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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3일

시편

어머니에게 시편 139편을 읽어드렸어요. 좋다고, 또 한 편 읽어달라고 하셔서 23편을 읽어드렸어요. 하나님은 평소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시는데, 고난과 고통의 시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외치시는 시기래요, 라고 c s 루이스가 한 말을 들려드렸더니, 아 너무 좋구나, 넌 목사 하면 잘했을텐데. 머리가 아프시다고 하셔서 지압을 해드렸더니, 아 시원해라 넌 한의사 하면 잘했을텐데.

2015년 9월 11일

어머니 입원

어머니가 입원하신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이틀째.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는데 이제 좀 익숙해졌다. 어머니는 금식이라 밥은 나만 먹는다. 신관 지하 식당 밥만 사먹다가, 구관 지하에 구내식당 있다는 거 발견. 더 싸다. 커피도 1층 스타벅스 몇 번 마셨다가 이제는 자판기에서 레쓰비. 점심 때 본관 지하 3층에 갔다. 아침에 입원실을 돌며 기도해주시던 중년의 여성 자원봉사자가, 각 종교별 기도실이 거기 있다고 알려주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3층에서 내리니 정면에 지하3층 약도가 붙어있었다. 노동조합,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건물 제일 밑바닥에 노동조합이 있다니. 잠시 마음이 싸해졌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우리가 성적인 존재라는 거, 노동하는 존재라는 거, 감추지 못한다. 종교실을 찾았다. 정말 종교별로 3개의 기도실이 있었다. 정말 잠시 고민하다가 천주교실의 문을 밀었다.

2015년 8월 29일

사본학에 대하여

집으로 오기 전 사무실에서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낼 카드를 썼다. (친구가 한 명 어제 다리 수술을 받았다.) 카드에는 병상에 있을 친구가 보면 힘이 될 시편 구절을 영어로 썼다. NIV 영어 성경을 보고 천천히 베꼈는데 베끼면서 성경 사본학, 특히 필사 과정 중의 다양한 변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짧은 두 절의 시편을 카드에 옮겨적는 과정에서 난 세 번의 실수를 저질렀는데: 제일 먼저 , my God에서 my를 빼먹었다. 그 다음 절에서는 영어단어 힘(strength)의 스펠링을 틀리게 썼다. 처음 st 다음에 e를 하나 더 넣었다. 마지막으로, 수술과 재활 기간 동안 힘내라는 안부 인사를 하고 날짜를 쓰려다보니 이런, 수술은 어제 였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오늘 날짜 대신 어제 날짜를 쓰고 내 이름을 썼다. 요한복음을 읽다보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일이 마태,마가,누가복음서와 다르다. 어떻게 이렇게 핵심적인 사건에 대한 일시 증언이 다를 수 있을까, 의아할 수 있다. 나도 의아하다. 하지만 난 이렇게 성서에서 불일치,모순,오류를 발견할 때마다 실망스럽거나 곤혹스럽기보다는 약간 흥분이 된다. 이렇게 불일치,모순,오류가 있는 ‘불완전한’ 책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정하신 그런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있구나. 불완전함에 자신을 내맡기는 신이라니! 그 분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땅에 오실 때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성육신하셨고, 자신을 계시 하실 때는 불완전한 매체, 불완전한 저자, 불완전한 기억력, 불완전한 문장(력) 등을 용인,감수,사용하시는 걸까? 신비롭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겸손하신 하나님,이란 기독교 교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2013.8.29.)

2015년 8월 26일

2년 전 일기 - 그녀와 처음으로 통화하다

오늘 화도 한 번 났지만 그래도 기쁜 일도 있었다. 내가 공들인 섭외 대상자 - 아직 기획안은 통과하지도 않았다;; - 낸시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직접 통화하기는 처음이었는데 느낌이 참 좋았다. (제발, 그녀도...;;) 오늘은 인사만 했고 내일 다시 통화하기로 했다. 전화 후 흥분이 돼 1층으로 내려가 생수를 한 병 사서 마셨다. 사무실로 올라가 미국에 기쁜 소식을 메일로 전했다. 프로그램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낸시랭을 알게 돼 좋았다. 퇴근 후에는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를 읽었다.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를 다 읽은 후에는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김용규 지음,휴머니스트)을 읽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누군가 아들의 맘을 상하게 해서였는데, 퇴근길에 지하철을 기다리며 , 즐거운 것과 즐겁지 않은 것 모두 경험하는 게 아이들을 더 균형잡히게 하고, 성숙케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다. (2013년 8월 26일).

2015년 8월 12일

19세의 여름

1984년 여름 대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왔다 대학 정원외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서대문역에 있는 단과반 서울학원을 끊었고 수학의 정석을 샀고 고전 국어를 공부했다 19세의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그렇게 보냈다 열아홉 둘째가 오늘 미국으로 돌아갔다 바쁜 가운데도 둘째에게 한국 음식을 사주며 좋은 이야기 들려준 선후배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2015년 6월 24일

100일 기념 야간 운동

집에 와서 스쾃과 플랭크 운동을 하려는 순간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메모지를 꺼내 계산을 해봤더니 오늘이 정확하게 세바시팀으로 온지100일째 되는 날. 100일 전 , 59kg. 현재, 62.15 kg.






2015년 6월 18일

TV 프로그램 렛미인

외모에 대한 이 사회의 <잘못된> 편견과 차별과 기준 때문에 여성들이 고통 당하는 것이라면, 잘못한 것 없는 여성을 데려다가 그녀를 '고칠 게' 아니라, 잘못 생각하고,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을 데려와 <그를 몇 주에 걸쳐 고치는 게> 맞다고 생각함.

2015년 6월 1일

표절을 저지르고

1. 표절을 저지르고 나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발각 되는 게 아니라 안 들키고 남은 평생을 사는 것이다. 존경 받으며.
2. 다윗도 '표절'을 했다. 표절을 하되 주도면밀하게 했다. 페이지를 바꾸고, 각주를 바꾸고, 본문의 배치를 조정했다.
3. 선지자가 형광펜으로 야비한 표절 부위에 줄을 쳤을 때, 신하들 앞에서 줄을 쳤을 때, 다윗은 선지자를 미워할 새가 없었다.
4. 어쩌면 다윗의 전 생애에서 이 순간이 가장 큰 은혜가 작용하는 순간이었단 생각이 든다.
5. 표절을 시인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모른다. 존경을 받을지, 손가락질을 받을지. 이어지는 상황은,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나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존경도, 손가락질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 이미 그는 ㅡ 아니, 우리 죄인들은 ㅡ 돌아섰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분과 함께라면 그 이후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2015년 5월 28일

『어둠 속을 걷는 방법』(바라라 테일러 지음, 포이에마 )을 읽고

1. 저자는 ‘어둠’에 대한 모든 것을 살펴 본다. 물리적 어둠, 정신적 어둠, 영적 어둠 등등. 어둠 덕후,라고 해도 될 듯. 저자는, 교회가 그동안 밝음만 너무 강조하며, 밝은 신앙과 밝은 인생에만 하나님이 머무신다고 가르쳤다고 불평한다. (한 대목 인용하면)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 1:5). 이런 가르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둠의 존재를 아예 부인하거나 충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영성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영성을 ‘전적 태양 영성full solar sprituality'이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임재,믿음의 확실성,만사를 하나님이 인도하심,확실한 기도 응답 등 신앙이 주는 유익을 강조하는 교회라면 대개 ‘전적 태양 교회’라고 보면 된다 >> (p.16). 아, 쏠라 영성이라니! 큭큭.

2. 일곱 살에 시력을 완전히 잃은 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두 부모는 << "자기 아들이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들이 앞을 못 보게 되어 ‘밤’에 갇혔다고 말하지 않았다. 영적 세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의 사고 직후 이렇게 말했다. “뭔가를 발견하거든 꼭 말해주렴”. >> (p.115). 내가 두 아들에게 해주는, 기독교적인 용어로만 가득찬 말과 어떻게 그렇게 다른지. 나도 이 아버지처럼, 종교적인 용어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인생의 조언해줄 수 있는 애비 되고 싶다.

『신약의 윤리적 비전 』(리처드 헤이스 지음, IVP)을 읽고.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을 읽었다. 이혼과 동성애와 낙태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는, 성경을 읽는 방식에는, 무척 공감이 갔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모든 전쟁에 반대해야 하며, 살면서 어떠한 물리적 폭력도 행사 해서는 안된다, 는 주장(성경해석)을 읽을 때는 자꾸 내 입에서 "말도 안 돼"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그는 울면서 적장의 목을 베었다" 라는 이 친숙한 동양적(?) 정서를 전혀 이해,수용 못하는 성경 해석, 내게는 좀 충격이었다. 최선을 다해 서로 죽여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서로 존경하는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