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면 여유가 생겨 낯선 여성을 만나도 긴장하거나 떨지 않게 된다. 방금도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온 젊은 여성에게 내 욕망을 자연스럽게 전했다.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아서.
"제가 먼저 왔는데요".
- 2016.5.7 (빽다방)
2018년 5월 7일
2018년 4월 2일
갈릴리
오늘 처음 깨달은 사실인데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면서
몹시 화도 내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무척 어이없어 하시고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정말 놀라기도 하시며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답답해 하기도 하셨지만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결코 하지 않으셨던 한 가지 행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주님은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셔도
결코 경멸하거나 비웃지는 않으셨어요!
책망은 하시되 경멸하거나 비웃지 않으시는 주님.
어제 또 죄를 지은 제게
이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자신을 버린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 기다려 주신 주님.
저도 오늘 믿음으로 갈릴리로 가겠습니다.
---------------
*덧붙이는 말 (2019년 8월 1일)
『고통의 문제』 (C.S.루이스, 홍성사)를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습니다. "또 모든 기록을 볼 때, 그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65). 오래 전 읽었던 루이스의 이 구절이 제 뇌리에, 무의식에 깊이 박혀, 제가 의도치 않게 위와 같은 <표절>을 하게 된 거 같습니다.
---------------
*덧붙이는 말 (2019년 8월 1일)
『고통의 문제』 (C.S.루이스, 홍성사)를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습니다. "또 모든 기록을 볼 때, 그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65). 오래 전 읽었던 루이스의 이 구절이 제 뇌리에, 무의식에 깊이 박혀, 제가 의도치 않게 위와 같은 <표절>을 하게 된 거 같습니다.
2018년 3월 10일
TV제작국 이삿날
오늘은 제가 소속돼 있는 TV제작국이 6층에서 4층으로 이사하는 날이었어요. 2002년 아주 적은 인원으로 TV개국을 할 때는 3층에서 일했는데 그 후 사람들이 많아져서 6층으로 이사를 왔고, 이번에 다시 조금 더 넓은 공간 4층으로 가게 됐어요. 지나온 모든 날이 다 아름답지만(ㅋㅋ) 그래도 기억에 남는 대화와 사건을 딱 하나씩만 꼽아보면:
(3층에서)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때였어요. 제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우리 사무실 직원들의 일상을 드라마타이즈해서 시리즈로 올렸어요.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어느날 후배L이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어요.
"선배님, 선배님 글 너무 웃겨요".
그때 처음으로 제가 글로 남을 웃길 수 있구나,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전 제 자신이 심각한 줄만 알았거든요.
제가 이렇게 페북에 글을 쓸 수 있는 자신감을 얻은 건 그날 3층에서였어요.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때였어요. 제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우리 사무실 직원들의 일상을 드라마타이즈해서 시리즈로 올렸어요.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어느날 후배L이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어요.
"선배님, 선배님 글 너무 웃겨요".
그때 처음으로 제가 글로 남을 웃길 수 있구나,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전 제 자신이 심각한 줄만 알았거든요.
제가 이렇게 페북에 글을 쓸 수 있는 자신감을 얻은 건 그날 3층에서였어요.
(6층에서)
낸시랭의 신학펀치 만들 때 가편과 자막 작업이 끝나면 대개 새벽4시,5시였어요. 집에 가서 조금 자고 오후에 종편하러 다시 나오는 그런 생활을 1년 정도 했어요. 어느날 새벽 6층 빈 사무실에 있는데 너무 감사한 거예요. 제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혹시 사람들이 있나 살펴 본 후에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어요.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요.
낸시랭의 신학펀치 만들 때 가편과 자막 작업이 끝나면 대개 새벽4시,5시였어요. 집에 가서 조금 자고 오후에 종편하러 다시 나오는 그런 생활을 1년 정도 했어요. 어느날 새벽 6층 빈 사무실에 있는데 너무 감사한 거예요. 제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혹시 사람들이 있나 살펴 본 후에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어요.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요.
(4층에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겠어요. 다만 무언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생각만 하지 않고 <실행>했으면 좋겠고, 또, 제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갚으려는 마음이 (사실 똑같이도 아니어요. 항상 받은 것 이상으로 갚으려해요 ㅠㅠ) 사실은 어리석은 마음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겠어요. 다만 무언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생각만 하지 않고 <실행>했으면 좋겠고, 또, 제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갚으려는 마음이 (사실 똑같이도 아니어요. 항상 받은 것 이상으로 갚으려해요 ㅠㅠ) 사실은 어리석은 마음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018년 2월 9일
사순절과 나귀(2)
*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쓴 사순절 묵상 원고
3월2일 마가복음 11:1~10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10)
----------------
현대인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제일 궁금해 하는 건 나귀 주인과 예수님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도대체 나귀 주인은 누구길래 ‘주가 쓰겠다’라는 암호 같은 말 한마디에 한 마리 이상(마가복음에선 한 마리, 마태복음에 따르면 두 마리)의 나귀를 두말없이 냉큼 내줬던 걸까요?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도 복음서 저자들의 수많은 ‘주작’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등장 인물의 정체도 모호하고 대화도 현실성이 없다고 하면서요.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 주위에 제자들이 한 명도 없는 순간들이 등장합니다.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갔을 때> 한 여성과 우물가에 <단둘>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인상적인 대화>는 그 여성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4:28). 저는 나귀 주인의 경우도 수가성 여인과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 주위에 제자들과 <현대인들>이 없을 때 – 예수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것 같고,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작은 신세>를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그가 그날 만남에 대해 – 네, 수가성 여인처럼 –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의 이름과 그가 그렇게 한 연유가 복음서 저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 됐을 가능성이 컸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만남과 대화에 대해 제가 아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믿는 것 한 가지는, 그 남자는 그날 만남에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 <자기 자신>도 만났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암호가 ‘주’였다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평소 잊고 사는 주라는 단어가 이 정체 모를 남자와 우리 주님 사이에선 무척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걸 보니 말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자신의 주에게, 자신의 나귀를 즉시 보냅니다.
(기도)
주님, 제가 주님을 주님으로 대우하고 있나요?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3월2일 마가복음 11:1~10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10)
----------------
현대인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제일 궁금해 하는 건 나귀 주인과 예수님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도대체 나귀 주인은 누구길래 ‘주가 쓰겠다’라는 암호 같은 말 한마디에 한 마리 이상(마가복음에선 한 마리, 마태복음에 따르면 두 마리)의 나귀를 두말없이 냉큼 내줬던 걸까요?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도 복음서 저자들의 수많은 ‘주작’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등장 인물의 정체도 모호하고 대화도 현실성이 없다고 하면서요.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 주위에 제자들이 한 명도 없는 순간들이 등장합니다.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갔을 때> 한 여성과 우물가에 <단둘>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인상적인 대화>는 그 여성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4:28). 저는 나귀 주인의 경우도 수가성 여인과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 주위에 제자들과 <현대인들>이 없을 때 – 예수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것 같고,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작은 신세>를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그가 그날 만남에 대해 – 네, 수가성 여인처럼 –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의 이름과 그가 그렇게 한 연유가 복음서 저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 됐을 가능성이 컸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만남과 대화에 대해 제가 아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믿는 것 한 가지는, 그 남자는 그날 만남에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 <자기 자신>도 만났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암호가 ‘주’였다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평소 잊고 사는 주라는 단어가 이 정체 모를 남자와 우리 주님 사이에선 무척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걸 보니 말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자신의 주에게, 자신의 나귀를 즉시 보냅니다.
(기도)
주님, 제가 주님을 주님으로 대우하고 있나요?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사순절과 나귀(1)
한국 루터란아워 사순절 묵상집을 위해 제가 두번 째로 써야 했던 원고 주제는 <마귀>가 아니라 <나귀>였습니다 : )
3월1일 (마태복음 21:1~11)
----------------------------------------
얼마 전 제가 일하고 있는 방송사에 안토니오 구테헤스가 녹화를 위해 왔습니다. 구테헤스가 누구냐고요? 현 유엔사무총장입니다. 관례상 유엔사무총장은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국가 원수급 예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경호도 국가원수급 수준으로 하게 됩니다. 녹화를 하는 카메라 감독들은 물론이고 녹화 전 구테헤스의 메이크업을 맡은 분장실 여성들 인적 사항도 사전에 청와대로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국가 수반급 인물이 저희 방송사에, 나귀를 타고 등장했다면 어떻게 보였을까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코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유대인들이었다면 의아하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당시에 왕이나 부자들은 대개 힘을 상징하는 노새를 탔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한 남자가 굳이 나귀를 타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
얼마 전 제가 일하고 있는 방송사에 안토니오 구테헤스가 녹화를 위해 왔습니다. 구테헤스가 누구냐고요? 현 유엔사무총장입니다. 관례상 유엔사무총장은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국가 원수급 예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경호도 국가원수급 수준으로 하게 됩니다. 녹화를 하는 카메라 감독들은 물론이고 녹화 전 구테헤스의 메이크업을 맡은 분장실 여성들 인적 사항도 사전에 청와대로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국가 수반급 인물이 저희 방송사에, 나귀를 타고 등장했다면 어떻게 보였을까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코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유대인들이었다면 의아하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당시에 왕이나 부자들은 대개 힘을 상징하는 노새를 탔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한 남자가 굳이 나귀를 타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 모두에 나귀가 나오지만 예수님이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 곳은 마태복음뿐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겸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사람에 따라 겸손을 정의하는 방법은 다 다를 터인데 마태복음 저자를 보면 멍에라는 단어 없이는 겸손을 설명 못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12장에선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용하네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내가 너희의 모든 멍에를 벗겨 주겠다’라고 하는데 오늘 우리 앞의 남자는 정반대입니다. ‘내 멍에를 메거라’. 우리의 상식과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멍에를 멘 인간>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천국에서도 우리에겐 메야 할 멍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룩하라는 명령이 – 마음껏 음란하고 싶은 인간에게는 무거운 멍에처럼 느껴지지만 – 사실 그게 얼마나 가볍고, 적당하고, 즐거운 무게인지는, 음란 후에 찾아오는 허무와 죄책의 무게를 경험해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겸손하다면 멍에가 우리를 살리는 줄 알기에 멍에 벗으려 발버둥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나귀처럼.
(기도)
나귀를 타고 오늘 제 앞으로 지나가시는 주님 앞에서 모든 멍에 벗어던지려고만 하는 제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하소서.
나귀를 타고 오늘 제 앞으로 지나가시는 주님 앞에서 모든 멍에 벗어던지려고만 하는 제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하소서.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사순절과 향유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시도한 사순절 묵상 원고 쓰기.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주제를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교회력에 따라 주어지는 주제에 대해 <무조건> 써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떨리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 ) 첫번 째 묵상 원고입니다.
2월28일 / 마가복음 14:3-11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3-11).
--------------------------------------------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 진퇴양난에 처한 것처럼 보일 때가 여러번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볼까요?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태 22장). 더 드라마틱한 주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교활한 시험 중에 나왔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한 8장).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피는 본문도 잘 읽어보면 이런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한 노동자의 일년치 임금인 3백 데나리온을 줘야 겨우 살 수 있는 비싼 향유를 -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에 따르자면 - ‘장례 준비’ 하는데 ‘소비’한 한 여성의 행동을 놓고 어떤 사람들이 따집니다. 지금도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데, 고작 ‘사랑 표현’에 3백 데나리온이나 사용하는 게 가합니까? 오히려 진정한 사랑 표현은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상하게 저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여성을 야단치는 사람들의 말에 수긍이 많이 갑니다.
이런 지적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듣고도 저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장례 준비’에 대한 제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이 죽는다고 하시지만 3일 뒤엔 부활하게 되어 있는 분이잖아요. 이미 정해져 있는 승리를 위해 거쳐야 하는 죽음이라는 ‘요식 행위’를 위해 3백 데나리온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 갑자기 이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예수의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요식 행위가 아니었단 말일까?
(기도)
사순절을 맞아 주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죽음이셨기에, 오늘만큼은 가난한 이뿐만 아니라 나도 위로를 받고 싶구나, 하는 고백을 하셨는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주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죽음이셨기에, 오늘만큼은 가난한 이뿐만 아니라 나도 위로를 받고 싶구나, 하는 고백을 하셨는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습니다.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제임스 사이어 세상을 뜨다
방금 페친 Y의 포스팅을 읽고 2018년 2월6일, 제임스 사이어가 세상을 떴다는 걸 알게 됐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고전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썼다. 나 또한 그의 영향을 <크게>, <오래> 받았다. 그 책에 대한 내 평가? 2013년 난 <박샘의 위대한 수다>라는 팟캐스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읽은 책들을 소개했다. 첫 녹음 때 내가 정한 첫 화 제목은 ‘내가 버린 책들’. 제임스 사이어의 책을 소개했다.
아래는 팟캐스트 첫 화를 정리한 기사 (링크 http://adzero.kr/236 )
----------------------------
팟캐스트 <박샘의 위대한 수다>가 5월 개편을 맞아 전문 패널을 섭외했다. 그 첫 번째 손님은 기독교 방송국 TV국에서 일하는 신동주 피디. 신 피디는 1993년 CBS에 입사하여 라디오에서 8년, TV에서 10여 년 일했다. 그는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는데, <한국 대중영화 속 기독교>와 <언더우드와 한국개신교 120년>이 신 피디의 작품이다. 이중 <한국 대중영화 속 기독교>는 영화에서 재현되는 기독교에 대해 반성적으로 살펴본, 나름의 화제작이었다. 그리고 신 피디는 2000년도 기윤실의 ‘거짓말 논쟁’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이윤의 Lies' burger'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성에 관해 부정적 접근 일색이던 기독교 문화에서 섬세하고 솔직한 성 이야기로 작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
팟캐스트 <박샘의 위대한 수다>가 5월 개편을 맞아 전문 패널을 섭외했다. 그 첫 번째 손님은 기독교 방송국 TV국에서 일하는 신동주 피디. 신 피디는 1993년 CBS에 입사하여 라디오에서 8년, TV에서 10여 년 일했다. 그는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는데, <한국 대중영화 속 기독교>와 <언더우드와 한국개신교 120년>이 신 피디의 작품이다. 이중 <한국 대중영화 속 기독교>는 영화에서 재현되는 기독교에 대해 반성적으로 살펴본, 나름의 화제작이었다. 그리고 신 피디는 2000년도 기윤실의 ‘거짓말 논쟁’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이윤의 Lies' burger'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성에 관해 부정적 접근 일색이던 기독교 문화에서 섬세하고 솔직한 성 이야기로 작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2013년, 어렵사리 신 피디가 박샘의 위대한 수다 책 코너 패널로 걸음 했다. 제작진은 평소 책을 많이 읽는 신 피디가 어떤 책을 선정하여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했다. 그런데 주문과 달리, 그는 추천 책이 아니라 읽지 말아야 할 책을 들고 왔다. 코너 제목도 ‘내가 버린 책들’이었다. 그가 실제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그 책은 기독교 세계관 분야에서 고전으로 알려진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이었다.
신 피디는 기독 지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 세계관의 폐해를 짚었다. 그가 가장 심각하게 본 점은 은유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은유는 단연 ‘안경’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하나님나라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이나 관점을 바로잡아줄 수 있다고 기독교 세계관은 말한다. 하지만 신 피디는 이 관점과 비유에 반대한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안경’을 비유로 회자된 것은 그것이 가진 편리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람의 인생관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서서히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마치 세계관을 기독교적으로 바로 잡으면 온전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반대하는 또 다른 비유는 ‘도미노 비유’이다. 근본적 질문에 대해 기독교적 관점을 수립하고, 그것이 인격을 형성하고, 그리고 다시 행동으로 이어지는 도미노식 설명은 동화에 불과하다는 게 신 피디의 생각이다. 실제로 우리의 인격이 형성되고 행동이 결정되는 것은 도미노식의 일선형적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 피디는 안경과 도미노 비유로 설명되는 기독교 세계관이 하나의 동화, 혹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은유는 ‘거미줄’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우리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도 100%의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여 기독교적인 인격과 삶을 이뤄갈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매력을 느끼는 일과 사상에 충실하고 고민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혹여나 비기독교적인 것에 오염될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결국 답이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이며, 우리는 다양한 생각 안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뤄갈 것이다.
다음은 '[박샘의 위대한 수다 에피소드 11] 내가 버린 책들'에서 신동주 PD, 박샘, 정도령이 나눈 대화들이다.
신동주: 기독교 방송국 TV국에서 일하고 있다. 93년 입사했고, 올해가 20년째 일하는 해다. 라디오에서 8년, TV에서 10년 정도 일했다.
박샘: 오늘 대화 주제가 ‘내가 버린 책들’이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데, 추천할 책이 아니라 버린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나.
신동주: 무언가 긍정적인 것을 소개하여도 어떤 사람을 알 수 있지만, 싫어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다. 이번에 내가 버린 책들을 통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오늘 소개할 책을 한 번 버렸다가 인용할 일이 있어 다시 중고 서점에서 샀다. 그 책은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IVP)이다.
박샘: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고전이다. 어떤 이유로 이 책을 ‘내가 버린 책들’로 소개하는가.
신동주: 30년 넘게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사용했던 용어와 그 뒤에 숨겨진 비유가 있다. 그 비유가 적절한 건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 내가 쓰레기통에 버린 건 비유였다. 아시겠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애용하는 비유는 안경이다. 기독교 세계관 관련 책 서문을 보면, 빨간색 안경을 끼면 빨간색이라고 보인다,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불교적으로 보인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면 기독교적으로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박샘: 아무래도 안경이 시각을 교정시켜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쓴 거 같다.
신동주: 안경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하는 건 아니다. 콘택트렌즈도 있다. 그리고 가령 빨간 안경을 끼면 세상이 빨갛게 보이지만 조명을 빨갛게 사용해도 동일한 효과가 있다. 내가 볼 때 안경 비유를 애용하는 이유는 편리성 때문이다. 우리가 안경점에 가서 “이 안경으로 주세요”라고 하듯이, 세계관도 여러 세계관 중 맘에 드는 걸 하나 골라 착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샘: 편리하면 좋은 거 아닌가. 어떤 문제인가.
신동주: 엄청난 문제다. 살다 보면 알게 되지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성숙한다는 건 싸우고 실수하고 무안당하면서, 용기를 내고 사물을 제대로 보는 과정을 거치는 거다. 그런데 어떤 안경 쓴다고 해결되겠나. 모든 건 시간이 걸리는데 안경 비유는 시간이 안 걸린다. 어느 날,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의 영어 제목을 살펴봤다. ‘The Universe Next Door: A Basic Worldview Catalog’라고 나와 있다. 우리의 옆에 있는 세계라고 해놓고 카탈로그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 책은 8개 정도의 세계관을 소개하고서 어떤 세계관을 선택할지 질문을 한다. 이게 상품 카탈로그를 보다가 구매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과연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는 건가?
정도령: 저 같은 경우에도 학부 때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읽었다. 회상해 보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사상을 접하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허무주의나 부조리를 이야기할 때, 사무엘 베케트나 카뮈 책을 읽기보다는 제임스 사이어가 소개한 허무주의를 먼저 읽었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해야지 다른 사상을 접할 때도 흔들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신동주: 사람들은 오염되는 걸 두려워한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시각으로 보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다며 오염되지 않는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미친 C.S 루이스나 칼 바르트는 다르다. 그들의 책을 읽으며 나는 그 사람의 깊이에도 놀랐지만, 또 하나 더 놀라운 건, 그들의 신앙 형태가 달라진다는 거다. C.S. 루이스 처음엔 무신론자, 그다음엔 이신론자가 되는 식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변했다. 바르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엔 자유주의자로 사회 운동을 열심히 펼쳤지만, 나중엔 하나님과 인간의 간극을 주장하는 신정통주의가 됐다. 지금 이 순간에 완벽하게 기독교적으로 되는 건 가능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믿고 있는 그 순간에 진실한 것이다. 지금 내게 끌리는 것을 끝까지 가 보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갔을 때, 아닌 것은 아닌 걸로 밝혀진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박샘: 사람들이 비유를 수단으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비유에 묶이고 비유에 따라 살아가는 거 같다. 혹시 안경 말고 또 다른 문제의 비유는 없나.
신동주: 도미노 비유가 있다. 우리는 무언가 하나를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되고, 인격은 행동이 되어, 기독교적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첫 단계를 바로잡아 놓고 다음 단계로 진행되면 아주 기독교적인 결론까지 나갈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사람은 바로 전 단계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것의 영향을 받는다. 도미노처럼 하나의 라인으로 우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박샘: 그렇다면 신 피디가 생각하는 대안적 비유는 무엇인가.
신동주: 최근에 진화론을 비판하는 학자가 펼친 거미줄 이론을 본 적이 있다. 변이와 진화에는 거미줄처럼 수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 아이에게 기독교 세계관 책을 읽힌다고 기독교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볼 때, 비기독교적으로 보이는 책을 읽더라도 그 안에서 뭔가를 깊이 느껴서 정말 멋진 기독교적 통찰을 끄집어낼 수 있다.
박샘: 기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독교적인 왕도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신 피디는 그런 왕도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기독교적이지 않은 경험도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입장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발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게 항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신동주: 그게 사실인데 어떡할 거냐? 사실이 중요하다. 그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지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옛날 <복음과 상황>에서 정정훈 편집위원이 ‘환상 속에 기세(기독교 세계관)가 있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동의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에게 실재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동화를 들려준다.
박샘: 말처럼 적용하는 게 쉽지 않다. 구체적인 현상으로 설명해 달라.
신동주: 최근에 두 개의 웹툰을 봤다. 하나는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고, 또 하나는 <무한 동력>이다. <신과 함께>는 무속이나 불교적 세계관으로 사후 세계를 재밌게 그렸다. 그리고 <무한 동력>은 강풀의 순정만화처럼 한 가족의 삶을 담담하고 재밌게 그렸다. 두 개의 웹툰을 보면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사실 <신과 함께>를 보다가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만두고 <무한 동력>을 봤다. 처음엔 작가 이름을 몰랐다. 웃고 울며 정말 재밌게 봤다. 그런데 작가 이름을 확인했더니 같은 작가였다. 혼자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내가 <무한 동력>을 보면서 저 작가의 무속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을까. 이런 질문은 습관적이고 트라우마적인 거다. 비기독교적 영향을 받게 되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40년 넘게 해왔다.
박샘: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식의 교육을 받다 보면, 무의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이 생기는 거 같다. 약간 비극적이다.
신동주: 약간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기독교와 대중이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거 같다. 대중은 늘 즐거워하거나 열광할 것을 찾지만, 크리스천은 늘 조심스럽기만 하다. 기윤실도 ‘성’을 대할 때 위험과 죄로 접근했다. ‘<거짓말> 사태’ 때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었다. 나한테 육체적인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발기한 게 아니라 눈물을 흘렸다. 한 번도 성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그 당시 <거짓말>을 반대한 기독교인들이 “너는 이 작품을 보면 너의 성기는 발기할 수밖에 없어”라고 주장했다는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자기의 경험이나 생각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100%를 순수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100%이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강요하게 된다. 고종석이 “모든 순수주의는 폭력과 맞닿아있다”고 했다. 크게 공감한다.
2017년 10월 29일
<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다 > - CBS 아카데미 숲 제작을 마치며
제가 올 3월 프로그램 중간부터 연출을 맡기 시작했던 이 가을 개편을 맞아 어제 방송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새로운 주제와 함께 시즌2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시즌2가 언제 방송될지, 담당 피디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함정 -.- ) 그동안 함께 해주셨던 분들의 멋진 강의가 떠올라요. 한성열 교수의 심리학 콘서트, 성현 목사의 이 시대의 영성 작가들, 최주훈 목사의 우리가 몰랐던 종교개혁 이야기, 김홍기 작가의 옷장 속 인문학 이야기, 민경식 교수의 우리의 신앙을 다져주는 사본학, 성경 인쇄와 번역 이야기, 임정혁 목사의 누구나 알아야 할 성(性) 이야기, 옥성득 교수의 다시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기민석 교수의 구약성경은 현재 진행형! , 덕은동 공동체 최규창 대표의 '공동체는 힘이 세다!' , 최은 영화평론가의 영화 이야기 '스크린 속에 지금 우리 삶이 있다'. (제가 연출 맡기 전에 출연하여 좋은 강의 해주신 김학철 교수, 배덕만 교수, 백소영 교수, 김진혁 교수, 김근주 교수, 김응교 교수 외 여러 강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숲을 제작하면서, 우리가 각자의 '전문성'을 키우면 언젠가 주위 이웃에게 큰 힘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됐습니다. 그것이 그림에 대한 안목이든 카운셀링에 관한 것이든, 주제가 패션이든 영화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든지요.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전문적인 주제와 씨름해오신 강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강사분들 외에 또 빼놓을 수 없는 분들! 녹화 때마다 멋진 질문 던져주신 패널 박수진, 최령, 차유주, 김원구, 박인영, 지니, 김진철 외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CBS 아나운서들의 멋진 활약 감사드립니다.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다. 올 봄 프로그램 맡으면서 제가 지었던 캐치프레이즈였어요. 그때는 숲이 인문학만을 은유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그램을 마치는 지금, 제게 있어서 숲은 오히려 제가 만난 사람들이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고 싶어요. 한 번 더라도!
감사합니다.
2017.10.29.
숲 스태프를 대표해서
신동주PD드림
숲 스태프를 대표해서
신동주PD드림
ps.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었던 스태프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어요. 강사 섭외, 강의안 구성과 제목 정하기, PPT 제작, 녹화/편집과 자막 등 프로그램의 모든 걸 다 함께 했던 멤버들이어요. 사진 속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숲은 지금과 달리 '앙상'했을 거예요. (사진 왼쪽부터: 신피디, 김민현 조연출, 이경남 조연출, 특별게스트 김현정 씨, 김보영 작가). 자비하신 그 분께서 50대 중년 남성으로부터 20대 여성 청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후 길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를!
2017년 10월 5일
『알라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IVP)를 읽고.
1. 미셸 푸코는 총 673쪽에 달하는 『광기의 역사』를 쓰면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짧게 언급한다. 겨우 3쪽 분량이었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는 나머지 670쪽에 대해선 아무 언급도 없이 그 3쪽만 물고 늘어졌다. 그 3쪽 안에 『광기의 역사』의 근간을 흔드는 결정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은 그렇게 시작됐고 둘의 관계는 이후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데리다처럼 나 또한, 달랑 8줄 나오는 『알라』 제13장 23번 각주 인용문에, 전체 『알라』 394쪽을 무력화시킬 결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2. 먼저 문제의 각주가 달린 본문부터 살펴보면 이렇다. 볼프는 "공통의 신을 믿으며 그 신을 비슷하게 인식한다는 사실을 공동으로 인정"하는 행위가 "공동생활에 관한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p.325)"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로, 볼프는 <공통의 신을 믿는다>는 행위와 <의견 충돌의 해결>이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을 394페이지 되는 이 책 <전체>에서 끊임없이 주장해 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순간에 문제의 각주가 등장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를 하기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꼼꼼하게 각주까지 다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아마 <이 문장>을 <지금 처음 접했을 것이다>. 한편, 각주에 등장하는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라는 말은 문맥상 <평화 공존을 위한 논의> 등으로 얼마든지 바꿔쓸 수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재진술도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평화 공존을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이제 독자들은 참으로 난감해진다. 평화 공존을 위해 공통의 신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독자들은 왜 <장장 394쪽에 걸쳐> 이슬람과 기독교 두 종교의 신이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을까. 하지만 이제, 이런 <근본적의 질문> 잠시 옆으로 제쳐놓고, 저자가 <394쪽>에 걸쳐 펼쳐놓은 이야기 논리 속에 다른 문제점은 없는지 알아보련다. 394>
3. 볼프는, 어느 두 집단에서 <믿는 신이 동일하다>면 <평화가 구축될 것이다>라고 믿기에, 자신의 책 『알라』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두 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나는 볼프의 이런 접근을 <크로아티아에서 배태된 신학>이라고 명명해 보겠다. (볼프는 종족 간의 많은 내전을 겪은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이에 반해 <신의 동일성 여부는 갈등 해소 및 평화 구축에 주요 변수가 아니다>라는 나의 신념과 접근법은 <강남 서초역을 거친 신학>이라고 부르려 한다. (서초역 근처에는 큰 교회가 하나 있고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표절 후에도 사임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그 교회를 출석하는 신도들의 수는 수 만을 헤아리며, 이 신도들과 그 교회를 갱신하려는 구성원들 사이에는 수 년간 <평화>가 없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소위 <크로아티아 신학>은 한국의 강남 서초역이라는 <공간>에서도 <작동>하는가?
교회를 갱신하려는 자들과, 그들을 보며 교회를 허문다고 비판하는 자들은, 같은 <개역개정>으로 성경을 읽는다. 두 측이 믿는 신은 동일한 날 십자가에 못 박혔고, 동일한 날 부활했다. 이슬람-기독교 비교에서처럼, 소위 <가까스로 동일신>이 아니라 <한눈에 동일신>이다. 하지만 이런 <동일성>은 오히려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아!>라는 분노를 증폭시킬 뿐이다. 안타깝게도, 양측에서 똑같이! 『알라』를 읽으면서 답답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나는 비록 총성도, 폐허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자꾸 볼프보다 <더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동일신의 실제적 <무력함>에 대해서만큼은.
4. <동일신>이 그렇게 무능하다면, 즉 양측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는 신이라면,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떤 신>을 바라보아야 할까? 볼프는 <각주 23번>에서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라는 사람이 쓴 『Thick and Thin』의 서문 한 대목을 길게 인용한다. 그 서문에서 저자 왈저는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벨벳혁명의 한 장면을 기록한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 그것은 프라하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이었다. 그들은 단순하게 '진실' 혹은 '정의'라고 쓰인 표지판을 들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즉시 그 표지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고, 똑같은 사진을 본 모든 사람도 다 그랬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나는 행진을 하는 그 사람들이 옹호하고 있는 가치를 이해했고 (...)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 행진을 하던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화는 나에게 이질적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런 반응을 하게 만들었던 경험을 나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마도 그들 사이에서 아주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역시 똑같은 표지판을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이, 394쪽 분량 『알라』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킨, 여덟 줄이다. (줄 수는 원문 기준).
5. 이질적이고 낯선 사람들 사이로 걸어들어갈 용기는 <동일신의 확인>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 왈저의 회상. 이렇게 양쪽이 믿는 신의 동일성은,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왈저 에피소드에 대한 볼프의 반응은? 한마디로 말해서 볼프, 수긍을 하되, <동일신에 대한 로망>을 버리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공통성>은 왈저가 파악한 <도덕적 최소치>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 만약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공통의 신을 가지며, 그들이 신의 성격과 명령을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중복>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강조 첨가). 이렇게 볼프는 여전히 동일신 로망 안에 머문다. 두 신의 <중복>이 <유익>을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을 포기할 생각이 그에겐 없다. 그럼, 그의 말대로 두 종교는 중복되는가?
6. 『꾸란』을 읽는 동안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내 <충격 포인트>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꾸란』을 읽기 전에는 예수도 <그저 그런 여러 예언자 중 한 명>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이 가장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꾸란』를 읽어본 지금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느끼는 대목은 다음이다 : "그러나 그들이 그를 (실제로는) 죽이지도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다...오히려 그들에게 그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나타났으며 (그들은 그를 예수와 혼동하여 죽였다)." ( 『꾸란』 4:157 중에서. 상기 우리 말 번역은 한스 큉이 쓰고 손성현이 번역한 『이슬람』 제4장 각주 40번에서 인용. 같은 대목을 N.J. Dawood는 다음과 같이 영역하였다. " They did not kill him, nor did they crucify him, but they thought they did." ) 이제 이 대목에 대한 한스 큉의 해설을 들어보면: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이 꾸란 구절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다른 해석들도 가능하다. 예컨대 이 구절이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만을 부정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그러나 고전적 꾸란 주석가, 현대의 꾸란 주석가 대부분은 이 구절을 대치(代置, substitution)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요컨대 예수 대신 다른 사람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함마드 주변에 널리 퍼져 있던 견해였다." (한스 큉,『이슬람』, pp.886-887 . 강조는 한스 큉). 기독교적 메시지가 십자가 사건에서 정점을 이룰진대 그 <정점>이 빠진 종교가 기독교와 중복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와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과연 <중복되는 문장>일까.
7. 『알라』에 대한 이번 서평에서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 다음 세 가지였다. ①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를 하기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각주 23)" 라고 믿으면서도 394쪽에 걸쳐 두 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려 하는 볼프의 행동은 상호 모순이다. ( "왜 볼프는 문제 해결에 <필수적인 사항>부터 밝히고 다루지는 않는 것일까?") ② 갈등 중인 양쪽의 신이 동일하다는 게 밝혀져도 실제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동일신은 보기와 다르게 무력하다") ③그런데 사실 양쪽의 신은 애당초 <중복>되지도 않는다. ("십자가는 중요한데 한 명은 십자가에 오르지 않았다"). 만약 볼프가, 『알라』 마지막 장 각주23에서 <지나가듯이> 밝힌 내용을, 책 서론에서 <제일 먼저> 밝히고, 그 문제와 394쪽에 걸쳐 씨름했다면, 『알라』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용과 영향력에서). 나는 볼프가 그런 후속작을 냈으면 좋겠다.
2016.3.25.
신동주
<서플먼트>
1)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한 달 넘는 시간을 『알라』를 읽고 쓰는데 매달리게 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장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문장으로서의 효용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걸까, 회의하고 있던 바로 그때 볼프가 들고온 <동일성>과 <중복>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고, 그래서 조금은 <데리다>식으로 볼프에게 딴지를 걸었던 것 같다. 볼프의 학문적 깊이와 역량 그리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평생에 걸쳐 기울인 노력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1)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한 달 넘는 시간을 『알라』를 읽고 쓰는데 매달리게 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장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문장으로서의 효용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걸까, 회의하고 있던 바로 그때 볼프가 들고온 <동일성>과 <중복>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고, 그래서 조금은 <데리다>식으로 볼프에게 딴지를 걸었던 것 같다. 볼프의 학문적 깊이와 역량 그리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평생에 걸쳐 기울인 노력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2) 서평을 쓰면서 읽고 참고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꾸란 선 : 35개 장의 의미번역과 주해』(손주영 번역,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알라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IVP) , 『한스 큉의 이슬람 : 역사 현재 미래』(한스 큉 지음, 시와 진실), 『The Koran』( N.J.Dawood 번역, Penguin Books ). 한국외대에서 나온 상기 『꾸란 선』은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여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다음에 한번 더 꾸란을 읽는다면 한스 큉을 번역할 때 번역자 손성현 선생이 기준으로 삼은 『성 꾸란 : 의미의 한국어 번역』(파하드국왕꾸란출판청 발간)으로 읽어보고 싶다. (『이슬람』을 읽으면서도 또 확인하고 느낀 거지만 손성현 선생의 번역은 참 좋다.)
3) 마지막으로, 볼프가 이번 『알라』에서는 <들어서지 않겠다고 한 길>을 잠시나마 걸어보면서 이 서평을 맺으려 한다. 볼프는 『알라』를 시작하며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신과 지금 세상에 관한 것이지, 신과 장차 올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 이 책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며,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지는 않는다.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는 남겨 두기로 한다. 전문용어로 이 책은 정치신학에 관한 책이지, 구원론에 관한 책이 아니다." (p.26) 이제 잠시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 짧게나마 하고 싶다. 나는 본문에서 꾸란과 성경이 증언하는 신은 동일한 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다른 신을 믿는 무슬림들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C.S.루이스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은 100 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퍼센트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나는 루이스의 말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내가 모르는 다양한 방법과 능력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하기 원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루이스의 상기 발언 중에서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란 대목에 눈길이 더 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 타종교인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루이스의 경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시각에선, 지금 한국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몇 갈등>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믿는 이들>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일 수도 있을 거란 무서운 생각이 든다.하나님은, 하나님만, 아시고 보실 수 있으시리.
2017년 9월 28일
『두 지평(The Two Horizons)』 (앤터니 티슬턴 지음, Eerdmans 출판사) 을 읽고.
1. 열여섯살 여고생, 부모님 볼까 이불 쓰고 몰래 할리퀸 읽는 느낌이, 재수 학원 다니는 남자 애들, 쉬는 시간에 드래곤볼 신간 보는 느낌이, 91년 내가 앤터니 티슬턴의 『두 지평』을 읽을 때만큼 달콤하고 짜릿했을까. 아내는 있었지만 직업은 없던 시절, 그러니까 한 여자에겐 '올'이었지만 사회에선 '낫씽'이었던 그때, 나는 하루 열여덟 시간씩 상식 문제를 외웠다. (그걸 상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보에서 산 언론사 기출문제집에서 발견한 <낯선 문장들>. 1990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 친선 축구대회에서 북한 선수들이 입은 상하 유니폼 색깔이 올바로 짝지워진 것은? ① 상의: 붉은 색, 하의: 붉은 색 ② 상의: 붉은 색, 하의 : 청색 .....두렵고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이런 낯선 상식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내 이름 호명 받는 날 과연 올까? 꾸역꾸역 무의미한 문장 집어삼키다가 끝내 한계에 도달하면, 당 떨어진 사람 허겁지겁 초콜릿 꺼내 먹듯 『두 지평』을 펴고 읽었다. (티슬턴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의미(있는 문장)에 목말랐다. 의미만 충만하다면 문장이, 내용이 아무리 어려워도 상관 없는 때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티슬턴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글은 어렵지 않은 법이다.
2. 『두 지평』 은 총 3개의 파트, 15개 챕터, 61개의 절로 탄탄하게 구축된 영국식 성(城). 난생 처음보는, 목차에서 드러나는 그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에 '이런 미친...!' 하며 놀라움과 즐거움의 탄성 질렀던 기억있다. 각주 하나하나까지, 그 성 구석구석 안 가본데 없이 다 가봤지만 그 <아름다운 성>에 대한 안내 나 포기하려 한다. 25년 전 기억 의지해 이 큰 성 누군가에게 가이드 하겠다는 건 무리 & 욕심. 그래서 나, 이 시간 그저, 내가 그 성 거닐며 찍었던, < 내 얼굴 > 크게 나온 나온 몇 장의 인스타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3. 인스타 #1: 얼마 전에도 후배 L이 물었다. 왜 아까 회의 시간에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내가 옛날에 읽은 『두 지평』 이란 책에는 E. Fuchs라는 사람이 한 이런 말이 나와. 사람들이 집에서 입을 여는 건 다른 가족을 이해시키고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 왜 여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야. 이해 받기 때문에 입을 -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 여는 거지. "at home one does not speak so that people may understand, but because people understand".(p.344) 회의 석상에서, 설득하면 이해해 줄 거란 믿음 내게 있는가, 먼저 판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입 열지 않는다. 아이들 키우면서도 - 바로 이 Fuchs의 말 때문에 - 우리 대화하자,라는 말 한 번도 안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믿음 심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4. 인스타 #2: 소위 <해석학적 간격>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건 『두 지평』 을 읽으면서였다. "어떤 경우에는 비유( parable)를 설명(explain)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명해줘야만 되는 비유라는 건, 설명해줘야만 하는 조크처럼, 이미 비유로서의 가치를 훼손(ruined) 당한 거 아닐까?" (p.15) 질문 던진 크로산(Crossan)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현대의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전통 속 <자기 자신의 자리>에 의해 한계(conditioned) 지워진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의 해석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대 독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이 바리새인 역할 맡게 되는 걸, 자신의 삶이 <바리새적이라고> 규정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거부하는 바리새주의를, 그저 다시 한 번 더 비판하고 확인해주는 하나의 도덕적 이야기로만 <소비>된다. 비유에 주어진 근본적인 역할 즉 청자들의 삶을 흔들고(unsettling), 그의 신념과 가치를 전복(overturning) 시킨다는 원래의 역할은 사라지고 이제, 청자가 갖고 있는 기존 가치를 재확인해주는 역할로서만 비유는 존재한다". 처음으로 깊이 깨달았다. 복음서를 기록한 2천 년 전 화자(話者)와 그 말을 2천 년 지나서 듣는 나라는 청자(聽者) 사이에는 메꾸기 힘든 해석학적 간격이 있구나. 처음 독자나 청자들이 받았던 <충격>을 어쩌면 나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무엇을 읽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 어쩌면 내 독서는 -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내 <오래된> 기존 생각을 재확인,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겠구나. 『두 지평』 어디에선가 한 신학자가 이런 제안을 했다. 그 <처음 독자들>이 눅 18장 비유 들으며 느꼈을 충격 조금이나마 경험해볼 수 있는 방법 하나 있는데 그건: 바리새인 자리에 지금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 그리고 세리 자리엔 우리가 가장 경멸하는 그리스도인, 을 대입 시켜 보는 것. 그래서 나 종종 뉴스앤조이에 등장하는 철면피들의 이름 눅 18에 대입해보곤 한다. 말도 안 돼, 였을 것이다, 첫 독자들의 반응은, 나처럼, 예수님의 최종 판정을 들었을 때.
5. 인스타 #3: 미국에서 중고등 시절을 보낸 나의 두 아이는 - 미국에서 교회 중고등부를 보냈는데 - 참으로 <신비한 질문>을 내게 하곤 했다. 그 질문이 내게 신비로왔던 이유는 그 두 아이의 질문이, 그 두 아들의 <애비>가 중고등부 시절에 했던 질문을 꼭 닮아서였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동일했다>. 아빠, 어떻게 하면 24시간 주님만 생각할 수 있어? 35년 전의 나 역시 - 고1때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 24시간 주님만 생각하지 못했고, 그런데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라 교육 받았고, 그 결과 좌절감과 죄의식을 <끼고 살았다>. 그러다가 H.G. Gadamer가, 육십 넘어 쓴 자신의 첫 책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게임이 진정 완성되는 시점은 플레이어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망각할 때이다". (Play fulfills its purpose only if the player loses himself in his play). (Gadamer, 『진리와 방법』, p.92; 『두 지평』, p.297에서 재인용). 중요한 것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의식이 아니라 플레이 자체"이다. ("the primacy of play over the consciousness of the player")( Gadamer, 『진리와 방법』, p.94 ; 『두 지평』, p. 297에서 재인용).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여러 신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점점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주님을 24시간 생각하면 주님이 슬퍼하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잊는 걸> 좋아하셔. ....생각해보니 아빠도 그런 거 같아. 지난 주 너희가 친구들과 농구할 때, 옆에 있는 이 아빠의 존재 완전히 망각하고 게임에 <완전히 빠져있는 모습> 보던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아빠 안 잊겠다고 친구들과 놀지 않고 이 아빠 앞 떠나지 않으려 하면, 아들의 24시간 주목 받는 이 아빠는 <비통한> 마음 들 거 같아. 신은 피조물들이, 그리고 애비는 자녀들이, 인생이란 게임을 '풀필'(fulfill)하기 원한단다. <망각>은 가장 큰 찬양이고 효도인 거 같아.
2017.9.28.
신동주
신동주
서플먼트
티슬턴의 『The Two Horizons』은 1980년 Eerdman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 한국에선 2002년 C신학교 출판사에서 『두 지평 : 신약해석학과 철학적 기술 』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 있으나 독자들의 호응 크지 않았던 것으로 앎. 최근 IVP가 박규태 선생의 탁월한 번역으로 『두 지평 : 성경 해석과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제목 하에 출간. 번역자는 원저자가 인용한 독일어 원전의 오류까지 바로잡았을만큼 심혈을 바쳐 번역을 했고 독자들을 위한 별도의 역주까지 제공했다 하니, 나 이 원본보다 나은 번역본도 사야하는 건가....(여기까지)
피드 구독하기:
글 (At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