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2일
용기를 냈다
나름 꽤 큰 일을 하나 마쳤다. 신학펀치와는 상관 없는, 부서 내의 일이었다. 오늘 낮 2시에 마감되는 한 공모에 우리 TV국 지원서를 등록하는 일이었다. 첨부해야 할 서류가 많은, 복잡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 업무 프로세스 중 하나를 들어 누군가 문제 제기를 했다. 어떻게 보면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30분 쯤 있다가, 부서 단톡방에 글을 하나 올렸다. 20대 2명, 30대 1명, 50대 2명이 있는 방이었다. " 소원 하나 들어주소서! ㅋㅋㅋ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고 그래서 드뎌 완료한 등록! 에 대해서 마지막 피드백이 '왜 000를 0000 안 했어요?' 여서, 마음이 무거운데 ㅋㅋㅋ 축! , 이라는 답글 달아주면, 이번 일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 같아요! : ) 감사합니다." 모두가 축하한다는 글을 달았고 함께 웃었다. 나도 참 대단하다 이런 걸 어떻게 요구하는지 ㅋ (엄청 쑥스럽고 민망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2020년 5월 10일
『구약성서의 이해』 읽기를 중단함. (버나드 W. 앤더슨 지음 / CH북스 크리스천다이제스트)
1. 좋은 책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즐기지는 못하고 있다. 번역 때문이다 ㅠㅠ 내용이 너무 좋아서 참으며 읽었지, 정말 내용마저 아니었다면 오래 전에 집어 던졌을 것이다. '제대로 된 우리말'로 번역된 센텐스 하나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신기할 지경이다.
2. 지금 94페이지를 읽다가 정말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나와서, 영어 PDF 파일을 구해 확인했는데, 역시 완벽한 오역이었다. 두 역자는 이렇게 번역했다. (지금 출애굽기 10가지 재앙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성경 이야기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되 좀더 신중하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A]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거나, [B]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 전승 자체를 전부 배척하거나 하는 것일 것이다 ". (사실, 원서를 보지 않아도 지금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날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말이 안 되니까. ).원서에서는 이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The wisest course lies between....." . 가장 현명한 접근법은 A와 B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3. 앤더슨의 상기 책이 CLC에서도 번역됐기에 주문했다. 책 제목은 『구약성서 탐구』로 되어 있다.참고로, CLC는 원서의 제5판을, CH북스는 원서의 제4판을 번역했다.
4. 좋은 책을 안 좋은 번역으로 읽는 것은, 베토벤의 소나타를, 1분마다 튀는 CD로 듣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나는 베토벤을 그렇게 만나고 싶지 않다.
열림버튼
열림버튼을 누르는 중이었다. 헬쓰장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락커키를 반납하고, 회원카드를 돌려 받은 뒤, 투명유리로 돼 있는 출입문 앞에 서서, 벽 오른쪽에 붙어있는 열림버튼을 누르는데 문이 안 열렸다. 열 번 이상을 눌렀을 것이다. 그래도 열리지 않아 난감해하고 있는데, 날 바라보고 있던 직원이 다가와서는 말했다. "회원님 문 열려있잖아요". 나는 원래 열려있던 문으로 걸어나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우산을 폈다. 깊은 깨달음이 온 건 그때였다. 인생은...(여기까지).
#이글의장르는무엇인가 #직원은남자였음 #여자직원에게들킨거라면지금헬쓰장더못다님
#이글의장르는무엇인가 #직원은남자였음 #여자직원에게들킨거라면지금헬쓰장더못다님
2020년 4월 28일
초보자와 전문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가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평범한 이웃에게 설명해 보면 드러난다고 C.S.루이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루이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죠.]
"예를 들어, 대속(Atonement)이나 성직(Orders)이나 영감(Inspiration)에 대해 자신이 [어느 정도 확립된] 특정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같은 부류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그 견해를 논하고 옹호합니다. 비판자들에게 답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여러 부분에서 다듬고, 모호한 부분을 명확하게 해주는 듯한 기발한 비유들을 고안하고, 다른 견해들과 비교하여 대강의 '위치'를 가늠해 보[다보면] 자신의 견해가 일류 사상들 사이에서 확고히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지적인 기계공이나, 진지한 호기심은 있지만 겉으로는 상당히 불경해 보이는 학생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려고 해보십시오. (식자들 사이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을) 유치한 질문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검술의 첫 번째 원칙조차 모르는 상대의 칼에 어이없이 꿰뚫린 능숙한 검객의 신세가 됩니다. 상대의 유치한 질문은 치명적인 한 방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장했던 내용을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견해를 철저히,끝까지,'완전히 끝장을 볼 때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견해를 포기하거나 , 아니면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참을성과 통상적인 노련함을 발휘하는데도 분별 있는(들을 마음이 있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한 가지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 C.S.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 제2부 '의사소통의 전제 조건' 중에서.
2020년 4월 5일
예고편 촬영 콘티
화요일에 회사 근처의 복싱장에 가서 신학펀치 시즌2 예고편을 찍을 예정이어요. (새로 합류하는 시즌2 MC가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은 촬영 콘티를 짰어요. 웹툰 느낌이 나는 예고를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제일 재미있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합니다). 예고에서는 신학펀치만의 특징 세 가지를 소개할 생각인데요, 특징 2번 소개 멘트를 미리 알려드리면: "매너를 지키는 신학펀치! 벨트 아래는 가격하지 않는다!" (이 화면이 다시 체인지되면 다음 문장이 등장합니다) "문자주의 신앙을 넘어서려 하지만, 문자주의 신앙을 조롱하지 않는다".
2020년 3월 25일
2020년 3월 17일
신학펀치 시즌2 제작 확정
오늘 CBS TV제작국에서 <신학펀치 시즌2 >를 제작 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시 무대 위에서, 신학자 두 분 모시고 <곤혹스러운> 질문의 펀치 날리게 되었습니다.(근질근질 ㅋㅋ). 시즌2 첫 에피소드는 5월 마지막 주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2020년 3월 16일
어떤 예언
이제 소개하는 열왕기상 13:2는 기원전 10세기 말에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 하느님의 사람이 제단을 바라보며 야훼께 받은 말씀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오, 제단아, 제단아, 야훼가 말한다. 다윗의 가문에서 요시야란 한 아들이 태어나리니, 두고 보아라,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의 사제들을 죽여 그 뼈를 네 위에서 태우리라." > (공동번역). (위 예언에 등장하는) " 벧엘을 정복하고 제단을 파괴한 다윗 왕조의 요시야 왕은 기원전 7세기 말에 생존한 인물이다." [위 예언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무려] 3세기 뒤에 벧엘 신전 파괴를 명령하고 제사장들을 살해하며 그들의 시체로 제단을 더럽히게 되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화하게 되는] 유다 왕국의 특정한 왕의 이름을 거명했기 때문에 이 예언은 전무후무한 예언이 되었다.
그 예언은 [마치] 17세기의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집필된 노예의 역사 책 내용 가운데 마틴 루터 킹의 탄생을 예언하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 "열왕기 상과 열왕기 하는 [요시야 왕 탄생 3세기 전에 쓰여진 게 아니라, 요시야 왕 시절인] 기원전 7세기에 집필된 역사서 (....) 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 -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지음,까치 ), p.200-201에서 발췌.
2020년 2월 11일
봉준호의 오스카 감독상 수상 소감
이번 오스카 감독상 수상 소감 3분40초 동안, (통역이 있었으니 실제 말한 시간은 채 2분이 안 되었다), 수상자는 정말 후보자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수상을 하지 못한 후보자들이 이렇게 눈물을 글썽이고, 진심으로 즐거워, 고마와 웃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나도 나 자신을, 봉준호가 봉준호를 바라보듯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 천국에서의 생활을 살짝 미리 엿본 느낌이었다. 내 삶의 지평에선 아련하게,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것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봉준호 감독에게 감사한다. 기생충 지루했던 것이 단번에 용서가 된다...
2019년 11월 4일
신앙 서적과 신학 서적
고등학교 때 제가 열심히 읽었던 신앙서적 몇 권을 꼽아보면 『사랑의 원자탄』(안용준 지음), 『삼박자 구원』 (조용기 지음), 『죽으면 죽으리라』(안이숙 지음),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최자실 지음) 등 입니다. 대학교 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존 스토트 지음), 『산상수훈』(로이드 존스 지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프란시스 쉐퍼 지음),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제임스 사이어 지음), 『하나님을 아는 지식』 (J.I.패커 지음) 등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십여년 전부터는 성서학에 대한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성서학 관련 책들부터 읽었다면 어땠을까? 요사이 내가 알게 된 것들을 대학 때 알았다면? 선교 단체와 대학부에서 내가 (조원으로) 배우거나 (조장으로) 가르칠 때 사용하던 교재가 생각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 쓰는 교재였습니다. 질문 뒤에는 몇 장 몇 절을 보라는 말까지 친절하게 다 나와 있습니다. 하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읽고 그 차이점에 대해 나누는, 그런 식의 성경 공부는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조장이 됐을 때도 시키지 않았구요....) 아니, 기억을 되살려보면 그런 질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마태는 왕으로서의 예수,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 누가는 이방인과 온 세상을 위해 오신 예수, 라고 어디서 본 걸 외워서 썼습니다. (요한복음은 까먹었습니다.) 신기합니다. 복음서를 꽤 여러번 읽었는데 왜 각각의 문체와 강조점과 뉘앙스와 차이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보르헤스나 쿤데라나 하루키를 읽을 때는 본능적으로 그 특색과 차이점을 알아차렸는데 말입니다. 아마 제가 그날 ‘적용’을 하려고, 십자가를 져라, 이웃을 사랑해라, 성결해라, 같은 교훈과 명령이 나오는 문장만 관심 갖고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 - 그러니까 성경 본문 - 이 중요하지 그걸 쓴 저자 - 즉, 부각되면 괜히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는 존재 - 가 뭐 중요한가, 라는 무의식이 제 독서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14. 9.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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