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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5일

<거룩한 행운> (유진 피터슨 지음, 권혁일 옮김, 너머書 )을 손에 쥐고.

 












주문했던 책이 도착했다. <거룩한 행운>(유진 피터슨 지음, 권혁일 옮김, 너머書 ). 오늘도 황동규 시인의 "시"를 읽었고, 어제도 "메시지 성경"을 읽은 내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쓴 시집"을 읽는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가? : ) : ) ----- "시를 쓰는 것은 평범한 것들에 깃든 하나님 나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좋은 방법이다". -----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 거룩한 행운. 제2부 바스락거리는 풀 제3부 매끄러운 돌들. 나는 2부에 내가 좋아하는 제목 두 개를 발견했다. '시간'과 '이집트'. '시간'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했다. "인생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나는 / 기다림으로 보내고 있다. ". 이런 구절도 등장한다. "죄라는 나의 다른 시계 속에서 나는 미루고 있다". 기다림과 미루기. 소망과 함께 하는 기다림과 정리되지 않은 삶에서 나오는 미루기. 마음에 훅 들어오는 대비이다. '이집트'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떠나라는 천사의 말은 아주 분명했지만 /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이집트는 안전했지만 집은 아니었다". 안전을 최고선으로 좇는 내게 들려오는 천사의 음성. 나도 천사의 음성을 들으면 사랑하는 사람 나귀에 태우고 믿음으로 출발하리. 늦은 밤 혹은 새벽에. -----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책을 " 잰(Jan)에게, 결혼 55주년을 맞아" 라고 하며 아내에게 바쳤다. 이 시집 덕분에 내가 59세로 맞이하는 2025년 겨울이 따뜻해질 거 같다. 꽉 찰 거 같다.

2025년 10월 11일

<우리가 기댄 모든 것>(마쓰모토 도시히코, 요코미치 마코토 지음, 김영사)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와 담배 못 끊는 정신과 의사가 나눈 의존증 이야기.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는데 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에게는 술 외에도 도벽, 섹스, 과식 등의 의존증도 있(었)다. 

모든 챕터가 흥미롭지는 않았다. 나는 제2장이 좋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나는 제2장만 좋았다. 2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구절을 아래 정리한다. 

"왜 일부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고 특정 약물을 반복해서 사용하며 도박이나 게임에 집착해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해버리는 걸까요? 생각건대, 그들을 약물로 몰아넣는 것은 쾌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쾌감이라면 금방 싫증이 날 테니까요. 아마도 그것은 쾌감이 아니라 고통의 완화가 아닐까요? 즉, 사람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아찔한 쾌감을 얻으려 약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겪어온 고통이 그 약물로 인해 일시적으로 사라지거나 약해지기 때문에 빠지는 것입니다. 쾌감이라면 질리겠지만, 고통의 완화는 질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그 고통의 완화를 놓을 수 없게 되겠지요." (p.37)

"사람이 무언가에 빠져들게 되는 데는 반드시 위기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소중한 관계의 상실이나 파탄 같은 중대한 사건일 수도 있고, 조금 무리를 하거나 현재 있는 곳이 왠지 불편하다는 정도의 작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것이 위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p.38).

"이 서신 교환을 통해 '끊는다/끊지 못한다'라는 단순한 의존증 담론을 넘어,의존증 이면에 있는 심연에 줄을 드리워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p.39)

내게 있어 '오래전부터 겪어온 고통'은 무엇일까 자문해 보았다. 위기가 반드시 중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교회에서 참 만족스러운 예배를 드리고 돌아온 후에도 의존증이 발생한다면, 예배도 내게 진정한 치유가 아니었던 건가. 


2025년 9월 13일

나쓰메 소세키를 읽고.

 최근 한 달 사이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5권을 읽었다. 먼저 <도련님>(1906), 이어서 소세키의 전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산시로>(1908),<그후>(1909), <문>(1910)을 읽었다. 이어서 <마음>(1914)과 (큰애가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 <명암>(1916)을 읽으려 했는데, <마음>만 읽고 멈췄다. 

오래 살다보니, 살면 살 수록, 용기가 절실하다. 용기가 없어서 <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 사람은 아무리 무서워도, 아무리 부끄러워도, 용기를 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그 사실을 무서울 정도로 잘 보여준다).  소세키가 소설 속에서 그리는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건 인간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용기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의 결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 결과를 직시할 용기, 그 결과의 한계 내에서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소세키가 그리는 또 다른 주인공의 얘기를 한 번 더 들을 마음과 시간이 내게는 없다. 

<그후>에서 내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문장 하나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전개에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대목인데, 이상하게 내게는 주인공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고 느껴졌다.) "다이스케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는 않았다." (P.189,현암사)  

<문>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 건너 앞에 있던 사내가 일어나 갔을 때는 잠시 후 안쪽에서 악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거리가 멀어 소스케의 고막을 심하게 때릴 만큼 세게 울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최대한의 위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목구멍에서 나온 개인의 특색을 띄고 있었다. 자기 바로 앞의 사람이 일어났을 때는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는 의식에 압도되어 한층 불안해졌다."(p.240, 현암사) 이 문장 역시 소설의 전개에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대목을 읽는데 요한계시록의 한 대목이 떠올랐을 뿐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요한계시록 2:17)

2025년 8월 27일

<산시로>(나쓰메 소세키 지음, 최재철 옮김)를 읽고.

"하숙집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에 들어가 앉아 보니 역시 바람소리가 들린다. 산시로는 이러한 바람소리를 들을 때마다 운명이라는 글자를 떠올린다. '윙-'하고 울려 올 적마다 움츠러든다. 자기 스스로도 결코 강한 남자라고는 여기지 않고 있다. 생각해 보면, 상경한 이래 자신의 운명은 대개 요지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다소간 화기애애한 우롱을 받는 것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요지로는 사랑스러운 장난꾸러기다. 앞으로도 이 사랑스러운 장난꾸러기에게 자기 운명이 쥐어져 있을 것같이 여겨진다. 바람이 계속 불어댄다. 확실히 요지로 이상의 바람이다." (p.210)

소세키의 책을 처음으로 읽고 있다. 먼저 <도련님>(1906)을 읽고 이어서 <산시로>(1908)를 읽었다. 전자에선 24세, 후자에선 23세 남자가 주인공이다. 도련님에선J.D.샐린저 냄새가 났고, 산시로에선 하루키 냄새가 났다. (출생 연도를 따지자면 거꾸로 말해야 맞을 것이다). ---- 산시로의 미숙함. 그것에 끌렸다. 그가 불완전하게 그려졌기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 같다. 몹시도 미숙하고 불완전했던 20대 초반 내 모습이 많이 떠올랐다. 마음껏 불완전해도 됐던 그 젊음의 시기.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몹시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이제 깨닫는다. 


2025년 4월 26일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김혜령 지음, IVP)를 읽고


 











1. 미생을 만화로도, 드라마로도 봤다. 누군가 내게 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뭐냐고 묻는다면, 내겐 그건 다음 장면이다.

누군가 장그래가 속해 있는, 그러니까 오과장이 이끄는 팀에 합류했다. 기존 팀원들과 이 사람 사이에 긴장이 느껴진다. 이 남자는 일 때문에 술도 많이 마신다. 그러나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집에 가면 꼭 맥주 한 캔을 혼자 마신다. 회사에선 일 때문에 마신 거고, 자신의 술을 즐긴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점차 신뢰가 쌓여가고 한 팀이 되어간다. 이 사람이 이 팀에 완전히 마음을 연 날이었다. 회사 일로 팀원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간 이 남자가 침대에 조용히 눕자 아내가 묻는다. "웬일이야, 일로 먹은 술은 먹어도 먹은 게 아니라고, 늘 맥주 한 캔은 하고 자는 사람이....".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은 충분히 마셨어". 남자의 "충분히"라는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아, 이제 따로 혼자 더 안 마셔도 될만큼 신뢰하는 사람들을 만났구나.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더 이상 업무만은 아니구나.  너무 다행이다. 

2. 토요일이면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만난다. 허락을 받고 함께 외출을 해서 근처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근처 파리바게트에서 함께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두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머니와 헤어진다. 그러고 나는 집 근처 찻집에 가서 혼자 다시 차를 마신다. 그때부터 나만의 차를 마신다. 자주 혼자 묻는다. "아까 충분히 마셨어"라고 하며 그냥 집으로 가는 날이 올까? 

3. 이화여대 김혜령 교수가 쓴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를 지난 겨울 우연히 손에 쥐게 되었다.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져서 집 근처 요양원에 모신 즈음이었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였다. 책의 부제는 '약해진 자들과 동행하는 삶의 해석학'이었고 나는 제목보다는 부제에 끌렸다. 책은 총 9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장은 배회를 다뤘다. 왜 치매 환자들은 자꾸 밖으로 나가려 하는지. 둘째 장은 옷차림을 다뤘다. 그들의 옷차림은 왜 종종 우스꽝스러워 보이는지. 두 장을 읽고 검색을 통해 저자의 이메일 주소를 찾은 후 짧은 메일을 보냈다. 이런 내용이었다. 

"한 장 한 장을 읽을 때마다 저희 어머님 상황을 떠올리게 되고, 어머님의 존엄, 저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묻게 됩니다. 참 외로운 질문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누군가와 함께 이 고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참 힘이 되고 감사합니다." (*환자와 가족의 "존엄을 지킨다"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4. 이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모시는 저자의 아주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와 사회학적인 분석의 글이 번갈아 가며 한 챕터씩 등장한다. 전자를 읽을 때는 위로가 되었고 후자를 읽을 때는 우리 사회 내 나의 위치가 그려졌다. 양쪽 모두가 힘이 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와닿는 부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내 경우엔 제7장 '돌보는 자의 신학'에 그런 부분이 있었다. 저자는 먼저 이렇게 말을 했다. "돌보는 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이 있다. (...) 그[치매에 걸린 부모]가 어떻게 나를 키워 냈는지, 어떻게 나와 함께 살았는지 잊지 않는다면 그를 돌볼 수 있는 인내심이 조금은 더 생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실망했다. 대뜸 내 속에선 이런 반론들이 튀어나왔다. "누구나 다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대안이 너무 나이브한 거 아니야? 누군가에겐 과거는, 함께한 시간은, 양육받은 <그 긴 시간>은 기억할 때 힘이 되는 시간이 아닐 수 있다고. 추억함이 오히려 고통과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저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기억에 기대어 돌볼 수 있다면, 그 환자와 돌보는 가족은 모두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부모나 배우자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존재로 각인된 사람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래서 돌보는 이에게 필요한 능력은 기억력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5. 잘 돌보기 위해 기억보다는 상상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손가락으로 상상력이란 방향을 가리켜 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그 상상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기억과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상상은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배우고 싶다. 
 
진심으로 추천하는 책이다.

2025.4.26.
신동주

2025년 3월 24일

<아라비아로 간 바울>(벤 위더링턴 3세 지음, 북오븐)을 사려고 했다.

 












어제 지인 A가 sns에 <아라비아로 간 바울>(벤 위더링턴 3세, 제이슨 마이어스 지음, 오현미 번역, 북오븐)에 대해 언급한 짧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참고로 이 책의 부제부터 밝히면: "회심 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까지, 감춰진 시간을 찾아서".

지인의 짧은 글은 이러했다.
바울이 매력적인 유대인 미리암을 만난 후 혼자 말한다. “이런 느낌은 빨리 털어 버리는 게 아마 최선일거야”
이상하게 이 글을 읽는데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대부분의 느낌들은 "털린다". 안 털려고 해서 문제이지, 털려고 하면 털린다. 지인의 글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됐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느낌들을 너무 두려워 할 필요 없다. 그리고 빨리 털 수록 쉽게 털린다).
어제 무척 감명을 받았기에 오늘 퇴근길에 서점에 가서 그 대목을 직접 확인해봤다. 81 페이지에 나왔다. "미리암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사울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을 사려고 했는데 이런, 도서상품권을 회사에 두고 왔다. 내일 사야겠다.

2025년 3월 15일

<콘트라베이스>(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를 읽고.

 













십 년 쯤 전에 <세바시>팀에서 일 년 정도 일한 적이 있다. 그때 같은 팀원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어느날 팀원 중의 한 명인 A가 내게 책을 한 권 선물해줬다. 선물 받은 책을 십 년이 지난 오늘 읽었다.
소설의 형식은 내가 싫어하는 독백체였다. 소재는, 내가 좋아하는 '악기'와 '연주'를 다루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뒤, 독백이라는 형식이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다. 주제 때문인 거 같다. "세상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악기를 연주하는 삶도 의미가 있는가". 은퇴를 일 년 앞두고 지난 30년의 '연주'를 자주 곱씹어보는 나였기에, 이 남자의 독백을 들으며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계속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었다. 다만, 나라면 그가 지금 하려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이야기'로 남아야지 '에피소드'로밖에 남지 못한다면 너무 슬프고 아쉽다.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책은 여럿 알고 있다. <향수>, <좀머 씨 이야기>, <비둘기>. 하나 그의 책을 읽은 건 이게 처음이다. 번역자에 따르면, 쥐스킨트는 이 <콘트라베이스>를 "1984년 스위스의 디오게네스 출판사를 통하여 발표하였으며, 이것은 그 후 현재까지 독일어권 나라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희곡으로,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에선 내가 회사에 입사하던 해인 1993년 3월10일에 초판 1쇄 발행. 1999년 7월10일 초판 39쇄. 2000년 2월10일 신판 1쇄. 2015년 5월30일 신판 38쇄.
그러니까 A가 내게 선물해 준 건 신판 38쇄. 책을 다 읽고 10년만에 A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냈다.

2025년 3월 13일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로버타 본디 지음, 황윤하 번역, 비아)를 읽고.

 













새롭게 섭외한 A 목사님의 네 편의 강의 중 두 번째 편 편집을 마치고, 오늘 업로딩 되는 영상 섬네일을 팀원들과 함께 정한 후 퇴근했다. 오늘도 퇴근길에 단골 카페에 들려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로버타 본디 지음, 비아)를 읽었다. 3세기~6세기 무렵 사막에 들어가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소위 사막의 교부들과 수도사들)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는 책인데 이상하게 몹시 빠져들어 읽고 있다. 사실 나는 사막의 교부들 금언집들은 이전에 이미 꽤 읽었는데, 이상하게 이 책은 새롭게 다가온다. 아주 짧은 서문(이 책에선 '들어가며'라는 이름이 붙어있다)은 너무 인상적이어서 천천히 세 번을 읽었다. 너무 짧은 서문이라 통째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을 처음 만난 건 2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두고 씨름하고 있었지만 말이지요. 다시 저는 제 지성과 마음을 모두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신앙의 형태를 찾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에 앉아 저는 6세기 마부그의 필록세누스(Philoxenos of Mabbug)가 쓴 설교집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느님과 다른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저는 최대한 많이 이 전통에 속한 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제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계심을,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있음을 가르쳐주었지요. 그들의 따뜻함, 통찰, 도움은 제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고, 제 삶 속의 지속적인 원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려운 현대 세계에서 이들은 여러분을 위한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 저자 로버타 번디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1941년생이었다. 이름 때문에 난 저자가 남성인 줄 알았는데 여성이었다. 암산이 안 돼 계산기로 계산을 해보았더니 저자가 이 책 속 인물들을 처음 만난 건('20년 전') 그녀가 26세였을 때였다. 도서관에서 1500년 전 설교문을 '놀란 눈'으로 갈급하게 읽어내려가는 20대의 저자를 상상해 보았다. 어떤 마음이면, 수천 년 돼 돼 바스락거리는 글을 마치 생수를 들이키듯이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란에 이런 글이 보였다. "신학자 패트릭 헨리는 [그녀를] '기억의 마법사', '학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 학자'로 평가했다." 그녀가 쓴 책 중에는 <고양이 닉>(Nick the Cat)도 있었다. -----  1장 시작, 2장 사랑, 3장 겸손, 4장 정념,을 다 읽고 지금 5장 기도,를 읽고 있다. 마지막 6장은 '하느님'이다. 사막의 교부들에 따르면 겸손은 " '나'를 다른 사람들과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차별화된 존재라고 여길 필요가 없음을 뜻합니다 (....)겸손을 익힌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견주어 애써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 다른 사람이 어떤 부분에 있어 나보다 무언가를 더 잘한다 해서 괘념치 않는 것을 뜻합니다. 교만은 결국 상처를 남기지만 , 겸손은 두려움을 없앱니다. 우리를 진실로 용감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은 겸손입니다". (p.182-183). 그녀 덕분에, 나도 오래 돼 바스락거리는 지혜에 쫑긋 귀기울이고 있다. 

2025년 1월 11일

전념














올해 내가 완독한 첫 책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다. "이 작품은 너무 가볍고 밝고 반짝거려서 그늘이 필요하다"라고 저자는 말한 적이 있다. 정말 밝고 반짝거린다. 그래서 끝까지 다 읽은 거 같다. 인물을 너무 잘 묘사해서 웃음이 터지곤 했다. (제인 오스틴이 요즘의 나를 봤으면 어떻게 묘사했을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묘사는, 주인공 가정인 베넷 집안과 가까운 루카스라는 사람에 대해 묘사였다 : "롱본에서 걸어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베넷 집안과 각별히 가까운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윌리엄 루카스 경은 왕년에 메리턴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거기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국왕에게 소를 올려 기사 작위에 봉해졌다. 이 영예는 그에게 지나치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듯하다. 자신의 사업과 작은 장터 마을에 있던 거처가 싫어졌으니 말이다. 결국 그는 이 모두를 떠나 가족과 함께 메리턴에서 1마일 가량 떨어진 저택으로 옮겨가, 그때부터 그 저택을 루카스 로지라고 명명하고서 그곳에서 자신의 지체를 느긋이 즐기며 일에 매이지 않은 채 세상 사람 모두에게 예의 바르게 구는 일에만 전념했다." <오만과 편견>, p.28, 민음사 


#지나치게깊은감명 #예의바르게구는일 #전념

2024년 3월 9일

『제일신학(First Theology』(케빈 밴후저 지음, IVP)의 제6장

『제일신학(First Theology』(케빈 밴후저 지음, IVP)의 제6장은 언어와 관계된 화행론(speech act theory)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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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J.R.R. 톨킨 지음, 씨앗을뿌리는사람 역간)의 앞 부분에는 매우 시사적인 대화가 나온다. 그 장면은 간달프(Gandalf)가 빌보 배긴스(Bilbo Baggins)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장면이다.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빌보가 말했다. (...) "그게 뭔 뜻으로 하는 말이오?"라고 그[간달프]가 물었다. "내게 좋은 아침을 원한다는 뜻이오? 아니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좋은 아침이라는 뜻이오? 아니면 당신이 오늘 아침을 좋다고 느낀다는 뜻이오? 아니면 아침은 좋은 것이라는 뜻이오?" " 그것들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빌보가 말했다. "더구나 바깥으로 나가서 담배 파이프를 물고서 담배를 피우기에는 더더욱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있다가 빌보는 매우 다른 발화수반적인 의도를 가지고 똑같은 발화행위를 사용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어떠한 모험도 원치 않아요, 감사합니다." " 당신은 참 여러가지로 좋은 아침이란 말을 사용하는구려!" 간달프가 말했다. "지금은 내가 없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내가 떠나야만 좋은 아침이 되겠구먼." (p.262)

2021년 10월 13일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1.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사람이 있다. 책에도 그런 책이 있다.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다.) 나는 서평을 쓸 때, 그 책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것>을 소개한다. (저자가 내 얘기 들으면 "아니 왜 그거를?"이라고 어이없어 할 수도 있고, "아니,당신도 거기서!"라고 감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 것은 <모른다>라는 단어였다. 2. 그냥 몇 군데 살짝 맛보기로 소개하면 :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에 책을 편찬하고 모으는 일과 책을 쓰는 일의 역할 구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언서의 저자가 실제로 누구였는지) .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구약 저자들의 직업을 이야기하며). "(거의) 알지 못합니다" (누가 구약을 썼는지).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4개 복음서들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많은 경우 답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저자의 확정과 경전의 인정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에 대해 ). 그런데, 이 모른다라는 단어와 더불어 소개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저자가 이 모른다라는 말을 할 때의 <톤>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게 핵심이다). 저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5>라고 말할 때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이제 독자들은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의 명예 교수인 저자의 <여유있고 자연스럽고 당당한> 톤에 취해(?), 평소(?)와는 달리 한결 넉넉해진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을 누가 썼나, 언제 썼나,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고해서 내 기독교 신앙이 꼭 흔들리는 건 아닌가봐? 내 기독교 신앙이 꼭 부끄러운 게 되진 않나봐? 

2021.10.13.
신동주

<서플먼트>

(1) 『성서의 형성』은 200쪽이 채 안 돼 한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기에, 성경 통독을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무척 유익할 듯. 나는 『최신구약개론』(레이몬든 딜러드, CH북스)와 『구약성서탐구』(버나드 앤더슨,CLC)도 읽으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큰 그림을 <빨리>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한편,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두 가지 그림 이미지에 무척 끌림. 첫번 째는 식물 이미지. "성서는 어떤 규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듯, 성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나 성서가 되었습니다". 두번 째는 이메일 이미지."우리는 책이라고 하면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기승전결이 있으며, 시종일관 같은 문체로 기록[된] (...) 물체를 떠올리지요. 고대 세계의 책은 오늘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여러 이메일을, 이것들이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왔음을 숨기고 하나로 묶어 단일한 형식으로 인쇄한 모음집 정도가 될 것입니다."

(2) <모른다>라는 단어 외에 한 단어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난 망설임 없이 (이번에는 '흥분'보다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 단어인데) <오늘날>을 추가 하겠다. 출간물 하나하나에 일일이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를 부여하고, 저자 역자 발행인을 각각 기록하고, 1쇄와 2쇄 날짜를 구분하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전승되어 온 본문에 종종 후대의 이름 모를 인물들이, 원저자와 현대 독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절과 구와 장을 과 장을 첨가하는 행위가 진본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임.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오늘날 문화에서는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p.58). (이 단어 역시 이 책에서 끊임없이 등장). 이 책에선 아니지만 G.K. 체스터튼 역시 구약의 욥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함 : "이 서사시에서 어떠한 부분이 원저자가 계획하였던 것이고 어떠한 부분이 훨씬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한 토론이 이어져 왔다.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불일치하는데 - 사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학자들의 주된 업무이긴 하다 - 전반적인 연구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실제로 어떠한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면, 산문으로 기록된 서론과 후기는 [확실히]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젊은이 [엘리후]의 연설과 마지막의 [욥의] 회개가 후대의 첨가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든지, 이 문제에 관하여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일반적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어떠한 고대의 예술 작품을 다루고자 한다면, 고대의 저작이 점진적으로 [즉 후대에 계속적으로 첨가되었다는] 쓰였다는 사실이 이 저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건축되어 왔던 것처럼, 욥기도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건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구전 시가를 쓴 사람들은, 실제 연대와 실제 저자에 대해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원저자와 원연대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그러한 중요성이란 모든 면에서 근대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개인주의의 창조물인 것이다. (...)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설사 다른 사람들이 어떤 구절을 이 저작에 삽입하였다 하여도, 그 당시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과 같은 개인주의적 시대에 그러한 행동이 불러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부족이 창조한 서사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부족의 사원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 부족 전체의 창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한다면, 욥기의 서문과 후기,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이 원래의 저작이 쓰인 이후에 삽입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삽입이 근대의 개인화 혹은 개별화된 책에서 이루어지는 삽입처럼 책을 명백히 위조물로 만든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삽입을 조지 메러디스가 쓴 책에서 이후에 실제로는 그가 쓰지 않은 한 장을 발견한 것과 같이 취급해서도 안 되고, 입센의 희곡에서 윌리엄 아처에 의해 교묘하게 삽입된 장면 일부처럼 간주해서도 안 된다. 일리아스나 욥기처럼 오래된 시를 만들어 낸 옛 시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전통을 언제나 지켜 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을 자기 자식이 추수하도록 물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쓰던 시를 자기 자식이 마무리하도록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통일성(Homeric unity)’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리아스는 한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백 명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통일성이란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 당시에는 한 도시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마치 내전 중에 있는 한 도시인 것처럼 보인다." ( '카이로스: 비평루트'가 번역한 G.K.체스터튼의 욥기 '서론' 중에서. 번역 전문은 https://cairos.tistory.com/215 에서 확인 가능.)

2021년 10월 11일

『성서, 역사와 만나다』(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비아 VIA)를 읽고.

1. 성경 말씀 중에 유독 <한국>에 와서 고생 <이빠이> 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구절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면". 표절,성폭력,횡령 목사들이 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다시 <설교>하는 모습 볼 때면 나 환장하겠다. ( 이렇게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데> 사용된다는 건, <성전을 정화>하신 분을 따르는 조직에서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두 번째 구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성경 본문의 불일치나 모순을 <살펴보며> (이를 통해) 성경(과 신앙)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들어가 보려고> 질문 하나 할라치면 바로 당장 등장하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는 디모데후서 말씀을 인정하면 해결되는데, 넌 그걸 안 믿는구나?". (나 두 번째로 환장하고 슬픔 ㅠㅠ).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다면>, 이 <영감> 구절은,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더 깊은 세계로의 진입을 <막는다>. 오늘은 후자에 대해서만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참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세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먼저 공유함.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디모데후서 3:16)"의 영어 번역은 이렇다 :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NASB) (2)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은 포함되지 않는다. 디모데가 디모데후서를 받을 당시 신약성서라는 책은 아직 없었다. <모든 성경>은 우리가 흔히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을 지칭. (3) 유대인들은 이 히브리 성경을 <타낙>이라고 부름. 유대인들은 성경 속 책들을 세 종류로 구분. 토라(율법서),네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 이렇게 셋인데, (그래서 성경을 호칭할 때) 이 셋의 앞 부분을 따서 타낙(혹은 타나크)라고 불렀다. 이제 <모든 성경>과 <영감>과 <타낙> 이렇게 세 단어가 <제대로> 결합될 때 - 기름 목사와 달리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데 - 우리 앞에는 <놀라운 결론>이 주어진다. 정말이다. 

2. 히브리 성경의 원래 본문은 모음은 하나도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음들로만 이뤄져 있다. 우리 한글로 예를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ㅅㄴㄷㅇㅈㄴㄴㅁㄴㅁㅇㄷㅁ ㄹㅅㄱㅎㅂㄴㄷㅋㅋ.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간단히 말해, 히브리 성경은, 독자들이 추후에 모음을 추가로 집어넣지 않고서는 <읽어 낼 수> 없는 글이라는 뜻이다. 모음을 추가해야, 비로서 의미 있는 문장이 생성된다. 위에서 예로 든 한글 자음들에 (제대로 된) 모음을 추가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된다: "신동주는미남이다미리사과합니다ㅋㅋ" 책에는 모음이 없더라도, 읽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모음을 집어넣어 주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음의 종류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음을 넣으면 다른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위의 똑같은 자음들이, 다른 모음들을 넣을 경우) "신동주너는왜이렇게사냐ㅋㅋ"(라는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독자들이 <어떤 모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독서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타낙 본문에 히브리어 자음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만을 전달 받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히브리어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서는 모음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아주 이른 시기부터 타낙의 자음에 어떤 모음이 가장 적합한지를 논하는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렇게 전달된 모음은 본문으로 기록된 성서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기억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7)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한 말은, 사실은 이렇게 풀어써야 할 것이다 : "모든 <기록된 자음>과 (모든) <기억된 모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방금 내가 한 이 말은 사실 펠리칸이 한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교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타낙, 즉 구약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문서'라면 성서 본문에 기록된 자음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남아 한참 후에 기록된 모음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영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즉 구전 전승 역시 기록된 본문과 동일한 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128) 

3. 이제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역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글을 맺으려 한다. 나는 영어로 본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가 영어책에선 "from teacher to pupil through countless generations"이라고 나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세대>. (그런데) 그 많은 세대, 긴 시간 중에서, 이사야처럼 <높이 들린 보좌>나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 <너를 예언자로 세웠다>, <아닙니다.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라고, 예레미야처럼 직접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의 밀당 할 수 있었던 순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 형성의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은, 환상을 보는 시간이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다음과 같은 선생과 학생들 사이의 <평범한 대화>로 채워져 있다고 본다 : 이 글자는 뭐라고 읽나요? 알레프라고 읽는다. 선생님 '바브'와 '요드'를 쓸 때 획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되나요. 오늘은 드바림(신명기)의 첫 장을 암송할 것이다. 테힐림(시편) 22편에서 '내 손과 발을 거칠게 다루었습니다'는 '내 손과 발에 구멍을 뚫었습니다'라고 읽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요? 스승님이 사무엘하 15장 7절을 '4년'이 아니라 '40년'으로 읽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답하던 스승과 제자들이 죽는다. 자녀들이 태어나 다시 처음부터 글을 배우고 스승들에게 질문을 한다). 하고 싶은 말,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만약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외웠다면, 서너 세대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수 백 세대, 수천 년 이어졌다는 것은, 그 내용을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무언가를 후에 누군가에게 (다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충분히 묻는다>이다. (지금) 충분히 묻지 않으면, (후에) 충분히 답변하지 못하고, 구전 전승은 <끊긴다>. 오늘 날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본다. 온전한 이해로 이끌어주는 첫 단추 의문과 질문을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의문과 질문을 무시하는 것은 비-영감적, 비-타낙적, 비-모든성경적이다. 한마디로 비-디모데후서적이다. 

2021.10.11. 
신동주 

<서플먼트> 

1) 시편22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은 각각 마소라 사본과 70인역에 등장.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9에서 인용함. 

2) 줌에서, 오프에서, 성경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나누고, 신학 서적을 구매해 함께 읽으며 궁금증을 풀어가고, 지인들끼리 모여 신학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이 모든 비-이사야적인 시간들을 영감의 원천이신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시기를.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음).

2021년 9월 7일

<스토커>(Stalker ,1979 )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를 보고.

1. 영화 두 편을 봤다. 둘 모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1932~1986)의 영화였다. 인터넷 서점에선 DVD로도 판매하고 있지만 (이 말은, 한글 자막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기에 유튜브로 봤다. (이 말은, 러시아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봤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 영화 모두 런닝 타임이 3시간). 나는 영어 이해가 빠르지 않기에 대사 하나 등장할 때마다 포즈 버튼을 누르고는 (모르는 단어 영어 사전에서 찾고)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이 말은, 한 영화당 내가 포즈 버튼을 누른 횟수가 최소 백 번은 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건 영화 감상이 아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음. 인정.) 영화 감상이 아니었어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래 그 이유와 결과를 간단히 적는다. (내 영화평이 늘 그렇듯이 본문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 등장 않는다. 각주에는 나온다). 

2. <스토커> (Stalker) / 1979 2019년 5월28일 화요일 오후 6시, 나는 회사 업무가 종료되는 순간,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 되는 고려대 베리타스 포럼에 접속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강연 주제는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였고, 남자 한 명이 왼쪽에 서서 동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 잊혀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강연 초반에 소개한 영화 한 편이었다. 스미스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를 소개했다 : "<스토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세 사람이 어딘가로 갑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은,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줍니다. 누군가 입으로 말하는 바램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죠. 문제는, 그 세 사람이, 그 방 앞에 도착해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정말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3. 2년 전에 들은 이 짧은 영화 줄거리는 이상하게 듣는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입을 통해, 페북을 통해, 경건해지고 싶습니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기고 있습니다, 비아에서 나온 『사막의 지혜』를 읽고 있습니다, 참 멋진 말들을 많이도 해오고 있는데, 막상 그런 나는, 내 입술의, 내 페북의 갈망을 현실화 시켜준다는 그 방, 더 룸(the Room)에 <들어가길> 원할까? 페북에 그렇게 종교와 경건에 대한 포스팅 많이 하는 나이지만, 일단 <지금>은 못 들어간다. (누가 뒤에서 실수로 밀까봐 두려울 정도다). 나 또한 내 깊이 내재한 갈망이 무엇인지 미리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의자에 앉자, 내 앞에, 벌거벗은 남녀 몸뚱아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적거리며 꿈틀대는 세상이 영원히 펼쳐진다면? 내가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어 영원히 꿈틀대(야만 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확실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정욕을 극복하는데 혹시 고행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수도사처럼, 그래서 자기 등 채찍으로 밤마다 쳤듯이, 나는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라는 <고행>을 계속했다. 마치 이 고행 통해 내 갈망 정화되기라도 하듯이. (맞다. '영화 감상'이라 불릴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행의 효과는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속 세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갔을까,에 대한 답변은 생략. 

4.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 1966 이십 여년 전, 라디오 방송사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시절, 녹음기 하나 들고 서울 전 지역을 돌아다니던 시절, 내 지갑 속에는 내가 볼펜으로 쓴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한 말이었는데 힘들 때면 꺼내 읽었다. "영화 감독으로 산다는 건 레드카펫 위를 걷고 카메라 플래쉬 받으며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감독으로 사는 건, 촬영 장비를 지고 비오는 새벽 집을 나서는 것이다." 화질 안 좋은 VHS 비디오로 그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본 건 그 무렵이었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삼위일체','블라디미르의 성모' 같은 이콘(icon)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15세기 러시아 화가이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거세게 불던 바람, 무너진 성당 벽에 기대선 남자의 긴장한 얼굴 표정은 또렷이 기억난다. 40대와 50대를 사는 동안 문득문득 흑백 영화 속 그 <거친 바람>이 떠올랐고, 얼마 전 영화평론가 C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중, 그 거친 바람을 <다시 맞고> 싶어졌다. 내 삶의 쭉정이를 다 날려보내고, 그리고 남는 내 삶의 알곡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남을까).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유튜브를 통해 부는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다시 불기를 (역시) 백 번 정도했다. (자막 ㅠㅠ) 런닝 타임 3시간 동안 안드레이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안드레이가 붓을 쥐고 있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다 보고나니 그건 결점이 아니었다. 

2021.9.6. 
신동주 

<서플먼트> 

(*스포일러 등장) 

1)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보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원작이 있는 경우 무조건 원작부터 본다, 는 내 오래된 원칙 지키기 위해 SF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 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 (두 형제는 소비에트 시대 작가로서 원작은 1972년에 출간). 출판사 소개문을 발췌, 인용하자면 : " 『노변의 피크닉』은 외계 생명체나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을 다루는 ‘퍼스트 콘택트’ 유의 소설에 속하"며, "불법적으로 ‘구역’(the Zone)에 숨어들어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물체들을 찾아내고, 그걸 팔아 살아가는 ‘스토커’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와 비슷한 동기를 갖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장편 소설에 <그곳은 우리의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라는 식의 문장이 단 일 회만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음.(현재 미국에 와 있어서 소설 속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 못하는 것을 양해 구함). 소설 속 그 한 줄의 문장이, <스토커>에서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 더불어, 이 소설을 통해 '스토커'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좇아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잠입자,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됨. 소설과 영화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임. 

2) <스토커>의 주인공 세 사람(스토커, 교수, 작가)은 두려워서 결국 '더 룸'에 들어가지 못함. 세 시간 내내 세 사람 꽁무니 졸졸 따라갔던 <피디> 한 명도 그 방 문턱에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남. (도대체 인간 중에 누가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이런 생각이 듦.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방에 들어간 거 아님? 너무 커서 그렇지, 그 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님? 왜냐하면, 각자가 갈망을 뿌린대로 거두는 모습을 이 방 안에서 매일 목도하고 있으니. 만델라. 이명박. 트럼프. 그레타 툰베리. 윤석열. 신동주...열매가 맺히는 속도만 다르지, 그 방과 이 세상은, 어쩌면 같은 공간일 듯. 그래서 결론: 방 안으로의 진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 

 3)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열기구가 추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총 9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짐. 그 중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세 개만 아주 짧게 소개하면 : (a) 젊은 청년이 영주를 위해서 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맞아 죽을 수 있음. 드디어 종을 치던 날, 몇 년째 입을 닫고 묵언수행해 오던 안드레이가 입을 열고는... (b) 타타르족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을 폐허로 만듦. 끔찍함.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름).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까지 들어와 사람들을 도륙하고, 교회의 보물을 찾겠다고 끓는 물을 사람의 입에 부음. 그런 행동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함. 장수로 보이는 듯한 이가 말을 탄 채로 성당 벽을 바라보며 묻는다. "저기에 누워 있는 아기는 누군가?" " 예수입니다" "아기 옆에 있는 여자는?" "동정녀 마리아 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면 동정녀가 아니지" 성당을 불태우고 타타르족이 떠난다. 이제 안드레이는 벽에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 누군가에게 아무런 영향 미치지 못한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화가는, 이제 <어떻게> 그려야 할까. 아니, <그려야 할까>. (c)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초반부에 나옴. 안드레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키릴이, 성상화(聖像畫)의 대가 테오판 그릭을 만나는 중. "나와 함께 일해주겠나?"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요. 제 공동체와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저를 지명해주십시오" (당시 안드레이가 더 인정 받고 있던 상황). "그러지". 얼마 뒤, 테오판 그릭이 보낸 전령이 수사들이 다 모인 앞에서 테오판의 후계자를 발표한다. "안드레이!"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의 키릴. "아, 머리가 빠개지는 거 같군". 전날 밤 술을 잔뜩 마신 듯한 전령은 말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함. 난 이 부분을 여러번 돌려봤는데, 만약, 테오판은 키릴을 생각했으나 숙취에 시달리던 전령이 이름을 착각한 것이라면? 이 도입부가 참으로 매혹적). 

 4) 실존 인물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실제 그린 성상화(聖像畫, icon)들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 내게는 성상화들을 <즐겨보고> 싶은 로망이 줄곧 있어왔음. 이콘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내가 짐작하기론) 중세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중세인의 태도가 내 삶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근현대인인 내게는 그것이 결여돼 있는 듯. C.S. 루이스는 『폐기된 이미지 - 중세 세계관과 문학에 관하여』 (C.S.루이스 지음, 홍종락 번역, 비아토르)에서 중세인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는 (...)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들은 무엇보다 "올려다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함. 누군가를,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걸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영락없는 근대인인 나는, 어쩌면 이콘마저도 내려다 보고 있었을 수도.

2021년 8월 23일

『부서진 사람』 (피터 맘슨 지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읽고.

1. 나는 옛날부터 다음 두 곳에 <들어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 오히려 반감이 있었다. 현실로부터 도망한다는 생각, 현실과 당당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브루더호프라는 기독교 공동체 안의 '리더십'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사람』이란 책을 내가 <단숨에> 다 읽은 것은 내게는 좀 사건이었다.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과정 중에 발견한 (거의 TMI에 가까울 수도 있는) 소소한 일들을 서너 개 나열해보고자 한다. 

2. 나는 책을 쥐면 제일 먼저 제사(題辭, epigraph)부터 읽는 습관이 있기에 이 책을 쥐고 제일 먼저 한 일도 제사를 확인하는 거였다. (제사가 없는 책도 많이 만나는데 그럴 때면 난 내심 몹시 실망한다. 얼마 전에 읽은 제사 하나도 참 인상적이었다. 『창세기를 만나다』(로널드 헨델 지음,비아)에 나오는 제사 :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 ). 『부서진 사람』 에는 반갑게도 제사가 있었다. 이 제사를 읽는 순간, 난 내가 이 책을 완독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은 이렇다. 상처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될까? 천사도 어쩔 수 없는, 가련하고 실수투성이인 이 땅의 자녀들을 깨우칠 자는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사랑의 군영에는 오직 상처 입은 병사만이 복무할 수 있으니. - 손턴 와일더, 「물을 휘저은 천사」 에서. 

3. 서문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비록 아놀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을 당했지만". 지난 가을에 <내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아놀드란 사람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서문을 읽는데 아놀드가 당한 일뿐 아니라 아놀드라는 사람 자체도 궁금해졌다. 서문의 승리.) 마지막에 서문을 쓴 이의 이름이 나왔다. 유진 피터슨. (역시!) 

4. 점점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나는 책 표지를 다시 살폈다. 부서진 사람,이라는 책 제목 위에 영어로 원제가 적혀 있었다. Homage to a Broken Man. 호미지가 뭐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이 단어의 발음은 오마주,였다. 평소 자주 쓰던 오마주라는 단어에는 에이취(H)가 붙는구나! (완전 몰랐다). (어서 빨리 나도 "Homage to C.S.루이스"라고 할 무언가를 내놓아야할텐데 ㅠㅠ). 

5. 아껴가며 읽었다. 내게 제일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두개만 소개하면: 하나. 공동체 생활은 한다는 것은,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하이너[아놀드]가 술을 권하자 더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이 되도록 맥주 한 잔 입에 안 대고 살았습니다." 더그는 커피조차 양심에 꺼려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p.426). 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상담하러 아놀드를 찾았다. 나는 아놀드가 한 대답 중에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멤버가 된 제니스가 언젠가 하이너[아놀드]에게 찾아와 자신에게 별 재주가 없다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제가 공동체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자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보태는 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산타클로스처럼 되길 고집하는군요" > (p.434). 이 구절을 읽는데 나는 한 방 먹은 거 같아서 멍해졌다. 실제 다음 문장도 이렇게 이어진다. "제니스는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했다". 

2021.8.23. 
신동주

2021년 5월 7일

『창세기와 만나다』 (로널드 헨델 지음,박영희 옮김, 비아 VIA)를 구매하고.

1. 기독교 출판사 <비아>에서 제작하는 유튜브 채널 이름은 '비아 채널'(Via Channel)이다. 비아 채널에서는 언박싱을 정기적으로 하는데 이 비아 언박싱은 내가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언박싱이다. 비아 언박싱은 항상 세 파트로 이뤄진다. 1) 책의 외양 소개. 2) 책의 내용 소개. 3) 편집장이 소개하는 이 책의 한 방. 나는 이렇게 『창세기와 만나다』 가 비아에서 언박싱 되는 순간을 지켜보았고 결심했다. "읽어야만 해". 화면에서만 보았던 그 책이 지금 내 손에 쥐어져있다. 

 2. 책 제일 앞의 헌정사를 보았다 : "친구, 동료이자 히브리 성서 연구자인 밥 알터(Bob Alter)에게". 아니, 알터라면, 『성서의 이야기 기술』을 쓴 로버트 알터아닌가! 나의 '근대적 편협성'을 황홀하게 산산조각 내주었던 학자! 페이지를 한 장 넘기자 이제 이런 제사(題辭)가 눈에 들어온다.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헌정사와 제사에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나는 잠시 책을 덮고...(여기까지) 

2021.5.7. 
신동주 

<서플먼트> 

이 책은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야심차게 펴내고 있는 '위대한 종교 서적들의 생애' 시리즈 중 '창세기 편'이다. 창세기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창세기가 인류사에서 어떠한 식으로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인류 지성의 변화가 창세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학문적으로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드문 창세기의 영향사, 해석사, 지성사 저작이다. (이상, 출판사의 소개글 중에서).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을 읽느라 시간이 안 나는 가운데서도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비아 채널에서 제공하는) '슬기로운 독서 생활'이라는 영상 때문이었다. 마침 출연자들이 『창세기와 만나다』에 대해 나누고 있었는데 한 여성 출연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저자의 말은, 창세기는 독자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 라는 말이었어요 ". 아양 떨지 않는 고대 문헌! 그 거침, 그 당당함을, 직접 빨리 대면해 보고 싶었다. 이제 만나러 간다.

2021년 5월 5일

미스터 션샤인

"쉬슬러 피오렌자의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순종'이란 용어가 없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p.431)라는 문장을 읽는데 "이 드라마에는 키스신이 없다"(나무위키, <미스터 션샤인>)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2021년 4월 22일

『찔림』 (신동필 지음, 시커뮤니케이션 , 개정판 2021 )의 저자에 대해서

"당신을 위로하지 않는 책 『찔림』 "의 저자 이름(신동필)이 제 이름(신동주)과 비슷한 이유는 제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선친께서 장남은 '동방의 주인'이 되라고, 차남은 '동방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다 -.- 제 동생은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참 재미없는 세상』 (홍성사,2016) / 『찔림』 (시커뮤니케이션 , 2017 ). 이번에 『찔림』의 개정판(2021)이 새로 나왔습니다. 많은 구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제9계명

며칠 전, 회사 동료 A가 내게 말했다. "미국에 있는 B교수님과 줌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끝나고 제게 피디님 안부를 물으셨어요". 예의를 중시하는 신 모 피디, 멀리서도 기억하고 안부 물어주심에 대해 감사하다는 짧은 메일을 B교수님에게 보냄. 아주 짧게 내가 요즘 하는 일을 썼음. "틈틈이, 새로운 신학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하기 위해 신학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케빈 밴후저의 <제일신학>을 읽었는데, 연구자들에게 제9계명(거짓 증거하지 말라)은, 다른 이의 주장과 글을, 내 입맛대로 변형시키지 않고, 비판하기 쉬운 측면만 골라 읽지 않고, 일단 그의 논지 전체를 제대로 읽어주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이 제게 참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책을 읽으며 그러지 못한 때가 자주 있었거든요." 이 메일에 대해 B 교수님이 답신을 보내주심. 한 가지 부탁을 해오심. 밴후저의 견해를 상기시켜 주어서 고맙다, 책을 한국에 두고 와서 미국에 이 책이 없어서 그런데, 상기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줄 수 있는지, 라고. 나는 기뻤음. 그래서 오늘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림. 사진 찍은 그 대목을 그대로 적어보면: "어떤 저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읽는 자의 의견들과 생각들을 본문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는 대신에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고 행한 바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황금률과 제9계명,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의 함의라고 본다. " - 『제일신학』 (케빈 밴후저 지음, IVP), p.55-56

2021년 4월 18일

< Sports Wit > (Lee Green 지음, 출판사 확인 불가)을 40년 전에 사서 읽고.

1. 이 책은, 내가 사서 지금까지 갖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온갖> 스포츠에 관련된 <온갖> 조크, 명언,경구들을 모아놓았다. 40년 전에 이 책에서, 내가 지금도 항상 마음에 떠올리는 경구 하나를 만났다.

2.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대만 타이페이에 있는 미국 학교에 들어갔고 영어를 못했다. 미국 친구가 없었던 나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던 헌책방에서 산 (살인과 애정행각이 난무하는) 3류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소설을 읽으며 영어 공부를 했고 (그래서 그런지) 끝내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Lawrence Sanders라는 작가가 쓴 <The First Deadly Sin> , <The Second Deadly Sin> , <The Third Deadly Sin>을 읽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지금 내가 소개하는 책도 이곳에서 샀다.
3. 나는 스크린 골프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골프에 관한 경구들에는 많이 끌린다. (볼링에 관한 경구도 좋아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도 골프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Golf is mostly a game of failures." - Tommy Aaron (프로 골퍼). (*골프는 대부분 실패로 이루어진다. 실패한다는 것과 친해져야 한다). coaches & coaching (감독 & 코칭)이라는 항목도 있다. 내게는 다음 두 개가 참 인상적이었다. (1) "No coach ever won a game by what he knows : it's what his players have learned. - Amos Stagg (대학 미식축구팀 감독) (*설사 자기가 알고 있더라도, 선수들이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 (2) "A coach isn't as smart as they say he is when he wins, or as stupid when he loses." - Darrell Royal (텍사스 미식축구팀 감독) (* 경기에 이겼다고 해서 그 사람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경기에 진 사람 말이라고 다 쓸모 없는 것도 아니다).
4. 이제 <내가 만난 경구>를 소개하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혐오하는 '투우 경기' (bull-fighting)에 관한 경구이다. '용기'에 대한 것이라서 알파벳 C 항목('courage')에 들어가 있다. 누구의 말인지도 알려지지 않는 그 경구를 소개하면: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not scared is nothing.
And to not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is nothing.
But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that is something.
- Anonymous
(의역을 해보면)
두려운 마음이 전혀 안 생기는 사람이 황소와 싸우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황소와의 싸움을 피한다면 (당연히) 이것 역시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있는데 황소와 싸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5. 나는 겁과 두려움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신학펀치 시즌1을 시작할 때도, 시즌2를 시작할 때도 이 말에서 힘을 얻었다. 아마 시즌3를 하게 된다면, 아마 그때도 이 말을 가장 많이 생각할 거 같다.

2021년 4월 8일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 (민영진 지음, 대한기독교서회)를 오래 전에 읽고.

1.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궁금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질문을 남겼다.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자 현 대한성서공회 번역자문위원인 민영진 목사가 답을 달았다. 그 중 대표적인 질문 49가지를 모아 만든 이 책을, 어느 날  손에 쥐게 되었다.

2. 책의 구성은 이런 식이다. 예를 들어 45번 질문을 보자. : "민영진 목사님께.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전서』라고도 하고, 『구약전서』 혹은 『신약전서』라고도 하는데, 『성경』이나 『구약』이나 『신약』 등 기독교의 경전과 관련된 이러한 이름들의 유래를 알고 싶어요. 이런 질문도 대답해 주실 거지요? 고맙습니다. 궁금이 올림. " 45번 질문에 대한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 "궁금이 님께, (...)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로마서,고린도전후서,야고보서라고 하지, 로마경,고린도전후경,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 답변은 훨씬 다양한 측면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여기서는 부득이하게 인상적인 한 문장만 소개). 

3.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하나를 위 질문과 답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필명>이다.  대부분의 질문자는 필명을 쓴다. 그리고 저자는 답변을 시작할 때 그 필명을 불러준다. 질문자가 김궁금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면, 답변은 김궁금 장로님께,로 시작한다. 게으름뱅이 올림, 게으름뱅이 님께. 열 받은 신자 드림, 열 받은 신자 님께. 이런 식이다. ( 참고로, 바로 전 질문자가 열 받은 이유는 누가복음 16장 1절~9절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다. "민영진 목사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 있습니다. 본문의 문장이나 구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진술된 내용 자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이 말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도 된다는 뜻입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이 '뇌물'과 다른 게 뭔가요? 열 받은 신자 드림." )  

4. 개인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질문들(과 답변들)을 먼저 읽었다. 그랬기에 <8번 질문>을 읽게 된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난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8번 질문은 이러했다. "목사님, 디모데전서 2:15에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저는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보다는 저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 제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아기는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은 우리 같은 석녀(石女)를 너무나도 괴롭힙니다. 석녀 올림."  나 역시 평소 읽을 때마다 좀 의아해 하던 구절이었기에, 나는 저자가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해 하며 답을 보기 위해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전체 답변은 몰랐지만 적어도 첫 문장이 어떻게 시작할지는 알았다. 석녀에게. 

5. 그리고 나는 틀렸다. <자매님께>. 답변은 그렇게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 순간 갑자기 내가 왜 그렇게 심하게 울기 시작했는지. 목젖이 뜨거워지고 가슴에서부터 딱딱한 울음 덩어리가 올라와 나는 꺽꺽대며 울었다. 그렇게 몇 분을 울었다. 필명을 그대로 부르던 분이, 그 여성에게만큼은, 이 책에서 지켜오던 원칙을 깨고, 석녀라고 부르지 않고 자매님이라고 불러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소개하는 도중에 석녀, 자매님 얘기만 하게 되면 나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될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매번 그랬다. 심지어 한번은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 책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내 눈에선 민망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로는 사람들 앞에서 이 책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아, 딱 두 번 더 꺼낸 일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연출하던 <새롭게하소서>에 민영진 목사님을 모셨을 때였다. 녹화전 대기실에서 민목사님께,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차분하게> 말하다가 자매님,에서 또 울고 말았다. 나머지 한 번은, 신학펀치 섭외를 위해 인천으로 사본학 전문가 M교수를 만나러 갔을 때였다. 그날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요즘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그 <울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2021.4.7.
신동주 


*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 수록된 질문들 중 일부는 (저자가 정기적으로 글을 싣고 있는) 성경연구 월간지 <햇순> 독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왔다. 공동체성서연구원(http://newsprout.org)을 방문하면 <햇순>이 나오는데  메뉴에서 '성서 난해구 해설'을 클릭하면 이 책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에는 실리지 않은 수백 편의 질문과 답변들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