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두려운 신비'에는 <The Inquirer >(July 14, 1923 )에 실린 글이 한 대목 등장한다. O.Schreiner 이 쓴 『Thoughts on South Africa』라는 책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저자는, 키가 크고 힘세며 강인한 성격을 소유한, 말이 없는 보어인 한 사람이 말한 의미심장한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책을 쓰는] 저자는, 그[보어인]가 고작해야 자기 양과 가축들, 혹은 그가 잘 알고 있는 표범들의 습성 외에는 거의 어떤 심오한 얘기라고는 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 약 두 시간 가량이나 넓고 넓은 아프리카의 평원을 건너질러 간 후 그는 탈(Taal) 언어로 서서히 말했다. "한 가지 오랫동안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하셨을테니까요. 이런 들에 혼자 있을 때, 그리고 태양이 잡목들에 내리쬐고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인가가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너무나 너무나 작아지는 듯하며 다른 어떤 것은 너무나 커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작은 일들이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집니다".
2021년 3월 15일
2021년 3월 9일
잘잘법 Ep. 61을 시청하고.
1. 잘잘법 Ep. 61 '비기독교인들에게 인간이 죄인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에서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이 일종의 <사투리>가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교회 내부의 구성원들만 알아듣고, 교회 외부의 비기독인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가 되었다는 뜻이죠. 잘잘법 이번 편에서는 <죄인>이란 말의 의미를 비기독교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주고 있는데, 저는 <이런 작업>이 비기독인에게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기독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단지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는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돼'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요. 내가 믿는 바를, 내 이웃에게, 내 이웃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저는 제가 <설명하는 바>를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잘잘법의 <이번 작업>은, 우리 기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일' 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런 작업> 없이 너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왔습니다.
2021년 3월 2일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를 읽으며
"정보망이 낙후되어 형편없었던 고대에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들은 기발한 수를 많이 개발했다. 그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 시판(詩板)을 들 수 있다. 당나라 사람들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시장의 상점이나 명승고적,역참, 사원 등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벽을 골라 회칠을 한 뒤에 자신의 시를 벽 위에 쓰고, 나머지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벽은 유한하고 당나라 사람들의 시정(詩情)은 무한하여 벽이 금세 부족해졌다. 많은 지역에서 시인에게 나무 널빤지 하나를 제공하는 것으로 방식을 바꾸었고 (...) 이 작은 널빤지가 바로 시판이다. (...) 시판을 쓰는 데 신분의 제약도 없었고 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 한족이나 이민족, 남녀노소 모두 시판 앞에서는 평등했다. 그러나 뛰어난 작품은 필시 매우 드물고 열등한 시판이 매우 많아지자 누군가 나서서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행해야 했다. 유우석은 백제성을 떠날 때 시벽을 지나다가 엉망인 시가 무수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걸음을..." (여기까지)
"당나라 후기의 유명한 재상인 배도(裴度)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늦봄에 우연히 남쪽 정원을 노닐다 모란이 아직 피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난간에 기대어 유감을 금치 못했다. “내가 이 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니 슬프구나.” 그런데 이튿날 남쪽 정원에 한 무리의 모란이 먼저 피었다. 하인이 다급히 이 소식을 알리자 배도가 그 말을 듣고 마치 원진이 친한 친구인 백거이가 폄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의 반응처럼 “죽을병에 걸렸다 놀라 일어나 앉아” 기를 쓰고 나가서 모란을 감상했다. 배도는 활짝 핀 모란을 보며 깊은 위로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사흘 뒤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두 대목 모두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 에서.
2021년 2월 26일
『예언자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천규 옮김, 비아 ) 를 읽으며
책의 첫 쎈텐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학교에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장 칼뱅이 정착시킨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전통은 바로 기도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 책은, 이제는 은퇴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드렸던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니, 안 봐도 어떻게 했을지 뻔한 수업 시작 기도들을 책으로 냈다고?" 였다). 그리고 책을 폈다. 첫 기도는 이렇게 시작 됐다 : " 우리는 / 거룩하신 당신을 통제하기 위해 / (...) / 경건한 행위를 하고, 교리를 만들고 ... " .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가지 이유에서. (어떻게 이런 공중대표기도가 있을 수 있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했지?). 이 첫 기도문 끝에는 <구약학 수업, 1998.10.15>이라는 메모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밑에, 내가 <따라 읽으며 기도드린> 날짜를 적었다. <특집부에 와서, 2021.1.12>. 올해 들어 <작은 전통>을 하나 만들었다. 회사 오면 일 시작하기 전에 이 기도문을 한 편씩 읽는 것. 얼마전 내가 2월22에 읽은 기도는, 월터 브루그만이 1998년 1월8일 수업 중에 드린 <끝없이 추락할 때>라는 기도였다. 기도문을 읽고 내가 읽은 날짜를 적었다. <2021.2.22.월. 지옥같은 금,토,일을 보내고 와서> . 기도는 이렇다. "주님, 우리에게는 몰락이 익숙합니다 / 삶의 중심을 대적하며 우리 자신을 파괴합니다 / (...) / 주님, 우리의 중심이 되소서 /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 /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 ". 나는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를 읽을 때 '절망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바꿔 읽었다. 그래, 힘들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고통스럽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그런 과장은 거짓말이 될 테니까. 내가 용기만 낸다면 다시 일어설 여지는 항상 있는 것이니까.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 다시 주말을 맞는다. 퇴근길에 기도문을 챙겼다).
2021년 2월 24일
『몸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지음, 두란노)을 읽는 중에
1. (인용)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장로교 목사 프레드 로저스가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로저스 아저씨네 동네>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로저스는 (...) 소품이나 첨단 장비를 별로 쓰지 않았다.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인상을 풍기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 그는 곧 유명해졌고 상도 많이 받으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 강연도 시작했다. 그가 강연마다 어김없이 넣는 순서가 있었는데 바로 청중에게 2분 동안 침묵하며 각자 자기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 그는 말했다. "매번 사람들이 [제 강연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 침묵의 시간입니다". (...) 한번은 백악관에서 열린 고위급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동 문제와 관련해 딱 8분 발언 시간을 얻었다. '짧디짧은 이 귀한 시간의 4분의 1을 꼭 침묵에 할애해야 할까?'.... " (그는 망설인다) (8분 중 2분 침묵은 오버일까?) (여기까지).
2021년 2월 22일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Jae Young Kim) 옮김, IVP )의 제1장을 읽고.
1. 좋은 스테이크는 다 먹지 않고 한 입만 먹어봐도 알 수 있듯이,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은 제1장만 <씹었는데도> - 논문집이라서 말 그대로 <씹어야> 한다 - <일등급 한우>로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밴후저는 각 시대마다 철학에서는 중요한 핵심 질문이 있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고대에는, 실재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중요했는데 (예: 만물은 물로 돼 있다, 아니다, 공기다, 아니다, 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만물이 '존재'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는데 여전히 사용하는 많은 범주인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실존(existence) 등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즉, 형이상학이] 고대 세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 '제1철학(first philosophy)'이었다. 우리는 한 시대의 제1철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함으로써 그 시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 12세기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업과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중세의 많은 신학자가 형이상학을, 혹은 그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1신학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p.28-29). 지적 허세 있는 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축약본까지 사서 읽었지만 아퀴나스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에 대해 파고들었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2. 고대와 중세를 다뤘으니 그럼 이제 자연스럽게 <근대의 제1철학은 무엇이었나>를 묻게 되는데, 밴후저에 따르면 그것은 <인식론>이다. "이성의 시대에 뜨거운 쟁점은 인식의 본성과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알 수 있을까? 나의 신념이 단순한 견해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 (p.29)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 <절차>이다. "어떤 주장들을 정당화하는 것은 더 이상 권위적인 자료들에 대한 호소"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게 된 객관적인 절차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의 우선 순위상의 이러한 변화는 르네 데카르트의 고전의 긴 제목전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제목은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여 학문 연구에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담론 』이다 (...) 이 점에 있어서는 자연과학의 성공이 전형적(paradigmatic)이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방법은 다른 학문 분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 근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용(matter)에 대한 방법의 우위이며, 형이상학에 대한 인식론의 우위이다". 반 하비(Van Harvey)는 그의 책 『역사가와 믿는 자(The Historian and the Believer)』에서 충분한 증거를 토대로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믿는 것은 사실상 <부도덕>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더니티를 변호한다. 하비는 우선적으로 역사가들에 대해 생각하지만, 동일한 요구 사항들이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 또는 근대 시대의 다른 누구에게나 적용되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약 200년이 지난 후에도 많은 학문 종사자가 여전히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비평적 물음>들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 (p.29-30).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성경에 대한 <비평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나는 영락없는 <근대의 아들>이었다.
3. 이어서 밴후저는 근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제1신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힌다. 그 내용이 이 제1장의 핵심을 이루지만 <개인 사정으로> 생략한다. (ㅋㅋ) 대신, 내 평생 잊지 못할 1장 결론부의 한 대목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밴후저는 우리가 <신학적 해석학> 작업을 수행하는 목적이 말씀을 따라 "살아감의 문제, 말씀을 행하는 문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 " 만일 우리가 본문을 따라서 (...) 살아가지도 않는다면, 성경 권위에 대한 우리의 교리들도 쓸모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값싼 무오론'과 더불어 남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쓴다. 값싼 무오론과 더불어 남게 될 것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누군가> 앞에서 내밀 수 있는 게 <값싼 무오론>과 <값싼 은혜>뿐이라면....
<서플먼트>
1) 내가 올리는 책 서평의 대부분은 일반 평신도를 위한 것인데, 이 책만큼은 <난이도>가 좀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밴후저가 이전에 쓴 12개의 논문을 모아서 출간한 논문집인데, 1장 중간중간에 화행이론(speech act theory)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했고, 낌새를 보니 앞으로는 더 자주 나올 것 같다. 평소 독서할 때 내가 제일 어려워하던 게 화행이론이었는데, 하나 이번에는 찬찬히 읽었더니 전체 요지를 파악하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밴후저 덕분인 것 같다. 밴후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렇기에 설명이 난해하지 않다. (모든 저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려운 개념이 나올 때 마다 꼼꼼한 역주를 달아주신 역자에게도 감사한다.
2) 밴후저가 『제일신학』 제1장에서 제일 길게 인용한 글은 놀랍게도, 반갑게도, C.S.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에 나오는 '공구실에서 한 생각'(Meditation in a Toolshed)이다. 밴후저에 따르면 루이스의 이 글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간략한 비유인데, 그 비유에서 루이스는 어두운 작업실에 들어가는 간단한 경험을 회상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세상을 전복시키는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루이스의 [이] 간략한 내러티브는 <근대라는 성전>에서 지식을 교환해 주는 자들의 <가판대>를 뒤엎는다. (p.30)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의 제1장을 읽고.
1. 좋은 스테이크는 다 먹지 않고 한 입만 먹어봐도 알 수 있듯이,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은 제1장만 <씹었는데도> - 논문집이라서 말 그대로 <씹어야> 한다 - <일등급 한우>로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미국 신학자의 글은 한우에 비유하는 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보라! (ㅋㅋ)) 밴후저는 각 시대마다 철학에서는 중요한 핵심 질문이 있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고대에는, 실재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중요했는데 (예: 만물은 물로 돼 있다, 아니다, 공기다, 아니다, 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만물이 '존재'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는데 여전히 사용하는 많은 범주인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실존(existence) 등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즉, 형이상학이] 고대 세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 '제1철학(first philosophy)'이었다. 우리는 한 시대의 제1철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함으로써 그 시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 12세기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업과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중세의 많은 신학자가 형이상학을, 혹은 그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1신학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p.28-29). 지적 허세 있는 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축약본까지 사서 읽었지만 아퀴나스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에 대해 파고들었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2021년 2월 4일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벤 위더링턴 3세 지음, 이레서원)을 읽고
1.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1세기 고린도의 사회적, 문화적 정황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하는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흥미로웠던 대목 한 군데를 소개하면 이렇다. (총독 갈리오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열리는 만찬회에 참석하려고 신전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신전 입구, 첫 번째 계단 옆에는 새 석판이 세워져 있고, 아스클레피오스 신과 이 신의 상징인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만찬회에 늦은 갈리오는 급히 계단을 올라 신전으로 들어가면서 테라코타 봉헌물이 놓이 방을 지나갔다. 이 방에는 순례자들이 치유를 위한 봉헌과 기도 용도로 바친 여러 부위의 인체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테라코타는 점토로 형상을 빚은 후 구워서 만든 모형인데, 당시에는 병이 난 부위를 테라코타로 만들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치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 여기까지 읽은 내 머릿속에선 <음란마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안 좋아진 부위? 그럼, 그 봉헌 모형들 가운데는 <그 모형>도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일까...흑흑흑" .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갈리오는 팔과 다리 모형이 눈에 익은 모습으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은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가장 흔한 인체 부위 복제품인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는 늘 그랬듯 그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 휴. 나만 쓰레기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트리클리니움, 또는 식당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뒷편에 있었는데, 그런 연회에서 늘 그러듯 크게 떠드는 소리와 흥청거리며 노는 소리가 갈리오의 귀에 들려왔다."
2021년 1월 15일
나의 아저씨
나랑 친한 조연출 한 명이 <나의 아저씨>를 다봤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누가 <나의 아저씨>를 다봤다고 하면, 그가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다읽었다고 하는 것만큼 반갑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것은 <위치>였다. 기성세대로서의 위치, 남편으로서의 위치. 거기서 벗어남은, 처음엔 쾌락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고통이라는 것. 그 위치를 지키고 있을 때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사실 평안이 가장 큰 쾌락이라는 것.
2020년 11월 21일
신학펀치 시즌2를 마치며 드리는 감사의 인사
오늘은 늦잠과 넷플릭스 다큐와 설거지와 대청소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토요일인데 회사 안 나가니까 너무 이상했어요. 지난 6개월, 주말은 제가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던 날이었거든요.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 낯선 즐거움을 잘 음미하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