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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8일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표절 관련 손해배상액 모금을 제안하며

저도 손해배상액을 함께 내겠습니다! 
-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의 저자 송병현 교수가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에게 청구한 손해배상액 모금을 제안하며
1. 송병현 교수(백석대)가 자신의 저서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에 대해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맹호성 이사(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와 이성하 목사(가현침례교회)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3억원 청구 소송과 관련,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4민사부는 2017년 1월 13일, 이성하 목사에 대한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고 맹호성 이사에 대해서는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다 하여 1,000만 원을 배상하고 몇몇 관련 게시물은 삭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 판결문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는 동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 하나가 우리 사회에 참으로 의미있는 <확인들>이었습니다. 몇 대목만 뽑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판결문 내 ‘표절 문제 제기의 공익성’ 중에서
“피고들의 이 사건 서적에 대한 표절 문제 제기는 공공의 관심 사안에 관한 것으로 충분히 공익성이 인정된다고 할 것이다.”
○ ‘표절 문제 제기의 상당성’ 중에서
“[원고는] 5가지 문헌을 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 본문에서 내주[즉, ‘(Hamilton; Mathews; Sarna; Waltke; Walton)']가 전혀 표시되지 않는 사례, 다른 연구자가 밝힌 견해를 마치 원고가 주체가 되어 이 사건 서적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된 사례가 각 발견되고”
○ ‘표절 문제 제기에 관한 수단의 사회상규 적합성’ 중에서
“피고들이 공개그룹인 번역이네집, 신표 페이스북에 각종 글을 작성,게시하고 (...) 회원들을 상대로 표절 의혹에 관한 제보,의견을 구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 피고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지식,경험을 공유하여 국내 신학계의 광범위한 표절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취지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 그 자체로 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 ‘소결’ 중에서
“[피고 맹호성과 이성하의 대상 행위는] 이 사건 서적의 표절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허용되는 정당한 행위이거나, 설령 그 중 일부가 명예훼손 및 모욕 등 비방행위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공익성, 상당성, 수단의 사회상규 적합성이 인정되어 그 위법성이 조각된다” (*조각된다: ‘성립되지 않는다’, ‘해당하지 않는다’)
3. 맹호성 이사에게 부과된 1000만원이라는 손해배상액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법원은 맹호성 이사가 “이 사건 서적의 표절 문제 제기를 넘어서 저작권 침해, 이에 따른 법적 책임 등의 문제까지 제기”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 [엑스포지멘터리] 시리즈의 다른 서적에도 상당한 저작권 침해가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표현 및 행위 등을 했기에 “원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관하여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결했습니다. 저는 맹호성 이사가 저작권 에이전트로서 본인의 직업상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위협”이나 “단정”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판정을 존중합니다>.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법원이 결정했으니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오래 전 한 신학교수와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태복음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 소장 학자에게 제게 언젠가 물었습니다. “신학자로서 당신의 꿈을 무엇입니까?” 그의 답변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제게는 의외였습니다. “제대로 된 마태복음 주석을 한 권 쓰는 것입니다.” “겨우 주석 한 권이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신학 주석 한 권 쓰는 일은 종종 평생의 연구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참고로, 송병현 교수가 엑스포지멘터리 시리즈에서 낸 책으로는 이번에 문제가 됐던 <창세기> 외에도 아래와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 아래 -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에스더,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역대상, 역대하, 에스라,느헤미야, 이사야1, 이사야2,예레미야Ⅰ,예레미야Ⅱ, 예레미야애가, 이사야1, 이사야2,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호세아, 스가랴. 말라기.
송병현 교수가 상기 책들을 저술할 때는, 문제가 있다고 법원이 이번에 확인해 준 <창세기> 저술 원칙과는 <다른 원칙>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존재하는 그 가능성과 관련해선 이 자리에서 더 말하거나 논의하고 싶은 마음 없고, 그 실상의 확인 및 증명은 제 능력 밖입니다.

4. 서론이 길었습니다. 저는 2016년 6월 11일, <소송 비용 모금을 제안드리며> 라는 글에서 “원고 송병현 교수가 피고 이성하 목사와 맹호성 이사를 고소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이 소송의 원고는 <한 명>이지만 피고는 <두 명이 넘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학서적 표절반대> 싸이트에서 한국 기독교 학문 세계의 정화와 성숙을 추구하는 <공익적 성격>을 봤고 그 공익적 성격에 <동의>해서 <신표>에 회원으로 가입, 활동해 온 저에게 <신표> 공동 관리자들의 피소는 <저에 대한 피소>와 다를 바 없었고,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 학문장의 공익성> 자체의 피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법원이 결정한 1000만원의 손배배상액은 제게도 청구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5.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 두 분, 정말 잘 싸우셨습니다. 정말 소중하고 의미있는 확인입니다. (“법원, 송병현 교수 표절 사실상 인정”, 뉴스앤조이, 2017.1.21.) 동료들을 대표해서 앞에서 싸운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불어오는 바람을 더 많이 맞고, 더 긴장해야 하고, 더 많은 배신과 상처를 경험하는 곳이 앞자리인 것 같습니다. 비록 싸우는 과정에서 손해배상을 해야하는 일이 발생했지만, 만약 제가 앞자리에서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면 이번보다, 이 두 분보다, 더 용감하게 더 지혜롭게 싸울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싸우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비용, 제 싸움이기도 하기에 함께 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저만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 주위 분들과 얘기해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표 멤버로서 이렇게 제 의사를 표하오니, 신표 운영진께서는 손해배상액을 모으는데 신표 멤버들, 그리고 공감하는 시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계좌공지 등 방법과 절차를 마련하고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소송과 재판을 통해 우리는 5백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에 작게나마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연구하시며 바른 결정 내려주신 판사님들과, 옳음을 위해 소송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 주신 일곱 분 교수님들과, 긴장되는 긴 재판 과정 묵묵히 견뎌주신 두 분 변호사님과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와 응원의 말씀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 1. 22
신동주 드림 ( <신학서적 표절반대> 회원, 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

2016년 11월 20일

동영상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찬수 목사 설교, 스탠드네트워크 제작)를 시청하고.


1. 약 한 달 전, 제게 엄청난 쇼크를 가져다 준 영상물 하나를 봤어요. 혹시 인천에서 한 유부녀가, 오롯이 한 유부남 목사의 기도 힘으로만, 그 목사 빼다 박은 아이 출산했다는 ‘제보자들’이란 프로는 아니냐고요? 아니어요. 제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영상물은, 교회란 어떤 곳인가를 묻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3분5초짜리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라는 유튜브 동영상이었어요.

2. 상기 동영상에서 이찬수 목사는 젊은 목사와 전도사들에게 (a)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삶의 자세, (b) 본인이 부목사 시절 담임 목사로 모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과의 일화 등을 소개했는데요, 저는 설교자가 숭앙하는 고인의 교회관에 대해 <단 한 프레임>도 동의할 수 없었어요.

3. 상기 동영상에는 고인이 화요 교역자 회의에서 부목사들을 심하게 다잡는 대목이 나오는데 고인의 언어는 다음과 같아요: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실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구 목사, 그 성도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 반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날. 목사님은 좀 다혈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왜 너 같은 게 이 교회 와 가지고 성도를 괴롭히냐는 거예요. <나가라고 이 교회>! 왜 사랑의교회 와가지고 성도들을 괴롭히느냐고!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 (상기 물맷돌 영상 중에서. < >표시 강조는 신피디.)
저는 고인이 사용하신 언어의 <폭력성>에서 심한 충격을 받았는데요 - 왜 내가 존경하는 고인이 하필 내가 싫어하는 스티브 잡스를 닮은 것일까 - 그래서 이제 저는, 누군가에겐 몹시도 <교회적>일 수 있는 고인의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 드러내는 한 일환으로 이런 <질문> 하나 던지고 답해보려 해요. <나라면 언제 화를 낼 것인가>.

4. 제가, 같은 교회에서 동역하는 후배 부목사를 부르고 이렇게 말합니다. (후배 목사의 이름은 편의상 민기라고 하겠습니다.) 민기야, 내가 오늘 네가 맡고 있는 2교구의 권사님들 몇 분을 만났는데 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라. (잠시 긴장했던 후배의 얼굴 표정이 좀 풀립니다) 지난 2년 동안 민기 네가 실수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야. 왜 그랬니. (이제 후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민기야, 여긴 교회야. 불완전해도 되는. 왜 완전한 성자 코스프레를 한 거야. 그렇게 교회 <밖에> 있지 말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줘. 안 그러면 내가 슬퍼. 지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민기는 잔뜩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성도들의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요...) 저는 말합니다. 민기야, 그때 그 교회에서 있었던 일, it's not your fault. 그래, it's not your fault. 삼만 명 되는 교회를 만든 건 네가 아니야. <어떡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사정 잠시 몰랐다고, 네 안에 사랑이 없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고민과 아픔을 네게 매번 <보고>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네가 <항상 다 아니>. 게다가 교인들 중에는 <담임목사>에게만 고민 오픈하는 사람들 많다는 거, 우리 잘 알잖아. (제가 사랑하는 후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습니다).

5. 예, 제가 담임 목사라면, 타인의 고민과 어려움은 <완전 파악>하고 있지만, 자신의 고민과 갈등, 실수와 약점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부목- 그러니까 <칭찬자자>, <백퍼완전> 부목- 불러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간청하겠어요. 흠 많았던 열두 제자 닮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약자 <대형교회 부목> 1인 향해,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고함치는 대신.

2016.11.17
신동주


서플먼트
1) 지금 내가 쓰는 글은 이찬수 목사와 고 옥한흠 목사님이 살고계신, 살다가신, <인생>과 <신앙>에 대한 비판 아님. 내게 그런 비판할 자격, 능력 없음. 다만, 상기 동영상에서 <언어를 통해> 드러난 교회<관>과 신앙<관>을, 다시 <언어를 통해> 되물어 보고, 이를 통해 우리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뭘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해 보는 중. 고인 살아생전 이 글 보셨다면, 내 진심 알아보시고 좋아요 눌러주셨을 거라고 믿음, 차단하는 대신.

2) 상기 동영상의 출처와 링크는 다음과 같음. 출처: 스탠드네트워크
링크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Q-wCf8oXQQ
내가 정리한 텍스트 버전은 다음에서 확인 할 수 있음.
http://holyfat.blogspot.kr/2016/11/blog-post.html

3) 우리 한국 교회엔 이상한 신화가 하나 존재하는데 나 이제 앞으로 그걸 <숟가락 신화>(spoon myth)라 부르겠음. <모름지기 진정한 목회자는 성도들 가정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아야 한다>라는 이 숟가락 신화는 <당장 파악하란 말이야>, <몰라? 그러면 넌 진정한 목회자 아니야>라는 - 젓가락과 포크처럼 사람 <찌르는> - 율법과 정죄로 쉽게 이어짐. 각설하고, 내가 이 신화에서 가장 의아하게,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점 하나 있으니, 이 신화에서 <알다>는 왜 한 번도 <쌍방향>이었던 적 없나 하는 점. 왜 항상 목회자는 <알아야만>하고, 교인은 <알려져야만> 하는 거임? (이 신화에서 목회자 집 숟가락 숫자는 안 나옴). 교인이 무슨 <남성>이나 <백인>에 의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려야만하는 <여성>이나 <아시아>임? (문장력이 달려 써놓고 보니 내가 여성과 아시아를 디스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내 의도는 정반대임. 여성과 아시아가 남성과 백인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듯, 교인도 목회자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음. 알려짐, 사랑받음, 기도받음, 이라는 수동성은 - 진정 성숙한 자만 이런 <수동성>을 당당히 긍정할 수 있지만 - 교인과 목회자 공히 <배우고 실천해야>하는 덕목임. 서로 돕지 못하는 일방적 관계의 결혼 오래 가지 못하듯, 소위 일방적 돌봄과 섬김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숟가락(신화)만 빠는 교회, 오래 가지 못함. 그래서 한국 교회 <이렇게> 됐음.

2016년 11월 12일

동영상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텍스트)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찬수 목사) 라는 3분5초짜리 동영상을 보고 넘 큰 쇼크를 받은 나는, 한 번 더 들으며 영상 내용을 받아적었습니다 ㅠㅠ 어떻게 <교회관>과 <분노의 지점>이 나와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설교자, 그리고 설교자가 인용하는 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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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무슨 청년들 데리고 성경공부만 하면은
세계복음화, 아프리카가 나를 부른다, 조국 통일,
민족복음화 떠는는데 손에 물맷돌이 없어요.
있습니까?
우리 젊은 목사님들, 또 전도사님들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 물맷돌은요 40일 금식기도해서
얻어낸 게 아닙니다.
내 삶터에서 보잘 것 없는
양 지키는 일이지만
이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여기에 온 마음을 쏟을 때
나온 부산물이 물맷돌입니다.
물맷돌 있습니까?
물맷돌도 없으면서 자꾸 골리앗 이긴다고 그러니까
허풍쟁이들밖에 더 되냐고요.
우리처럼 뻥이 센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뻥이 센 사람들이 모였는데
한국교회는 왜 이 꼴입니까?
왜 절에 교회를 팔아야 하는 비극이 왜 일어납니까?
옥한흠 목사님의 어느 부분이 그리운지 아십니까?
화요일 교역자 회의 할 때
지금 생각해도 등꼴이 오싹해요
한 번도 옥한흠 목사님이
“야, 이목사 왜 고등부 숫자가 안 느냐?”
이걸 가지고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실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구 목사, 그 성도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 반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날
목사님은 좀 다혈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왜 너 같은 게 이 교회 와 가지고 성도를 괴롭히냐는 거예요.
나가라고 이 교회!
왜 사랑의교회 와가지고 성도들을 괴롭히느냐고!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지금도 소리가 들려요 지금도.
화요일날 기도회 인도하시다가
막 우시는 거예요.
막 우시는 거예요.
왜 우시는지 아세요?
하나님, 어느 권사가 지금 암이랍니다.
암으로 신음하는데
이 종이 무능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어서
하나님, 마음이 힘듭니다.
그러시면서 우시는 거예요.
옥목사님이 언제 대형교회한다고
대형교회 하자고 그러신 적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있는 성도도 관리도 안 하고
방치해 놓으면서
뭐하러 자꾸 배가 배가 그러고 있느냐고요.
두당 얼마씩 팔려고 그러십니까?
다윗은요
조국통일
민족 부흥, 타도 골리앗
그렇게 떠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양 지키는 일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양 지키는 일이 내게 맡겨진 일이면
이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그게 나라를 구하더라고요.
출처: 스탠드네트워크 . 2016.10.16.
링크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Q-wCf8oX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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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8일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E.P.샌더스 지음, 알맹e)를 구매하고.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이사로 있는 맹호성 페친이, 한국 신학(출판)계가 39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방금 했어요 ^^ 1977년 출간 이후 바울 연구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는 평가받는 E.P.샌더스의『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전자책으로 냈어요. 페친이 직접 디자인한 표지를 보고 저는 제 석사학위 논문의 주 분석 대상이었던 마이클 폴라니의 주저『Personal Knowledge』(1958년)가 바로 떠올랐어요. 둘 모두 표지는 단순해도, 우리가 세상과 기독교를 보는 시각을 참 많이 <흔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만남 있잖아요, 그 만남 이후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식론과 신학에 <약간의 사전 지식>(이런 난 얼마나 많이 안다고 ㅜㅜ)이 있는 분들께 두 책 모두 적극 추천.

(참고) ① 폴라니의 책은 아카넷에서『개인적 지식』이란 이름으로 나온 적 있는데 (적어도 제게는) 해독 불가 였어요. 인식론에 관심 있는 교수나 학생이 있다면 영어책을 권합니다. ② 이번에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번역은 제가 신뢰하는 신학서적 전문 번역가 박규태 목사가 해주셨어요. 완전안심. ③ 우리나라 신학서적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맹호성 페친은 이 책을 PDF 형식으로 출간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양한 구매 옵션>을 제공하는데요, 제 페친의 성격이 잘 묻어나는 <하드보일드한>의 책 구매 방법 소개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장 쾌락적인...읽기라는 행위에 푹... :)
https://www.facebook.com/Rmaenge/posts/1228529727188938

2016년 10월 7일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IVP)를 읽고.

한 개의 구(句), 하나의 문장(文章)이 나로 하여금 이 책 구매케 했으니 먼저 구부터 소개하면: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라는 이 책의 부제). 원부제 '신학자의 회고록' 가볍게 킬하고 매혹적인 상기 부제 단 이, 출판사는 포상해야함. 한편, 상기 구와 함께 날 유혹한 ‘쎈텐스’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신학교수 세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쓴 추천사에 등장하는데 그 정확한 워딩은 다음과 같다: “『한나의 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전통을 당당하게 잇는다.” (후기,p.523). 특정 답만을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한국 교회에 신물난 내게, 『고백록』을 좋아하여 선한용 역, 최민순 역, R. S. Pine-Coffin 역으로 『고백록』 세 권 갖고 있는 내게, 상기 두 홍보 포인트는 내 <성감대>를 정확하게 터치한, 내가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음. 하나 아무리 책을 읽어도 상기 구와 문장에서 촉발된 나의 <설렘과 흥분>은 절정으로 이어지지 않고....계속 <무언가 다 안 채워진 듯한> 미진함.....때문에 책을 다 읽고 돌아누운 나는....좋았어? 라고 스탠리가 계속 묻는데도 아무 대답 않고.....
2016. 10. 7.
신동주
서플먼트
1) 책을 덮었을 때 가슴에 남은 건 ‘당혹감’이었고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불친절’. 내가 이 책 왜 불친절하다 생각하나 하면: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스탠리가 씨름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문제들>을 알아야 하는데, 542쪽 되는 이 책에서 스탠리는 자신의 결론과 결정만을 <일방적>으로 소개. 스탠리가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을 비판했고 존 요더를 만나는 가운데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됐다는 <팩트>는 알겠는데, 그런 <결과의 나열>이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담? 나는 어떤 신학적 입장도 <100>로만 구성됐다고 보지 않음. 그렇기에 여전히 무시해선 안 될, 계속 귀기울여할 <니버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봄. 니버가 갖고 있었던 <두려움>과 <꿈>과, 특정 성경 본문을 스탠리와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든 <성서관> 등 니버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충분히> <매력적으로> 소개할 때 비로서 <스탠리의 이야기>도 산다고 봄. <레옹>에서 게리 올드먼이 레옹와 마틸다의 이야기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주었듯이 말임. 레이 올슨(Ray Olson)이란 이가 “대부분의 현대 회고록 저자들은 일인칭 소설 화자와 비슷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명한 신학자 하우어워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라고 말했으나 나 그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음. 이 회고록엔 적(敵)에 대한 <명단>은 있으되 그 <적들의 이야기>는 없음. 다시 말하지만 이 회고록엔, 스탠리가 신학자로서 성서를 해석하며 다른 해석 방법(그러니까 ‘다른 삶’)과 조우할 때 그가 느꼈을 두근거림, 두려움, 망설임은 등장하지 않음. <저명한 신학자>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 <흔들리는 신학도>는 만나지 못한다는 게 몹시나도 애석함. (나는 <그걸> 듣고, 보고 싶어 이 책을 펼쳤는데 말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적들의 이야기만 빈약한 게 아님ㅠㅠ 가장 강력한 아군인 요더와 매킨타이어의 고민과 꿈에 대해서도 나 더 알게 된 거 <정말 한 줄>도 더 없음. (참고: 내가 아는 요더는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IVP)에 등장하는 요더가 전부. 내가 읽은 매킨타이어의 저서는『덕의 상실』(문예출판사)이 유일.) 이제 나, 스탠리와 내가 쓰는 언어가 과연 <같은 언어>인지 회의에 빠짐. 왜냐고? 스탠리가 돌아누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 그다음에 이것을 썼다’식의 서술을 피하려”고 했어.(<맺음말>,p.508) 나는 나보다 <훌륭한> 그에게, <24> 그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림. “스탠리,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게 정확하게 바로 그거예요.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그 다음에 이것을 썼다...라고만 하는 거....내가 원하는 건....내 몸에서....당신이 만져주기를 바랐던 곳은....”
2) 이제 이어지는 건 독서 중 내가 체험한 총 다섯 번의 “멀티-당혹감(multi-confusions)”. 멀티 오르가즘은 들어봤어도 멀티 당혹감은 첨 들어봤을 당신에게 그 당혹들 좀 구체적으로 소개하면(후방주의? -.-): "앤과 함께하는 삶이 신학자로서의 나의 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p.287) ( 아니, <가끔>이라니? 『한나의 아이』 구매자 대다수는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스탠리 답변 듣고 싶어 이 책 샀을 터인데.) 어쨌든 상기 질문에 대한 스탠리의 답변: “모른다는 것이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p.287). 모른다....저자가 모른다...고 하는 마당에 이제 더 물을 수도 없다....(이게 첫 번째 당혹) "앤과 함께 살며서 나는 삶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이 내 신학적 통찰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지만, 앤과 애덤과 함께한 시간이 내가 배운 신학을 펼치는 방법을 좌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나친 억측인 듯하다." (p.288). 이런, <내 예상>이 억측에 불과했구나. 그의 <24>이 <그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내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을 억측이라 호(呼)하다니. (이게 두 번째 당혹). 어쨌든 왜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갈 때 앤과 함께 한 시간과 경험에 기대지 않는지 스탠리가 밝히는 이유 들어보면: "내러티브에 대한 강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신앙 언어의 의미를 시험하거나 결정하는 데 쓰라는 요구가 아니다." (p.288) 스탠리의 이런 <신념과 태도> 때문에 우리는 스탠리의 <신학적 사유>에 <앤과 함께한 삶>이 끼친 영향의 <정도와 내용>에 대해 <충격적일 정도>로 <무지한채로> 책을 덮게 됨. (세 번째 당혹). 오케이, 스탠리, 알겠어요, 그럼 당신의 신학적 통찰, 당신의 그 내러티브 신학에 영향을 <끼친> 경험은 뭔가요? “내러티브가 기독교적 확신에 필요한 문법이라는 말은 존재의 이런 종말론적 특성을 뜻한다. 확신컨대 이것은 나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과 그의 연구 결과를 만났기 때문에 내 저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p. 291). 그렇다. 스탠리에 따르면, 스탠리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이는, <앤>이 아니라, <존 하워드 요더>임. (ㅠㅠ) 정리해보자. 이제 우리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요더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게 됐음. 동시에, 아무리 『한나의 아이』를 읽어도 요더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참고: 서플먼트 2) 역시 이미 알고 있음. (네번 째 당혹). 난 이제 곤고한 독자...이 당혹스러운 회고록에서 누가 나를 건저낼 수 있을까 흑흑흑. 나 이번 여행에서, 수많은 신학자들과 올레길 걸으며, 개인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경험 들을 기회 있을 줄 알았는데, 인솔자 스탠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파킹랏. 요더와...니버와...매킨타이어와...그리고 스탠리 자신의...차만 <파킹돼 있었음>. 그게 다.(that’s all). 나 신학자들 차만 보고 왔음. 이 연속되는 네 번의 당혹은 우리에게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문학적 질문>을 하나 야기함.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임. 회.고.록.이.란.무.엇.인.가. <도대체> 회고록이란 무엇인가....세라, 『한나의 아이』가 어거스틴의 『고백록』 전통을 잇는다고 했죠? 세라....세라, 내 말 들려요?
3) 이제 다섯 번째, 마지막 당혹 남았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앤이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떴을까. 그러다 등장한 스탠리와 앤의 이혼 소식. 내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내게는 큰 충격이었음. 나 지금 원론적인 기독인의 이혼 가능 여부 묻는 거 아님. 내가 묻는 건,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 배우자의 천식이 심하다고, 오른쪽 다리가 썩는다고, 정신질환 증세가 심해진다고, 이혼해도 돼? 다시 말해, 자녀의 안전 등을 위해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게 아니라 <이혼>하는 게 기독인에게 <옵션>이 될 수 있나. 배우자의 잘못이 없는 한 – 질환은 잘못이 아니다 – 우리는 평생을 상대의 배우자로 <살아야만> 하는 거 아니었나. 한편, 내 이 당혹감이 단순히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면 이제 내가 인용하는 페친 K의 글은 이번 회고록에서 들리지 않았던 <병자/환자의 목소리>에 주목함. “저자나 이 책을 만든 출판사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직접 고통을 겪은 당사자인 앤의 입장에서 그의 목소리는 누가 대변해 주나 싶어 안쓰럽고 먹먹했다.” (페친 K의 2016년 10월3일 페북 포스팅에서 인용).
4) 거듭되는 당혹감에 당혹한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생각 궁금해, 2016년 8월 22일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일곱시에 열린『한나의 아이』 출간 기념 공개 강연회에 참석. “그럼 이제 플로어의 질문 두 개만 받겠습니다” . 강연 후 사회자가 말하자 나와 함께 강연회에 왔던 회사 후배 L이 손을 듦. (난 지금도 이 질문이 그 강연회의 백미라고 생각. 참고로 L은 나와 함께 지금 <새롭게하소서> 연출 중. 맞음. 나 지금 프로그램 홍보 중.) “믿지 않는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니. 그냥 열심히 최선 다해 사는 거지. 그럼, 그 답 없음과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정답 없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최선을 다해 사는 그 친구에게 우리의 정답 없는 종교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답은 없고,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정신에 따라, 그날 나온 답변 소개는 생략.
5) 이상 나의 글은 <지극히 사적인> 독후감. 다른 의견, 다른 평가 당연히 존재.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쓰고 IVP가 펴낸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는 국민일보 선정 ‘2016년 올해 최고의 책’으로 뽑힘. “이 책은 출판사와 아카데미 대표 등 12명이 호평, 대상 도서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6.12.28). 이 책 비록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펴낸이와 편집자가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와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무척 소중하다고 믿는다.


2016년 9월 18일

교회와 설거지

오늘 아침 교회 갈 때 처음 설거지를 하는 날이라서 그런지 세례 받는 날처럼 약간 긴장됐다 점심을 빨리 먹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장로님 한 분과 한 조가 되어 설거지를 하는데 점심 메뉴가 카레였기에 그런지 세심하면서도 집요한 터치가 필요했다 -.- 설거지를 마치고 솥까지 다 씻고 났더니 뿌듯했다 내가 30대 초반에 듣고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참 칭찬 받기 쉽다. 설거지를 한 번 하면, 커피를 한 번 타오면, 먹은 자리를 치우면, 뭔가 한 번만 해도 <매너> 좋다고 칭찬을 받는다....반면 그 일을 <매번> 하는 사람들은 <한 번만 안 해도> 여자가....하면서 비난 받는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고했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서 감사했지만 내가 더 바라고 기대하는 건 설거지 하는 남성들이 칭찬 받는 게 아니라.....설거지 안 하는 여성들이...안 해도...뭐라는 사람 없고 자연스러운....남자들처럼 <하고 싶은 날만> 이름 기입하는....그런 교회....( 이 글은 내가 다녔던, 지금 다니는, 앞으로 다닐지도 모를 모든 교회를 생각하며 쓴 글임) )

2016년 9월 10일

『참 재미없는 세상 』 (신동필 지음, 홍성사, 2016년 9월)을 읽고.

동생이 책을 냈어요. 나중에 제가 책을 내면 안 사주시더라도 제 동생 책은 많이 사랑해주세요! (꾸벅) 틈틈이 찍은 사진들에 짧은 시를 덧붙인 책입니다. '추천의 글'은 제가 썼습니다. ^^;; 

저는 한 방송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일하다 보면 저마다 사연을 지닌 분들의 출연 신청을 받습니다. 수북이 쌓인 사연들 중 하나를 채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과 식사를 하다가 동생의 휴대폰에 담겨 있는 사진과 글을 보았습니다. 순간, 감춰져 있는 사진과 글을 세상에 꺼내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동생의 사진과 글을 보는 제 마음은 이중적이었습니다. 먼저, 동생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일상의 순간을 잡아내는 방식이 전혀 상투적이지 않았고, 그 새로움을 통해 독자로서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삶 가운데서 고난받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부디 이 책을 통해 주님 주시는 참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_신동주(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홍성사 링크 바로가기 http://goo.gl/abQNb9

교회 개혁을 위한 아주 작은 실천 방안

돈 전혀 들지 않는 교회 개혁 방안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돈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나 단체에 교회가 돈을 전달할 일이 있으면 담임목사가 아니라 재정담당 직원이 했으면 좋겠다. 전달식에 목사 대신 교회 직원이 왔으면. 사람들은 담임목사가 아니라 그 교회에,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할 것이다. 사람이 영광받는 일이, 사람에게 영광돌리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어려운 현장을 돌아보는 일도 담임목사가 아니라 해외구호일을 제대로 배우거나 경험한 교인이 갔으면 좋겠다. 전문가가 담임목사보다 현장에서 <더 많은 걸 보고> 돌아오리라는 건 상식이다. 교회가 한 사람의 항공비를 추가로 부담할 수 있더라도, 그때도, 담임 목사가 아니라 해외구호에 <관심과 사명>이 있는 교인을 <한 명 더> 보냈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 둘은, 그러니까 그 <교회>는, 담임목사가 그 교회를 떠나고 새로운 목사로 바뀌더라도, 해외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지혜로운 방법들을 축적시켜나가며 해나갈 것이다. 기독교 영화제 개막식에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와서 격려사를 하고 돈을 전달하는 일을 본 적이 있다. 그 행사에 큰 돈을 댄 그 목사는 그날 그 행사장에서 최고의 <귀빈>이었다.그런데, 그날 만약, 그 교회의 영화학과 교수나 연극 배우 교인이 그 행사장에 교회 대표로 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난 확신하건대, 그의 격려사는 지금 막 단편영화나 단막극을 만든 청년들에게 훨씬 더 <구체적인 도전과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식의, 그날 그 담임목사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삶의 현장에, 다양한 요청과 다양한 요구에, 한 사람만 파송하는 건 어색하다. 만사형통(대통령의 형)이 문제를 일으켰듯 만사담통(담임목사)도 문제를 일으킨다. 각 영역의 대표자들이 - 실질적인 대표자들이- 많이 존재하는 교회는 세습도 잘 안 될 거라 믿는다. 오늘의 작은 결론. 돈은 직원이 전달하자. 목사는 자기 개인 돈 전달할 때만 참석하자. 목사의 해외 방문은 자비로 하자. 격려사도...더 구체적으로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하자.(2013.9.10)

2016년 9월 8일

대형교회

나는 종종 ‘대형교회’를 비판하는 데 어느 날 내 삶 속에 대형교회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페이스북 친구 수였다 많아야 좋다고 생각해서 계속 늘렸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천오백이라는 수를 이번 주에 육백이십으로 줄였다 더 줄이려고 한다 성도들의 말을 다 들을 능력도 없으면서 계속 등록을 받는 대형교회가 나였다 누군가의 소중한 이야기를 스크롤 한다는 게 훑는다는 게 미안했다

2016년 9월 3일

『대지의 기둥』(켄 폴릿 지음, 문학동네)을 읽고.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1.『대지의 기둥』은 12세기 영국에서 성당 건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어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스파이 소설인 『바늘 구멍』의 저자 켄 폴릿이 썼어요. 고등학교 때 켄 폴릿의 『바늘 구멍』을 읽고 그에게 반해 요즘도 이런 저런 인터넷 싸이트에서 닉네임을 요구하면 Ken이라고 적곤해요.
2.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이거였어요. 선한 사람은 점점 더 선해지고 나쁜 사람은 점점 더 나빠져요. 선인은, 처음에는 부족한 점 있어도, 점점 더 용감해지고, 더 너그럽고 지혜로워지고. 자기 일을 더 잘 하게 되고. 근데 악인은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사람들을 더 이용하려고만 들고, 점점 더 <괴물>로 변해가요. C. S. 루이스가 어디선가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났어요.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우리가 무언가 훌륭한 일을 했을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은 방금 한 일보다 더 훌륭하고 덕스러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마음이다. 루이스는 또 어디선가, 지옥은 점점 더 자기 중심적으로 변모한 개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죠. 타인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 집중하는 곳! 점점 자기 안으로 쪼그라들고 쭈그러드는, 그래서 지옥은 어떤 의미에서 광활하기보다는 하나의 점처럼 아주 작을 거라는 말은 한 게 기억나요. 여하튼 켄 폴릿도 이 장편 소설을 쓰면서 “몇 십 년에 걸쳐 이야기가 전개되고 등장인물들이 <성숙해감에 따라> 그들의 삶에 새로운 굴곡을 만들어 넣”는게 제일 어려웠다고 고백해요. (1권, 서문).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재미 포인트. 이 책의 저자 켄 폴릿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어요. 그런데 이 장편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수도원장이지요! 그래서 발생하는 켄 폴릿의 고민: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하느님의 사람’에 속하는 부류여야 했다. 이 점은 내게는 까다로운 문제였다. 아마 상당수 독자들도 그럴테지만 내세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물에 흥미를 갖는 일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거 같았다”. 제가 볼 때 켄 폴릿, 그 일을 무척 성공적으로 해내요. (비기독교 신자 켄 폴릿이 쓴 특정 문장을 읽다가 제 불신앙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어요.)
3. 미술, 건축, 조각, 미학에 나름 <조예(?)가 있는> 저로서는 (자뻑만렙-.-) 내심 성당 건축을 맡은 톰과 그의 의붓아들 잭이 <석재와 나무와 나누는 깊은 대화>를 기대했어요. 돌과 나무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숨겨진 최대치>를 보여주지 않잖아요. 상대가 정말 믿을만하다고 여겨질 때만 자신을 <만져도 된다고> 허락하죠. 근데 저자 폴릿은 톰과 잭이 <여자들과 나누는 육체적 대화>만 자꾸 들려주는 거예요. (베리댕큐하면서도 아쉬웠던 부분이에요). 엘렌과 앨리에너 두 여성의 절정을 묘사할 때만큼 돌이 흘리는 땀방울을...강한 바람을 맞을 때 성당의 목재가 휘는 그 긴장을, 그때 터져나오는 깊은 저음의 신음을....좀 더 자세히 들려주었더라면....(근데 이런 지적, 이 책에 대한 디스인가 낚시인가 -.-).
2016.9.3.
신동주
서플먼트
1) 지금 켄 폴릿의 『대지의 기둥』1권, 2권, 3권의 섹스씬을 다시 한 번 훑어보니 처음 읽을 때는 못봤던 특징 하나가 보인다. 거의 매 씬에 nipple이 등장한다. (켄의 개취존중 -.-). 일단 제3권에서만 한 군데 살펴보면: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그가 그녀의 젖꼭지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비틀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더니 그에게서 몸을 떼며 헐떡였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내가 아프게 했나요?”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 게 아녜요!” (3권,p.151). 한편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센테스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물릴 줄 모르는 육체적 정열에 사로잡힌 신혼부부 같았다. 아마도 처음으로 잠글 수 있는 문이 달린 침실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 이제는 아무에게도 들킬 염려 없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엘리에너는] 특별한 전율을 느꼈다. 지난 이 주 동안 자신과 잭이 했던 일 몇 가지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3권, p.495.) 나는 은근한 묘사를 좋아한다.(-.-)
2) 섹스 묘사와 달리 켄 폴릿의 건축 묘사는 약간 아쉬웠다. 다양한 건축 사조와 기법이 등장하지만 난 그가 회반죽 한 번 해보지 않았다는 거에 오백 원 건다. 『대지의 기둥』을 읽는 동안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자서전『한나의 아이』를 동시에 읽었는데 예닐곱 살부터 벽돌 쌓는 조적공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던 스탠리의 묘사가 훨씬 - 당연히 - 더 실제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묘사. “우리는 말 그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정말 지독한 냄새가 났다. 땀이 쉬어 공사 현장의 모든 사람이 악취를 풍겼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는데, 우리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감독하러 현장에 오는 사람들이 그 냄새 때문에 괴로워할 때 특히 좋았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으므로 우리는 계속 물을 마셔야 했다. 물은 나무 물통에 들어 있었고, 아침 일찍 그 안에 얼음을 넣었다. 얼음이 두어 시간 이상 가는 법이 없었지만 뜨거운 물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물을 마시러 갈 때는 조적공이 곧 찾게 될 물건을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조지 하퍼에게 배웠다. 한마디로, 움직임을 최소화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를 끝까지 버티기 힘들었다.”(p.74-75).
3) 나는, 공간과 건축은 사람에게 아주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그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짓는 거라고 믿는다. 교회 건축에 대해서 이전에 썼던 글 하나 첨부. 제목은 ‘교회의 크기와 언어’. http://holyfat.blogspot.kr/2013/12/blog-post.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