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56세가 되는 오늘 아침에도 난 장모님댁 뒤에 있는 불곡산을 오르며 내가 3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살기 위해> 불교 혹은 무속의 '어떤 말(가르침)'을 간절히 붙잡으려 했을까 생각해봤다. 종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미천한 내 귀에까지 다다른 말은 가르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런 수준의 것이었을 것이다. (내용과 분량과 전달 방식 모두에서. 전달자는 아마 주막집 주모나 머슴, 굿판의 무당이기 쉬웠을 것. 술주정에 가까운 형식을 통해. ) 주인으로 부터 모진 고문을 당할 때 내가 떠올린 말은 '마음이 정하면 악귀도 어쩌지 못한다' 였을까. (그 말은 내게 힘을 주었을까, 무력감을 주었을까). 자기 것 챙기기에 바쁜 하루하루 삶 속에서 내가 나를 다잡기 위해 가끔이나마 떠올린 말은 '베푼대로 돌아온다' 정도였겠지? (나는 불곡산 정상에 있는 정자에 도착했고 내 상상은 이어진다.) 정상에 있는 암자에 다다른 나는 노승에게 주인 마님이 전하라한 서찰을 건네고 돌아서기 전에 물 한 잔을 얻어 마신다. 웬일인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노승이 말을 건넨다. "깊은 산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뇨?" 내가 무엇을 보았을까? 앞길이 보이지 않는 종의 인생길. 나는 무엇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스님. 오는데 새 한 마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 걸 봤습니다. 딱딱딱딱 나무를 쪼는데 유심히 바라보니까 제가 하는 망치질과 달랐습니다. 저는 못대가리를 망치로 한 번 치고는 다시 치기 위해 망치를 들어올려야 하는데 제가 본 새는 신기하게도, 조금의 시간 틈도 없이 나무를 딱딱딱딱 연이어 쪼더라구요. 신기해서 한참이나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 새가 갑자기 멈추고는 더 깊은 숲으로 날아갔습니다. 다시 가던 길을 가는데 얼마쯤 걷다가 작은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를 바라보던 그 30분, 나는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구나. 참 오래간만에 평안했구나. 그런데 스님, 평생 새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는 거겠지요?" (2021.12.28)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폴 니터 지음, 클리어마인드) #2012년4월8일에 1독. 지금 2독 중. #300년 전의 나와 다르게 경전과 주석을 양 손에 쥐고 있는 지금의 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 올 해 생일
2021년 12월 28일
2021년 10월 13일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1.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사람이 있다. 책에도 그런 책이 있다.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다.) 나는 서평을 쓸 때, 그 책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것>을 소개한다. (저자가 내 얘기 들으면 "아니 왜 그거를?"이라고 어이없어 할 수도 있고, "아니,당신도 거기서!"라고 감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 것은 <모른다>라는 단어였다.
2. 그냥 몇 군데 살짝 맛보기로 소개하면 :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에 책을 편찬하고 모으는 일과 책을 쓰는 일의 역할 구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언서의 저자가 실제로 누구였는지) .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구약 저자들의 직업을 이야기하며). "(거의) 알지 못합니다" (누가 구약을 썼는지).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4개 복음서들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많은 경우 답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저자의 확정과 경전의 인정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에 대해 ). 그런데, 이 모른다라는 단어와 더불어 소개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저자가 이 모른다라는 말을 할 때의 <톤>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게 핵심이다). 저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5>라고 말할 때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이제 독자들은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의 명예 교수인 저자의 <여유있고 자연스럽고 당당한> 톤에 취해(?), 평소(?)와는 달리 한결 넉넉해진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을 누가 썼나, 언제 썼나,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고해서 내 기독교 신앙이 꼭 흔들리는 건 아닌가봐? 내 기독교 신앙이 꼭 부끄러운 게 되진 않나봐? 5>
2021.10.13.
신동주
<서플먼트>
(1) 『성서의 형성』은 200쪽이 채 안 돼 한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기에, 성경 통독을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무척 유익할 듯. 나는 『최신구약개론』(레이몬든 딜러드, CH북스)와 『구약성서탐구』(버나드 앤더슨,CLC)도 읽으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큰 그림을 <빨리>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한편,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두 가지 그림 이미지에 무척 끌림. 첫번 째는 식물 이미지. "성서는 어떤 규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듯, 성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나 성서가 되었습니다". 두번 째는 이메일 이미지."우리는 책이라고 하면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기승전결이 있으며, 시종일관 같은 문체로 기록[된] (...) 물체를 떠올리지요. 고대 세계의 책은 오늘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여러 이메일을, 이것들이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왔음을 숨기고 하나로 묶어 단일한 형식으로 인쇄한 모음집 정도가 될 것입니다."
(2) <모른다>라는 단어 외에 한 단어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난 망설임 없이 (이번에는 '흥분'보다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 단어인데) <오늘날>을 추가 하겠다. 출간물 하나하나에 일일이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를 부여하고, 저자 역자 발행인을 각각 기록하고, 1쇄와 2쇄 날짜를 구분하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전승되어 온 본문에 종종 후대의 이름 모를 인물들이, 원저자와 현대 독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절과 구와 장을 과 장을 첨가하는 행위가 진본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임.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오늘날 문화에서는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p.58). (이 단어 역시 이 책에서 끊임없이 등장). 이 책에선 아니지만 G.K. 체스터튼 역시 구약의 욥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함 :
"이 서사시에서 어떠한 부분이 원저자가 계획하였던 것이고 어떠한 부분이 훨씬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한 토론이 이어져 왔다.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불일치하는데 - 사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학자들의 주된 업무이긴 하다 - 전반적인 연구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실제로 어떠한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면, 산문으로 기록된 서론과 후기는 [확실히]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젊은이 [엘리후]의 연설과 마지막의 [욥의] 회개가 후대의 첨가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든지, 이 문제에 관하여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일반적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어떠한 고대의 예술 작품을 다루고자 한다면, 고대의 저작이 점진적으로 [즉 후대에 계속적으로 첨가되었다는] 쓰였다는 사실이 이 저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건축되어 왔던 것처럼, 욥기도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건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구전 시가를 쓴 사람들은, 실제 연대와 실제 저자에 대해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원저자와 원연대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그러한 중요성이란 모든 면에서 근대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개인주의의 창조물인 것이다. (...)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설사 다른 사람들이 어떤 구절을 이 저작에 삽입하였다 하여도, 그 당시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과 같은 개인주의적 시대에 그러한 행동이 불러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부족이 창조한 서사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부족의 사원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 부족 전체의 창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한다면, 욥기의 서문과 후기,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이 원래의 저작이 쓰인 이후에 삽입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삽입이 근대의 개인화 혹은 개별화된 책에서 이루어지는 삽입처럼 책을 명백히 위조물로 만든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삽입을 조지 메러디스가 쓴 책에서 이후에 실제로는 그가 쓰지 않은 한 장을 발견한 것과 같이 취급해서도 안 되고, 입센의 희곡에서 윌리엄 아처에 의해 교묘하게 삽입된 장면 일부처럼 간주해서도 안 된다. 일리아스나 욥기처럼 오래된 시를 만들어 낸 옛 시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전통을 언제나 지켜 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을 자기 자식이 추수하도록 물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쓰던 시를 자기 자식이 마무리하도록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통일성(Homeric unity)’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리아스는 한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백 명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통일성이란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 당시에는 한 도시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마치 내전 중에 있는 한 도시인 것처럼 보인다." ( '카이로스: 비평루트'가 번역한 G.K.체스터튼의 욥기 '서론' 중에서. 번역 전문은 https://cairos.tistory.com/215 에서 확인 가능.)
2021년 10월 11일
『성서, 역사와 만나다』(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비아 VIA)를 읽고.
1. 성경 말씀 중에 유독 <한국>에 와서 고생 <이빠이> 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구절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면". 표절,성폭력,횡령 목사들이 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다시 <설교>하는 모습 볼 때면 나 환장하겠다. ( 이렇게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데> 사용된다는 건, <성전을 정화>하신 분을 따르는 조직에서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두 번째 구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성경 본문의 불일치나 모순을 <살펴보며> (이를 통해) 성경(과 신앙)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들어가 보려고> 질문 하나 할라치면 바로 당장 등장하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는 디모데후서 말씀을 인정하면 해결되는데, 넌 그걸 안 믿는구나?". (나 두 번째로 환장하고 슬픔 ㅠㅠ).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다면>, 이 <영감> 구절은,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더 깊은 세계로의 진입을 <막는다>. 오늘은 후자에 대해서만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참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세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먼저 공유함.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디모데후서 3:16)"의 영어 번역은 이렇다 :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NASB) (2)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은 포함되지 않는다. 디모데가 디모데후서를 받을 당시 신약성서라는 책은 아직 없었다. <모든 성경>은 우리가 흔히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을 지칭. (3) 유대인들은 이 히브리 성경을 <타낙>이라고 부름. 유대인들은 성경 속 책들을 세 종류로 구분. 토라(율법서),네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 이렇게 셋인데, (그래서 성경을 호칭할 때) 이 셋의 앞 부분을 따서 타낙(혹은 타나크)라고 불렀다. 이제 <모든 성경>과 <영감>과 <타낙> 이렇게 세 단어가 <제대로> 결합될 때 - 기름 목사와 달리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데 - 우리 앞에는 <놀라운 결론>이 주어진다. 정말이다.
2. 히브리 성경의 원래 본문은 모음은 하나도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음들로만 이뤄져 있다. 우리 한글로 예를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ㅅㄴㄷㅇㅈㄴㄴㅁㄴㅁㅇㄷㅁ ㄹㅅㄱㅎㅂㄴㄷㅋㅋ.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간단히 말해, 히브리 성경은, 독자들이 추후에 모음을 추가로 집어넣지 않고서는 <읽어 낼 수> 없는 글이라는 뜻이다. 모음을 추가해야, 비로서 의미 있는 문장이 생성된다. 위에서 예로 든 한글 자음들에 (제대로 된) 모음을 추가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된다: "신동주는미남이다미리사과합니다ㅋㅋ" 책에는 모음이 없더라도, 읽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모음을 집어넣어 주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음의 종류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음을 넣으면 다른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위의 똑같은 자음들이, 다른 모음들을 넣을 경우) "신동주너는왜이렇게사냐ㅋㅋ"(라는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독자들이 <어떤 모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독서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타낙 본문에 히브리어 자음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만을 전달 받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히브리어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서는 모음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아주 이른 시기부터 타낙의 자음에 어떤 모음이 가장 적합한지를 논하는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렇게 전달된 모음은 본문으로 기록된 성서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기억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7)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한 말은, 사실은 이렇게 풀어써야 할 것이다 : "모든 <기록된 자음>과 (모든) <기억된 모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방금 내가 한 이 말은 사실 펠리칸이 한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교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타낙, 즉 구약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문서'라면 성서 본문에 기록된 자음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남아 한참 후에 기록된 모음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영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즉 구전 전승 역시 기록된 본문과 동일한 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128)
3. 이제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역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글을 맺으려 한다. 나는 영어로 본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가 영어책에선 "from teacher to pupil through countless generations"이라고 나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세대>. (그런데) 그 많은 세대, 긴 시간 중에서, 이사야처럼 <높이 들린 보좌>나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 <너를 예언자로 세웠다>, <아닙니다.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라고, 예레미야처럼 직접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의 밀당 할 수 있었던 순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 형성의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은, 환상을 보는 시간이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다음과 같은 선생과 학생들 사이의 <평범한 대화>로 채워져 있다고 본다 : 이 글자는 뭐라고 읽나요? 알레프라고 읽는다. 선생님 '바브'와 '요드'를 쓸 때 획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되나요. 오늘은 드바림(신명기)의 첫 장을 암송할 것이다. 테힐림(시편) 22편에서 '내 손과 발을 거칠게 다루었습니다'는 '내 손과 발에 구멍을 뚫었습니다'라고 읽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요? 스승님이 사무엘하 15장 7절을 '4년'이 아니라 '40년'으로 읽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답하던 스승과 제자들이 죽는다. 자녀들이 태어나 다시 처음부터 글을 배우고 스승들에게 질문을 한다). 하고 싶은 말,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만약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외웠다면, 서너 세대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수 백 세대, 수천 년 이어졌다는 것은, 그 내용을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무언가를 후에 누군가에게 (다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충분히 묻는다>이다. (지금) 충분히 묻지 않으면, (후에) 충분히 답변하지 못하고, 구전 전승은 <끊긴다>. 오늘 날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본다. 온전한 이해로 이끌어주는 첫 단추 의문과 질문을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의문과 질문을 무시하는 것은 비-영감적, 비-타낙적, 비-모든성경적이다. 한마디로 비-디모데후서적이다.
2021.10.11.
신동주
<서플먼트>
1) 시편22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은 각각 마소라 사본과 70인역에 등장.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9에서 인용함.
2) 줌에서, 오프에서, 성경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나누고, 신학 서적을 구매해 함께 읽으며 궁금증을 풀어가고, 지인들끼리 모여 신학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이 모든 비-이사야적인 시간들을 영감의 원천이신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시기를.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음).
2021년 9월 26일
안식년 휴가 중 몇 권의 구약 성경을 읽고.
1. 이곳 미국에 와서 잠시 지내는 동안 오래간만에 성경을 읽었다. 나이가 있다보니 전도서를 먼저 읽었고 (아주 좋았음), 다음으로 어디를 읽을까 잠시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사무엘상을 폈다. 그렇게 사무엘상,하를 읽고, 이어서 열왕기로 넘어가려다가 사무엘상,하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 다시 한 번 더 읽고, 그리고 열왕기상,하를 읽고, 이어서 예레미야를 읽고 있는 중. (예레미야를 선택한 이유: 아주 흥분해서 읽었던 열왕기하의 마지막 사건들이,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와 겹치기에 스토리가 잘 이어지기도 하며, 사무엘/열왕기와는 다른 장르(즉, 예언서)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음.) 사무엘서를 읽기 시작할 때 결심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 "영적인 교훈을 깨달으려고 하지 말자". 2년 전에 로버트 알터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그 책에서 하는 말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알터는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 "성경도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구약을 읽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문학적 재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지면 알터의 <할애비>가 와도 재미를 경험하지 못할 뿐이다. 다행히(?) 구약(이라는 문학)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은 편이기에 (도대체 내가 누구관대 이런 말을 ㅋ) ,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층위에서 <문학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아래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문학적 재미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미리 말하지만, 내 재미가 누군가에게는 노잼일 수도 있겠다. 흑흑.
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참 인상적인 책 제목이 있다. 이 제목에 라임을 맞춰 내가 사무엘서 읽은 소감을 표현해 본다면: "사무엘서는 재미있는데 다윗은 맘에 안 들어". 나는 너무 능수능란한 사람, 빈틈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데 다윗은 (소름끼칠 정도로) 권력 유지(Power Yuji)와 전쟁,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수였고 능란했다. 사람을 죽일 때도 그냥 죽이지 않았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이긴 다윗은 "포로들을 줄을 지어 세운 다음에, 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매 석 줄 중에 두 줄은 죽이고, 한 줄은 살려주었다." (사무엘기하 8:2)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다윗은 포로들을 <그런 식으로 죽이고(두 줄)>, <그런 식으로 살렸고(한 줄)>, 나는 <그런 다윗>에게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3. 그럼, 사무엘서에서 인간적으로(?) 제일 정이 갔던 사람은? 그 사람은 아히도벨이었다. 아히도벨은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다윗이 죽인 우리야는, 그의 손녀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 (아름다운 손녀, 용감한 사위를 둔 아히도벨은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의 탐욕스러운 사내가 나타나 그의 손녀에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사위까지 <살해>한다. 가해자는 (전자발찌도 차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녔다. 그래서였을까, 나중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압살롬 편에 선다. 그리고 (도망간) 다윗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략을 냈다. 평소 그가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사람들은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삼하 16:23). 어떻게 된 일인지 압살롬이 이번에는 그의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신이 개입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주님께서 이미 압살롬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좌절시키셨기 때문이다." (삼하 17:14). 이제 사무엘서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사건이 펼쳐진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 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 (삼하 17:23). 그가 목을 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을 깊은 정적의 시간. (사건은 바로 전에 일어났다. 아히도벨이 <매달려> 있는 줄은 지금도 <여전히>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아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종들이 마당에서 일하는 건강한 소음이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와 방 안의 정적과 섞인다. 비록 역모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시도해 봤고, 집의 대소사까지 다 정리하고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 남자. 방 안의 공기는 (적어도 내게는) 무겁다기보다는 차라리 평온하게 느껴진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 이야기가 내게 깊이 각인 되었을까. 아히도벨이 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떠난 시점은, 압살롬이 다윗성 점령에 성공했을 때. 아히도벨은 자신 편의 군사력이 가장 왕성한 그 때, 압살롬의 필패를 미리 <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요즘 내가 <내 끝>에 자주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4. 열왕기상 22장에는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미가야 예언자 사이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크게 두 번>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두 번 놀라기를 바란다.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고 믿는다). 먼저 상황 설명을 하면: 아합 왕은 미가야 예언자를 싫어했다. 이유는, 늘 그에 대해 <안 좋은 예언>만 해서 그렇다. 지금 전쟁을 막 시작하려는 왕이 미가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나는 속으로) 늘 안 좋은 예언만 한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예언을 하겠지, 라고 나는 합리적인 예상을 했다. 웬걸, 15절에서 미가야는 "올라가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라는 축복의 예언을 한다! (여기가, 나의 첫번 째 놀람) 그런데 이어지는 왕의 대답은 방금 전 예언만큼이나 의외였고 나는 두번 째로 놀랐다. 왕이 한 말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다. "너 왜 지금 진실을 말하지 않냐?" 왕은 "역정"(공동번역)을 낸다.(당황한 나는) 15절의 단어 하나 하나에 주목하며 서너 번을 읽었지만 <역정을 낼만한 건덕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번뜩 깨달았다. 미가야 예언자는 15절을 <조롱하듯이> 말했던 것이다! 아합 왕은, 그 예언(이 조롱이라는 것)을 제대로 읽어냈다. (그랬기에 그는 미가야를 옥에 가둔다). 나는 몹시 흥분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낭독하거나 암송할 때, 낭독자나 암송자는, (성경에) 조롱하듯이 읽으시오 라는 지문(地文) 없어도, 이 부분을 조롱하듯이 읽거나 암송했겠구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이 사실이 너무너무 신기했다! ) "주님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15절)"라고 <아무리 분명하게> 성경에 쓰여 있더라도, (그리고) 이 부분은 조롱입니다, 라는 지문이 없더라도, 우리는 기존 문자를 읽을 때와는 <다른 톤>으로 해당 본문을 읽어내야 할 경우가 있는 거구나! 성경은, 우리가 당연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고 있구나! (나 여기서 괜히 깊은 감동 받음. 흑흑). 혹시, 신약에서도, 내가 지금 읽는 톤이 아닌 다른 톤으로 읽어주길 기다리는 구절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그 구절들은 어디일까.
5. 예수님은 구약이 "자기에 관해" 쓴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눅 24:27) 구약의 역사와 이야기는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힐끗) 그 연결점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모두 내가 보기에는 '시작은 좋았으나 끝에 가서는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역사라는 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12:7)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백성이 정신 차리고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나 이스라엘을 원수에게 아무리 <넘겨 주어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들을 <넘겨 주신다>. 이렇게 <백성을 넘겨주는> 구약은 <아들을 넘겨주는> 신약과 이어지고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엠마오 가던 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다시 보니, 여기서도 <넘겨 주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0).
2021.9.25.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신동주
<서플먼트>
1) 이 글의 초반부에 언급한 <문학> 관련 이야기는 로버트 알터의 『성서의 이야기 기술』 (원제: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 39쪽에 등장한다. “성서도 문학[이라고] 본다면, 문학적 분석의 틀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 모든 다른 접근법은 (...) 성서 이야기가 지닌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영적인 교훈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문학적 재미만은 놓치지 말자. 이게 내 가이드라인이었음. 내가 문학적 재미를 놓친다면, 계시의 통로로 구태여 문학을 선택했던 성경 저자들이 몹시 서운해할 것 같았음.
2) 예레미야서를 읽다보니, 적혀 있는 문자를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른 톤>으로 읽어내야 할 상황이 그 어떤 책보다 자주,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음. 예를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쳤다" (15:6)는 어떤 톤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지문(地文)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거 같음. 당신의 지문이 무엇일지 궁금함.
2021년 9월 22일
45세 시절의 조용기 목사 설교(1981.2.25. '겉옷을 벗어 버리고' )를 듣고.
1. 한 명의 목사가 세상을 떴다. 향년 86. 유튜브에는 '조용기 목사 45세 때 설교' 라는 동영상이 떴고 나는 한번 끝까지 들어보았다. 나보다 어린 나이의 한 중년 사내가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었다. 한번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적은 있었으나 (설교 제목이 '겉옷을 벗어버리고'였고, 조목사는 설교 도중 양복 웃도리를 벗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거기서 웃었다), 내 고개는 설교 내내 주로 아래 위가 아닌 좌우로 흔들렸다.
살면서 내가 그에 대해서 꽤 진지하게 숙고했던 적이 <두 번> 있다. 그리고 두 개의 <결론>을 내렸다. 오늘 (대단치 않은, 개인적인) 그 두 결론을 나누고자 한다.
2. 2002년 월드컵 직후였던 것 같다. 교회에서 보내온 그의 설교를 편집하고 있었다. (피디들은, 교회에서 설교 파일을 보내주면, 규정된 방송 시간을 초과하는 분량이나, 방송법 법에 저촉되는 내용 등을 편집해서 잘라내고 내보낸다). 설교 중에 대략 이런 말이 등장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한다).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그런 성장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그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람을 만나더라도 규모가 되는 교회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제 후배 목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교인 수가 적은 목사들 말고, 어느 정도 교회 규모가 되는 목사 동료들과 어울려라." (설교에서는 교인 숫자까지 말했으나, 그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적지 않음).
3.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멘붕에 빠져 편집기를 멈췄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질문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게 맞나?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 그러나 하나님 판단은 내 판단과 다르니, 내가 그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구원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다음 한 가지는 비록 신 앞이지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적인가?"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신 앞에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후, 누군가 내게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구원 여부에 대해선 제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20여년이 흘러도 내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4. 이제, 두 번째 이야기. 다들 잘 알다시피,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요한3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 한번은, 그동안 내가 공부한 신학을 근거로 해서 그의 삼박자 구원을 한번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비평'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함). 평신도로서 그간 신학책을 읽으며 배운 것을, 삼박자 구원론을 살피는 데 <적용>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확인하고 거기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신학책에서 강조하는 첫번 째 원칙이었다. 시(시편)를 읽을 때는 시로 읽어야 하고, 묵시(계시록)를 읽을 때는 묵시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한3서는 편지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 그렇기에, 요한3서는 편지로, 편지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이 편지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을 편지로, 편지처럼, 읽거나 해석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5. 그럼 이 편지에서 삼박자 구원론의 근간이 되는 센텐스는 어디에서 등장할까? 놀랍게도 그 구절은 곧바로 2절에 나온다. 즉, '누구에게(1절)' 바로 다음에 나온다. 대개의 편지에선, 우리가 <의례적인 인사>라고 일컫는 문장이 <그 위치>에 등장한다. 이제, 작은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정말 전형적인 <인사>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조카야), 네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너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개역개정과 현대인의 성경을 혼합).
6. 나는 요한이 상기 편지를,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을 조기 은퇴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삼겹살 고깃집을 개업하는 성도에게 (지금) 쓰고 있다면, 2절은 아마 이런 모습을 띠지 않았을까 싶다 :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사장님), 사장님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이번 고깃집 완전 대박나고, 사모님과 두 분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인사에는 좀 오버하는, 과장된 축복 멘트가 들어가도 괜찮다. '대박' '돈벼락' 같은 말이 들어가도 괜찮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원래 인사가 그런 것이다. 다들 감안해서 듣는다.)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의) 문제는, 어느 정도는 <흘려 듣고> 마음만 받아야 하는 인사말을 <진지 빨고> 들으면서, 자신의 신학을 그런 (한갓) 인사말 위에 세웠다는 데 있다. 그러한 <진지 빤 신학>에서는 이제 '대박'은 진정한 믿음의 표징,증거,의무가 된다. (대박과 십자가를 연결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결론을 정리하면: 인사말은, 듣고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본격적인 신학을 세우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다른 말씀, 다른 심오한 말씀들 많잖아! 왜 66권 수많은 말씀 중에서 하필 거기야!)
2021.9.20.
신동주
2021년 9월 7일
<스토커>(Stalker ,1979 )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를 보고.
1. 영화 두 편을 봤다. 둘 모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1932~1986)의 영화였다. 인터넷 서점에선 DVD로도 판매하고 있지만 (이 말은, 한글 자막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기에 유튜브로 봤다. (이 말은, 러시아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봤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 영화 모두 런닝 타임이 3시간). 나는 영어 이해가 빠르지 않기에 대사 하나 등장할 때마다 포즈 버튼을 누르고는 (모르는 단어 영어 사전에서 찾고)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이 말은, 한 영화당 내가 포즈 버튼을 누른 횟수가 최소 백 번은 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건 영화 감상이 아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음. 인정.) 영화 감상이 아니었어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래 그 이유와 결과를 간단히 적는다. (내 영화평이 늘 그렇듯이 본문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 등장 않는다. 각주에는 나온다).
2. <스토커> (Stalker) / 1979
2019년 5월28일 화요일 오후 6시, 나는 회사 업무가 종료되는 순간,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 되는 고려대 베리타스 포럼에 접속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강연 주제는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였고, 남자 한 명이 왼쪽에 서서 동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 잊혀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강연 초반에 소개한 영화 한 편이었다. 스미스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를 소개했다 : "<스토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세 사람이 어딘가로 갑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은,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줍니다. 누군가 입으로 말하는 바램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죠. 문제는, 그 세 사람이, 그 방 앞에 도착해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정말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3. 2년 전에 들은 이 짧은 영화 줄거리는 이상하게 듣는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입을 통해, 페북을 통해, 경건해지고 싶습니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기고 있습니다, 비아에서 나온 『사막의 지혜』를 읽고 있습니다, 참 멋진 말들을 많이도 해오고 있는데, 막상 그런 나는, 내 입술의, 내 페북의 갈망을 현실화 시켜준다는 그 방, 더 룸(the Room)에 <들어가길> 원할까? 페북에 그렇게 종교와 경건에 대한 포스팅 많이 하는 나이지만, 일단 <지금>은 못 들어간다. (누가 뒤에서 실수로 밀까봐 두려울 정도다). 나 또한 내 깊이 내재한 갈망이 무엇인지 미리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의자에 앉자, 내 앞에, 벌거벗은 남녀 몸뚱아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적거리며 꿈틀대는 세상이 영원히 펼쳐진다면? 내가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어 영원히 꿈틀대(야만 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확실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정욕을 극복하는데 혹시 고행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수도사처럼, 그래서 자기 등 채찍으로 밤마다 쳤듯이, 나는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라는 <고행>을 계속했다. 마치 이 고행 통해 내 갈망 정화되기라도 하듯이. (맞다. '영화 감상'이라 불릴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행의 효과는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속 세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갔을까,에 대한 답변은 생략.
4.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 1966
이십 여년 전, 라디오 방송사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시절, 녹음기 하나 들고 서울 전 지역을 돌아다니던 시절, 내 지갑 속에는 내가 볼펜으로 쓴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한 말이었는데 힘들 때면 꺼내 읽었다. "영화 감독으로 산다는 건 레드카펫 위를 걷고 카메라 플래쉬 받으며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감독으로 사는 건, 촬영 장비를 지고 비오는 새벽 집을 나서는 것이다." 화질 안 좋은 VHS 비디오로 그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본 건 그 무렵이었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삼위일체','블라디미르의 성모' 같은 이콘(icon)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15세기 러시아 화가이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거세게 불던 바람, 무너진 성당 벽에 기대선 남자의 긴장한 얼굴 표정은 또렷이 기억난다. 40대와 50대를 사는 동안 문득문득 흑백 영화 속 그 <거친 바람>이 떠올랐고, 얼마 전 영화평론가 C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중, 그 거친 바람을 <다시 맞고> 싶어졌다. 내 삶의 쭉정이를 다 날려보내고, 그리고 남는 내 삶의 알곡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남을까).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유튜브를 통해 부는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다시 불기를 (역시) 백 번 정도했다. (자막 ㅠㅠ) 런닝 타임 3시간 동안 안드레이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안드레이가 붓을 쥐고 있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다 보고나니 그건 결점이 아니었다.
2021.9.6.
신동주
<서플먼트>
(*스포일러 등장)
1)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보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원작이 있는 경우 무조건 원작부터 본다, 는 내 오래된 원칙 지키기 위해 SF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 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 (두 형제는 소비에트 시대 작가로서 원작은 1972년에 출간). 출판사 소개문을 발췌, 인용하자면 : " 『노변의 피크닉』은 외계 생명체나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을 다루는 ‘퍼스트 콘택트’ 유의 소설에 속하"며, "불법적으로 ‘구역’(the Zone)에 숨어들어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물체들을 찾아내고, 그걸 팔아 살아가는 ‘스토커’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와 비슷한 동기를 갖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장편 소설에 <그곳은 우리의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라는 식의 문장이 단 일 회만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음.(현재 미국에 와 있어서 소설 속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 못하는 것을 양해 구함). 소설 속 그 한 줄의 문장이, <스토커>에서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 더불어, 이 소설을 통해 '스토커'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좇아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잠입자,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됨. 소설과 영화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임.
2) <스토커>의 주인공 세 사람(스토커, 교수, 작가)은 두려워서 결국 '더 룸'에 들어가지 못함. 세 시간 내내 세 사람 꽁무니 졸졸 따라갔던 <피디> 한 명도 그 방 문턱에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남. (도대체 인간 중에 누가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이런 생각이 듦.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방에 들어간 거 아님? 너무 커서 그렇지, 그 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님? 왜냐하면, 각자가 갈망을 뿌린대로 거두는 모습을 이 방 안에서 매일 목도하고 있으니. 만델라. 이명박. 트럼프. 그레타 툰베리. 윤석열. 신동주...열매가 맺히는 속도만 다르지, 그 방과 이 세상은, 어쩌면 같은 공간일 듯. 그래서 결론: 방 안으로의 진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
3)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열기구가 추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총 9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짐. 그 중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세 개만 아주 짧게 소개하면 : (a) 젊은 청년이 영주를 위해서 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맞아 죽을 수 있음. 드디어 종을 치던 날, 몇 년째 입을 닫고 묵언수행해 오던 안드레이가 입을 열고는... (b) 타타르족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을 폐허로 만듦. 끔찍함.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름).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까지 들어와 사람들을 도륙하고, 교회의 보물을 찾겠다고 끓는 물을 사람의 입에 부음. 그런 행동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함. 장수로 보이는 듯한 이가 말을 탄 채로 성당 벽을 바라보며 묻는다. "저기에 누워 있는 아기는 누군가?" " 예수입니다" "아기 옆에 있는 여자는?" "동정녀 마리아 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면 동정녀가 아니지" 성당을 불태우고 타타르족이 떠난다. 이제 안드레이는 벽에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 누군가에게 아무런 영향 미치지 못한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화가는, 이제 <어떻게> 그려야 할까. 아니, <그려야 할까>. (c)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초반부에 나옴. 안드레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키릴이, 성상화(聖像畫)의 대가 테오판 그릭을 만나는 중. "나와 함께 일해주겠나?"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요. 제 공동체와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저를 지명해주십시오" (당시 안드레이가 더 인정 받고 있던 상황). "그러지". 얼마 뒤, 테오판 그릭이 보낸 전령이 수사들이 다 모인 앞에서 테오판의 후계자를 발표한다. "안드레이!"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의 키릴. "아, 머리가 빠개지는 거 같군". 전날 밤 술을 잔뜩 마신 듯한 전령은 말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함. 난 이 부분을 여러번 돌려봤는데, 만약, 테오판은 키릴을 생각했으나 숙취에 시달리던 전령이 이름을 착각한 것이라면? 이 도입부가 참으로 매혹적).
4) 실존 인물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실제 그린 성상화(聖像畫, icon)들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 내게는 성상화들을 <즐겨보고> 싶은 로망이 줄곧 있어왔음. 이콘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내가 짐작하기론) 중세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중세인의 태도가 내 삶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근현대인인 내게는 그것이 결여돼 있는 듯. C.S. 루이스는 『폐기된 이미지 - 중세 세계관과 문학에 관하여』 (C.S.루이스 지음, 홍종락 번역, 비아토르)에서 중세인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는 (...)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들은 무엇보다 "올려다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함. 누군가를,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걸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영락없는 근대인인 나는, 어쩌면 이콘마저도 내려다 보고 있었을 수도.
2021년 8월 23일
『부서진 사람』 (피터 맘슨 지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읽고.
1. 나는 옛날부터 다음 두 곳에 <들어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 오히려 반감이 있었다. 현실로부터 도망한다는 생각, 현실과 당당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브루더호프라는 기독교 공동체 안의 '리더십'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사람』이란 책을 내가 <단숨에> 다 읽은 것은 내게는 좀 사건이었다.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과정 중에 발견한 (거의 TMI에 가까울 수도 있는) 소소한 일들을 서너 개 나열해보고자 한다.
2. 나는 책을 쥐면 제일 먼저 제사(題辭, epigraph)부터 읽는 습관이 있기에 이 책을 쥐고 제일 먼저 한 일도 제사를 확인하는 거였다. (제사가 없는 책도 많이 만나는데 그럴 때면 난 내심 몹시 실망한다. 얼마 전에 읽은 제사 하나도 참 인상적이었다. 『창세기를 만나다』(로널드 헨델 지음,비아)에 나오는 제사 :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 ). 『부서진 사람』 에는 반갑게도 제사가 있었다. 이 제사를 읽는 순간, 난 내가 이 책을 완독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은 이렇다.
상처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될까?
천사도 어쩔 수 없는,
가련하고 실수투성이인 이 땅의 자녀들을 깨우칠 자는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사랑의 군영에는 오직
상처 입은 병사만이 복무할 수 있으니.
- 손턴 와일더, 「물을 휘저은 천사」 에서.
3. 서문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비록 아놀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을 당했지만". 지난 가을에 <내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아놀드란 사람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서문을 읽는데 아놀드가 당한 일뿐 아니라 아놀드라는 사람 자체도 궁금해졌다. 서문의 승리.) 마지막에 서문을 쓴 이의 이름이 나왔다. 유진 피터슨. (역시!)
4. 점점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나는 책 표지를 다시 살폈다. 부서진 사람,이라는 책 제목 위에 영어로 원제가 적혀 있었다. Homage to a Broken Man. 호미지가 뭐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이 단어의 발음은 오마주,였다. 평소 자주 쓰던 오마주라는 단어에는 에이취(H)가 붙는구나! (완전 몰랐다). (어서 빨리 나도 "Homage to C.S.루이스"라고 할 무언가를 내놓아야할텐데 ㅠㅠ).
5. 아껴가며 읽었다. 내게 제일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두개만 소개하면: 하나. 공동체 생활은 한다는 것은,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하이너[아놀드]가 술을 권하자 더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이 되도록 맥주 한 잔 입에 안 대고 살았습니다." 더그는 커피조차 양심에 꺼려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p.426). 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상담하러 아놀드를 찾았다. 나는 아놀드가 한 대답 중에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멤버가 된 제니스가 언젠가 하이너[아놀드]에게 찾아와 자신에게 별 재주가 없다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제가 공동체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자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보태는 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산타클로스처럼 되길 고집하는군요" > (p.434). 이 구절을 읽는데 나는 한 방 먹은 거 같아서 멍해졌다. 실제 다음 문장도 이렇게 이어진다. "제니스는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했다".
2021.8.23.
신동주
2021년 5월 7일
『창세기와 만나다』 (로널드 헨델 지음,박영희 옮김, 비아 VIA)를 구매하고.
1. 기독교 출판사 <비아>에서 제작하는 유튜브 채널 이름은 '비아 채널'(Via Channel)이다. 비아 채널에서는 언박싱을 정기적으로 하는데 이 비아 언박싱은 내가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언박싱이다. 비아 언박싱은 항상 세 파트로 이뤄진다. 1) 책의 외양 소개. 2) 책의 내용 소개. 3) 편집장이 소개하는 이 책의 한 방. 나는 이렇게 『창세기와 만나다』 가 비아에서 언박싱 되는 순간을 지켜보았고 결심했다. "읽어야만 해". 화면에서만 보았던 그 책이 지금 내 손에 쥐어져있다.
2. 책 제일 앞의 헌정사를 보았다 : "친구, 동료이자 히브리 성서 연구자인 밥 알터(Bob Alter)에게". 아니, 알터라면, 『성서의 이야기 기술』을 쓴 로버트 알터아닌가! 나의 '근대적 편협성'을 황홀하게 산산조각 내주었던 학자! 페이지를 한 장 넘기자 이제 이런 제사(題辭)가 눈에 들어온다.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헌정사와 제사에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나는 잠시 책을 덮고...(여기까지)
2021.5.7.
신동주
<서플먼트>
이 책은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야심차게 펴내고 있는 '위대한 종교 서적들의 생애' 시리즈 중 '창세기 편'이다. 창세기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창세기가 인류사에서 어떠한 식으로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인류 지성의 변화가 창세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학문적으로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드문 창세기의 영향사, 해석사, 지성사 저작이다. (이상, 출판사의 소개글 중에서).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을 읽느라 시간이 안 나는 가운데서도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비아 채널에서 제공하는) '슬기로운 독서 생활'이라는 영상 때문이었다. 마침 출연자들이 『창세기와 만나다』에 대해 나누고 있었는데 한 여성 출연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저자의 말은, 창세기는 독자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 라는 말이었어요 ". 아양 떨지 않는 고대 문헌! 그 거침, 그 당당함을, 직접 빨리 대면해 보고 싶었다. 이제 만나러 간다.
2021년 5월 5일
미스터 션샤인
"쉬슬러 피오렌자의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순종'이란 용어가 없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p.431)라는 문장을 읽는데 "이 드라마에는 키스신이 없다"(나무위키, <미스터 션샤인>)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2021년 4월 22일
『찔림』 (신동필 지음, 시커뮤니케이션 , 개정판 2021 )의 저자에 대해서
"당신을 위로하지 않는 책 『찔림』 "의 저자 이름(신동필)이 제 이름(신동주)과 비슷한 이유는 제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선친께서 장남은 '동방의 주인'이 되라고, 차남은 '동방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다 -.-
제 동생은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참 재미없는 세상』 (홍성사,2016) / 『찔림』 (시커뮤니케이션 , 2017 ). 이번에 『찔림』의 개정판(2021)이 새로 나왔습니다. 많은 구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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