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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일

3. 당신의 수술

1. “간단한 수술입니다.” 마스크를 쓴 의사 K가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저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습니다. 수술용 무영등(無影燈)이 제 얼굴로 쏟아집니다. 그림자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조명. 음영이 전혀 없는 제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요. 낯설고 섬뜩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 간호사가 제 머리를 밀었고 요도에는 소변관을 끼웠습니다. 마취의가 K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펌프의 계기판 앞으로 다가섭니다. 마취를 시작하나 봅니다. 프로포폴(propofol). K의 설명에 따르면 투여 후 대사속도가 빨라서 최근에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전신마취용 정맥 주사제입니다. 수술용 마킹펜을 든 K가 익숙한 동작으로 제 몸에 선을 하나 긋습니다. “정확하게 인본주의만 잘라줄게.” 그의 동작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잠깐만요! 지금 인본주의와 기독교의 경계를 마크한 라인의 폭, 거의 5밀리미터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펜으로 마크를 해놓으면 나중에 메스로 라인 정중앙을 어떻게 자르겠다는 것일까요. 자르면 안 되는 기독교쪽으로 1밀리미터라도 침범하면 어떡하죠. 갑자기 불안이 엄습하며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펜을 바꿔줘!” K는 두 번째 선을 긋습니다. 제 말을 못들은 걸까요? “더 가는 펜으로 다시 그어달라니까!” 어떻게 비명에 가까운 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거죠? 아니, 제 소리가 정말 입 밖으로 나오긴 한 걸까요?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집니다. K가 간호사로부터 메스를 건네 받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게 저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왔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저를 보면 “수술이 잘 돼서 다행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수술 하루만에 가스도 나왔고, 식사도 잘 하고, 간호사들과 농담도 주고 받습니다. 기분도 아주 좋습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제가 무슨 수술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정도 입니다. 하지만 병명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지금 제 기분이 이렇게 좋으면 됐지요.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독서를 합니다. 일요일 오후의 입원 병동은 너무 조용해서 제가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온 병실에 크게 울릴 정도입니다. 지금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있습니다. 똑! 그런데 이게 뭐죠? 읽고 있는 페이지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습니다. 물방울입니다. 오래된 병원이라 천장이 새나 봅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봅니다. 이상하네요. 하얀 페인트 칠한 천장에는 아무런 얼룩도 보이지 않습니다. 똑! 또 한 방울의 물이 읽고 있는 책 위로 또 떨어졌습니다. 얼굴을 한번 만져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제 뺨이 흠뻑 젖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이렇게 화창한 오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는데 눈물이라뇨. 더군다나 지금은 포셔가 샤일록에게 한 방 먹이는 통쾌한 장면인데 말이죠. “계약대로 살덩이 일 파운드는 가져가세요. 그러나 그걸 잘라 낼 때 이 기독교인의 피를 한 방울만 흘려도 당신 땅과 재물은 국법에 따라 베니스 정부로 몰수될 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슬플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이 승리의 장면을 읽는데 왜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지. 저는 잠시 책을 덮고 창 밖 화단을 바라봅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붉은 맨드라미들 위로 내리쬐고 있습니다. 


서플먼트

1) 상기 포셔의 대사를 소개함에 있어서 최종철이 번역한 『베니스의 상인』(민음사,2010)을 참고 하였으되 화자의 어투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었고 단어 두 개를 뺐다. 

2)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베어내는 일은 실제 가능한 일일까. "대동맥으로부터 실핏줄에 이르는 혈관은 (중략) 아주 좁아져서 혈구들이 한 줄로 미끄러져 들어가야 할 정도가 될 때까지 갈라지고 또 갈라진다. (중략) 그리하여 대부분의 세포 조직에서 어떤 세포도 혈관으로부터 셋 또는 네 세포 이상 떨어져있지 않[게 된다]. (중략) [그렇기에] 피를 흘리지 않고는 1파운드의 살을 떼어내기는커녕 1밀리그램의 살도 떼어 낼 수 없다. 프랙탈 기하학의 창시자 베노이트 만델브로트는 이것을 베니스의 상인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였다." (제임스 글리크, 『카오스, 현대과학의 대혁명』 , 동문사,1993, pp.141-142에서 인용하였으되 마지막 두 문장의 순서 바꾸었고, 만델브로트를 잘 소개하기 위해 ‘프랙탈 기하학의 창시자’라는 문구 삽입.)

3) 우리가 만약 '필요 없고 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모두 잘라내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장자의 대답은 이렇다. "쓸모 없음을 알아야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지. 땅은 한 없이 넓지만 사람에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는 만큼일세.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모두 황천에 이르기까지 다 파 없애면 [이제 남은 그 깍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같은 땅이] 그래도 정말 쓸모 있는 것일 수 있겠는가?" (오강남역, 『장자』, 외물(外物)편 중에서). 그러나 내가 제2장 ‘당신의 1제곱인치(inch²)’에서 소개했듯이, 화란의 자유대학 초대 총장 아브라함 카이퍼는 '쓸모없는 인본주의'를 다 제거한, 그래서 '쓸모있는 기독교'만 남은 천 길 벼랑 길을, 믿음으로 걷자고 우리에게 강권한다. (나는 카이퍼 뒤를 따라 그런 길을 걸을 생각이 전혀 없다). 우리가 살면서 자주 확인하다시피, 실패와 성숙, 부끄러움과 깨달음, 인본주의와 기독교가 ‘얽혀’있는 것이라면 후자를 건드리지 않고 전자만을 자르고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전자를 제거하면 우리 삶이 완전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깊이와 음영>이 사라진다. 하나의 쓸모없는 고리를 제거하면, 전체가 풀린다.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던 '하이퍼링크'는 그저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내게서 실패, 상처, 어리석음, 인본주의가 완전히 제거된다면 그때 남는 나를 지금의 나는 못 알아 볼 것이다.  

4) 지금 막 여자와 K는 사랑을 나눴다. 어느새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진 일이지만 수술 후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질 때면 꼭 여자가 올라간다. 어쩌면 수술 내내 지시를 들었던 간호사와 수술 내내 지시를 내렸던 의사에게 이 보다 더 각자에게 적절한 위안이 되는 자세도 없을 것이다. 완벽한 주도권을 행사하며 두 번이나 절정을 맛본 여자는 나른해진 몸을 가누기 힘들어 그냥 K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좋았어?” 여자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스탠드불을 켠다. 눈이 부셔서 여자는 잠시 눈을 찡그린다. “당신 네덜란드에 가봤어?” 여자는 수술실 밖에서 말을 놓는다. “네덜란드? 갑자기 네덜란드는 왜?” “그때 그 105호실 수술 환자 있잖아. 그 남자가 수술실 메이요대 위에 놓인 메스들을 보더니 뜬금없이, 메스는 네덜란드 말이어요, 그러는 거야. 근데,  메스는 독일 말 아니야?” “이십 년 가까이 써온 말인데 어느 나라 말인지는 한 번도 생각을 못 해봤네" “근데 그 남자가 자기가 잘 아는 네덜란드 대학 총장 한 명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 사람도 메스라는 이 화란말을 분명히 썼겠죠? 그러는 거야. 메스가 자른다, 라는 뜻이라면서. 그런데 의사도 아닌 대학 총장이 도대체 뭘 잘랐다는 걸까?" "안 돼. 그만. 나 내일 오전에 발표 있단 말이야. " “그래서 벌써 자겠다고?”

2012. 5.10. 
신동주

2. 당신의 1제곱인치(inch²)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1. 서정주가 <자화상>을 쓰기 정확하게 백 년 전, 네덜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가 태어납니다. 그는 25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26세에 목사가 됩니다. 32세에는 반혁명당(ARP)의 총재가 되고 37세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43세에는 자유대학교를 설립했고 64세에는 네덜란드의 수상이 됩니다. 30대 초반부터 주간지 헤라우트(De Heraut)와 일간지 스탠더드(De Standaard)의 편집인과 주필로 45년에 걸쳐 칼럼을 썼고 평생 저술한 책이 총 223권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자’라고 불렀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정부는 카이퍼의 70회 생일을 국경일로 선포합니다.

2. 카이퍼는 44세에 자신이 세운 자유대학교(Free Univirsity)의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취임기념 강연을 하는데요, 여기엔 미당이 <자화상>에서 사용한 ‘팔 할’ 못지 않게 심히 계량적(計量的)인 용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제곱인치’(inch²)라는 단어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전세계 기독교계에서 널리 회자·인용되고 있는 카이퍼의 문제의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땅은 단  1제곱인치도 없다!" 무척 선동적(어떤 이에게는 감동적)입니다. 비기독교에 물든 영역을 단 1제곱인치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우리 삶을 완벽하게 ‘십 할’ 기독교화 하겠다는 카이퍼의 이 신학을 저는 <면적의 신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3. 모든 면(적)에 따라붙는 필연적인 사실 하나는 <경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발 딛고 서있는 면이 <기독교적>이라면, 그 면이 끝나는 곳에선 필연적으로 <비기독교적>인 게 시작됩니다. 그게 면적의 운명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비기독교적인 것은 단 1제곱인치도 남기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러니까 
<면적의 신학> 신봉자들은, 자연스럽게 <정밀한 자> 와 <날카로운 칼>이라는 두 개의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기독교/비기독교의 경계선을 찾은 다음, 가차 없이 잘라냅니다. 비기독교를. 기독교만 남겨둔 채.

4. "그런데 말이죠", 제가 카이퍼에게 묻습니다. "우리 삶에는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은데 명확한 경계를 찾는다는 게 가능할까요? 기독교와 비기독교가 갈라지는 경계선이 정확하게 여기다, 늘 이럴 수 있는 걸까요?” 카이퍼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답변합니다. "[기독교인은] 인생의 지도에서 이웃과 전혀 다르게 선을 긋는 법입니다.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고 그 기원에는 공통점이 전혀없습니다. 당신이 그은 경계선 라인 왼쪽에 서 있는 사람과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의 관점은 겹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택하든지 저것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 내부에서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이 혹 있다면] 우리의 대열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제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카이퍼씨, 우리가 어떻게 1제곱인치 수준까지 정확하게 그
런 경계를 파악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자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성경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 그 경계 사이의 선을 봅니다." (이상 카이퍼의 모든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1880년의 취임 기념 강연인 '삶의 각 영역에 있어서의 주권'(Sphere Sovereignty)과 189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고 행한 6개의 강연을 모은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에서 발췌).

5. 그런데 우리 삶은 과연 <면적>을 닮았을까요? 항상 명확한 경계가 있고, 그 경계선을 콕 집어낼 수 있는. 무표정이 웃음으로 변하는 그 정확한 경계를 누가 집어낼 수 있을까요? 화가 나 뾰로통해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피어나는 순간을. 제가 던진 조크에 터진 K의 웃음. 그 웃음의 시작과 끝, K 본인이라고 알 수 있을까요? 간지러움이 성적 쾌감으로 변하는 지점, 단순한 살과 성감대의 경계선은? 아니, 제 호감은 언제부터 사랑이 되었을까요? 사실 경계의 불명료성은 삶의 모든 ‘영역’(sphere) - 네, 카이퍼가 주창한 개념인데요, 그에게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에서 발견됩니다. 고종석이 『감염된 언어』에서 하는 말을 들어볼까요. "이른바 로만어라는 것은 통속 라틴어가 진화한 언어들이라고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러나 통속 라틴어의 끝과 예컨대 이탈리아어의 시작이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누구도 확정할 수 없다." 라틴어 얘기를 들었으니 이번엔 그리스어 얘기를 한번 들어봅니다. 영문학 교수이자 기독교 작가였던 C. S. 루이스는 그리스어로 된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선 먼저 그리스어 문법 공부라는 지루하고 고역스러운 시간을 거쳐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고역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날짜와 시간을 정확하게 집어낼 수 없습니다." (『영광의 무게』중에서). 한편 루이스는 또 다른 책에서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경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상은 100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고종석과 C. S. 루이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런 이데올로기와 신학을 저는 <비면적>적 이데올로기와 신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비면적적 신학에선 일견 비기독교적이라고 보이는 것 속에서도 기독교를 발견합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플먼트

1) 1제곱인치 같은 <면적>의 은유를 갖고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는 건 적절할까? "어거스틴 이래 중세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나라'(basileia)를 영토, 구조, 제도, 혹은 기구와 같은 어떤 지정학적 실재로 이해했다. 그러나 구스타프 달만(Gustaf Dalman, 1855~1941)이 그리스어 ‘바실레이아’의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말쿠스’(malkuth)가 야훼와 결합하여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God's kingly rule)를 의미한다고 밝힌 이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실레이아'를 더 이상 영토적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장윤재,'예수 믿기, 예수 살기-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기독교사상』,2007년 3월호에서 인용). 만약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적절한 개념이 '영토'나 '면적'이 아니라 '통치'라면 우리가 묻는 질문의 형태도 달라진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자를까요?"가 전자에 어울리는 질문이라면, "하나님, 당신은 어떻게 저런 사람까지 다 기다려주고 계신 건가요?"는 후자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깔끔한 기독교 이해를 가뿐히 뛰어 넘는다. '면적'은 완전한 정복(인식)이 가능하되, '통치'는 영원히 부분적으로만 이해 가능할 뿐이다.

2) 1988년 10월 종로 5가에 위치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박사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주한 네덜란드 대사 텡베르컨, 과거 화란 자유대학에서 유학했던 손봉호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 전시회를 주최했던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의 정성구 원장은 2010년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과 삶』(킹덤북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상기 취임 기념 강연에 대한 번역 오류였는데 오류가 포함된 그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실 수 없는 땅은 단 한 평도 없다.(p.270)" 한 평은 3제곱미터(㎡)가 넘기에 1제곱인치라는 말을 통해 카이퍼가 전하고자 했던 뉘앙스를 전혀 살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단 한 평도 없다"라는 이 번역은 "단 1헥타르(1만㎡)도 없다"라는 번역 만큼이나 카이퍼에서 멀다. 그렇다면 카이퍼의 의도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반대 극단으로 가는 건 어떨까? 예를들어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1제곱옹스트롬(1억분의 1센티미터)도 없다"와 같은 의역. 궁금해진다, 그 <1제곱옹스트롬 기독교>는 <1제곱밀리미터 기독교>보다 더 순전한 기독교를 보여주게 되는 걸까? 아무리 작아도 1제곱옹스트롬도 여전히 <면적>일진대, 여전히 낮에는 자와 칼의 교리가 지배하고 밤에는 <잘라내라!>라는 엄숙한 계시의 목소리가 온 지면 위를 뒤덮고 있으리라. 1제곱옹스트롬이나 되는 그 <널따란> 지면 위를.

3) 카이퍼식 사랑을 나누는 자는 '클리토리스는 어디에 붙어있나?'라고 묻는다. 클리토리스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 폭과 길이와 경계를 묻는다. 배꼽에서 1센티미터씩 기계적으로 내려오는 그런 여행. 클리토리스와 유륜(乳輪) 경계 밖으론 1센티미터도 벗어나지 않는, 1센티미터라도 벗어난 곳엔 절정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그런 카이퍼식 사랑 여행. 이 사랑법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다다르고자하는 '또 다른 천국' 역시 '지리학적인 실재'가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떻게 만져(통치)주는가와 연관된 지극히 '관계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따라 그 어떤 곳도 천국으로 이어질 수 있고, 같은 이유에서 클리토리스조차 그저 하나의 삭막한, 막다른 골목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폴리처상 수상작가 나탈리 앤지어의 『여자:그 내밀한 지리학』(Woman:An Intimate Geography). 만약 그녀가 여성의 몸 전반이 아니라 섹스에 한정해서 이 책을 썼다면 분명 그 제목을 바꿨으리라. <여자, 그 내밀한 통치(reign)>. 

4) "만져줘. 아니, 거기 말고, 조금 더 위" 내 귀에도 지금 내 목소리는 달짝지근하게 들린다. "조금만 더 위. 응, 그래, 바로 거기!". 이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입을 열면 부끄러운 신음이 새어나올 거 같아 황급히 손을 문다. 그러나 오늘도 성공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눌 때 마다 나는 매번 '감미로운 실패'를 경험한다. "돌아누워"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명령, 부끄러움과 기대감에 내 온 몸은 달아오른다. 난 눈을 질끈 감은채 한껏 달궈진 내 엉덩이를 높이 쳐든다. 철썩! 남자의 손에 들린 자가 잔뜩 긴장된 내 엉덩이를 때린다.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 내가 처음 들어보는 낯선 내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엉덩이에 피어오른 진홍빛 자국은 묵직한 쾌락과 함께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온 몸으로 퍼져 내 뺨까지 붉게 물들인다. 자가 남긴 장밋빛 흔적이 끝나는 경계선을 정확하게 집어낼 자 누구일까. 내 신음이 잦아드는 순간과 수치심과 쾌락의 경계선을 정확히 짚어낼 자는 존재할까. 내 엉덩이는 애타게 또 한 번 자의 하강을 기다린다. 언젠가 한 신칼빈주의자의 손에 들려 내 몸을,내 생각을, 내 신념을 쟀던 자. 그 자에 길들여져 어느 순간 나 또한 하나의 자가 되어 세상과 타인의 신앙을 쟀다. 그 자가 이제 <그분> 의 손에 들려, 그분의 통치 하에 하강하고, 내 입에선 또 다시 길고 감미로운 신음. 어느새 내 얼굴에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 치유의 눈물. 
 
2012.5.1.

1. 당신의 8할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1. "열대과일 같았던 제니의 가슴을 기억한다. 비키니 속으로 내려다보였던 분홍 유두가 생생하다. 오늘은 내 방에서 자고 가라던 대담함을 기억한다." 남성잡지 < GQ > 한국판 2008년 11월호에 실린 ‘중국 여인과 일별함’이라는 섹스 칼럼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잡지사에 소속된 남자 에디터 한 명이 태국 해변가에서 젊은 중국 여성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쓴 이 글을 읽어보면, 상하이 출신의 그 중국 여성은 그날 밤 이 한국 남성 위에서 '절정'을 맞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 < 색, 계 > 처럼 아크로바틱하진 않았지만 탕웨이만큼은 뜨거웠다. 제니는 내 위에서 절정이었다."

2. 지금 한 여성이 한 남성 위에서 막 절정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멋진 시간을 보냈다는 말을 듣는데 괜히 심술이 납니다.(부러워서 그런 거 같습니다). "절정이 아니라 절망이었을거야", 혼자 되지도 않는 딴지를 걸어 봅니다. 하지만 그 중국 여성의 절정 유무는 저의 진짜 관심사가 아니기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섹스 칼럼에서 제 시선을 잡아끈 대목은 사실 따로 있었고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갖기 몇 시간 전 해변가에서 키스를 나눴는데 남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딱 한 줄로 묘사합니다. “이때 키스한 것은 팔 할이 술 탓, 나머지 이 할은 바닷바람 탓이었다.”

3. 1941년 서정주가 자신의 첫 시집『화사집(花蛇集)』에 실린 < 자화상(自畵像) 〉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라고 선언한 후, 사람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세상사와 인생사를 ‘팔 대 이’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군가에게 이 세상사를 칠 대 삼이나 육 대 사가 아닌 팔 대 이로 나눌 권리가 왜 없겠습니까마는 저는 한 잡지사 남자 직원의 글을 읽으며 서정주가 보여주었던 시적 긴장감을 제대로 '도둑질'해오려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는 문장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나머지 '이할(二割)의 내용'을 밝히지 않은 데 있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서정주가 '이할'의 내용마저 다 밝혔다면, 이미 밝힌 '팔할'의 내용(바람)과 더불어, 한 남자를 키운 것이 십 할, 즉 백퍼센트 밝혀지는 아주 희한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삶에 '알 수 없(다)는 것'이 들어설 여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십 할, 백퍼센트, 남김없이' 설명해버릴 수 있는 것이 당신의 삶이라면? 그런게 당신의 사랑이고, 그런게 당신의 배신이라면? 누군가 저에게, 너에게는 더 이상 미지의 영역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저는 모욕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을 십 할까지 파악·묘사할 수 있다는 신념은 그렇게 얄팍할뿐더러, 종종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4. 1982년 이탈리아의 극좌파단체 < 붉은 여단 > 은 로마 외곽에 위치한 레비비아 교도소를 습격합니다. < 붉은 여단 > 은 이곳에서 제르마나 스테파니니라는 여성을 납치했고요. 레비비아 교도소에 수감돼있던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에 제르마나가 가담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던 제르마나는 장애인 특례 제도에 따라 교도관으로 뽑혔고, 교도소 내에서 소포와 우편물을 수감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67세였습니다. “울음을 그쳐! 지긋지긋해. 반복해서 말하는데 울음을 그쳐. 당신은 어느 누구의 동정도 살 수 없어." < 붉은 여단 > 이 자체적으로 녹음한 혁명재판 테이프를 들어보면 < 붉은 여단 > 의 그 누구도 장애를 가진 그 노인의 변명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납치 한 달 뒤 제르마나는 총살됐습니다.

5. 프랑스 철학자 알랭 핑켈크로트는『사랑의 지혜』에서 위 사건을 소개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이 제르마나를 처형하기 전, 그들의 지식이 이미 제르마나를 점령하였다. 제르마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르마나 스테파니니가 누구인지를 그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알랭 핑켈크로트가 미당의 시를 알았다면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모릅니다. " < 붉은 여단 > 은 제르마나를 '십 할' 파악했다고 자신했다".

6. 조금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 꽉 막혀있는 '계량(計量)의 언어'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당신과 나의 삶을 잡아낸 미당, 그는 정녕 시인이었습니다. 비록 계량 수치를 사용하지만 서정주는 인생을 '십 할', 즉 '백퍼센트'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서정주는 설명할 수 < 없다고 > 말하는 중입니다. 인생의 모호함과 불투명함에 대한 응원과 지지, 그게 미당의 시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팔 할이 술 탓, 나머지 이 할은 바닷바람 탓"이라는, 서정주의 시어(詩語)로 한껏 치장한 이 문장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무척이나 비(非)서정주적입니다. 저는 제 키스를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제가 끝내 모를 것들이 언제까지나 섞여 있습니다. 저의 선에는 악이 섞여있고, 저의 용기에는 비겁이 섞여있고, 저의 기독교에는 비기독교가 섞여 있습니다.


서플먼트

1) 서정주의 <자화상>이 시적 울림을 주는 이유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2할의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는 이야기의 ‘개수’도 모른다는 점에 주목해 보는 것이다. 개수가 적시되지 않은 2할은 영원히 복수(複數)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세상 80억 개의 이야기가 다 담긴다. 서정주의 2할은 8할 보다 작지 않다. 8할과 경쟁하지도 않는다.

2) 상기 섹스 칼럼을 읽는데, 갑자기 '절정'이 아니라 '절망'을 느낀 여성을 한번 창조해보고 싶어졌다. (나도 참 짓궃다. 모든 남자는 늘 모든 남자를 질투한다.) 상기 칼럼에 등장하는 묘사를 겹따옴표를 사용해 그대로 인용하되 (내 눈에 어색한 표현도 그대로 놔뒀다), 전체 내용은 칼럼과는 달리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시점에서 서술했다. 아래 내용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3) 언젠가 태국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해변에서 키스를 하고 우리는 방갈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의 "머리를 귀 뒤로 넘기다, 어깨에 잠시 머문 손으로 미니 드레스 어깨 끈을 어깨 밖으로 밀어냈다". 드레스가 마루 위로 흘러내리고 "검은색 팬티만 입고 선" 나를 남자가 뒤에서 안았다. 엉덩이에 닿는 남자의 성기가 잔뜩 발기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가 혀로 내 등을 핥기 시작했고 난 내 젖꼭지가 점점 단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혀끝이 가슴에 [와] 닿았을 때" (상기 칼럼에서는 이 순간 '한숨 소리'가 여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되어있다) 내 입에선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해변에서 왜 내게 키스 했어?" 남자는 나를 더 세게 안으며 내 귓속에 감미로운 목소리로 "에이티 퍼센트 윈드, 투웬티 퍼센트 와인"이라고 속삭였다. 내 몸은, 빠르게 식어갔다. 꼿꼿했던 두 젖꼭지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과녁을 제대로 맞히지 못하는 걸 죄(罪)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삼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대로라면, 그는 내게 죄를 지었다. 과녁을 비껴간 화살처럼 나의 성감대를, 아니 나의 그 어디도 맞히지 못한 그의 언어. 나는 천천히 바닥에서 검정 팬티와 드레스를 주워 꿰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를 뒤로 한채 방을 나왔다. 밖은 후덥지근하고 더웠다.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했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