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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일

예수의 인성에 대한 이견 - 고려신학대학원 박영돈 교수 vs <낸시랭의 신학펀치> 담당 PD

박영돈 교수님께
 
안녕하십니까.
 
CBS 기독교방송에서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신동주PD라고 합니다. 작년 연말 교수님께서 쓰신 일그러진 한국 교회의 얼굴읽으며 많은 감동 받았던 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책으로, 또 페북 상에서 좋은 글로, 우리 사회와 교회에 유익을 끼쳐주심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박교수님이 <낸시랭의 신학펀치> 10예수님은 백 퍼센트 인간이었나요?’를 보고 페북에 올리신 글을 읽고, 저 또한 느낀 점을 나누고자 한 명의 기독인 자격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교수님과 또 시청자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건 이런 것들입니다.
 
1. 예수님의 시험에 대하여.
저희 프로그램에선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실제로 그 시험의 내용에 대해 유혹을 느꼈다고 소개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을 활용하고 싶은 욕망(돌과 떡), 사탄에게 절을 하고서라도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높은 산과 만국의 영광), 하나님을 시험해서라도 멋진 것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이 예수님 안에 어느 순간 있었다고요. 그 욕망은 만약 실천했다면 ! 불순종으로 이어지는 욕망이었다고요. , 저희 프로그램에선 그런 욕망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교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시며 그 욕망과 예수님이 치열하게 싸우셔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죄에 굴복했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상기 문장을 읽고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알던 성경 상식 , 저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신자로서 제게 있는 신학적 지식은 상식 수준에 가깝습니다 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안에는 나의 원(실천하면 불순종에 이르고)’아버지의 원(실천하면 순종에 이르는)’이 둘 모두 동시에 존재했던 게 아닌가요? 그 둘이 치열하게 싸웠던게 아닌가요? 그 싸움이 너무나 치열해서 피와 땀을 흘리셨고,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고백하신 게 아닌가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예수님이 극심한 갈등을 겪었기에 교수님의 지적대로 - 이미 죄에 굴복하셨다고 봐야 하는 건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욕망과 기도는 둘 모두 극히 실제적이었고 치열했으나 죄는 짓지 않으셨다. 이것이 제가 이 본문과 기타 시험을 읽는 독법입니다. 그리고 저희 프로그램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2. 야한 생각에 대하여
만약 저희 프로그램에서 예수님도 <음욕을 품었을까요>?” 라고 물었고, 거기에 대해 모든 인간들처럼 예수님도 <음욕을 품었다>”라고 답했다면 저희 프로그램,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제가 믿는 예수님은 - 박교수님이 믿는 예수님처럼 - 음욕을 품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저희 프로그램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혹시 누군가 하면, 아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한> 생각은 어떨까요?
 
야하다는 말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여고생들도 오늘 내 치마 좀 짧지 않니?” 라는 말을 나 오늘 야하지 않니?”라는 식으로 종종 표현합니다. 야하다,는 단어를 <침대 위에서 땀 흘리며 행하는 성교>로만 해석한다면, 저도 박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야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나, 야하다는 말을 <건강하고 밝은 성적 생명력>과 연결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을 때도 있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며 맘에 맞는 동료와 함께 밝고 빛나는 야한대화를 나눌 때도 있습니다. (오래 나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대화는 짧고 그리고 밝은 웃음으로 끝난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를 행할 때 저는 회개하고, 후자를 행할 때는 예수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전자에 대한 강조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 결과는 초라하지만요). 후자에 대한 표현, 표출, <찬양>(물론 주님께) 도 함께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일 먼저 교회에서! 그래서 소위 기독교프로그램에서 물었습니다. 예수님도 야한 생각을 하셨나요? 몽정도 하셨나요? (저라면, 예수님도 새벽에는 발기 하셨겠죠, 라는 질문도 추가했을 것 같습니다.) ! 시험을 겪으시고, 발기를 경험하시고,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죄는 짓지 않으신 한 남자를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분께 모든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인성과 신성을 더 알게 되기를!
 
 
3. 중대한 교리에 대해
박교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아래 말씀을 읽으며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또한 낸시랭의 신학펀치가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에 대해 논의하기에는 부적합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교수님.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를 논할 수 있는 중대한 자리()”가 과연 따로 있나요? 중대한 교리에 대해 솔직하고 겸손하게 묻는다면 그 장소에 상관없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혜를 주시는 게 아닌가요? 예수님이 진정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신 곳은 회당이 아니라 우물가였습니다.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를 논의하기에 적합한 곳이 어디인지 정말 알고 싶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궁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거길 찾아올까? 혹 찾아오더라도....물을까?
 
신학을 한다는 것, 교회개혁, 성화 등등 박교수님의 좋은 글들 페북에서 매번 읽고 있습니다.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저희 프로그램, 아직 부족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주제나 방향성 등에 대한 조언해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달을 앞두고 있는데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2014.3.27.
신동주 드림
 
* 제 글을 읽는 분들이 양쪽의 논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박영돈 교수님의 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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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랭의 신학 펀치를 보고 느끼는 아쉬움
 
오늘 처음으로 신학펀치라는 CBC 프로그램을 보았다. 예수님이 온전한 사람이심에 대해 논의하는데 교의학자로서 듣기에 아슬아슬하고 위험스러운 대목이 많았다.
 
한 교수는 예수님이 광야시험을 당하시면서 사단이 유혹한대로 돌을 떡으로 만들고 천하만국을 소유하고픈 불순종의 욕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욕망이 전혀 없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진정으로 시험과 유혹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야한 생각을 하고 몽정을 했겠느냐는 낸시 랭의 엉뚱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 교수는 주저 없이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 자리가 예수님의 인성을 전문적으로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대중을 상대한 가벼운 신학적 담화에서 던진 그 교수의 몇 마디 말을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의 중대한 진리에 관해 언급하면서 좀 더 사려 깊고 신중한 발언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다. 그러나 그 분은 죄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시다. 히브리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고했다(4:15).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죄의 근원과 좌소는 마음이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야한 생각을 하셨다는 것은 그 분도 이미 마음으로 간음의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야한 생각이란 단순히 여인이 아름답다거나 섹시하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갖고 싶다거나 성적인 행위와 관련된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몽정을 하는 것은 대개 꿈속에서의 성행위에서 기인된다. 구약 율법에서는 몽정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몽정은 잠재의식 속에 억눌려있는 성적 욕망의 표출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예수님이 사단이 유혹한 대로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는 발언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큰 실언이다. 죄의 근원은 불순종의 욕망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1:15).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불순종의 행위만이 아니라 불순종의 마음, 욕망이다.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 혹은 품었다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는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면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약함 가운데 처절한 배고픔을 견디며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다. 그에게도 똑같이 사단의 유혹이 엄습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이 그 유혹에 끌려 불순종의 욕망을 품게 되었고 그 욕망과 예수님이 치열하게 싸우셔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죄에 굴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죄와 사탄의 유혹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불순종의 욕망을 품는 자체가 죄의 근원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가. 가장 거룩하신 분에게는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라는 사단의 사악한 유혹과 암시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었던 것이다. 불순종의 죄를 밥 먹듯 범하는 죄인들에게 그런 유혹은 아무 괴로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죄의 유혹이 달콤할지 모른다. 그러나 죽기까지 하나님을 순종하신 그 분에게 그 하나님을 반역하라는 마귀적인 음성은 그의 마음에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다. 그 분을 하나님이라는 렌즈로만 바라보므로 예수님의 온전한 인간됨의 면모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으면서도 다른 분이시다. 죄로 말미암아 속속들이 부패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의로우신 분이다.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인간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오염되고 뒤틀린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마음의 모든 생각과 욕망과 상상까지 죄로 오염된 우리와는 달리 예수님은 성령으로 성화된 죄 없는 인간성과 청결한 심령을 가지신 분이다. 아직 부패성이 남아있는 우리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도 야한 생각이나 욕망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되는데 하물며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항상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이셨던 그 분을 야한 생각과 욕망이나 품고 사는 우리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사람 되심을 곡해하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다(2:9). 그 분은 인간으로 존재했던 모든 육체의 때에도 완전한 하나님이시지 않은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분을 부패한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의 비정상적인 인간성을 그 분에게 그대로 투사해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은 그 분의 죄 없으심과 그 분의 신인되심을 부인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자기 생각을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전에 2천년 교회 역사 속에 우리의 신앙선진들이 치열하게 고민하여 연구한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존중이라도 가져주면 좋겠다. 또한 내시 랭의 신학펀치가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에 대해 논의하기에는 부적합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영돈 교수님의 글 원문 보기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0 )


*저의 상기 질문에 대해 박영돈 교수님이 페북에 아래와 같은 답변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낸시랭의 신학펀치를 보고 느낀 아쉬움에 대한 신동주 PD 님의 답 글에 대한 답신
 
글 잘 읽었습니다. 시청소감을 한마디 하고 말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또 글을 올리게 됨을 양해해주세요.
 
1. 먼저 보내주신 답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예수님이 불순종의 욕망과 싸우셨다는 주장을 변론하기 위해 매우 부적절한 비유를 드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원함과 아버지의 원함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신 것에 근거해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도 예수님 안에 사단이 유혹한 불순종의 욕망이 있었고 예수님이 그 욕망과 치열하게 싸웠다고 보는 것은 성경을 곡해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공존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신 것은 마귀가 제안한 신성모독적인 욕망과는 완전히 상충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으로부터 옮겨달라고 하신 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이 말세에 악인들에게 쏟아 부을 진노의 잔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악인들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잔을 찌끼까지 남김없이 마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림받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끊어지기를 원치 않는 아들의 간절한 소원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아들의 말할 수 없는 심적 고뇌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26:38) 하셨고,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인간의 연약한 육신이 감당하기 힘든 극심한 내적인 진통을 겪으셨습니다(22:44).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맛보신 헤아릴 수 없는 심적 고통의 극치를 엿보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구약 선지서에 예언된 고난의 종으로서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그 죽음의 패션에 사로잡혀 사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의 잔을 받아야 할 고난의 순간을 목전에 두고 그렇게 고뇌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참된 인간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원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원하는 아들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불순종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한순간이라도 분리되지 않기를 원하는 의로운 갈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들로서 가지는 정당하고 거룩한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정당한 소원까지도 포기하시고 자신을 버리시는(매우 부당해 보이는) 아버지의 가혹한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저주하시면서 까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앞에 자신에게 임할 진노의 잔이 옮겨지기를 바라는 의로운 소원까지도 결국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 안에 있었던 불순종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이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일, 즉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것까지 감수하시는 그 분의 죄인을 향한 놀라운 사랑이 밝히 드러나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주님의 자발적인 순종의 클라이맥스가 극명하게 계시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끊어지는 길 외에 아버지의 다른 뜻이 혹 있는가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이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하고 기도했다고 기록했습니다(22:42). 만일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거든 허락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주님의 뜻을 대적하는 불순종의 길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 분은 절박하셨고 그 진노의 잔은 받기를 인간적으로 두려워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 이런 갈등이 없었다면 주님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고난의 심연을 헤아리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는 대목을 우리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내적인 갈등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오독한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원함을 마귀적인 욕망, 즉 사탄에게 절을 하고라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고 싶은 욕망, 하나님을 시험해서라도 자신을 과시하고 입증하려는 욕망과 같은 차원에서 본다는 것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해석입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반역하는 마귀적인 욕망과 갈등했다는 말씀이나 암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간교한 유혹과 암시를 단호히 물리치셨지, 우리처럼 우리 안의 부패한 욕망과 씨름하며 고뇌하며 미적거리는 순종의 길을 가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광야의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하심으로 첫 사람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마음이 꾀어 실패한 시험과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순종하므로 실패한 시험을 확실히 만회하심으로, 많은 불순종의 종들을 대속할 완전한 순종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입증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들 안에 있는 왜곡된 본성과 욕망으로 인한 갈등을 주님의 경험에 무리하게 투사하여 성경본문에서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에로틱한 상상을 기발하게 비약하여 고안해내지 않는 한, 복음서에서 주님이 부패한 욕망과 갈등했고 야한 생각을 했다는 말씀이나 암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죄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불순종의 욕망을 품었다는 자체가 곧 죄의 근본입니다. 주님 자신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야고보도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만약 주님이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면 주님 자신의 말씀에 의하여 그 분은 이미 죄인이 되신 셈입니다. 만약 신 피디님이 그런 의미로 말하려던 것이 아니라면 내 글에서 언급한 대로 다른 방식과 논리로 표현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민감한 진리를 다룰 때 신중함과 신학적인 자문이 필요합니다.
 
2. 주님이 야한 생각을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도 주님이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신 피디님은 주님이 음욕을 품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고 변론하시며, 야한 생각이 의미하는 바를 건강하고 밝은 성적 생명력”, “밝고 빛나는 야한이라고 매우 우아하게 그 뜻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시청자 중에서 야한 생각을 그렇게 이해한 이가 얼마나 될까요. 공중파 방송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중이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수준과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요. 물론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스펙트럼은 넓을지 몰라도, 시청자 중 거의 대부분은 불건전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 말이 그런 고상한 의미보다는 영화의 야한 장면이라든가, 야한 동영상이라는 표현으로 더 널리 통용되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런 고상한 뜻을 의도했다면 그런 의미가 시청자들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셨어야지요. 주님이 건강하고 밝은 성적 생명력을 가졌던 분인가 또는 주님이 정상적인 성적 의식을 가졌던 분인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랬다면 이런 논란의 여지가 없었겠지요. 비록 대중을 끄는 흥미를 유발하는 데는 아주 맹탕이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뜻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고 오해의 소지만 다분한 표현을 사용하시고는, 뒤늦게 그런 식으로 생소한 뜻풀이를 하시는 것은 궁색한 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더욱이 주님이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는 논의의 맥락에서 나온 질문이니 더욱 그렇게 이해하기가 쉬웠지요. 주님이 보편적인 불순종의 욕망을 품었다면, 당연히 음란한 욕망도 가졌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자연히 주님이 야한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이런 의미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자신을 입증하고 사단에게 절해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고 싶은 불순종의 욕망까지 가졌는데 음욕이라는 불순종의 욕망만은 없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옹색한 논리가 될 것입니다.
 
3. 요즘 들어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곤란을 당하는 일인지를 더욱 절감하기에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몇 가지 느낀 아쉬움을 적어본 것입니다. 아주 민감하면서도 기독교의 핵심 되는 중대한 진리를 다루는 데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한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기독교 진리와 신학을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는 취지는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위험부담 또한 크다는 것도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공중파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대중성의 확보와 시청률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게 되어 대중의 기호와 취향에 맞추다 보면 하나님의 진리는 대중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벼운 담소거리로 상품화되기 쉽습니다.
 
기독교 TV방송까지 상업주의 스피릿에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았습니다. 일반 TV 방송 시청자들도 드라마와 프로그램을 모니터하며 더 좋은 방송을 위한 조언과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주님과 교회의 얼굴을 드러내는 기독교 TV 방송을 보면서 건전한 발전을 위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방송사가 복음의 진리를 증진시키기보다 훼손하는 것을 막는 방어기제가 교계에서 작동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방송 담당자들은 시청자의 비판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잘못된 의도가 없을지라도 많은 시청자에게 여러 가지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면 사과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심히 부족하지만 약간의 전문 지식을 가진 신학교수가 수많은 교인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문제의식을 대변해주었을 때, 그 지적을 귀담아 듣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발전과 이미지 개선에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프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한동안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모르나 점점 교인들이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건강한 방송으로 도약하기를 소원합니다. -- 박영돈 교수, 2014. 3. 28 

* 저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남겼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 박영돈 교수님이 답글을 주셨습니다. 자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꼭 저희 프로그램 관련 토론이 아니어도 최근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주제를 놓고 신학 토론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견들이 나타날 때 교회가 찢어지는 게 아니라 , 우리 교회의 하나님 이해,기독교 이해가 더 풍성해진다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모든 분들께 평안을 빕니다. 2014.3.28. 
신동주PD

2014년 3월 19일

낸시랭의 신학펀치 - 굳이 예고편에 출연하겠다고 한 담당PD -.-

https://www.youtube.com/watch?v=bjR_jgWgkhw

낸시랭의 신학펀치 제9회 방송

낸시랭의 신학펀치 스탭(2014년 3월)













없는 가운데, 부족한 가운데,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 <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9회 방송.
페이스북 like 1,848.
2천되면 이벤트해야지.


톨레 레게(tolle lege)

(1/3)
오늘 2013.12.23.은 내가 속한 TV선교제작국 송년회가 있는 날이다. 난 몸살 기운이 있어 휴가원을 내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중이다. 내 인생에서 세 번째로 장미의 이름,을 집어들고 - 집어들다,는 라틴어로 톨레(tolle) - 읽으려 했는데 - 읽으려는, 레게(lege) - , 라틴어가 입에서 술술 나오다니! - 결국 내 인생에서 세 번째로 장미의 이름을 톨레 던졌다”. 그러니까, “집어 던졌다”. (던졌다,는 라틴어로 모름 ;; ) 에코가 조금만 더 자기의 박식함을 감추고 사건 전개에만 집중했더라면! 움베르토, 미안해! 네 번째 시도는 없을 거 같다..
 
(2/3)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들고 읽으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온다. (1128C스토리 청년특집 이원석 작가의 강연 제목이었기도 하다. 내일 오전 7시에 방송된다. ) 어거스틴(영어명)살고 있을 때 어느 날 담 밖으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 그래서 무작정 성경을 집어들고 폈더니, 로마서 13장이 나왔다. 이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낮이 가까웠다. 어거스틴은 그렇게 그날 회개했다. 고백록을 읽은 지 오래 되어서 약간 가물가물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노랫소리를 어거스틴 혼자 들은 게 아니었고 옆에 친구가 있었음. 친구도 성경을 폈음. 빌립보서, 라고 기억됨.
 
(3/3)
오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을 읽는데 고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 중 아무리 생각해도 틀린 부분,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래서 좀 당황했다. 존경하는 이선생님의 번역이었기에..) “그 분 앞에서 말을 머뭇거릴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p.36)그 분 앞에서 말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가 맞을 것."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 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울 리는 없다고 대답했다”(p.38)반드시 이로운 법은 아니라고 대답했다라고 해야 자연스러움. 이선생님의 자전적 소설 <하늘의 문>을 읽은 기억이 남. 잊혀지지 않는 부분은, 미국(어쩌면 캐나다)에서 살 때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는 대목. 열쇠를 집 안에 두었는데 현관문이 닫혔다. 잠겼다. 경찰에게 떠듬떠듬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이 you're locked out. 라고 함. 이선생님도 - 그리고 나도 - 그 간결한 미국식 표현을 잊지 못함. 왜 난 locked에 꽂혔을까. 3권짜리 긴 소설 중에서. 어리석어서, 욕망의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평화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 삶 닮아서인가.  

2014년 1월 22일

낸시랭의 신학펀치 첫 방송! (2014년 1월 22일 오후7시)

멋진 질문해 주신 낸시랭님, 낯선 형식에 기꺼이 도전해 주신 두 교수님, 뜨겁게 좋아요 눌러주신 분들(그 중 많은 분들은 제가 모르는), 이 프로그램을 신규로 결정해 준 선교제작국 식구들, 타이틀 영상과 예고를 만들어준 후배, 타이틀 음악을 만들어준 Sam Billen, 어려운 조건에서 촬영해 준 카메라감독들, 시간에 쫓기면서도 애써준 자막실과 종편실 후배들, 한숨과 탄성을 같이 나눈 조연출과 작가. 그리고...곤혹스러운 질문 뒤에 계시는 < 그 분 > . 과 함께 화제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방송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페이스북에 썼더니 후배 K가, 어디 상탔수? 수상소감을 왜....
정말 그러네 ^^;;


<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1회 '성경에는 왜 불일치하는 게 나오나요?'
http://www.youtube.com/watch?v=KtCgV5TKbzI

2013년 12월 31일

낸시랭의 신학펀치 첫 스탭 식사

오늘 낮에 목동 파라곤 지하 1층에 있는 중국집 리이웬에서 권연경 교수, 김학철 교수, 낸시랭과 첫 스탭 식사를 했다. 2013.12.30.

변호인,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는 (팟캐스트) - 8

여기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adzero.kr/272
팟캐스트 <박샘의 위대한 수다>를 제작하는 정재원PD의 소개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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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40] '변호인,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는' 

이번 에피소드는 박샘의 위대한 수다 2013년 결산 방송이자 시즌 1 마지막 방송입니다. 어떤 방송으로 한 해를 마무리 지을까 고민한 끝에,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 한 편, 애증의 대상이 된 한국 교회의 위기 징후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이야기로 방송을 마무리 짓기로 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선택한 2013년도 마지막 영화는, 지금 이 시각에도 많은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 영화 '변호인'입니다.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이 영화에서 안녕치 못한 한국 사회 현실을 통감했고, 참 지도자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2부에 다룬 이야기는 2013년 한국교회 위기의 징후들입니다. 올 한 해에도 교회 안에는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지만, 그중 우리는 '박정희 추모 예배', '사랑의 모 교회의 에스컬레이터', '차별금지법 반대', '홍대새가게'를 한국 교회의 가장 적나라한 위기의 징후로 선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수상한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그리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한국교회의 교인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답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기독교적' 정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잠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공통 감각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습니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가 영화를 보고, 책과 고전을 읽는 방송을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박샘의 위대한 수다 시즌 1은 끝을 맺습니다. 지난 10여 개월 동안 매주 금요일 40회에 걸쳐 거의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중간중간 분주한 일상 때문에 지치기도 하고 허공에 대고 말하는 거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허해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취자의 격려와 관심, 그리고 우리 방송으로 큰 힘을 얻는다는 고백들이 있었기에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애청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년에 더 좋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사회: 박샘, PD: 정도령, Guest: 신동주 CBS PD, 최은 영화 평론가)

* 방송 청취 방법
- 에디공 블로그(http://adzero.kr/272)
- 팟빵( http://www.podbbang.com/ch/3471)
- 아이튠즈(http://bit.ly/12Lezw1)
- 안드로이드 이용자는 '쥐약', '팟빵' 어플 설치 후 청취

* 2013년 결산 기념으로 올해 녹음한 에피소드 40편 리스트를 덧붙입니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40] '변호인,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는'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9] 사뮈엘 베케트 - '고도를 기다리며'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8] 스승님의 책들 - 'C. S. 루이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7] 지옥과 지옥 사이 - '사이비'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6] 베르톨트 브레히트 - '사천의 선인' ②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5] 종종 도망치고 싶은 당신에게 -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4] 내가 싫어하는 남자의 자서전- '스티브 잡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3] 목사 & 섹스 - '침대 위의 신'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2] 베르톨트 브레히트 - '사천의 선인'①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1] 괴물되기를 강요받는 당신에게 - '화이'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30] 내 직업을 결정해준 책 - '죽도록 즐기기'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9] 이원석 - '거대한 사기극'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8] 게오르그 카이저 - '아침부터 자정까지'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7] 엄마가 가장 힘든 당신에게 - '가을 소나타'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6] 38년 만에 다시 읽은 책 - '사기꾼 로봇'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5] 크리스천, 마지막 사중주를 연주하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4] 안톤 체홉 - '세자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3] 훌쩍 떠나고 싶은 당신에게 - '카모메 식당'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2] 내가 끊은 남성잡지들 -'GQ'와 '맥심'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1] 크리스천, '설국열차'에 탑승하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 20] 싸이, 음모론, 그리고 에디공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9] 정기적으로 읽는 책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8] 헨리 입센 '인형의 집'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7] '은밀하게 위대하게' 흥행 논란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6] 크리스천, '비포 미드나잇'을 보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5] 불완전한 책들 - '화성의 인류학자'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4] '결정장애'의 결정판 '햄릿'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3] 투덜대도 괜찮아 - '내 아내의 모든 것'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2] 크리스천, '직장의 신'이 되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1] 내가 버린 책들 -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0] 크리스천, '로마 위드 러브'를 보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9] 크리스천, '안티고네'를 읽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8] 크리스천, '지슬'을 보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7] 크리스천, '인생학교 섹스'를 읽다 ②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6] 크리스천, '인생학교 섹스'를 읽다 ①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5] 크리스천,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을 보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4] 크리스천, '오이디푸스 왕'을 읽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3] 크리스천, '스토커'를 보다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2] 크리스천, '레미제라블'을 보다 ②
[박샘의 위대한 수다 ep1] 크리스천, '레미제라블'을 보다 ①


2013년 12월 20일

스승님의 책들 - C.S.루이스 편 (팟캐스트) - 7


(인용) 

혹시 스승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신가요? 저는 불행히도 마음에 품고 있는 그런 인물이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다소 엉뚱하지만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며 많은(?) 팬을 확보하신 신 피디님이, 이번주 방송 주제로 '스승님의 책들'을 하겠다고 알려왔고, 그 스승은 바로 기독교의 변증가로 알려진 'C. S. 루이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침 올해가 루이스가 죽은 지 50주년되는 해였고, 신 피디님이 스승님으로까지 칭송하는 루이스가 새삼 궁금해졌기에 기대가 되는 방송이었습니다. 실제로도 방송을 진행하면서 이전에 루이스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생각이 상당히 걷혔고, 루이스를 긍정할 수 있는 지점이 넓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은 이미 루이스를 좋아하실 겁니다. 하지만 저와 같이 루이스에 대해 그닥 큰 흥미가 없던 분들도 신 피디님의 안내를 받다보면 그가 달라보일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거나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제대로된 변증을 해내는 사람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는 변증보다는 낮아져야 하는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공감적으로 설명해 내는 일은 시기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C. S. 루이스 편은 우리에게 유익한 통찰을 제공해 줄 거라 믿습니다.  - 박샘의 위대한 수다, 정도령. 


- 방송 청취 방법
- 에디공 블로그(http://adzero.kr/269)
- 팟빵( http://www.podbbang.com/ch/3471)
- 아이튠즈(http://bit.ly/12Lezw1)
- 안드로이드 이용자는 '쥐약', '팟빵' 어플 설치 후 청취


2013년 12월 8일

신규기획안 드디어 통과!

낸시랭이 오케이했어요! 드뎌 확정. 아, 이렇게해서 1년전부터 준비해온 프로그램 (가제) < 낸시랭의 신학펀치!  >  가 내년 1월 중순부터 방송되게 됐어요. 전 몰라요,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안 믿어져요! 이렇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이해되지 않을 땐 이해 안 된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낸시랭,과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 받고 있는 신학자 둘 (그러니까 총 3명)이 펼치는 신학 토크이어요. 오래전 출연을 약속하신 젊은 신학자 두 분, 아직 낸시랭의 출연 소식 모르지만, 그래서 놀라시겠지만, 무척 기뻐하실 줄로 믿어요! 흠흠 ^^ ‘성경공부’가 아니라 성경과 기독교 <  에 대하여 >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어요. 조크와 웃음과 전문성이 공존하는 신학 프로그램. (네, C.S.루이스는 어디선가 유우머와 경건은 공존가능하다고 했지요!)  <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신학적 질문들 > 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답을 찾아가는 가운데 우리 < 신앙의 근육 > 을 키워가는 프로그램! 네, Round 1 벨이 울릴 때까지 이제 D-40일! 신앙의 식스팩을 원하는 이들이여, 누구든지 다 모이라! (용문신한 조폭도...;;; )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이번 기획안을 지지,통과시켜준 국 식구들과, 계속 저를 응원 지지해 줄 페친들에게 이렇게 감사의 인사드려요...
왕! (앙! 하려했는데 안 어울려요ㅋㅋ)

2013년 12월 1일

교회의 크기와 언어

1. 사랑의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 무척 놀랐다. 교회에 이렇게 멋진 ‘차 마시는 곳’이 있다니. 정문으로 들어서자 넓은 뜰이 있었고 오른편으로 차를 마시며 담소할 수 있는 넓직한 <커피숍 같은> 공간이 있었다. 교회가면 종이컵에 봉지 커피 넣고 뜨거운 주전자 물 넣어 마시기만 했던 나는, 아무 때나 삼삼오오 모여서 마음껏 <쉐어링>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처음 봤고, 무척 놀랐고, 무척 부러웠다. 내 나이 이십대 초반이었을 때였다. 그 첫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내가 삼십대 후반에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그 많던 언어들은 어디로 갔을까?』(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이제이북스)라는 책을 읽을 때도, 제일 먼저 그 <커피숍 같은> 공간이 떠올랐을 정도였다.
2.저자들은 마지막 남은 언어 사용자들을 소개한다. 1972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아서 베넷이 죽었다. 그는 음바바람어를 몇 마디 이상 할 줄 아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20년 전에 세상을 뜬 뒤 그도 이 언어를 쓰지 않았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에선 1년에 1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환경은 보존하려 하면서 왜 언어는 보존하려 하지 않는가. 이렇게 저자들은 묻고 있었다. 그때 문득 특정 신앙의 언어도 사라질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교회들은 사라지고 몇몇 큰 교회만 남는다면 - 영어만 남고 소수 언어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작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쓰던 대화도 사라지게 되는 것 아닐까. 난 예배 후 교회 근처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커피숍에(큰 부담 느끼지 않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와 상가 교회 계단에서 자판기 커피 마시며 나누는 대화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 아빠가 요즘 허리를 다쳐 공사장 일도 못 나가 민호가 그나마 딱 하나 하고 있던 영어 학습지도 끊었어요. 그런데도 자기는 성격이 좋아 외국인 만나도 친구 충분히 사귈 수 있다고 막 큰소리 치는 거에요. 어미 맘 아플까봐 그러는 거 다 알죠. 이런 속 깊은 아들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아까 나와서 기도하는데 감사하다는 말 밖에 안 나왔어요". (하지만, 감사하다고 하는 A집사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다). "초2 방학 때부터 어학 연수는 미국으로만 보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캐나다로 갔는데 이번 기수 그룹이 참 좋았나 봐요. 우리 정우가 좀 내향적인 데가 있어서 연수 가는 거 싫어했는데 내년에도 꼭 또 가겠대요. 여호수아처럼 믿음으로 가겠다고. 어제는 식사 때 온 가족이 영어로 기도하는데 왜 그렇게 감사하던지". (이렇게 고백하는 B집사 입가엔 미소가 걸린다.)
3. 교회의 부(富)와 크기는 언어의 톤에도 변화를 준다. 결정적인 변화를 준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라는 단어를 한 쪽에선 “목사님 그 쪽 좀 붙잡아 주세요. 아니요, 조금 더 위로 올려주세요. 조금만 더. 오케바리! ” 라는 톤으로 호(呼) 한다면, 한 쪽에선 "하나님" 할 때 톤으로 호한다. "그 쪽 좀 꽉 붙잡아 주세요 아니 남자가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할 때의 톤을 <경험하지 못한> 교회 성도들은, 비록 에스컬레이터 설치된 화려한 대리석 건물 안에서 예배 드리더라도, 실은 <헐벗은> 것이다. 사춘기 중학생 한 명이 토요일 오후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서는 소파에 혼자 앉아 핸드폰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다. “목사님 뭐 하세요?” “말 시키지마라 게임한다 애니팡 ” “애니팡 재미 없는데. 최고 점수 얼마 나왔어요?”. 이런 대화 막는 목사의 스케줄, 교인의 수, 예배당 크기,를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을까.
2013. 12.1.
신동주

서플먼트

1) “공간은 인간의 영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십 년 전에 읽은 한 외국 건축가의 글이 아직도 생각난다. 책과 음악과 친구 뿐만 아니라 공간도 인간 영성 깊숙하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내가 건축에 대한 경구를 하나 짓는다면 이렇게 짓겠다. “건축가는 미래의 대화를 건축한다.”
2) 그렇기에 예배당 건축에 대해 고민할 때 우리가 1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건 소방법이나 건폐율이 아닌 심리학과 언어학이다. 이 공간 내에서 인간과 신(神)은, 성도와 성도는, 목회자와 비목회자는, 교인과 비교인은 어떤 종류의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높은가. 다른 말로, 이번 건축은 언어적으로 우리를 부하게 하는가 헐벗게 하는가.
3) 그럼, 예배당은 어느 정도 크기가 적당해? 네가 그렇게 강조하는 심리학과 언어학적으로 설명해봐, 한다면: 예배 후 교회에서 점심을 같이 먹을 때 "오늘은 국수가 너무 퍼졌어요" 하는 목사에게, "그것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지난 주에는 싱겁다고 뭐라고 하더니!" 하며 주방에 있던 권사님이 핀잔 놓을 수 있는 크기. <핀잔>과 <예배당 크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있다. 우리가 자주 목도하지만, 예배당 크기가 일정 규모를 넘게 되면 담임 목사는 그 누구로부터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노인으로부터도.
4) “공간은 인간의 영성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한 건축가 이름을 찾으려고 한 시간 넘게 웹 검색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함. 그러다가 눈에 띈 윈스턴 처칠의 경구 하나. “우리가 건물을 짓지만 그 다음에는 건물이 우리를 모양지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