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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7일

로버트 레드퍼드 (1936~2025)

 










부끄럽게도 난 참 오랫동안 누군가의 부고를 들을 때 "그는 죽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지"라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했던 거 같다. 슬픔과 안타까움을 안 느낀 건 아니지만, 돌아보면 그렇게 느끼는 슬픔과 안타까움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그런 '안심'과 '우월의식(?)"이라는 틀 안에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 생각은 차츰 바뀌었다.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더 낫다거나, 더 나은 무언가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것을 나이 많이 들어서야 깨닫다니 부끄럽다). '충만히' 세상을 살고 떠난 누군가의 부고 기사를 읽을 때, 누군가의 부고 기사에서 '사랑과 도전'이 가득차 있는 것을 발견할 때 이제 나는 우월의식 대신 부러움을 느낀다. (인간으로서, 혹은 피조물로서의) 사명을 다 이룬 삶이 몹시 부럽다. 한 사람의 부고 기사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의 그날 일기보다 더 생명으로 가득차 있을 수 있다는 걸 요즘 느낀다. 평생의 연기와 그가 만든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희열과 꿈을 선물로 준 로버트 레드퍼드의 부고 소식을 들으면서 또 한 번 부럽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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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 키드’ 로버트 레드퍼드 별세…향년 89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로 스타덤
‘스팅’ ‘추억’ 등서 활약한 ‘할리우드 전설’
선댄스영화제 창립·환경운동도 펼쳐


미국 할리우드 스타이자 영화감독, 제작자이며 선댄스영화제의 설립자인 로버트 레드퍼드가 별세했다. 향년 89. 뉴욕타임스는 16일(현지시각) 레드퍼드가 미국 유타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이날 보도했다. 젊은 시절 가장 미국적인 미남 배우로 사랑받았던 찰스 로버트 레드퍼드 주니어는 1936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야구와 미술 등에 두각을 나타내며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한 뒤 미국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1960년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는 1969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출연하며 배우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 평단의 찬사와 흥행 성공까지 거머쥐면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를 열어젖힌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단숨에 스타 배우로 부상했다. 훗날 그가 설립한 ‘선댄스영화제’는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했던 인물 ‘선댄스 키드’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후 ‘스팅’(1973), ‘추억’(1973)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레드퍼드는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추억’과 ‘코드네임 콘돌’(1975),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등 많은 명작을 함께 만들어낸 시드니 폴락 감독은 평생의 친구이기도 했다. 또 감독으로도 활동하면서 ‘보통 사람들’로 1981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브래드 핏이 ‘제2의 로버트 레드퍼드’라는 별명을 얻으며 스타로 출세한 ‘흐르는 강물처럼’을 감독, 제작해 큰 호평을 받았다. 2017년에는 제인 폰다와 함께 황혼의 로맨스를 연기한 넷플릭스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에 출연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함께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년에 들어서며 레드퍼드는 영화감독과 제작자뿐 아니라 환경보호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80년에는 신진 영화인을 위해 선댄스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독립영화의 제작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곳에서 그가 창립한 선댄스영화제는 전세계에서 가장 젊고 영향력 있는 영화제로 자리 잡으면서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꿈의 영화제가 되었다. (한겨레 신문) 김은형 선임기자

2025년 9월 13일

나쓰메 소세키를 읽고.

 최근 한 달 사이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5권을 읽었다. 먼저 <도련님>(1906), 이어서 소세키의 전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산시로>(1908),<그후>(1909), <문>(1910)을 읽었다. 이어서 <마음>(1914)과 (큰애가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 <명암>(1916)을 읽으려 했는데, <마음>만 읽고 멈췄다. 

오래 살다보니, 살면 살 수록, 용기가 절실하다. 용기가 없어서 <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 사람은 아무리 무서워도, 아무리 부끄러워도, 용기를 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그 사실을 무서울 정도로 잘 보여준다).  소세키가 소설 속에서 그리는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건 인간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용기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의 결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 결과를 직시할 용기, 그 결과의 한계 내에서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소세키가 그리는 또 다른 주인공의 얘기를 한 번 더 들을 마음과 시간이 내게는 없다. 

<그후>에서 내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문장 하나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전개에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대목인데, 이상하게 내게는 주인공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고 느껴졌다.) "다이스케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는 않았다." (P.189,현암사)  

<문>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 건너 앞에 있던 사내가 일어나 갔을 때는 잠시 후 안쪽에서 악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거리가 멀어 소스케의 고막을 심하게 때릴 만큼 세게 울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최대한의 위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목구멍에서 나온 개인의 특색을 띄고 있었다. 자기 바로 앞의 사람이 일어났을 때는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는 의식에 압도되어 한층 불안해졌다."(p.240, 현암사) 이 문장 역시 소설의 전개에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대목을 읽는데 요한계시록의 한 대목이 떠올랐을 뿐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요한계시록 2:17)

2025년 9월 1일

퇴직 6개월 전에 하는 생각

오늘은 9월 1일. 정확하게 퇴직(2026.2.28) 6개월 전이다. 사랑하는 일, 애정하는 가까운 동료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은 통증에 가까운 슬픔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 전 새벽에 눈을 떴을 때도 그런 통증이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 보고 싶을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다가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고, 그러자 통증이 사라졌다. 내가 했던 생각은 이런 거였다.  

나에게는 "내 모든 걸 쏟아부어 본 시간"들이 있다. 내게는 "인간적으로 깊은 신뢰를 주고 받는 동료들"이 있다. 만약 이런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런 관계들이 없었다면 내 재직 기간은 커다란 공허로 다가왔을 것이고, 남은 6개월은 그 공허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며, 퇴직은 정녕 날카로운 비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니 감사하게도 내 지난 30년은 "채워져"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떠남이 두렵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퇴직을 앞 둔 이에게는 남은 기간보다 받은 은혜를 돌아보는 게 더 필요하구나.    

"5년이 더 주어진다면 좋겠니?"라는 질문도 내게 도움이 됐다. 아니오,가 내 대답이었다. 나는 나의 재직 기간을 더 완전하게 <보수>하기 위해 시간을 더 요청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즉  피조물이다. 유한한 상태에서 입사했다가 유한한 상태로 퇴직하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5년이 더 내게 주어지더라도 그 5년 때문에 내가 지금의 나보다 완전한 존재가 될 거 같지는 않다. 불완전한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지금보다 더 온전하게 보수될 거 같지도 않다. 어떤 아쉬움도 느끼지 않는 퇴직을 꿈꾼다면, 그러지 못함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어리석고 건강하지 못한 생각일 거 같다. 늘 그래왔듯이, 나는 아쉬움도 느끼겠지만 '괜찮다' 위로해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함께 경험할 것이며, 그분께 또 한 번, 나의 <완벽하지 않은 퇴직 후 계획>을 들려드릴 것이다. 1993년 한 명의 어리숙한 신입사원을 신실하게 인도하신 그분께서는 2026년, 이번에는 (여전히 어리숙한ㅠㅠ) 한 명의 퇴직자를 또 한 번 신실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다.   

남은 6개월이, 한 명의 피조물이 완전해지려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과 한계까지도 향유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2025.9.1. 

신동주 드림


* '내 자신의 결핍을 향유함'이란 말은 도심 속 수도 교회 '신비와 저항'의 박총 원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2025.8.18)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