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레이블이 개인적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개인적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6년 9월 16일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2026)를 보고. (스포◎,보링×,오썸◎,소름◎)

Here comes Travis Scott again.

(Surprised? Hey, don't be. There’s a lot more coming. ㅋㅋㅋ)

! A film.

! Many viewers. Many views.

! A view.


1. 목마에 관한 모든 것이 좋았다. 배를 드러낸 채 바닷가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는 목마. 이 목마 보는 순간 내가 이 영화 끝까지 볼 거란 거 알았다. 끝까지 봤다. (난 영화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나간다.) 놀란의 목마는 오십 년 넘게 봐 왔던, 그러니까 오십 년 넘게 날 실망시켜 왔던, 바퀴 달린 수많은 유치한 목마들과 달랐다. 검붉은 빛 도는 말의 배. 나무의 재질과 질감은 또 어떻고! 나는 놀란이 만들어 낸  오브제의 마감이  테무(Temu)적이지 않는 게 너무 고맙다. 내 속에, 테무산()으로는 불가능 했을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트로이인()들과 목마를 함께 끌었다. 성 안으로. 신전 계단 아래서 올려다 본 목마의 배에는 횃불에 비친 내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내 삶. 아테나에게 기도한다, “늘 흔들리는 내 삶을 붙들어 주소서.” 나는 이 기도가 내가 이 땅에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인 줄 모른다. 함께 눈을 감고 기도 드리고 있는 모든 트로이인들이 다 나와 같은 운명이다.  

2. 총 일곱 번 오디세우스는 귀향 길에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마주친다. 내게는 사만다 모턴(Samantha Morton)이 연기한 키르케(Circe)만 기억에 남는다. 마주친 상대의 두려움과 깊은 실망과 서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유일했다. (우리는 이 영화 보고서도 세이렌에 대해, 그들의 두려움과 기쁨에 대해 1<더 알게> 된 게 없다. 그들은 노래 부를 거였고, 노래 불렀다. ) 

3. 남자들이 돼지로 변하는 씬은 찐으로 놀라웠다. (손으로 '정성껏' 빚어낼 거라곤 정말 생각 못했다.) 하나 내게 진정 무게감 있게 다가왔던 변화는, 오디세우스와 마주보며 식탁에 앉은 키르케가 하는 말을 들을 때 내 마음 속에서 키르케가 '마녀'에서 '그녀'로 변한 변화였다

마치 한국 여성처럼 느껴졌다. 키르케의 감정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 톤에는 그녀가 강남역에서, 광주 광산구 고등학교 옆 대로변에서, 업무의 연장인 회식 장소에서,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교회에서, 고작 집행유예 6월 때리는 법정에서 - 그러니까 한국에서 - 겪은 듯한 삶의 비애와 분노가 묻어 있었다이유 없이 밀리고, 찔리고, 찍히고, 공개되고, 공유되고 한.  

"내가 걔네를 뭘로 바꾼 게 아냐. 똑똑히 봐. 이게 진짜 걔네 모습이라고."  

낮은 어조로 말한다. (그래서 더 셌다.) 오디세우스는 모르는 - 남자인 나는 못 보는 - 남자들의 진짜 모습을 키르케는 안다. 여성에게 '안다''당해봤다'이다. '당함'이라는 여성의 보편적 현실을 지금 (초월적 존재에 가까운) 마녀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러 영화평을 읽어봤다. 애비 오모루이(Abby Omoruyi)라는 여성은 빅슨시네마(Vixen Cinema)에 올린 한 리뷰에서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여성 캐릭터를 분석하는데 키르케에 대해선 이렇게 말한다

섬을 찾은 병사들을 향한 그녀의 적대감은 악의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해안으로 찾아오는 남자들을 충분히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what they are capable of) 정확히 알게 된 <한 여자>의 반응처럼 느껴진다.” (her hostility toward the arriving soldiers reads less like villainy and more like the   reaction of a woman who has watched enough men arrive on her shore to know exactly what they are capable of.) - ‘<오디세이>(2026)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 분석’ (2026.7.18) 중에서.    

이 몇 주 캐퍼블 어브(capable of)라는 말이 계속 생각난다. 나는 어디까지 캐퍼블 할까. 어디까지 캐퍼블 했나. 오디세우스가 앉았던 자리에 내가 앉는다면 나는 사만다 모턴의 시선을 오래 받아내지 못했을 거 같다.

4. 20여 년 전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천병희 역으로 읽었는데 그는 '오뒷세이아', '오뒷세우스'라는 표기법을 고수한다.) 나는 놀란의 <오디세이>가 훨씬 더 좋았다. 무엇이? 놀란이 오디세우스의 경험을 '전쟁-승패-귀향'이 아닌 전쟁-어떤 결정-뒤늦은 자각과 고뇌'의 틀로 해석한 것. 호메로스 책에서 홈커밍이 어려웠던 이유는 중간에 오디세우스를 방해한 마녀와 괴물들 때문인데, 놀란 영화에서 홈커밍이 어려운 이유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이 돌아가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까지도 함께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To burn the walls of Troy was to burn the world-entire. Including his home.) 이 얼마나 인간의, 현대인의, 나의 어리석음을 잘 반영하는 캐릭터인지!

5. 오디세우스는, 승리자라기보다는 세상과 문명과 신과 모든 인간들 앞에서 죄를 지은 죄인으로 귀향해서 가족을 괴롭히던 구혼자들을 처치하자마자 아내와 함께 서쪽으로 떠난다. “, 제우스여! , 아테나여!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모든 신성한 것 - 제우스의 법, 환대, 신의, 약속 - 을 짓밟았나이다....”(We violated all that’s ever sacred between people.) 여기까지는 놀란이 작성한 기도문. 이어지는 건 내가 작성한 기도문. “바이오레이트 하고 보니, 그전에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것들 - 그것은 심지어 적이 돼 싸우는 순간에도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았죠 - 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6. 감동에 차서 글을 끝내려 했다. (못 끝내는 상황에 봉착했다는 뜻이다 ㅠㅠ) 내게 좋았던 점들을 얼추 다 적었기에, 나는 오디세우스가 배를 타고 가며 하는 말, 서쪽으로 가서 무엇을 하겠다고 말하는지, 그 정확한 워딩을 적으며 내 글을 맺으려 했다. 놀란이 쓴 스크립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참고로, 놀란은 이 영화에서 각본도 맡았다.) 찾은 영어 스크립트를 읽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내 영화평의 장르가 호러와 스릴러로 변할 줄 몰랐다.

7. 미셸 푸코는 총 673쪽에 달하는 광기의 역사를 쓰면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짧게 언급한다. 겨우 3쪽 분량이었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는 나머지 670쪽에 대해선 아무 언급도 없이 그 3쪽만 물고 늘어졌다. 3쪽 안에 광기의 역사의 근간을 흔드는 결정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은 그렇게 시작됐고 둘의 관계는 이후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데리다처럼 나 또한, 놀란이 쓴 마지막 스크립트 한 줄에, 나머지 171분의 영화의 진정성 허물 결정적 요소 있다는 이야기 하려 한다. (놀란과 사이가 안 좋아질 거 같다.)

8. 이제부터는 텍스트 기반으로 얘기한다. 놀란이 영화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쓴 스크립트는 이렇다. “우리는 미지의 서쪽 땅으로 가서 내 전우들을 기릴 것이오” (We’ll head into the unknown west to honor my men.) 참고로, 영화 중반에 죽은 자들의 땅에서 올라온 시논(Sinon)이 오디세우스에게 한 말은 이렇다.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고 당신의 전우들을 기리시오” (give sacrifice and honor your men)

9. 사람이 (상대가 아니라) 자기를 탓할 때가 있다. 차라리 자기 눈을 의심할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그렇다. 놀란이 아니라 내 눈에, 내 독법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트래비스에게 물었다. (트래비스는 우리 말을 못한다.)

“Travis, did Nolan really write “my men” here? Is he saying he will honor only his men who fell in the Trojan War, rather than all the people who died? Is he seriously not including <Trojan men and women> on the list of people to honor? Just ‘my men’? No way! He doesn’t really mean that, does he?”

말 많은 랩퍼가 아무 말이 없다.

10. 놀란이 이 영화를 장거리 여행이 아닌 길 잃음의 영화로 만든 게 좋았다. 전쟁 아닌 사냥 했다는 수치심을 다뤄서 좋았다. 우리가 우리 예상보다 더 어리석을 수 있다(이 역시 ‘capable’로 수렴된다)는 걸 보여줘서 좋았다. 집에 와서는 난 아직 도착하지 못했어” (I'm not home. Not yet) 라고 말하는 역설이 좋았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불태워 버린 문명’, 훼손 시켜버린 사람들 사이의 신성한 것들’. 그것의 재건을 위해 작은 씨앗 심는 동작 하나만 보여주며 끝내면 되는 거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트로이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을 기리겠습니다라는 한마디만 하면 된다. 놀란은 그 간단한 걸 하지 못했다.

11. 이것을 하나의 실수로 보는 건 적절할까. 172분 동안 달려온 자신의 영화의 마무리. 원작 <오뒷세이아>와 결정적으로 달라진 결말의 노른자위 센텐스. 가장 심혈을 기울였을 스크립트. 나로선 실수가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다. (실수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실수가 아니라 놀란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이 상황- 놀란의 나의’(my)라는 한정사(determiner) 사용 -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놀란이, 사람들 사이의 신성한 것들을 훼손시킨 한 남자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훼손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해 보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아무리 부족한 감독이어도 훼손과 후회라는 주제를 다룰 경우엔 모든 스크립트에서 <훼손한 뒤 후회하고 있는 이들>뿐 아니라, 바로 <그들 때문에 훼손되고, 묻히고, 삭제된 이들>을 안 떠올릴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이 영화에 영감을 주고, 지금까지 흐름을 주도했으니!) 그 감독이 매 씬과 매 스크립트에서 ‘my’라는 한정사 대신 ‘all'이라는 한정사를 떠올리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쉽다. ‘빠트림은 불가능하다. 하나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어떤 감독이 훼손후회재건에 관한 영화 스크립트를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쓸 때이다. 진정성을 갖고 영화를 만들 때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 'all''my'의 중대한 차이를 순간적으로나마 보지 못하는 일-이 스크립트를 머리로만 구성할 때는 일어날 수 있다. (‘감동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느라 <바쁜 머리>는 마음은 결코 놓치지 못하는 걸 놓칠 수 있다.) 나는 <오디세이>의 마지막 대사는 놀란의 실수가 아니라 놀란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이 생각이 무서웠다. 내 생각이 맞다면, 도대체 사람은 어디까지,무엇까지 캐퍼블한 존재인가. 슬픔에 관한 영화를 감히 머리로 만들겠다며 덤벼드는 세상.

“Travis, where are you going? I’m not done yet.”

“I'm so sorry, man. But I have to go to Mi-sa-ri. I still have one more show there tonight.”


2026.9.16

신동주

 

후기. 트래비스는 갔지만, 내가 좋아하는 결말을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다.

- - - - - - - - - -

밤이 깊었다. 나무 바닥 틈 여기저기로 아테나 신전을 밝히는 횃불에서 나온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다들, 눈을 감고 있는 오디세우스가 수치심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들도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논의 일이 내게 맡겨졌더라면!” 다들, 부끄럽지 않은 가운데 죽을 수 있었던 시논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낮에 - 그러니가 불과 대여섯 시간 전이다 - 성 문이 완전히 닫히고 아테나 성전 앞에 목마가 세워진 후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이 나무 벽을 타고 들려왔다. 지휘관과 남자 노예 사이의 대화였다. 노예의 목소리에는 칭찬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칼로 목마 사이를 찔러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이어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경멸이 담긴 목소리였다.

놀로스(Nolos), 네가 야만인의 땅에서 붙잡혀 왔기에 그렇게 묻는 거겠지. 야만인들과 달리 우리는 신의 이름을 계략을 꾸밀 때 사용하지 않아. (플래쉬백/ “선물입니다. 아테나에게 바치는.” (A gift. For Athena.) 시논이 트로이 병사에게 말한다.) 비록 오디세우스의 칼에 우리의 동료들이 적지않이 쓰러졌지만 그가 제우스와 아테나 여신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용사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 비록 서로 싸우고 있지만 나는 오디세우스를 신뢰한다. 그러니 너, 야만인의 땅에서 온 놀로스,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모독하지 마라. 다음엔 용서 없다. 물러가.”

놀로스라는 노예의 말은 더 들을 수 없었다. 목마 안에서도 침묵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가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동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마의 숨겨진 통로가 새벽에 조용히 열리고 밧줄을 타고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내려와서는 성문 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성벽 담을 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패장(敗將)이 되었다. 트로이인에게 발각돼 간신히 탈출했다는 그의 보고를 아가멤논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받았다. 그 보고를 함께 들었던, 각지에서 온 연합군 사령관들의 눈에 의아한 모습이 하나가 들어왔다. 오디세우스와 함께 서 있는 남자들의 자세에는 -  승리라도 거둔 마냥  - 당당함이 배어 있었다. 모두가 전리품이라도 전차에 가득 채워 온 듯한  얼굴들이었다. 

신전 앞 횃불들은 꺼진 지 오래였다. 이른 아침 신전을 찾은 여사제들이 목마의 통로와, 여전히 그 통로에 매달려 있는 밧줄을 발견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칼을 찬 병사들이 달려왔다. 병사들을 이끈 지휘관은 낮에 노예 놀로스를 매섭게 꾸짖은 남자였다.

부하들이 보는 가운데 그가 밧줄을 타고 목마로 올라갔다. 홀로 목마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본 것은 스무 명 남짓의 사내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지금은 텅 빈 공간. 아니, 텅 비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바닥 한가운데에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칼 한 자루였다. 남자는 칼을 집어들었다. 칼날 곳곳에 묻어 있는 피는 굳어 있었다동료들이 흘린 피였다. 문양이 하나 보였다. 칼자루 쪽 검신에는 신성한 고래의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 누구나 다 아는 이의 문양!

칼을 손에 든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제는 기도를 하는 것인지 그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설사 누가 바로 옆에 있었어도 알아듣지 못했으리라. 단 한 번, '제우스의 법'이라는 말을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높아진 때를 제외하고는.    

패자(敗者)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대하는 이타카 사람들의 태도에는 변화가 있었다.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뒤에서는 쑤군거렸다. “내 남편을 십 년간 데려갔으면 전리품이라도 갖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패배한 것도 아니고 들켜서 도망친 거라며?” 국왕에 대한 불만은 왕비에게까지 이어졌다. 페넬로페를 대하는 시녀들의 태도는 무례하지는 않았으나 냉랭한 건 분명했다이런 와중에도 오디세우스는 백성들의 비난과 조롱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별다른 내색 없이 일상을 이어갔다. 오전에는 왕국의 크고 작은 일을 보고 받고 신하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토지와 재산을 둘러싼 송사를 듣고 판결을 내렸다. 왕으로서 할 일을 마치면 오후에는 홀로 사냥을 나갔다. 참, 언급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오디세우스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 신하와 백성들에게 지시를 할 때,  그의 목소리는 당당했으나 동시에 거기엔 약간의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하나 오디세우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상인들 앞에 영원한 적은 없었다. 이타카와 트로이를 오가는 선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소금, 포도주, 올리브유를 싣고 갔다가 귀금속, 목재, 가죽을 싣고 왔다. 돌아오는 배엔 낯선 소문도 함께 실려왔다. 그 소문은 이타카 항구에서 왕궁에까지 퍼졌다. 어느 날 시녀 한 명이 페넬로페에게 뛰어왔다. 평소와 다른 얼굴이었다. 상기 됐고 냉랭하지 않았다. “왕비님! 고래 문양 칼에 대해 들으셨어요? 오디세우스님은 쫓겨서 도망친 게 아니래요! 목마 안에 칼이 있었대요!” 시녀는 펠넬로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쏟아놓았다.

달려간 숲에서 남편을 발견했다. 오늘도 홀로 사냥을 하고 있었다. 페넬로페의 눈에 활을 든 남편과 풀숲에서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고 있는 어린 사슴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자세를 낮추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평생을 동물과도 공평하고 명예롭게만 싸우는 남자. 내 남자. 남편이 퉁긴 활시위에서 난 소리를 듣는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디시어스!! (미국발음. əˈdɪsiəs)

그녀는 달려가며 남편의 이름을 외쳤다. 사슴은 달아났고 남자가 일어서서 여자를 바라봤다. 사슴보다 더 놀란 표정이었다.

퍼넬러피! (pəˈnɛləpi) 무슨 일이 있오? 오디세우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랑스러웠다. 문명을 구한 남자. 그러기 위해 패배를 선택한 남자. 그런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벅찬 감격으로 다가왔다. 남자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왜 여태껏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여자는 십여 년 전 자신이 때린 적 있는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남자는 말 없이 여자를 바라 볼 뿐이다.

당신은 참 바보 같아...”

여자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남자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2026년 9월 11일

제70회 미스코리아 대회

미스 코리아 대회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기괴하다.

아름다운 외모는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외모라는 선물에 등수를 매겨달라고 단체로 요청한다. 내게는 그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 가장 겸손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나 이웃을 위해 가장 희생을 많이 한 사람을 뽑는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시도만큼이나 기괴하게 느껴진다. 성품이나 희생에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과 신에 대한 모욕이기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선물 받은 외모 갖고 등수 시합하는 건 인간과 신의 관계를 망각할 때만 가능한 어리석고 부적절한 일이기에 이 경우엔 나로 하여금(이라고 쓰고, 부디 우리 사회 모두가! 라고 읽는다) 실소하게 한다. 성형 논란은 전혀 본질이 아니다. 

2026년 7월 19일

마스크













오늘 예배드릴 때 3개월 동안 늘 쓰고 있던 마스크를, 오늘도 벗을 생각 없었는데, 처음으로 벗었다. 자리에 앉아서 예배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각선으로 내 앞에 앉은 여집사님이 내게 인사를 해오셨다. 처음 받아보는 인사였다. "안녕하세요. 오신지 6개월 정도 되셨죠?", "안녕하세요. 3개월 정도 된 거 같습니다", "늘 뒤에 앉으시다가 요즘 앞 쪽으로 앉아주셔서 감사해요. 한번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이 집사님은 찬양대 4명 중 가장 젊은 여집사님. 몇 주 전에 대표 기도를 하신 분. 그 기도가 너무 좋아서 내가 감동했고 그날 내 일기에도 썼던 분. "얼마 전에 대표 기도하셨죠? 참 감동 받았습니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 사람이 여러가지를 해야 해요". 내게 누군가 처음으로 다가 온 것. 내심 나는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를 않았으면,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상하게 이 집사님이 자리로 돌아가신 후 마음이 너무 따뜻해졌다. 내게 이렇게 다가와주었는데, 계속 나만 마스크를 쓰는 게 예의가 아닌 거 같았다.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고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 편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다음 주에도 교회 나오자'. 다음 주에는 김기석 목사님이 이 교회에 설교자로 오시기에, 나는 내가 피디인게 드러나는 게 싫어서 다음 주는 안 올 생각했음. 그 마음이 바뀌었음. 엄청난 왕족의 비밀도 아니고 그냥 피디였다는 거 알려지는 건데 뭐 굳이 안 오고 그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내가 3개월간 꾸준히 나올 수 있었던 요인 중에 하나는, 누구와도 교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어쩌면 다음 주부터는 그러지 못할 수도 있을 거 같음. 그래도 '새로운 선택'을 해보겠음. the road less traveled를 걸어보겠음. 

 
      

2026년 7월 16일

상처받은 내면 아이 치유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다 읽어간다. 오늘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두 번째로 읽을 심리 상담을 책을 샀다. 


2026년 7월 15일

잘잘법 녹화


박재연 소장 두 번째 녹화 때는 내려가 뒤에 앉아 들었다. 마지막 사례 - 아버지와 딸 사이의 카톡 - 를 듣는데 눈물이 났다. 눈물이 계속 흘러 창고에 들어가서 눈물을 닦았다. 눈물을 닦는데 과자 봉지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까 A가 당이 떨어진다고 과자를 들고 창고로 가던 게 기억나서였다. 김학철 교수와 즐겁게 인사를 나눴다. 프리랜서로는 첫 만남. 나는 인사만 하고 위로 올라와 B와 함께 강연 나눔을 했다. 참 좋은 나눔이었다. 퇴근 길에 운동을 했고, 서브웨이에서 에그마요를 주문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행복했다. 오늘 하루 내 삶에 대해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유년기에 받지 못했던 칭찬과 수용, 이제 "내"가 해주기로 했다. 놀랍게도 나는 나이든 뒤에도 나를 평가하고 다그쳐 왔다. 유년기에 내가 경험한 그것을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그 경험을) 내가 나에게 행하고 있었다. 이제는 안 그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