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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5일

『새가족반』 (이정규 지음, 복있는사람)을 읽고.

오늘 『새가족반』(이정규 지음, 복있는사람)을 읽었는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다루는 제6장에서 참 인상적인 구절을 하나 발견했다. (십자가의 고통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고통이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 예수께서는 진노를 받으시며 부르짖으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언뜻 보면 친밀한 외침 같아 보이지만,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직접 부르신 유일한 부분입니다. (각주13). 이는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정말 철저히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 (p.166) *각주 13번: R. T. France, The Gospel of Mattew,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s Rapids, MI: Wm.B. Eerdmans Publication co. , 2007) p. 1076 

2018년 8월 2일

휴가

제가 오늘부터 19일까지 가족을 보러 미국 갔다 오는데, 갖고 가는 건 아래와 같아요. 
1. 227페이지까지 읽은 『누가 성서를 기록했는가』(R.E. 프리드만, 한들출판사)
2. 그림을 그릴 작은 노트 (아이들을 그릴 예정. 아마 아내도 ㅋ )
3. 그림을 그릴 샤프펜슬(2mm)
4. 새번역 성경
5.『조지 맥도널드 선집』(C S 루이스 엮음, 홍성사) (* 요즘 시편과 이 책으로 큐티)
6. 반송되어 온 아내 생일 선물 (건전지 빼고 다시 갖고 감)
7. 둘째에게 줄 샤프펜슬 (3번과 같은 모델 . 샤프는 2천원, 심은 천원).
8. 최종적으로 노라고 한 S기획사 대표의 답변 
9. 10년 전에 주님께 받은 말씀 
잘 다녀오겠습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2018년 7월 29일

어느 가족

미군에서 복무 중인 아들이 2년의 한국 근무를 마치고 다음 주 토요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어제는 아들과 마지막으로 '토요일 목욕'을 했고 오늘은 아들과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예배 광고 시간에 사회 보는 장로님이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더니, 아들은 멋진 미소를 지으며 거수 경례를 하였다. 부대에서 환송식이 있어 아들은 일찍 부대로 돌아가야했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오는데 갑자기 짧은 순간 무서울 정도로 아들이 그리웠다. 아들에게서 오늘 시간 더 많이 같이 보내지 못해서 서운하다는 문자가 왔다. 아빠도 그렇다고, 그래도 어제 같이 목욕하고 <어느 가족>도 함께 봐서 너무 뿌듯하다고 답신을 보냈다. 영화에서 경찰이 남자에게 물었다. 왜 어린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쳤냐고. 남자는, 가르쳐 줄 게 그것밖에 없어서, 라고 대답했다. 이 땅의 애비들은 너무 모순 덩어리이고 부족하오니, 하늘 아버지...

2018년 6월 9일

사탄의 무기 2개

#무척19금 

1. 나는 사탄이, 자기 밑의 가장 똑똑한 영들만 따로 모아서, 오랜 회의를 거쳐, 인간들의 꿈과 삶을 단숨에 무너뜨릴 <만능 무기> 하나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나도 20대 후반 이 무기에 찔렸을 때 피를 철철 흘렸고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사탄의 무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플하다. 그저 다음과 같은 하나의 센텐스(sentence)일 뿐이다 :  "너도 처자식 생겨봐라".  이 말은, 듣는 사람을 순식간에 <무안하게> 만들고, 세상 물정과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한가하게 동화같은 꿈만 좇는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말에 찔려 꿈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 또한 이 센텐스에 깊이 찔려보았기에, 그 뒤로 <무엇을 듣는가>에 무척 주의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찬 사람의 말은 그냥 무시한다. 

2. 또 나는 사탄이 <한반도 지역 공중>에서 활동하는 영들만 특별히 따로 불러, <한국 남자들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 특별한 센텐스를 <또 하나> 만들었다고 믿는데 그건 다름아니라 :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되지". 언제부터인가 성인 토크쇼를 보다보면 <부부관계>가 화제로 오를 때, 이 센텐스가 누군가에 의해 시전되기만 하면 모두가 <웃음>으로 화답한다. (나도 종종 웃었다). 스튜디오 안을 꽉 채우는 웃음 즉, 무언의 격렬한 동의! 배우자와의 관계는 즐겁지 않은, 즐거울 수 없는 <의무>이고, 진정한 즐거움은 <낯선 여성>을 상대할 때만 경험할 수 있다,라는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되지>. 어느 날 이 <익숙한 센텐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내가 딱 한 번만 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나는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이름도 모를 낯선 상대와 나눌 것인가. 아니면 내 <이름>을 알고, 내 불완전함을 알고, 그러면서도 나를 여전히 믿어주는 <익숙한 상대>와 나눌 것인가. (답은 너무 자명하다). 그러자 또 다른 물음이 떠올랐다. 왜 마지막 관계만 그래야 해? 오늘 밤은 왜 안 돼? 

2018년 5월 7일

중년이 되면 찾아오는 변화

나이들면 여유가 생겨 낯선 여성을 만나도 긴장하거나 떨지 않게 된다. 방금도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온 젊은 여성에게 내 욕망을 자연스럽게 전했다.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아서.
"제가 먼저 왔는데요". 
- 2016.5.7 (빽다방)

2018년 4월 2일

갈릴리

오늘 처음 깨달은 사실인데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면서  
몹시 화도 내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무척 어이없어 하시고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정말 놀라기도 하시며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답답해 하기도 하셨지만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결코 하지 않으셨던 한 가지 행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주님은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셔도
결코 경멸하거나 비웃지는  않으셨어요!  

책망은 하시되 경멸하거나 비웃지 않으시는 주님.
어제 또 죄를 지은 제게 
이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자신을 버린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 기다려 주신 주님. 

저도 오늘 믿음으로 갈릴리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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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2019년 8월 1일)  
『고통의 문제』 (C.S.루이스, 홍성사)를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습니다.  "또 모든 기록을 볼 때, 그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65). 오래 전 읽었던 루이스의 이 구절이 제 뇌리에, 무의식에 깊이 박혀, 제가 의도치 않게 위와 같은 <표절>을 하게 된 거 같습니다.  

2018년 3월 10일

TV제작국 이삿날

오늘은 제가 소속돼 있는 TV제작국이 6층에서 4층으로 이사하는 날이었어요. 2002년 아주 적은 인원으로 TV개국을 할 때는 3층에서 일했는데 그 후 사람들이 많아져서 6층으로 이사를 왔고, 이번에 다시 조금 더 넓은 공간 4층으로 가게 됐어요. 지나온 모든 날이 다 아름답지만(ㅋㅋ) 그래도 기억에 남는 대화와 사건을 딱 하나씩만 꼽아보면:
(3층에서)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때였어요. 제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우리 사무실 직원들의 일상을 드라마타이즈해서 시리즈로 올렸어요.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어느날 후배L이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어요. 
"선배님, 선배님 글 너무 웃겨요".
그때 처음으로 제가 글로 남을 웃길 수 있구나,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전 제 자신이 심각한 줄만 알았거든요.
제가 이렇게 페북에 글을 쓸 수 있는 자신감을 얻은 건 그날 3층에서였어요.
(6층에서)
낸시랭의 신학펀치 만들 때 가편과 자막 작업이 끝나면 대개 새벽4시,5시였어요. 집에 가서 조금 자고 오후에 종편하러 다시 나오는 그런 생활을 1년 정도 했어요. 어느날 새벽 6층 빈 사무실에 있는데 너무 감사한 거예요. 제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혹시 사람들이 있나 살펴 본 후에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어요.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요.
(4층에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겠어요. 다만 무언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생각만 하지 않고 <실행>했으면 좋겠고, 또, 제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갚으려는 마음이 (사실 똑같이도 아니어요. 항상 받은 것 이상으로 갚으려해요 ㅠㅠ) 사실은 어리석은 마음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018년 2월 9일

사순절과 나귀(2)

*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쓴 사순절 묵상 원고

3월2일 마가복음 11:1~10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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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제일 궁금해 하는 건 나귀 주인과 예수님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도대체 나귀 주인은 누구길래 ‘주가 쓰겠다’라는 암호 같은 말 한마디에 한 마리 이상(마가복음에선 한 마리, 마태복음에 따르면 두 마리)의 나귀를 두말없이 냉큼 내줬던 걸까요?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도 복음서 저자들의 수많은 ‘주작’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등장 인물의 정체도 모호하고 대화도 현실성이 없다고 하면서요.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 주위에 제자들이 한 명도 없는 순간들이 등장합니다.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갔을 때> 한 여성과 우물가에 <단둘>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인상적인 대화>는 그 여성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4:28). 저는 나귀 주인의 경우도 수가성 여인과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 주위에 제자들과 <현대인들>이 없을 때 – 예수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것 같고,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작은 신세>를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그가 그날 만남에 대해 – 네, 수가성 여인처럼 –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의 이름과 그가 그렇게 한 연유가 복음서 저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 됐을 가능성이 컸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만남과 대화에 대해 제가 아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믿는 것 한 가지는, 그 남자는 그날 만남에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 <자기 자신>도 만났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암호가 ‘주’였다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평소 잊고 사는 주라는 단어가 이 정체 모를 남자와 우리 주님 사이에선 무척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걸 보니 말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자신의 주에게, 자신의 나귀를 즉시 보냅니다.

(기도)
주님, 제가 주님을 주님으로 대우하고 있나요?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사순절과 나귀(1)

한국 루터란아워 사순절 묵상집을 위해 제가 두번 째로 써야 했던 원고 주제는 <마귀>가 아니라 <나귀>였습니다 : )

3월1일 (마태복음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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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가 일하고 있는 방송사에 안토니오 구테헤스가 녹화를 위해 왔습니다. 구테헤스가 누구냐고요? 현 유엔사무총장입니다. 관례상 유엔사무총장은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국가 원수급 예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경호도 국가원수급 수준으로 하게 됩니다. 녹화를 하는 카메라 감독들은 물론이고 녹화 전 구테헤스의 메이크업을 맡은 분장실 여성들 인적 사항도 사전에 청와대로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국가 수반급 인물이 저희 방송사에, 나귀를 타고 등장했다면 어떻게 보였을까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코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유대인들이었다면 의아하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당시에 왕이나 부자들은 대개 힘을 상징하는 노새를 탔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한 남자가 굳이 나귀를 타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 모두에 나귀가 나오지만 예수님이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 곳은 마태복음뿐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겸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사람에 따라 겸손을 정의하는 방법은 다 다를 터인데 마태복음 저자를 보면 멍에라는 단어 없이는 겸손을 설명 못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12장에선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용하네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내가 너희의 모든 멍에를 벗겨 주겠다’라고 하는데 오늘 우리 앞의 남자는 정반대입니다. ‘내 멍에를 메거라’. 우리의 상식과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멍에를 멘 인간>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천국에서도 우리에겐 메야 할 멍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룩하라는 명령이 – 마음껏 음란하고 싶은 인간에게는 무거운 멍에처럼 느껴지지만 – 사실 그게 얼마나 가볍고, 적당하고, 즐거운 무게인지는, 음란 후에 찾아오는 허무와 죄책의 무게를 경험해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겸손하다면 멍에가 우리를 살리는 줄 알기에 멍에 벗으려 발버둥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나귀처럼.

(기도)
나귀를 타고 오늘 제 앞으로 지나가시는 주님 앞에서 모든 멍에 벗어던지려고만 하는 제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하소서.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사순절과 향유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시도한 사순절 묵상 원고 쓰기.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주제를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교회력에 따라 주어지는 주제에 대해 <무조건> 써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떨리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 ) 첫번 째 묵상 원고입니다.
2월28일 / 마가복음 14:3-11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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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 진퇴양난에 처한 것처럼 보일 때가 여러번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볼까요?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태 22장). 더 드라마틱한 주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교활한 시험 중에 나왔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한 8장).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피는 본문도 잘 읽어보면 이런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한 노동자의 일년치 임금인 3백 데나리온을 줘야 겨우 살 수 있는 비싼 향유를 -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에 따르자면 - ‘장례 준비’ 하는데 ‘소비’한 한 여성의 행동을 놓고 어떤 사람들이 따집니다. 지금도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데, 고작 ‘사랑 표현’에 3백 데나리온이나 사용하는 게 가합니까? 오히려 진정한 사랑 표현은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상하게 저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여성을 야단치는 사람들의 말에 수긍이 많이 갑니다.
이런 지적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듣고도 저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장례 준비’에 대한 제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이 죽는다고 하시지만 3일 뒤엔 부활하게 되어 있는 분이잖아요. 이미 정해져 있는 승리를 위해 거쳐야 하는 죽음이라는 ‘요식 행위’를 위해 3백 데나리온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 갑자기 이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예수의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요식 행위가 아니었단 말일까?

(기도)
사순절을 맞아 주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죽음이셨기에, 오늘만큼은 가난한 이뿐만 아니라 나도 위로를 받고 싶구나, 하는 고백을 하셨는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습니다.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