페이지

레이블이 기독교적(的)?기독교적(敵)!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기독교적(的)?기독교적(敵)!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6년 11월 20일

동영상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찬수 목사 설교, 스탠드네트워크 제작)를 시청하고.


1. 약 한 달 전, 제게 엄청난 쇼크를 가져다 준 영상물 하나를 봤어요. 제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영상물은, 교회란 어떤 곳인가를 묻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3분5초짜리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라는 유튜브 동영상이었어요.

2. 상기 동영상에서 이찬수 목사는 젊은 목사와 전도사들에게 (a)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삶의 자세, (b) 본인이 부목사 시절 담임 목사로 모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과의 일화 등을 소개했는데요, 저는 설교자가 숭앙하는 고인의 교회관에 대해 <단 한 프레임>도 동의할 수 없었어요.

3. 상기 동영상에는 고인이 화요 교역자 회의에서 부목사들을 심하게 다잡는 대목이 나오는데 고인의 언어는 다음과 같아요: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실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구 목사, 그 성도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 반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날. 목사님은 좀 다혈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왜 너 같은 게 이 교회 와 가지고 성도를 괴롭히냐는 거예요. <나가라고 이 교회>! 왜 사랑의교회 와가지고 성도들을 괴롭히느냐고!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 (상기 물맷돌 영상 중에서. < >표시 강조는 신피디.)
저는 고인이 사용하신 언어의 <폭력성>에서 심한 충격을 받았는데요 - 왜 내가 존경하는 고인이 하필 내가 싫어하는 스티브 잡스를 닮은 것일까 - 그래서 이제 저는, 누군가에겐 몹시도 <교회적>일 수 있는 고인의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 드러내는 한 일환으로 이런 <질문> 하나 던지고 답해보려 해요. <나라면 언제 화를 낼 것인가>.

4. 제가, 같은 교회에서 동역하는 후배 부목사를 부르고 이렇게 말합니다. (후배 목사의 이름은 편의상 민기라고 하겠습니다.) 민기야, 내가 오늘 네가 맡고 있는 2교구의 권사님들 몇 분을 만났는데 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라. (잠시 긴장했던 후배의 얼굴 표정이 좀 풀립니다) 지난 2년 동안 민기 네가 실수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야. 왜 그랬니. (이제 후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민기야, 여긴 교회야. 불완전해도 되는. 왜 완전한 성자 코스프레를 한 거야. 그렇게 교회 <밖에> 있지 말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줘. 안 그러면 내가 슬퍼. 지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민기는 잔뜩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성도들의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요...) 저는 말합니다. 민기야, 그때 그 교회에서 있었던 일, it's not your fault. 그래, it's not your fault. 삼만 명 되는 교회를 만든 건 네가 아니야. <어떡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사정 잠시 몰랐다고, 네 안에 사랑이 없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고민과 아픔을 네게 매번 <보고>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네가 <항상 다 아니>. 게다가 교인들 중에는 <담임목사>에게만 고민 오픈하는 사람들 많다는 거, 우리 잘 알잖아. (제가 사랑하는 후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습니다).

5. 예, 제가 담임 목사라면, 타인의 고민과 어려움은 <완전 파악>하고 있지만, 자신의 고민과 갈등, 실수와 약점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부목- 그러니까 <칭찬자자>, <백퍼완전> 부목- 불러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간청하겠어요. 흠 많았던 열두 제자 닮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약자 <대형교회 부목> 1인 향해,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고함치는 대신.

2016.11.17
신동주


서플먼트
1) 지금 내가 쓰는 글은 이찬수 목사와 고 옥한흠 목사님이 살고계신, 살다가신, <인생>과 <신앙>에 대한 비판 아님. 내게 그런 비판할 자격, 능력 없음. 다만, 상기 동영상에서 <언어를 통해> 드러난 교회<관>과 신앙<관>을, 다시 <언어를 통해> 되물어 보고, 이를 통해 우리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뭘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해 보는 중. 고인 살아생전 이 글 보셨다면, 내 진심 알아보시고 좋아요 눌러주셨을 거라고 믿음, 차단하는 대신.

2) 상기 동영상의 출처와 링크는 다음과 같음. 출처: 스탠드네트워크
링크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Q-wCf8oXQQ
내가 정리한 텍스트 버전은 다음에서 확인 할 수 있음.
http://holyfat.blogspot.kr/2016/11/blog-post.html

3) 우리 한국 교회엔 이상한 신화가 하나 존재하는데 나 이제 앞으로 그걸 <숟가락 신화>(spoon myth)라 부르겠음. <모름지기 진정한 목회자는 성도들 가정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아야 한다>라는 이 숟가락 신화는 <당장 파악하란 말이야>, <몰라? 그러면 넌 진정한 목회자 아니야>라는 - 젓가락과 포크처럼 사람 <찌르는> - 율법과 정죄로 쉽게 이어짐. 각설하고, 내가 이 신화에서 가장 의아하게,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점 하나 있으니, 이 신화에서 <알다>는 왜 한 번도 <쌍방향>이었던 적 없나 하는 점. 왜 항상 목회자는 <알아야만>하고, 교인은 <알려져야만> 하는 거임? (이 신화에서 목회자 집 숟가락 숫자는 안 나옴). 교인이 무슨 <남성>이나 <백인>에 의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려야만하는 <여성>이나 <아시아>임? (문장력이 달려 써놓고 보니 내가 여성과 아시아를 디스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내 의도는 정반대임. 여성과 아시아가 남성과 백인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듯, 교인도 목회자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음. 알려짐, 사랑받음, 기도받음, 이라는 수동성은 - 진정 성숙한 자만 이런 <수동성>을 당당히 긍정할 수 있지만 - 교인과 목회자 공히 <배우고 실천해야>하는 덕목임. 서로 돕지 못하는 일방적 관계의 결혼 오래 가지 못하듯, 소위 일방적 돌봄과 섬김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숟가락(신화)만 빠는 교회, 오래 가지 못함. 그래서 한국 교회 <이렇게> 됐음.

2013년 12월 1일

교회의 크기와 언어

1. 사랑의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 무척 놀랐다. 교회에 이렇게 멋진 ‘차 마시는 곳’이 있다니. 정문으로 들어서자 넓은 뜰이 있었고 오른편으로 차를 마시며 담소할 수 있는 넓직한 <커피숍 같은> 공간이 있었다. 교회가면 종이컵에 봉지 커피 넣고 뜨거운 주전자 물 넣어 마시기만 했던 나는, 아무 때나 삼삼오오 모여서 마음껏 <쉐어링>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처음 봤고, 무척 놀랐고, 무척 부러웠다. 내 나이 이십대 초반이었을 때였다. 그 첫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내가 삼십대 후반에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그 많던 언어들은 어디로 갔을까?』(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이제이북스)라는 책을 읽을 때도, 제일 먼저 그 <커피숍 같은> 공간이 떠올랐을 정도였다.
2.저자들은 마지막 남은 언어 사용자들을 소개한다. 1972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아서 베넷이 죽었다. 그는 음바바람어를 몇 마디 이상 할 줄 아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20년 전에 세상을 뜬 뒤 그도 이 언어를 쓰지 않았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에선 1년에 1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환경은 보존하려 하면서 왜 언어는 보존하려 하지 않는가. 이렇게 저자들은 묻고 있었다. 그때 문득 특정 신앙의 언어도 사라질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교회들은 사라지고 몇몇 큰 교회만 남는다면 - 영어만 남고 소수 언어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작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쓰던 대화도 사라지게 되는 것 아닐까. 난 예배 후 교회 근처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커피숍에(큰 부담 느끼지 않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와 상가 교회 계단에서 자판기 커피 마시며 나누는 대화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 아빠가 요즘 허리를 다쳐 공사장 일도 못 나가 민호가 그나마 딱 하나 하고 있던 영어 학습지도 끊었어요. 그런데도 자기는 성격이 좋아 외국인 만나도 친구 충분히 사귈 수 있다고 막 큰소리 치는 거에요. 어미 맘 아플까봐 그러는 거 다 알죠. 이런 속 깊은 아들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아까 나와서 기도하는데 감사하다는 말 밖에 안 나왔어요". (하지만, 감사하다고 하는 A집사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다). "초2 방학 때부터 어학 연수는 미국으로만 보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캐나다로 갔는데 이번 기수 그룹이 참 좋았나 봐요. 우리 정우가 좀 내향적인 데가 있어서 연수 가는 거 싫어했는데 내년에도 꼭 또 가겠대요. 여호수아처럼 믿음으로 가겠다고. 어제는 식사 때 온 가족이 영어로 기도하는데 왜 그렇게 감사하던지". (이렇게 고백하는 B집사 입가엔 미소가 걸린다.)
3. 교회의 부(富)와 크기는 언어의 톤에도 변화를 준다. 결정적인 변화를 준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라는 단어를 한 쪽에선 “목사님 그 쪽 좀 붙잡아 주세요. 아니요, 조금 더 위로 올려주세요. 조금만 더. 오케바리! ” 라는 톤으로 호(呼) 한다면, 한 쪽에선 "하나님" 할 때 톤으로 호한다. "그 쪽 좀 꽉 붙잡아 주세요 아니 남자가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할 때의 톤을 <경험하지 못한> 교회 성도들은, 비록 에스컬레이터 설치된 화려한 대리석 건물 안에서 예배 드리더라도, 실은 <헐벗은> 것이다. 사춘기 중학생 한 명이 토요일 오후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서는 소파에 혼자 앉아 핸드폰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다. “목사님 뭐 하세요?” “말 시키지마라 게임한다 애니팡 ” “애니팡 재미 없는데. 최고 점수 얼마 나왔어요?”. 이런 대화 막는 목사의 스케줄, 교인의 수, 예배당 크기,를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을까.
2013. 12.1.
신동주

서플먼트

1) “공간은 인간의 영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십 년 전에 읽은 한 외국 건축가의 글이 아직도 생각난다. 책과 음악과 친구 뿐만 아니라 공간도 인간 영성 깊숙하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내가 건축에 대한 경구를 하나 짓는다면 이렇게 짓겠다. “건축가는 미래의 대화를 건축한다.”
2) 그렇기에 예배당 건축에 대해 고민할 때 우리가 1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건 소방법이나 건폐율이 아닌 심리학과 언어학이다. 이 공간 내에서 인간과 신(神)은, 성도와 성도는, 목회자와 비목회자는, 교인과 비교인은 어떤 종류의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높은가. 다른 말로, 이번 건축은 언어적으로 우리를 부하게 하는가 헐벗게 하는가.
3) 그럼, 예배당은 어느 정도 크기가 적당해? 네가 그렇게 강조하는 심리학과 언어학적으로 설명해봐, 한다면: 예배 후 교회에서 점심을 같이 먹을 때 "오늘은 국수가 너무 퍼졌어요" 하는 목사에게, "그것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지난 주에는 싱겁다고 뭐라고 하더니!" 하며 주방에 있던 권사님이 핀잔 놓을 수 있는 크기. <핀잔>과 <예배당 크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있다. 우리가 자주 목도하지만, 예배당 크기가 일정 규모를 넘게 되면 담임 목사는 그 누구로부터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노인으로부터도.
4) “공간은 인간의 영성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한 건축가 이름을 찾으려고 한 시간 넘게 웹 검색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함. 그러다가 눈에 띈 윈스턴 처칠의 경구 하나. “우리가 건물을 짓지만 그 다음에는 건물이 우리를 모양지어 간다.”

2013년 4월 4일

H형제 살인사건

1. 한 일본 추리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이 기억납니다.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술집의 < 출입문만 만진다 > 는 원칙을 6개월 동안 지킨 남자입니다. 컵도 만지지 않고, 테이블도 만지지 않고 문 손잡이만 만지던 그 남자는 어느 날 살인을 하고, < 문 손잡이에만 남았을 그의 모든 지문 > 을 닦은 뒤, 유유히 사건 현장을 벗어납니다. 결국 경찰은 사건 당일 사라진 남자가 한명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그의 신원은 파악하는데는 실패합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집니다.
2. 제 생각에 그 남자의 생활이 무척 불편했을 것 같습니다. 우연히 테이블에 손을 짚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아는) 남자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을 것입니다. 컵을 만지지 않기 위해 회사(술집)에서 그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을 확률이 큽니다. 완전범죄를 노렸던 그 남자는 < 자신의 손이 닿는 곳 > 을 항상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저도 끊임없이 < 의식 > 하며 지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쓰는 < 형제 > 라는 호칭입니다. 저는 최근 10여년간 이 형제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 단 한번 > 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늘,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한국교회의 의식(과 무의식)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3. 누군가 저를 < 형제(님) >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 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 분이 믿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방금 말한 그 가르침은 윤리 혹은 영적 사실에 대한 가르침이지 호칭에 관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 가르침은 < 그런 태도를 갖춰라 > < 그렇게 대우해라 > 에 대한 것이지, < 그렇게 불러라 > 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가르침을 후자로 해석,실천하는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번지수를 잘못찾은 신학일 것입니다.
4. 한국어의 특징 중의 하나는 2인칭 대명사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대화 상대에 대한 마땅한 호칭을 찾지못해 곤혹스러워 하거나, 상대가 사용한 (나에 대한 적당하지 않은) 호칭에 불쾌해지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소설가 고종석은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 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는 언어"라고 말을 합니다. 상대와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가 일견 평등과 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제님'이라는 용어에 유혹을 느끼는 것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곤혹스러움을 일시에 해소해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이런 복잡한 한국 사회의 호칭체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처음 본(혹은 자주 보는) 사람을 형제로 < 대우하며 사는 것 > 과, 누구가를 형제님이라고 < 부르며 지내는 것 > 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이렇게 물어보면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 전자와 후자, 둘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 . 물론 후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후자가 전자와 < 아무런 연관성 없이 > 실천될 수도 있다 는 점입니다. 아무런 상관없이. 참 무서운 말입니다. 교회 내부에서의 빈부 차이, 교회 안과 교회 밖의 빈부 차이를 그대로 놓아둔 < 채로도 > 우린 형제님! 하며 반가와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을 일개 호칭에 대한 가르침으로 '전락'시킨다면 심히 안타까운 일이며, 동시에 직무 유기일 것입니다.
5. "아니, 웬일이요?"하고 주교는 장발장을 향해 외쳤다. [...] "나는 당신에게 촛대도 주었는데 [...] 왜 당신에게 준 그릇이랑 함께 가져가지 않으셨소?" 장발장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인간의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 거룩한 주교를 바라보았다.[...] "나를 정말 풀어주는 겁니까?" 장발장은 물러서면서 마치 꿈꾸듯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당신에게 주었던 촛대가 여기 있으니 갖고 가시오." [...] 장발장은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다만 기계적으로 그 두 개의 촛대를 받았다. [...] 장발장은 금방 실신할 것 같았다. 주교는 그에게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형제인> 장발장이여, 당신은 이제 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선에 사는 것이오" ( 『레미제라블』 제1권 중에서. < > 표는 신피디).
위의 장면은 아마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장발쟝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읽다보니 < 장발쟝이 와들와들 떨 > 었던 것은 주교가 장발쟝을 형제라고 부르기 전이라는 사실이 눈에 띄었습니다. 형제라고 < 불리워 > 와들와들 떨었던 것이 아니고, 형제(즉, 사람으)로 < 대우 > 를 받았기에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 대우 > 와 < 호칭 > 은 별개의 것입니다. (1)후자가 전자와 함께 있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2) 전자는 후자 없이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3)전자없이 후자만 있는 것은 불행입니다.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최근에 내가 장발쟝처럼 와들와들 떨린 적이 있었나? < 넘쳐나는 형제(님) 호칭 > 에 < 처음 보는 사람도 그 분 안에서 형제라는 신비 > 가 가리는 것 같습니다.
6. 제가 볼 때, 우리 한국교회가 형제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데에는 편리성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경건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을 믿고 이제 그 분 앞에서 경건해지고 싶은데 막상 삶이 삶이 경건해지거나 신령해지지 않자, 사람들이 쉬운 방법을 택한 것 같습니다. < 용어의 경건화 >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용어의 종교화 > 라고 해도 되고요. 경건한 삶은 살지 못해도 경건한 용어만은 쓴다는 뜻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 인본주의적 > 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 빨갱이 > 라는 단어가 받아왔던 식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자신 안에 남아있는 소위 인본주의적 생각,세계관을 없애려고 많은/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와는 다른 실재,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 다른 이에게/자기 자신에게 > 확인시키려고 < 과거와는 다른 용어 > 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 의식하면서 혹은 무의식 가운데 > 받아들이는 종교적인 용어 중에 형제라는 호칭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7. 아이로니 하나. 형제 사이가 될 때, 우리는 말을 놓습니다. 형제 사이의 가장 큰 특징은 더 이상 서로를 형제님이라고 호칭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내가 사랑해서 형제로 대우하던 사람이 어느 날 저를 < 형제님이라고 부른다면 > 저는 모욕을 느끼거나 깊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8. 아이로니 둘. 이 형제라는 호칭은 보기와는 달리,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평등한, 수평적 관계를 상징하는 단어로 여겨지는 이 '형제(님)' 이라는 용어는, 사실 무척 < 서열적 > 입니다. 교회 식당에서 박성호라는 (가상의) 목회자를 만났을 때, 그를 보고 < 박성호 목사님! > 이라고 부르는 대신 < 박성호 형제님! > 이라고 해보십시오. 아마 그 < 형제님 > 의 얼굴색은 변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전도사/부목/장로/집사 모두에게 해당되는 예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 < 형제님 > 이라는 호칭에 모욕을 느낄수 있다는 사실은, <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한 형제자매다 > 라는 이 고귀한(priceless) 명제가 사실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실제로는 얼마에 거래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결코 < 목사님 > < 전도사님 > < 장로님 > < 집사님 > (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 형제님 > 을 사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에서 < 형제님 > 은 덤핑 판매되는 품목입니다.
9. 형제라는 호칭에 관한 제 글을 마무리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어법에 맞고, 우리 한국교회 특유의 심리적/신학적 강박증을 걷어낸, 또 '정치적으로도 올바른(즉,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그런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론 < 000 선생님 > 이 괜찮을 것 같은데, 물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두 종류의 글을 소개하며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는, 한 신문사와 한 국어관련 연구단체에 메일로 질문한 내용의 답변인데, 형제라는 호칭이 국어학적으로 적절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장발장이 < 그날 밤 > 주교 집을 나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묘사입니다.
10. (한 신문사의 교열부에서 받은 답변)
국어사전들을 보면, 형제: ①1.형과 아우. ②=동기. ③(종교) 하느님 백성으로서 ‘한자손’이란 뜻으로 일컫는 말. ④(천주) 평교간에 또는 나이가 아래인 남자 교우를 부를 때 쓰는 말. 서~ . 베드로∼. 이런 정도의 풀이는 대체로 1950년대 이후 나온 국어사전들에서 대동소이 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톨릭)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형제, 자매 호칭은 두루 통하여 쓰이는 듯합니다 [....] 신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보고 들을 때 그것이 맞갖지 않고, 이로써 그 동아리나 집단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합니다.
11. (한 국어관련 연구단체로부터 받은 답변)
'형제님'이 어법에 맞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참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왠고 하니 일반 사회에서는 '형제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따라서 일반 사회에서는 '형제님'은 어법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교인들 사회에서는 이런 말은 거부감 없이 널리 쓰여 왔고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결국 기준이 문제라고 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옳지 않은 말이고 교인들 사이라는 특수 사회에서는 옳은 말입니다. 결국, 교인들 사이에서는 쓸 수 있되, 일반 사회에서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일반 사회에서 쓰일 수 없는 말이라면 교인들 사이에서도 써서는 안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그럴 경우 대신 뭐라고 써야 할지를 묻는다면 답이 어려울 듯싶습니다.
12. 빅토르 위고에 따르자면 그날 밤 장발장은 < 도망치듯 거리에서 빠져나갔다 > 고 합니다. < 급한 걸음으로 들판을 가로질 > 렀으며, <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방황했으나 배도 고프지 않았다 > 고 합니다. 장발쟝은 < 스스로 분노 같은 것을 느꼈 > 는데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뚜렷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 자신이 감동한 것인지, 또는 모욕을 당한 것인지 > 스스로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감옥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했던 < 그 어떤 유들유들한 침착성이 자기의 마음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불안을 느꼈다 > 고 빅토르 위고는 묘사합니다. 무엇이 장발장의 마음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을까요. < 형제님이라는 호칭 > 때문이었을까요.
신동주

2013년 4월 3일

롤리항공 이야기

40대의 뚱뚱한 백인 남자가 자기 자리에 도착해, 자신의 옆자리에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흑인 노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분노에 찬 그가 승무원을 불렀다. “선생님 무엇이 문제인가요?” 라고 승무원이 물었다.“당신 눈에는 이게 안 보이나요? 지금 내 옆에 저렇게 흑인이 앉아 있잖아요. 나는 흑인 옆에 앉을 생각이 없소! 자리를 변경해 주시오!” “선생님, 진정해주십시오” 승무원이 말했다. "안타깝게 현재 모든 좌석이 다 찼지만 빈 곳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자리를 떴던 승무원이 얼마 뒤 돌아왔다. “선생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금 저희 이 이코노미 클래스엔 빈 자리가 없습니다. 기장님께 다시 한 번 문의한 결과 역시 빈 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남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승무원이 말을 이었다. “저희 회사는 지금까지 이코노미 클래스의 승객을 퍼스트 클래스로 이동시키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처럼 저희 승객으로 하여금 불쾌한 사람 옆자리에 앉아 여행 하도록 하는 것은 저희 회사의 원칙과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거라는 게 저희 기장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스튜어디스는 그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흑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선생님, 번거로우시더라도 가방을 챙겨주시면 저희가 선생님을 퍼스트 클래스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무례한 행동을 보며 충격을 받았던 모든 탑승객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승객 일부는 자리에 일어나서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당신이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면 이 글을 공유해주십시오!*  

짧은 위의 글은 제가 어제 페이스북에서 읽은 것이어요. 원문은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제가 우리 말로 번역을 했어요. 글쓴이는 'Otunba Malay'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는데, 제가 글을 읽는 순간 무려 37,616명이 그 글을 공유하고 있었어요. 

저는 처음 이 인상적인 글을 읽고 제가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니, 몹시 불편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스스로 한번 써 보기로 했어요. 아래 그 스토리가 있어요. 

 1.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등석으로 가지 않으시겠어요?” 승무원은 의아한 듯 물었다. 박수를 치던 다른 승객들도 다들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예. 이 자리에 앉겠습니다.” 

 2. 비행기 안은 조용했다. 다들 기내 영화를 보고, 아이패드로 게임을 했다. 앞좌석에선 아이 하나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30분 전 비행기가 출발할 때 일어났던 그 사건은 이제 점점 승객들 뇌리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앞좌석만 바라보던 백인 남자가 입을 연 건 그 때였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전히 앞좌석을 바라보며. “혹시 왜 자리를 옮기지 않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고열에라도 시달리고 있는 듯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3. 시카고 공항에 도착해서 캔자스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기다렸다. 6개월만에 보는 아들은 또 얼마나 컸을까. 책을 좋아하는 아들은 지난 여름 한국에 왔다 돌아갈 때도 교보에서 5권짜리 『레미제라블』 세트를 사 갔었다.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세 시간이 남았다. 사실 모든 사건을 바로 옆자리에서 목격했던 내게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노인에게 자리를 옮기지 않은 이유를 묻던 백인 사내의 떨리던 목소리,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들어봤던 목소리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어디서 들었을까? 언제나처럼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무료하다. 그건 그렇고, 아들은 사갔던 책을 다 읽었을까. 드디어 캔자스행 비행기의 탑승 개시를 알리는 불이 들어왔다.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짐 가방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기내에서 들었던 백인 남성의 떨리던 목소리를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 깨닫게 된 것은. 그 목소리의 남자를 처음 만난 건 『레미제라블』에서 였다. 

4. "나는 당신에게 촛대도 주었는데 왜 당신에게 준 그릇이랑 함께 가져가지 않으셨소?" 장발장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인간의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 거룩한 주교를 바라보았다. 장발장은 금방 실신할 것 같았다. "나를 정말 풀어주는 겁니까?" 장발장은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레미제라블』 제1권 중에서) 

5. 그 기내에서 정의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나는 불안하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스토리의 전부라면. 모욕한 자를 떠나지 않는 사람의 스토리가 정녕 없다면. 내가 나의 잘못을 깨우치는 유일한 방법이 모든 사람의 비웃음 속에 좌석에 홀로 앉아 가는 것이라면. ‘인종차별’을 심판하는 이야기만 있고 ‘인종차별주의자’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없다면 나는 불안하고, 감동받지 못한다. 주 예수님. 당신은 왜 자리를 옮기지 않으셨는지요, 저를 떠나. 

2012.1.31. 
신동주

시합 중에 공개 기도하기

1. 올해 25살인 미식축구 선수 팀 티보우(Tim Tebow). 시합 중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개적으로 기도를 한다. 지지도 받지만 <조롱>도 동시에 받는다. 사람들은 그의 기도 동작을 "티보우잉(tebowing)"이라고 부르며, 어떤 이는 소위 그런 "티보우잉" 패러디 동작만을 올리는 웹사이트(tebowing.com)까지 만들었다. 그 웹사이트 운영자는 티보우잉(tebowing)의 의미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 " 동사(動詞). 한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주위의 모든 사람이 기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행동들을 하고 있을 때라도". 두 아이를 잘 키우려고 고심하는 한 명의 기독교인 아버지로서, 나와 똑같이 자신의 아들을 신앙 안에서 제대로 키우려고 종종 가슴 졸이며 기도했을 한 미국인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 부자가 평소 나눴을 대화를. 

 2. 혹시 티보우 부자(父子)는, 진정한 기독교인 선수는 시합 중에 <반드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야 한다, 고 믿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드러냄에 공개 기도는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만약 그렇다면 난 그들이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경기 중에, 경기와 그 경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다른 팀원들에게 집중하기를 원하시지, 개인 기도로 자신(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걸 바라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그래도) 서운해하지 않으시며, (그런 자연스러운 망각을) 불신앙으로 보지 않으신다,고 나는 생각한다. 관중석에 앉아있는 여자 친구의 존재도 잊고, 하나님도 잊고, 돌진해 들어오는 상대팀 선수들의 존재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공을 보내야 할 <유일하게 남은 길과 각도>를 찾기. 그렇게 해서 탄생한 <창조적인 킬패스>의 아름다움은 <모든 창조적인 것>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드러내는 소중한 또 하나의 <찬양>이라고 믿는다. 

 3. 킬패스 뒤에 골이 터졌다. (어떤 이는 꿇어앉아서 기도를 하고, 어떤 이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다). 난, 그들이 눈을 감기 보다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에게 멋진 패스를 해 준 동료에게로 달려갔으면 좋겠다. 그건 '기도'만큼이나 '기독교적인 행동'이다. 아니, 그 순간에 제일 어울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난 시합 중에 기독교인들만 하나님을 높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합에 참가하는 < 모든 선수와 관중들 > 이 그들의 드리블과 패스와 고함과 탄식과 세리머니를 통해 '놀이하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더라도, 그들은 그 순간 하나님이 의도하신 피조물의 상태에 무척 가깝게 갔다고, 킬링타임 하는 크리스천보다는 킬패스하는 논크리스천이 창조주를 더 높이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이미> 창조주의 창조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누군가 공개 기도를 한다면? 어쩌면 그런 시합 중 공개 기도는 하나님을 그 기도 안에만 (존재하는 분으로) 가두는 행동과 상징이 될 수 있다. 난 내 두 아이가, 그리고 팀 티보우(Tim Tebow)가, <공개적인 기도>보다는 <공개적인 멋진 패스>를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동료들이 주위에 있을 땐 그들과 <땀>과 <웃음>과 <탄성>을 더 많이 섞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게, 그 시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개 행위>라고 믿는다. (비록 일면식도 없지만) 티보우 부자에게, 하나님이 마음의 평화와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2012.2.2. 
신동주 

<서플먼트> 
 1) 티보우잉 패러디 웹사이트(tebowing.com)는 지금도 열려있고, 여전히 새로운 사진들이 올라오고 있다. 최종 접속했을 때 본 사진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두 남녀가 티보우잉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2) 언젠가 책에서 <감사를 표시하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외국의 농구 선수가 쓴 글이었다. (요지는 이렇다). 자신은 멋진 슛을 성공 시키고 나면 꼭 자신에게 멋진 패스를 해 준 동료 선수를 바라보며 감사의 표시를 한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혹시 내가 감사를 표시하려고 하는데 그 패스를 한 선수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어떡하냐고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패스를 한 선수는 절대 자신의 패스를 잊지 않습니다. 꼭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멋진 패스를 한 사람을 기억하라,는 이 말이 내게는 참 인상 깊었고, 일상 생활 속에서 이 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약) 내가 멋진 패스를 했는데, 내 패스를 받은 동료가 골을 넣고 나를 보는 대신, 그가 믿는 신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기독교적(的)?기독교적(敵)! (2) - 헬라어

1.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마다, 혹시 가수면 상태의 내 입에서, 평소 꼭꼭 숨겨놓았던 내 은밀한 욕망이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작은 불안에 젖곤 합니다. 전신마취 수술 후 아직 깨어나지 않은 한 노 신학자의 입에선, 성경 구절이 흘러나왔다고 하죠, 그것도 헬라어로. 헬라어가 아니어도 좋으니 성경 몇 구절 제 입에서 새어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요, 제 입에서 <헬라어 단어 하나>가 튀어나오는 기적같은 일이 혹 생긴다면, 그럼 그 단어는 분명 <에피티마오>일 것입니다. 몇 년 째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단어 에피티마오. 질책하다. 심하게 꾸짖다.  

2. 마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한테 크게 ‘에피티마오’ 당합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기독교역사에서 이보다 더 심한 질책을 받은 기독교인이 또 있을까요? 그럼, 베드로가 이렇게 심한 질책을 당한 이유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개역한글, 막 8:32).

 3. ‘간(諫)하다’ 혹은 ‘간언(諫言)하다’는 웃어른이나 임금의 잘못을 지적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극에서 보면 신하는 고개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마를 바닥에 대고 간합니다. 그럼 베드로가 간(諫)하고 있다는 이 장면을 다른 성경들은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개역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새번역).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공동번역개정). 아무리 읽어봐도 이마를 땅에 대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한 영어성경(CEV)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먼저 저의 한국어 의역을, 그리고 이어서 영어 원문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한쪽으로 끌고가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딴 식으로 한 번만 더 말했단 봐라! (Peter took Jesus aside and told him to stop talking like that.) 너 한 번만 또 그딴 식으로 말했다간 다리몽둥이 부러질 줄 알어! 드라마에서 자주 듣습니다. 고난이고 나발이고 아직 왕국도 세워지지 않았는데 죽는다고? 메시아가 죽는다니, 이 양반이 지금 미쳤나! 지금 이 순간의 베드로를 묘사하기 위해 헬라어 성경이 선택한 단어, '에피티마오'입니다. 질책하다. 심하게 꾸짖다. 개역한글 성경은 원문의 뉘앙스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4. 제가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일은 이제부터 벌어집니다. 그렇게 큰 굴욕을 당하고(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심하게 질책당했습니다),그렇게 큰 신학적 오류를 범했으면서도 (메시아는 결코 수난 받아선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제2의 굴욕과 오류를 피해갈 그런 신학적 안전 조치 말이죠. 저 같으면 패닉 상태에 빠져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제가 믿는 모든 걸 다시 점검해볼 것 같습니다. 그런 결정적인 오류를 또 한 번 범하지 않기 위해서요. 마가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적(的)으로만 세상을 보기 위해서요.(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막 8:33). 그런데 이 남자는 이전과 비슷한 삶을 이어갑니다. 나머지 열한 명 동료들 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진심으로 믿고, 그래서 동료들과 최소 두 번 이상 크게 싸우고, 하루는 산에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가지 말고 산 정상에서 살자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닭 우는 소리 듣고 울고, 이방인과 밥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당황해서 도망치고, 그러다가 들켜서 공개 석상에서 '초신자' 바울로부터 왜 그따위로 신앙생활하냐는 질책을 받고, 말년에는 지나가는 남자에게 '쿼바디스'라고 묻고...이 남자의 삶에선 크고 작은 굴욕과 오류와 실수가 떠난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남자 그런 모든 오류와 실수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방법론이나 시스템을 찾지 않습니다. 세우지 않습니다. 그냥 계속 베드로적(的)으로 살아갑니다. 실수하며, 성숙하며.

5. 그때 만약 베드로가, (일반적으로 표현해서) 또 한 번의 신학적 · 신앙적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마가복음적으로 표현해서) 사람적(的)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적(的)으로만 생각하기 위해, (로마서적으로 표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겠다고,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교회에서 유행하고있는 소위 ‘기독교세계관운동’을 벌였다면, 주님은 (제가 모르는 아람어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양반아, 기독교적으로만 보는 확실한 방법을 찾겠다는 그게 더 큰 실수야. 지금처럼 때때로 잘못 저지르며 성숙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저는 <이 양반아>라고 말씀하실 때의 주님의 온화하신 눈길과 음성을 묘사할 헬라어,아람어,한국어를 모릅니다.

2012.3.22.

*예, 맞습니다. 이 글은 세상을 <비기독교적으로는 결코 안 보려는, 다시 말해, 기독교적으로만 보는 방법>을 찾으려는 소위 <기독교세계관운동>에 대한 짧은 <디스>입니다. 좀 <긴 디스>는 여기서. https://holyfat.blogspot.com/2013/05/blog-post_20.html#more

기독교적(的)?기독교적(敵)! (1) - 이(李)전도사의 신학

1.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그 살인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는다. 손양원 목사(1902~1950)가 실제 삶으로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하나님께 자신이 감사하는 이유 9가지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만 살펴볼까요.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이날 총 9가지 감사의 이유를 말하고 1만환(당시 화폐단위)을 봉투에 넣어 감사헌금을 합니다. 그 봉투에는 “감사의 봉헌금”이란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2. 손양원 목사의 맏딸 손동희 권사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를 보면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죽을 때 손양원 목사가 있던 애양원교회는 부흥회 기간 중이었습니다. 부흥회의 특별 강사는 손목사의 평양신학 동창생인 이(李)모 전도사였습니다. 애양원교회 교인들이 순천으로 가서 가매장된 상태에 있던 두 형제의 시신을 운반해옵니다.

3.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정신을 못차리고 비통해 하실 때도 이전도사님은 아버지의 어깨를 세게 탁 치며 호통을 치셨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을 보면 이전도사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손목사. 정신차리시오. (...) 오늘 젊고 아름다운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이 그리도 아깝소? 슬퍼하기만 할 일이 아니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요.” 그 후의 일을 손동희 권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난 아버지는 세계가 바뀌었다. 마음 속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고 하셨다. (...)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정신이 나간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p.238 )

4. 누군가 제게 가장 분노가 치미는 한국교회사의 한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서슴지 않고 이(李) 모 전도사가 비통한 마음에 빠져있는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어깨를 내리치는 순간을 꼽겠습니다. 한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를, 시간을, 기회를 빼앗아가는 이 행동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신앙의 이름으로 이전도사는, 분명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겠지요, 가장 비기독교적인, 비인간적인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5.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그리스도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선 눈물을 흘립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선 공포와 번민에 쌓여 가까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막 14:34, 공동번역). “내가 슬퍼 죽을 것 같아”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CEV). 그렇습니다. C.S.루이스의 말대로 운다는 것은 “영국 신사다운 행동은 아니지만 매우 그리스도적인 행동”입니다. 괴롭고 슬퍼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으며, 그런 마음을 옆 사람에게 말하는 것도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그 모든 게 다 그리스도께서 “괜찮다”라고, “나도 그래”라고 삶으로 보여주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한국인 전도사가 무덤 앞에서, 동산 바위 옆에서 외롭고 무서워 울고,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어깨를 후려칩니다.

6. 고려오페라단이 예술의 전당에서 박재훈 박사가 작곡한 오페라 (2012.3.8.~3.11)을 공연하고 있습니다. 출연진을 살펴보니까 ‘이전도사’도 등장합니다. 이 오페라에도  < 그 장면 > 이 나오겠지요? 그 장면을 < 아름답고 >  < 신앙적으로 > 묘사했으면 어떻하지요. 그 장면은 가장 비기독교적인 장면인데 말입니다. 슬퍼서 울고, 무서워서 떠는, 먹는 걸 탐하고 수다스러운 성자(聖者)에게도 우리가 <곁>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신학이 그리스도가 금하지 않은 슬픔과 쾌락을 믿음으로 수용했으면 좋겠습니다.
201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