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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2일

45세 시절의 조용기 목사 설교(1981.2.25. '겉옷을 벗어 버리고' )를 듣고.

1. 한 명의 목사가 세상을 떴다. 향년 86. 유튜브에는 '조용기 목사 45세 때 설교' 라는 동영상이 떴고 나는 한번 끝까지 들어보았다. 나보다 어린 나이의 한 중년 사내가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었다. 한번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적은 있었으나 (설교 제목이 '겉옷을 벗어버리고'였고, 조목사는 설교 도중 양복 웃도리를 벗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거기서 웃었다), 내 고개는 설교 내내 주로 아래 위가 아닌 좌우로 흔들렸다. 살면서 내가 그에 대해서 꽤 진지하게 숙고했던 적이 <두 번> 있다. 그리고 두 개의 <결론>을 내렸다. 오늘 (대단치 않은, 개인적인) 그 두 결론을 나누고자 한다. 

 2. 2002년 월드컵 직후였던 것 같다. 교회에서 보내온 그의 설교를 편집하고 있었다. (피디들은, 교회에서 설교 파일을 보내주면, 규정된 방송 시간을 초과하는 분량이나, 방송법 법에 저촉되는 내용 등을 편집해서 잘라내고 내보낸다). 설교 중에 대략 이런 말이 등장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한다).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그런 성장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그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람을 만나더라도 규모가 되는 교회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제 후배 목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교인 수가 적은 목사들 말고, 어느 정도 교회 규모가 되는 목사 동료들과 어울려라." (설교에서는 교인 숫자까지 말했으나, 그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적지 않음). 

 3.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멘붕에 빠져 편집기를 멈췄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질문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게 맞나?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 그러나 하나님 판단은 내 판단과 다르니, 내가 그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구원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다음 한 가지는 비록 신 앞이지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적인가?"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신 앞에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후, 누군가 내게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구원 여부에 대해선 제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20여년이 흘러도 내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4. 이제, 두 번째 이야기. 다들 잘 알다시피,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요한3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 한번은, 그동안 내가 공부한 신학을 근거로 해서 그의 삼박자 구원을 한번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비평'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함). 평신도로서 그간 신학책을 읽으며 배운 것을, 삼박자 구원론을 살피는 데 <적용>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확인하고 거기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신학책에서 강조하는 첫번 째 원칙이었다. 시(시편)를 읽을 때는 시로 읽어야 하고, 묵시(계시록)를 읽을 때는 묵시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한3서는 편지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 그렇기에, 요한3서는 편지로, 편지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이 편지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을 편지로, 편지처럼, 읽거나 해석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5. 그럼 이 편지에서 삼박자 구원론의 근간이 되는 센텐스는 어디에서 등장할까? 놀랍게도 그 구절은 곧바로 2절에 나온다. 즉, '누구에게(1절)' 바로 다음에 나온다. 대개의 편지에선, 우리가 <의례적인 인사>라고 일컫는 문장이 <그 위치>에 등장한다. 이제, 작은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정말 전형적인 <인사>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조카야), 네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너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개역개정과 현대인의 성경을 혼합). 

 6. 나는 요한이 상기 편지를,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을 조기 은퇴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삼겹살 고깃집을 개업하는 성도에게 (지금) 쓰고 있다면, 2절은 아마 이런 모습을 띠지 않았을까 싶다 :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사장님), 사장님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이번 고깃집 완전 대박나고, 사모님과 두 분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인사에는 좀 오버하는, 과장된 축복 멘트가 들어가도 괜찮다. '대박' '돈벼락' 같은 말이 들어가도 괜찮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원래 인사가 그런 것이다. 다들 감안해서 듣는다.)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의) 문제는, 어느 정도는 <흘려 듣고> 마음만 받아야 하는 인사말을 <진지 빨고> 들으면서, 자신의 신학을 그런 (한갓) 인사말 위에 세웠다는 데 있다. 그러한 <진지 빤 신학>에서는 이제 '대박'은 진정한 믿음의 표징,증거,의무가 된다. (대박과 십자가를 연결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결론을 정리하면: 인사말은, 듣고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본격적인 신학을 세우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다른 말씀, 다른 심오한 말씀들 많잖아! 왜 66권 수많은 말씀 중에서 하필 거기야!) 

 2021.9.20. 
신동주

2021년 9월 7일

<스토커>(Stalker ,1979 )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를 보고.

1. 영화 두 편을 봤다. 둘 모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1932~1986)의 영화였다. 인터넷 서점에선 DVD로도 판매하고 있지만 (이 말은, 한글 자막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기에 유튜브로 봤다. (이 말은, 러시아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봤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 영화 모두 런닝 타임이 3시간). 나는 영어 이해가 빠르지 않기에 대사 하나 등장할 때마다 포즈 버튼을 누르고는 (모르는 단어 영어 사전에서 찾고)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이 말은, 한 영화당 내가 포즈 버튼을 누른 횟수가 최소 백 번은 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건 영화 감상이 아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음. 인정.) 영화 감상이 아니었어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래 그 이유와 결과를 간단히 적는다. (내 영화평이 늘 그렇듯이 본문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 등장 않는다. 각주에는 나온다). 

2. <스토커> (Stalker) / 1979 2019년 5월28일 화요일 오후 6시, 나는 회사 업무가 종료되는 순간,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 되는 고려대 베리타스 포럼에 접속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강연 주제는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였고, 남자 한 명이 왼쪽에 서서 동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 잊혀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강연 초반에 소개한 영화 한 편이었다. 스미스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를 소개했다 : "<스토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세 사람이 어딘가로 갑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은,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줍니다. 누군가 입으로 말하는 바램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죠. 문제는, 그 세 사람이, 그 방 앞에 도착해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정말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3. 2년 전에 들은 이 짧은 영화 줄거리는 이상하게 듣는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입을 통해, 페북을 통해, 경건해지고 싶습니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기고 있습니다, 비아에서 나온 『사막의 지혜』를 읽고 있습니다, 참 멋진 말들을 많이도 해오고 있는데, 막상 그런 나는, 내 입술의, 내 페북의 갈망을 현실화 시켜준다는 그 방, 더 룸(the Room)에 <들어가길> 원할까? 페북에 그렇게 종교와 경건에 대한 포스팅 많이 하는 나이지만, 일단 <지금>은 못 들어간다. (누가 뒤에서 실수로 밀까봐 두려울 정도다). 나 또한 내 깊이 내재한 갈망이 무엇인지 미리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의자에 앉자, 내 앞에, 벌거벗은 남녀 몸뚱아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적거리며 꿈틀대는 세상이 영원히 펼쳐진다면? 내가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어 영원히 꿈틀대(야만 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확실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정욕을 극복하는데 혹시 고행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수도사처럼, 그래서 자기 등 채찍으로 밤마다 쳤듯이, 나는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라는 <고행>을 계속했다. 마치 이 고행 통해 내 갈망 정화되기라도 하듯이. (맞다. '영화 감상'이라 불릴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행의 효과는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속 세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갔을까,에 대한 답변은 생략. 

4.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 1966 이십 여년 전, 라디오 방송사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시절, 녹음기 하나 들고 서울 전 지역을 돌아다니던 시절, 내 지갑 속에는 내가 볼펜으로 쓴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한 말이었는데 힘들 때면 꺼내 읽었다. "영화 감독으로 산다는 건 레드카펫 위를 걷고 카메라 플래쉬 받으며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감독으로 사는 건, 촬영 장비를 지고 비오는 새벽 집을 나서는 것이다." 화질 안 좋은 VHS 비디오로 그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본 건 그 무렵이었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삼위일체','블라디미르의 성모' 같은 이콘(icon)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15세기 러시아 화가이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거세게 불던 바람, 무너진 성당 벽에 기대선 남자의 긴장한 얼굴 표정은 또렷이 기억난다. 40대와 50대를 사는 동안 문득문득 흑백 영화 속 그 <거친 바람>이 떠올랐고, 얼마 전 영화평론가 C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중, 그 거친 바람을 <다시 맞고> 싶어졌다. 내 삶의 쭉정이를 다 날려보내고, 그리고 남는 내 삶의 알곡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남을까).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유튜브를 통해 부는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다시 불기를 (역시) 백 번 정도했다. (자막 ㅠㅠ) 런닝 타임 3시간 동안 안드레이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안드레이가 붓을 쥐고 있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다 보고나니 그건 결점이 아니었다. 

2021.9.6. 
신동주 

<서플먼트> 

(*스포일러 등장) 

1)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보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원작이 있는 경우 무조건 원작부터 본다, 는 내 오래된 원칙 지키기 위해 SF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 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 (두 형제는 소비에트 시대 작가로서 원작은 1972년에 출간). 출판사 소개문을 발췌, 인용하자면 : " 『노변의 피크닉』은 외계 생명체나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을 다루는 ‘퍼스트 콘택트’ 유의 소설에 속하"며, "불법적으로 ‘구역’(the Zone)에 숨어들어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물체들을 찾아내고, 그걸 팔아 살아가는 ‘스토커’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와 비슷한 동기를 갖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장편 소설에 <그곳은 우리의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라는 식의 문장이 단 일 회만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음.(현재 미국에 와 있어서 소설 속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 못하는 것을 양해 구함). 소설 속 그 한 줄의 문장이, <스토커>에서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 더불어, 이 소설을 통해 '스토커'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좇아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잠입자,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됨. 소설과 영화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임. 

2) <스토커>의 주인공 세 사람(스토커, 교수, 작가)은 두려워서 결국 '더 룸'에 들어가지 못함. 세 시간 내내 세 사람 꽁무니 졸졸 따라갔던 <피디> 한 명도 그 방 문턱에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남. (도대체 인간 중에 누가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이런 생각이 듦.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방에 들어간 거 아님? 너무 커서 그렇지, 그 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님? 왜냐하면, 각자가 갈망을 뿌린대로 거두는 모습을 이 방 안에서 매일 목도하고 있으니. 만델라. 이명박. 트럼프. 그레타 툰베리. 윤석열. 신동주...열매가 맺히는 속도만 다르지, 그 방과 이 세상은, 어쩌면 같은 공간일 듯. 그래서 결론: 방 안으로의 진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 

 3)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열기구가 추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총 9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짐. 그 중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세 개만 아주 짧게 소개하면 : (a) 젊은 청년이 영주를 위해서 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맞아 죽을 수 있음. 드디어 종을 치던 날, 몇 년째 입을 닫고 묵언수행해 오던 안드레이가 입을 열고는... (b) 타타르족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을 폐허로 만듦. 끔찍함.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름).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까지 들어와 사람들을 도륙하고, 교회의 보물을 찾겠다고 끓는 물을 사람의 입에 부음. 그런 행동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함. 장수로 보이는 듯한 이가 말을 탄 채로 성당 벽을 바라보며 묻는다. "저기에 누워 있는 아기는 누군가?" " 예수입니다" "아기 옆에 있는 여자는?" "동정녀 마리아 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면 동정녀가 아니지" 성당을 불태우고 타타르족이 떠난다. 이제 안드레이는 벽에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 누군가에게 아무런 영향 미치지 못한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화가는, 이제 <어떻게> 그려야 할까. 아니, <그려야 할까>. (c)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초반부에 나옴. 안드레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키릴이, 성상화(聖像畫)의 대가 테오판 그릭을 만나는 중. "나와 함께 일해주겠나?"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요. 제 공동체와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저를 지명해주십시오" (당시 안드레이가 더 인정 받고 있던 상황). "그러지". 얼마 뒤, 테오판 그릭이 보낸 전령이 수사들이 다 모인 앞에서 테오판의 후계자를 발표한다. "안드레이!"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의 키릴. "아, 머리가 빠개지는 거 같군". 전날 밤 술을 잔뜩 마신 듯한 전령은 말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함. 난 이 부분을 여러번 돌려봤는데, 만약, 테오판은 키릴을 생각했으나 숙취에 시달리던 전령이 이름을 착각한 것이라면? 이 도입부가 참으로 매혹적). 

 4) 실존 인물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실제 그린 성상화(聖像畫, icon)들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 내게는 성상화들을 <즐겨보고> 싶은 로망이 줄곧 있어왔음. 이콘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내가 짐작하기론) 중세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중세인의 태도가 내 삶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근현대인인 내게는 그것이 결여돼 있는 듯. C.S. 루이스는 『폐기된 이미지 - 중세 세계관과 문학에 관하여』 (C.S.루이스 지음, 홍종락 번역, 비아토르)에서 중세인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는 (...)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들은 무엇보다 "올려다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함. 누군가를,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걸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영락없는 근대인인 나는, 어쩌면 이콘마저도 내려다 보고 있었을 수도.

2021년 8월 23일

『부서진 사람』 (피터 맘슨 지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읽고.

1. 나는 옛날부터 다음 두 곳에 <들어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 오히려 반감이 있었다. 현실로부터 도망한다는 생각, 현실과 당당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브루더호프라는 기독교 공동체 안의 '리더십'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사람』이란 책을 내가 <단숨에> 다 읽은 것은 내게는 좀 사건이었다.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과정 중에 발견한 (거의 TMI에 가까울 수도 있는) 소소한 일들을 서너 개 나열해보고자 한다. 

2. 나는 책을 쥐면 제일 먼저 제사(題辭, epigraph)부터 읽는 습관이 있기에 이 책을 쥐고 제일 먼저 한 일도 제사를 확인하는 거였다. (제사가 없는 책도 많이 만나는데 그럴 때면 난 내심 몹시 실망한다. 얼마 전에 읽은 제사 하나도 참 인상적이었다. 『창세기를 만나다』(로널드 헨델 지음,비아)에 나오는 제사 :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 ). 『부서진 사람』 에는 반갑게도 제사가 있었다. 이 제사를 읽는 순간, 난 내가 이 책을 완독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은 이렇다. 상처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될까? 천사도 어쩔 수 없는, 가련하고 실수투성이인 이 땅의 자녀들을 깨우칠 자는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사랑의 군영에는 오직 상처 입은 병사만이 복무할 수 있으니. - 손턴 와일더, 「물을 휘저은 천사」 에서. 

3. 서문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비록 아놀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을 당했지만". 지난 가을에 <내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아놀드란 사람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서문을 읽는데 아놀드가 당한 일뿐 아니라 아놀드라는 사람 자체도 궁금해졌다. 서문의 승리.) 마지막에 서문을 쓴 이의 이름이 나왔다. 유진 피터슨. (역시!) 

4. 점점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나는 책 표지를 다시 살폈다. 부서진 사람,이라는 책 제목 위에 영어로 원제가 적혀 있었다. Homage to a Broken Man. 호미지가 뭐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이 단어의 발음은 오마주,였다. 평소 자주 쓰던 오마주라는 단어에는 에이취(H)가 붙는구나! (완전 몰랐다). (어서 빨리 나도 "Homage to C.S.루이스"라고 할 무언가를 내놓아야할텐데 ㅠㅠ). 

5. 아껴가며 읽었다. 내게 제일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두개만 소개하면: 하나. 공동체 생활은 한다는 것은,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하이너[아놀드]가 술을 권하자 더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이 되도록 맥주 한 잔 입에 안 대고 살았습니다." 더그는 커피조차 양심에 꺼려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p.426). 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상담하러 아놀드를 찾았다. 나는 아놀드가 한 대답 중에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멤버가 된 제니스가 언젠가 하이너[아놀드]에게 찾아와 자신에게 별 재주가 없다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제가 공동체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자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보태는 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산타클로스처럼 되길 고집하는군요" > (p.434). 이 구절을 읽는데 나는 한 방 먹은 거 같아서 멍해졌다. 실제 다음 문장도 이렇게 이어진다. "제니스는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했다". 

2021.8.23. 
신동주

2021년 5월 7일

『창세기와 만나다』 (로널드 헨델 지음,박영희 옮김, 비아 VIA)를 구매하고.

1. 기독교 출판사 <비아>에서 제작하는 유튜브 채널 이름은 '비아 채널'(Via Channel)이다. 비아 채널에서는 언박싱을 정기적으로 하는데 이 비아 언박싱은 내가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언박싱이다. 비아 언박싱은 항상 세 파트로 이뤄진다. 1) 책의 외양 소개. 2) 책의 내용 소개. 3) 편집장이 소개하는 이 책의 한 방. 나는 이렇게 『창세기와 만나다』 가 비아에서 언박싱 되는 순간을 지켜보았고 결심했다. "읽어야만 해". 화면에서만 보았던 그 책이 지금 내 손에 쥐어져있다. 

 2. 책 제일 앞의 헌정사를 보았다 : "친구, 동료이자 히브리 성서 연구자인 밥 알터(Bob Alter)에게". 아니, 알터라면, 『성서의 이야기 기술』을 쓴 로버트 알터아닌가! 나의 '근대적 편협성'을 황홀하게 산산조각 내주었던 학자! 페이지를 한 장 넘기자 이제 이런 제사(題辭)가 눈에 들어온다.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헌정사와 제사에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나는 잠시 책을 덮고...(여기까지) 

2021.5.7. 
신동주 

<서플먼트> 

이 책은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야심차게 펴내고 있는 '위대한 종교 서적들의 생애' 시리즈 중 '창세기 편'이다. 창세기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창세기가 인류사에서 어떠한 식으로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인류 지성의 변화가 창세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학문적으로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드문 창세기의 영향사, 해석사, 지성사 저작이다. (이상, 출판사의 소개글 중에서).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을 읽느라 시간이 안 나는 가운데서도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비아 채널에서 제공하는) '슬기로운 독서 생활'이라는 영상 때문이었다. 마침 출연자들이 『창세기와 만나다』에 대해 나누고 있었는데 한 여성 출연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저자의 말은, 창세기는 독자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 라는 말이었어요 ". 아양 떨지 않는 고대 문헌! 그 거침, 그 당당함을, 직접 빨리 대면해 보고 싶었다. 이제 만나러 간다.

2021년 5월 5일

미스터 션샤인

"쉬슬러 피오렌자의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순종'이란 용어가 없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p.431)라는 문장을 읽는데 "이 드라마에는 키스신이 없다"(나무위키, <미스터 션샤인>)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2021년 4월 22일

『찔림』 (신동필 지음, 시커뮤니케이션 , 개정판 2021 )의 저자에 대해서

"당신을 위로하지 않는 책 『찔림』 "의 저자 이름(신동필)이 제 이름(신동주)과 비슷한 이유는 제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선친께서 장남은 '동방의 주인'이 되라고, 차남은 '동방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다 -.- 제 동생은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참 재미없는 세상』 (홍성사,2016) / 『찔림』 (시커뮤니케이션 , 2017 ). 이번에 『찔림』의 개정판(2021)이 새로 나왔습니다. 많은 구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제9계명

며칠 전, 회사 동료 A가 내게 말했다. "미국에 있는 B교수님과 줌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끝나고 제게 피디님 안부를 물으셨어요". 예의를 중시하는 신 모 피디, 멀리서도 기억하고 안부 물어주심에 대해 감사하다는 짧은 메일을 B교수님에게 보냄. 아주 짧게 내가 요즘 하는 일을 썼음. "틈틈이, 새로운 신학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하기 위해 신학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케빈 밴후저의 <제일신학>을 읽었는데, 연구자들에게 제9계명(거짓 증거하지 말라)은, 다른 이의 주장과 글을, 내 입맛대로 변형시키지 않고, 비판하기 쉬운 측면만 골라 읽지 않고, 일단 그의 논지 전체를 제대로 읽어주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이 제게 참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책을 읽으며 그러지 못한 때가 자주 있었거든요." 이 메일에 대해 B 교수님이 답신을 보내주심. 한 가지 부탁을 해오심. 밴후저의 견해를 상기시켜 주어서 고맙다, 책을 한국에 두고 와서 미국에 이 책이 없어서 그런데, 상기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줄 수 있는지, 라고. 나는 기뻤음. 그래서 오늘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림. 사진 찍은 그 대목을 그대로 적어보면: "어떤 저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읽는 자의 의견들과 생각들을 본문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는 대신에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고 행한 바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황금률과 제9계명,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의 함의라고 본다. " - 『제일신학』 (케빈 밴후저 지음, IVP), p.55-56

2021년 4월 18일

< Sports Wit > (Lee Green 지음, 출판사 확인 불가)을 40년 전에 사서 읽고.

1. 이 책은, 내가 사서 지금까지 갖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온갖> 스포츠에 관련된 <온갖> 조크, 명언,경구들을 모아놓았다. 40년 전에 이 책에서, 내가 지금도 항상 마음에 떠올리는 경구 하나를 만났다.

2.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대만 타이페이에 있는 미국 학교에 들어갔고 영어를 못했다. 미국 친구가 없었던 나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던 헌책방에서 산 (살인과 애정행각이 난무하는) 3류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소설을 읽으며 영어 공부를 했고 (그래서 그런지) 끝내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Lawrence Sanders라는 작가가 쓴 <The First Deadly Sin> , <The Second Deadly Sin> , <The Third Deadly Sin>을 읽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지금 내가 소개하는 책도 이곳에서 샀다.
3. 나는 스크린 골프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골프에 관한 경구들에는 많이 끌린다. (볼링에 관한 경구도 좋아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도 골프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Golf is mostly a game of failures." - Tommy Aaron (프로 골퍼). (*골프는 대부분 실패로 이루어진다. 실패한다는 것과 친해져야 한다). coaches & coaching (감독 & 코칭)이라는 항목도 있다. 내게는 다음 두 개가 참 인상적이었다. (1) "No coach ever won a game by what he knows : it's what his players have learned. - Amos Stagg (대학 미식축구팀 감독) (*설사 자기가 알고 있더라도, 선수들이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 (2) "A coach isn't as smart as they say he is when he wins, or as stupid when he loses." - Darrell Royal (텍사스 미식축구팀 감독) (* 경기에 이겼다고 해서 그 사람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경기에 진 사람 말이라고 다 쓸모 없는 것도 아니다).
4. 이제 <내가 만난 경구>를 소개하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혐오하는 '투우 경기' (bull-fighting)에 관한 경구이다. '용기'에 대한 것이라서 알파벳 C 항목('courage')에 들어가 있다. 누구의 말인지도 알려지지 않는 그 경구를 소개하면: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not scared is nothing.
And to not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is nothing.
But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that is something.
- Anonymous
(의역을 해보면)
두려운 마음이 전혀 안 생기는 사람이 황소와 싸우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황소와의 싸움을 피한다면 (당연히) 이것 역시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있는데 황소와 싸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5. 나는 겁과 두려움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신학펀치 시즌1을 시작할 때도, 시즌2를 시작할 때도 이 말에서 힘을 얻었다. 아마 시즌3를 하게 된다면, 아마 그때도 이 말을 가장 많이 생각할 거 같다.

2021년 4월 8일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 (민영진 지음, 대한기독교서회)를 오래 전에 읽고.

1.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궁금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질문을 남겼다.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자 현 대한성서공회 번역자문위원인 민영진 목사가 답을 달았다. 그 중 대표적인 질문 49가지를 모아 만든 이 책을, 어느 날  손에 쥐게 되었다.

2. 책의 구성은 이런 식이다. 예를 들어 45번 질문을 보자. : "민영진 목사님께.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전서』라고도 하고, 『구약전서』 혹은 『신약전서』라고도 하는데, 『성경』이나 『구약』이나 『신약』 등 기독교의 경전과 관련된 이러한 이름들의 유래를 알고 싶어요. 이런 질문도 대답해 주실 거지요? 고맙습니다. 궁금이 올림. " 45번 질문에 대한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 "궁금이 님께, (...)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로마서,고린도전후서,야고보서라고 하지, 로마경,고린도전후경,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 답변은 훨씬 다양한 측면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여기서는 부득이하게 인상적인 한 문장만 소개). 

3.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하나를 위 질문과 답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필명>이다.  대부분의 질문자는 필명을 쓴다. 그리고 저자는 답변을 시작할 때 그 필명을 불러준다. 질문자가 김궁금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면, 답변은 김궁금 장로님께,로 시작한다. 게으름뱅이 올림, 게으름뱅이 님께. 열 받은 신자 드림, 열 받은 신자 님께. 이런 식이다. ( 참고로, 바로 전 질문자가 열 받은 이유는 누가복음 16장 1절~9절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다. "민영진 목사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 있습니다. 본문의 문장이나 구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진술된 내용 자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이 말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도 된다는 뜻입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이 '뇌물'과 다른 게 뭔가요? 열 받은 신자 드림." )  

4. 개인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질문들(과 답변들)을 먼저 읽었다. 그랬기에 <8번 질문>을 읽게 된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난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8번 질문은 이러했다. "목사님, 디모데전서 2:15에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저는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보다는 저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 제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아기는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은 우리 같은 석녀(石女)를 너무나도 괴롭힙니다. 석녀 올림."  나 역시 평소 읽을 때마다 좀 의아해 하던 구절이었기에, 나는 저자가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해 하며 답을 보기 위해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전체 답변은 몰랐지만 적어도 첫 문장이 어떻게 시작할지는 알았다. 석녀에게. 

5. 그리고 나는 틀렸다. <자매님께>. 답변은 그렇게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 순간 갑자기 내가 왜 그렇게 심하게 울기 시작했는지. 목젖이 뜨거워지고 가슴에서부터 딱딱한 울음 덩어리가 올라와 나는 꺽꺽대며 울었다. 그렇게 몇 분을 울었다. 필명을 그대로 부르던 분이, 그 여성에게만큼은, 이 책에서 지켜오던 원칙을 깨고, 석녀라고 부르지 않고 자매님이라고 불러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소개하는 도중에 석녀, 자매님 얘기만 하게 되면 나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될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매번 그랬다. 심지어 한번은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 책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내 눈에선 민망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로는 사람들 앞에서 이 책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아, 딱 두 번 더 꺼낸 일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연출하던 <새롭게하소서>에 민영진 목사님을 모셨을 때였다. 녹화전 대기실에서 민목사님께,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차분하게> 말하다가 자매님,에서 또 울고 말았다. 나머지 한 번은, 신학펀치 섭외를 위해 인천으로 사본학 전문가 M교수를 만나러 갔을 때였다. 그날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요즘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그 <울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2021.4.7.
신동주 


*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 수록된 질문들 중 일부는 (저자가 정기적으로 글을 싣고 있는) 성경연구 월간지 <햇순> 독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왔다. 공동체성서연구원(http://newsprout.org)을 방문하면 <햇순>이 나오는데  메뉴에서 '성서 난해구 해설'을 클릭하면 이 책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에는 실리지 않은 수백 편의 질문과 답변들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돼 있다.

2021년 3월 31일

『삐딱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쾌한 희망사전(Wishful Thinking: A Seeker's ABC ) 』 (프레드릭 뷰크너 지음, 복 있는 사람)을 읽고.

1. 이 책은 사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62개 단어를 고른 후 저자가 아주 개인적인 설명을 달았다. 'ㅂ' 항목을 찾아보면 저자의 이름인 '뷰크너'도 등재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뷰크너(Buechner)'.  내 이름이다. 뷰크너라고 발음한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바보스럽게 잘못 발음하면 마치 내가 바보인  것 같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잊어버리면 마치 내가 잊혀진 것 같다. 내가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듯이 내 이름에도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뭔가가 있다. 헬드라든가 메릴, 아니면 흘라바첵 같은 다른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일 내 이름이 달랐다면 나도 달라졌을 것이다. 내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상대방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나에 대한 영향력을 넘겨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이름을 부르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멈추고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말씀하신다. 그 후로 하나님은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다. (p.75)

2.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연출을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는 목사님 한 분을 뵈러 간 적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셨고 스탭들과 같이 갔다. 점심 초대였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드렸더니 목사님은 반가운 얼굴로  "어서와요, 박동주 피디". 그후 꽤 오랫동안 서운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엔 그 분의 그 실수가 인간에 대한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느껴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요즘은 그날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내 스스로 조금 부끄러워진다. 그 실수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인간적인 실수였을 뿐이다. 이제는 누군가 실수로 나를 신동추 혹은 신통주,라고 부르더라도 웃으며 <정확한 발음>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3. 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건 '역사'(History)이다. 저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 '역사' . 불교나 힌두교와는 달리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본을 좇아 역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역사를 매우 의미 있게 여기셔서 그것을 시작하셨고, 그 속에 들어오셨고, 언젠가 의미 있는 결말을 맺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견뎌 내야만 하는 부조리도 아니고 거부해야 하는 환상도 아니며 해탈해야 하는 영겁의 순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를 어딘가로 인도해 가기 위한 일련의 중대하고 반복될 수 없는 소중하고 유일한 순간들이다. 인류와 개인의 진정한 역사는 역사책이나 전기나 자서전에 수록된 정보와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역사는 영혼을 구원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역사는 자기 영혼이 위태로운 사람을 포함해 사람들 대다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일어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전환점은, 선거에 당선되거나 결혼식을 올린 날보다는 어떤 편지를 부치지 않기로 결정한 아침이나 눈이 소복이 쌓인 숲을 바라보던 오후일 수도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진정한 전환점은, 바퀴가 발명되거나 로마가 멸망한 날이 아니라 어느 유대인 부부에게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일 수 있다. (p.125)

4. 저자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비크너는 1926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작가로서의 이력을 쌓고자 뉴욕에 체류하던 중, 예수님은 신자의 고백과 눈물과 '큰 웃음' 가운데 신자의 마음에 즉위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했다".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글 1번에서 '뷰크너'로 표기 됐던 저자의 이름이 지금 글 4번에선 '비크너'로 바뀐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뷔크너’, ‘뷰크너’, ‘뷔히너’, ‘부크너’ 등 다양하게 불러왔는데 저자가 원하는 발음은 '비크너'이다. 위키피디아와 '프레드릭 비크너 페이지'(https://www.frederickbuechner.com )에도 '비크너'(pronounced BEEK-ner)로 소개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읽은 비크너의 책은  그의 설교문 37편을 모아놓은  『어둠 속의 비밀(Secrets in the Dark)』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 옮김, 포이에마)이었는데  - 방금 위에서 소개한 비크너의 회심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 소개문에 나온다 - 처음 읽으며 "이런 설교가 있을 수 있다니" 하며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도 북리뷰에서 비크너를 이렇게 소개했다. "비크너는 끝내 독자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 독자를 웃게 함으로써, 때로는 경악한 나머지 거의 기도하게끔 함으로써, 가장 좋을 때는 둘 다 하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 (비아)를 쓴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도 비크너를 언급하며 "단어의 힘을 망각한 나를 발견할 때, 나는 프레드릭 비크너를 읽는다"라고 말했다. 상투적인 설명과 설교에 지쳤다면 비크너 읽기를 추천한다. 비크너의 책에는 진부함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