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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8일

『두 지평(The Two Horizons)』 (앤터니 티슬턴 지음, Eerdmans 출판사) 을 읽고.

1. 열여섯살 여고생, 부모님 볼까 이불 쓰고 몰래 할리퀸 읽는 느낌이, 재수 학원 다니는 남자 애들, 쉬는 시간에 드래곤볼 신간 보는 느낌이, 91년 내가 앤터니 티슬턴의 『두 지평』을 읽을 때만큼 달콤하고 짜릿했을까. 아내는 있었지만 직업은 없던 시절, 그러니까 한 여자에겐 '올'이었지만 사회에선 '낫씽'이었던 그때, 나는 하루 열여덟 시간씩 상식 문제를 외웠다. (그걸 상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보에서 산 언론사 기출문제집에서 발견한 <낯선 문장들>. 1990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 친선 축구대회에서 북한 선수들이 입은 상하 유니폼 색깔이 올바로 짝지워진 것은? ① 상의: 붉은 색, 하의: 붉은 색 ② 상의: 붉은 색, 하의 : 청색 .....두렵고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이런 낯선 상식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내 이름 호명 받는 날 과연 올까? 꾸역꾸역 무의미한 문장 집어삼키다가 끝내 한계에 도달하면, 당 떨어진 사람 허겁지겁 초콜릿 꺼내 먹듯 『두 지평』을 펴고 읽었다. (티슬턴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의미(있는 문장)에 목말랐다. 의미만 충만하다면 문장이, 내용이 아무리 어려워도 상관 없는 때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티슬턴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글은 어렵지 않은 법이다.
2. 『두 지평』 은 총 3개의 파트, 15개 챕터, 61개의 절로 탄탄하게 구축된 영국식 성(城). 난생 처음보는, 목차에서 드러나는 그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에 '이런 미친...!' 하며 놀라움과 즐거움의 탄성 질렀던 기억있다. 각주 하나하나까지, 그 성 구석구석 안 가본데 없이 다 가봤지만 그 <아름다운 성>에 대한 안내 나 포기하려 한다. 25년 전 기억 의지해 이 큰 성 누군가에게 가이드 하겠다는 건 무리 & 욕심. 그래서 나, 이 시간 그저, 내가 그 성 거닐며 찍었던, < 내 얼굴 > 크게 나온 나온 몇 장의 인스타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3. 인스타 #1: 얼마 전에도 후배 L이 물었다. 왜 아까 회의 시간에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내가 옛날에 읽은 『두 지평』 이란 책에는 E. Fuchs라는 사람이 한 이런 말이 나와. 사람들이 집에서 입을 여는 건 다른 가족을 이해시키고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 왜 여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야. 이해 받기 때문에 입을 -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 여는 거지. "at home one does not speak so that people may understand, but because people understand".(p.344) 회의 석상에서, 설득하면 이해해 줄 거란 믿음 내게 있는가, 먼저 판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입 열지 않는다. 아이들 키우면서도 - 바로 이 Fuchs의 말 때문에 - 우리 대화하자,라는 말 한 번도 안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믿음 심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4. 인스타 #2: 소위 <해석학적 간격>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건 『두 지평』 을 읽으면서였다. "어떤 경우에는 비유( parable)를 설명(explain)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명해줘야만 되는 비유라는 건, 설명해줘야만 하는 조크처럼, 이미 비유로서의 가치를 훼손(ruined) 당한 거 아닐까?" (p.15) 질문 던진 크로산(Crossan)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현대의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전통 속 <자기 자신의 자리>에 의해 한계(conditioned) 지워진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의 해석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대 독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이 바리새인 역할 맡게 되는 걸, 자신의 삶이 <바리새적이라고> 규정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거부하는 바리새주의를, 그저 다시 한 번 더 비판하고 확인해주는 하나의 도덕적 이야기로만 <소비>된다. 비유에 주어진 근본적인 역할 즉 청자들의 삶을 흔들고(unsettling), 그의 신념과 가치를 전복(overturning) 시킨다는 원래의 역할은 사라지고 이제, 청자가 갖고 있는 기존 가치를 재확인해주는 역할로서만 비유는 존재한다". 처음으로 깊이 깨달았다. 복음서를 기록한 2천 년 전 화자(話者)와 그 말을 2천 년 지나서 듣는 나라는 청자(聽者) 사이에는 메꾸기 힘든 해석학적 간격이 있구나. 처음 독자나 청자들이 받았던 <충격>을 어쩌면 나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무엇을 읽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 어쩌면 내 독서는 -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내 <오래된> 기존 생각을 재확인,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겠구나. 『두 지평』 어디에선가 한 신학자가 이런 제안을 했다. 그 <처음 독자들>이 눅 18장 비유 들으며 느꼈을 충격 조금이나마 경험해볼 수 있는 방법 하나 있는데 그건: 바리새인 자리에 지금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 그리고 세리 자리엔 우리가 가장 경멸하는 그리스도인, 을 대입 시켜 보는 것. 그래서 나 종종 뉴스앤조이에 등장하는 철면피들의 이름 눅 18에 대입해보곤 한다. 말도 안 돼, 였을 것이다, 첫 독자들의 반응은, 나처럼, 예수님의 최종 판정을 들었을 때.
5. 인스타 #3: 미국에서 중고등 시절을 보낸 나의 두 아이는 - 미국에서 교회 중고등부를 보냈는데 - 참으로 <신비한 질문>을 내게 하곤 했다. 그 질문이 내게 신비로왔던 이유는 그 두 아이의 질문이, 그 두 아들의 <애비>가 중고등부 시절에 했던 질문을 꼭 닮아서였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동일했다>. 아빠, 어떻게 하면 24시간 주님만 생각할 수 있어? 35년 전의 나 역시 - 고1때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 24시간 주님만 생각하지 못했고, 그런데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라 교육 받았고, 그 결과 좌절감과 죄의식을 <끼고 살았다>. 그러다가 H.G. Gadamer가, 육십 넘어 쓴 자신의 첫 책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게임이 진정 완성되는 시점은 플레이어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망각할 때이다". (Play fulfills its purpose only if the player loses himself in his play). (Gadamer, 『진리와 방법』, p.92; 『두 지평』, p.297에서 재인용). 중요한 것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의식이 아니라 플레이 자체"이다. ("the primacy of play over the consciousness of the player")( Gadamer, 『진리와 방법』, p.94 ; 『두 지평』, p. 297에서 재인용).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여러 신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점점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주님을 24시간 생각하면 주님이 슬퍼하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잊는 걸> 좋아하셔. ....생각해보니 아빠도 그런 거 같아. 지난 주 너희가 친구들과 농구할 때, 옆에 있는 이 아빠의 존재 완전히 망각하고 게임에 <완전히 빠져있는 모습> 보던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아빠 안 잊겠다고 친구들과 놀지 않고 이 아빠 앞 떠나지 않으려 하면, 아들의 24시간 주목 받는 이 아빠는 <비통한> 마음 들 거 같아. 신은 피조물들이, 그리고 애비는 자녀들이, 인생이란 게임을 '풀필'(fulfill)하기 원한단다. <망각>은 가장 큰 찬양이고 효도인 거 같아.
2017.9.28.
신동주
서플먼트
티슬턴의 『The Two Horizons』은 1980년 Eerdman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 한국에선 2002년 C신학교 출판사에서 『두 지평 : 신약해석학과 철학적 기술 』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 있으나 독자들의 호응 크지 않았던 것으로 앎. 최근 IVP가 박규태 선생의 탁월한 번역으로 『두 지평 : 성경 해석과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제목 하에 출간. 번역자는 원저자가 인용한 독일어 원전의 오류까지 바로잡았을만큼 심혈을 바쳐 번역을 했고 독자들을 위한 별도의 역주까지 제공했다 하니, 나 이 원본보다 나은 번역본도 사야하는 건가....(여기까지)

2017년 9월 16일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박소현 외 3인, 아토포스)을 읽고.

아들이 어제 저녁 때 루터교회에서 열리는 종교개혁 세미나에 가볼까 하길래 그러지 말고, 아들아, 그 시간에 아주 좋은 북콘서트가 하나 있는데 거기 가보는 거 어떠냐, 했더니 아들은 그러겠다고 했다. ( 나 혹시 이러다가 루터교회에서 파문 당... ㅋㅋㅋㅋ) 그렇게 아들은 공저자 4명이 모두 참석하는 <지극히 사적인 페니니즘>(아토포스 출판사) 북콘서트에 갔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무척 궁금하다. 책은, 얼마전에 다 읽었다. 네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 모두 소중했지만 내게 <사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박소현 (Sohyun Park) 작가가 들려주는 첫번 째 이야기에 등장. 어찌보면 사소하고, 누군가에겐 과잉 반응,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난 공감하고 또 공감. 지금 그 책, 나와 같은 루터교회 다니는 여성 한 명에게 빌려줬기에 기억에 의지해서 나누자면: 기혼자인 박 작가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면, <그 즉시>, 시댁 식구들과 친정 식구들처럼 가까와질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한국 문화에 대해,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라고 조용히 자기 생각 표명. 예의를 갖춰 누군가를 대한다는 것과 친해지는 건 다른 문제이고 후자에는 시간이 필요. 우리 주변에는 <그 즉시>와 <당연히> 때문에 오히려 싹도 틔우지 못하고 죽은 아까운 관계의 씨앗, 가능성의 씨앗 얼마나 많은지. < 제가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가겠다는 것은 당신을 진짜 존경하고 싶어서예요. 진짜 사랑하고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이에요 >.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게 적어 이런 말하는 게 쑥스럽지만, 페미니즘은, 중간에 오해를 받고 시행착오를 좀 겪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썩지 않는 쇼윈도 플래스틱 관계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든지 얼마든지 썪을 수 있는, 그렇기에 진짜 열매 맺을 수도 있는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될까...내게 천천히 다가온 며느리...와 캔맥주 마시며 영화와 루이스와 칭의론과....(여기까지).

2017년 2월 20일

손원영 교수에 대한 파면 결정에 <공감>하는 분들에게

1. 2016년 1월 경북 김천 개운사 법당에 한 60대 개신교 신자가 밤늦게 들어가 불상 등을 부쉈습니다. 1억원 가량의 재산피해가 났고 주지 스님은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기독대학교의 손원영 교수는 한 명의 개신교인으로서 불상 훼손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는 사과문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하고 법당 복구를 위한 보상비를 모금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운사의 요청에 따라 이렇게 모인 260만원의 모금액은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이해와 종교평화를 위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는데 쓰였습니다. 같은 해 12월 19일 서울기독대 이사회는 손교수에 대한 징계안을 제청했고, 2017년 2월17일, 이사회는 파면 결정을 내렸습니다. 2월 20일 오늘, 손교수가 작성, 낭독한 기자회견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저는 지난 주 ‘성실의무 위반’이란 죄목으로 파면당했습니다. (...)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지어서는 안 되는 소위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2. <어떤 분들>은 서울기독대학교 이사회의 상기 파면 결정에 대해 <공감하고 찬성>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불상을 우상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저는 C.S.루이스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한번 찬찬히 읽어봐주시겠어요.
“세상은 100 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퍼센트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예컨대 선한 의지를 가진 불교도가 불교의 다른 가르침은 뒷전에 밀어둔 채(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비에 대한 가르침에만 점점 더 집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3.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자비>라는 가르침에만 집중하던, 그래서 어쩌면 얼마 후 기독교라는 <타종교> 안에서 자비의 성육을 발견하고 <개종>했을지도 모를 한 불자가 위와 같은 불상훼손을 경험한다면, 그가 그 <타종교>로 개종할 확률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한 개신교도가 마음을 담은 사과문을 대신 올리고 보상비 모금이라는 실천을 통해 그 사과의 진정성을 보여줄 때, 그 <타종교>에 대해 닫혔던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다시 생길까요.
4. 저는 손원영 교수가 오히려 <성실의 의무>를 누구보다 잘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와 목사로서의 그의 신앙과 모범을 통해, 그동안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오던 사람들, 기독교라는 타종교에 마음 문 더 열리고,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워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손원영 교수가 신앙과 삶으로 <숭배>한 것은 우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비>를 <가르쳐주시고 명령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입니다.

2017. 2.20.
신동주 드림


(참고) 손원영 교수의 기자회견 전문 보기 
https://www.facebook.com/sohnwo/posts/1603409536343104


2017년 2월 11일

<새롭게하소서>를 제작하며, 떠나며















1. 후배 L피디와 둘이서 새롭게하소서를 연출한지 10개월이 됐습니다. 그리고 보름 전, 저와 L피디, 다른 프로그램 배정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소위 ‘디졸브 타임’이라고 부르는, 피디들에게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존 프로 마무리 제작, 새로운 프로 사전 제작을 동시에 하는 시기입니다. 한 동안 긴 글 쓸 시간 없을 거 같아 오늘 토요일, 동네 커피숍에서, 제게 <참으로> 소중했던 지난 열 달을 돌아봅니다. 흑흑.
2. 새롭게하소서가 작년만큼 언론에 많이 회자됐던 해도 없었던 거 같아요. 라이즈업 코리아의 이동현 목사(성추행), 중국동포교회의 김해성 목사(성추행), 최순실과 관련된 차은택 씨(국정농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상기 인물들의 과거 새롭게하소서 출연 캡처 사진이 인터넷에 떴습니다. 그때마다 두 연출자, <간증>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많은 젊은 세대에게 이미 <오래 전에 잊혀진 장르> 간증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토론하며 섭외의 원칙을 세웠고, 그렇게 열 달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시죠?
3. <섭외의 원칙에 대해서>. 일단 숫자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누군가 하루 세 시간 매일 기도한다 해도, 그가 일 년에 성경을 백 번 통독한다 해도 <우리는 그의 신앙에 대해 전혀 모른다>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듣기 전까지는. 최근 큰 슬픔을 최근 겪은 분은 그 스토리가 아무리 극적이어도 좀 천천히 모시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객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그 분께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목소리가 좋은 성악가라도 만약 그 성악가가, 주일에 교회 주차장에, 타고간 그의 차와 함께 그의 뇌까지 “파킹”하고 예배당에 들어가 설교 듣는 기독인이라면,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인격을 멸시해서가 아니라 굳이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 싶은 신앙”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제 관심은 선교에 있어요, 지금 하는 일은 선교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하는 거죠, 라는 간증은 열 달 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식당, 운동코치, 그 무엇을 하더라도,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보내는 그 직업과 일 속에서/하며 즐거워하는 분 모시고 싶었어요. 나, 내 자식들, 은혜 받고 축복 받고 인도함 받는 이야기도 소중하지만, 자신의 삶 속에 <이웃>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분을 모시고 싶었어요. (연출 맡고 있는 내가 못살고 있는 <그 삶> 사는 분들). 또, 얼마 전에 <부끄러움>을 느낀 적 있다고 말하는 분들, 명함에는 대표 타이틀 붙어 있더라도, 지금도 직원과 동료로부터 무언가 배우고 있는 분들, 여전히 더 성장해야 한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완성되지 않은 분들> 모시고 싶었어요. (반어법이어요. 완성되지 않은, 이란 저의 최상의 존경담은 무례한 과장법을 용서해주세요). 누군가를 가르친 이야기 외엔 들려 줄 게 없는 분들은 모시고 싶지 않았고, 여전히 넘어지고 여전히 헷갈린다고 고백하는 분들 모시고 싶었어요. (왜 눈물이 나죠 ) 가끔 목회자를 모실 때는 “성도로서 함께 길을 걷는 느낌” (시청자가 페북에 올려주신 글)을 주는 분, 그렇게 사는 분들을 모셨어요.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지만 논리만 탄탄한 분들은 모시지 않았어요. 지금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맘의 부담을 이해하는, 그분들을 여전히 대화의 상대로 여기는 분들 모셨어요.
4. 섭외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페이스북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네요. (페북 좋아요/팔로우 수가 10개월만에 2,500에서 3만으로 <변경>되었다는 소식! ㅋㅋ) 새롭게 두 피디 중 한 명인 후배 L이 “우리 프로그램, 페이스북으로 꼭 나눠야 해요”라고 강력하게 제안을 해서 시작된 새롭게 페북 프로젝트 <간증, 또 하나의 제자도>. CBS의 가장 올드한 프로그램, 가장 올드한 간증 장르 , 새롭게하소서가, 페이스북을 통해, 수많은 기독인, 젊은이, 타종교인, 무종교인들과 만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는 일은 가슴 뛰는 경험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널리 확산될 수 있었을까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진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저희 제작진이 자주 나눴던 이야기는, 사람들에겐 소위 복을 받고 싶다는, 행복하고 성공하고 싶다는 갈증 외에도, <훌륭하게, 제대로 살고 싶다는 깊은 갈증>이 있는데, 새롭게 출연자들의 삶과 신앙이 그런 갈증에 대한 해답이 되었던 게 아닐까, 였습니다.
5. 이제 새롭게의 주인공을 소개하며 글을 맺으려 합니다. 사람은 슬플 때뿐만 아니라 진실함과 마주칠 때도 눈물이 나나봐요. 형제들을 보고 옆 방에 들어가 울고 나온 이집트의 요셉처럼, 녹화 중에 옆 세트 창고 들어가 울고 나온 적이 많았어요. 카메라 앞이라는 낯설고 부담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부담 기꺼이 져주신 새롭게하소서 출연자 백스무 분께 이 자리 빌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새롭게하소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 2.11.
신동주 드림
*지난 열 달 동고동락한 새롭게 스태프들이 떠오릅니다. MC를 맡으셨던 김학중 목사님과 전혜진 집사님, 강신해, 강민경, 박민정, 장문정 네 분의 작가, 송영호· 임에덴 두 조연출, 그리고 제 글에 자주 후배L로 등장했던 임지은(Jee Eun Lhim)PD(사진 왼쪽)에게, 비록 새로운 프로와 팀으로 흩어지지만,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용감하고 억센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지금까지 함께 하셨듯이 앞으로도!
**사진설명: 녹화와 녹화 중간에도 토론을 쉬지 않았던 두 피디ㅋㅋ

2017년 1월 28일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표절 관련 손해배상액 모금을 제안하며

저도 손해배상액을 함께 내겠습니다! 
-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의 저자 송병현 교수가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에게 청구한 손해배상액 모금을 제안하며
1. 송병현 교수(백석대)가 자신의 저서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에 대해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맹호성 이사(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와 이성하 목사(가현침례교회)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3억원 청구 소송과 관련,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4민사부는 2017년 1월 13일, 이성하 목사에 대한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고 맹호성 이사에 대해서는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다 하여 1,000만 원을 배상하고 몇몇 관련 게시물은 삭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 판결문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는 동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 하나가 우리 사회에 참으로 의미있는 <확인들>이었습니다. 몇 대목만 뽑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판결문 내 ‘표절 문제 제기의 공익성’ 중에서
“피고들의 이 사건 서적에 대한 표절 문제 제기는 공공의 관심 사안에 관한 것으로 충분히 공익성이 인정된다고 할 것이다.”
○ ‘표절 문제 제기의 상당성’ 중에서
“[원고는] 5가지 문헌을 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 본문에서 내주[즉, ‘(Hamilton; Mathews; Sarna; Waltke; Walton)']가 전혀 표시되지 않는 사례, 다른 연구자가 밝힌 견해를 마치 원고가 주체가 되어 이 사건 서적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된 사례가 각 발견되고”
○ ‘표절 문제 제기에 관한 수단의 사회상규 적합성’ 중에서
“피고들이 공개그룹인 번역이네집, 신표 페이스북에 각종 글을 작성,게시하고 (...) 회원들을 상대로 표절 의혹에 관한 제보,의견을 구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 피고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지식,경험을 공유하여 국내 신학계의 광범위한 표절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취지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 그 자체로 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 ‘소결’ 중에서
“[피고 맹호성과 이성하의 대상 행위는] 이 사건 서적의 표절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허용되는 정당한 행위이거나, 설령 그 중 일부가 명예훼손 및 모욕 등 비방행위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공익성, 상당성, 수단의 사회상규 적합성이 인정되어 그 위법성이 조각된다” (*조각된다: ‘성립되지 않는다’, ‘해당하지 않는다’)
3. 맹호성 이사에게 부과된 1000만원이라는 손해배상액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법원은 맹호성 이사가 “이 사건 서적의 표절 문제 제기를 넘어서 저작권 침해, 이에 따른 법적 책임 등의 문제까지 제기”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 [엑스포지멘터리] 시리즈의 다른 서적에도 상당한 저작권 침해가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표현 및 행위 등을 했기에 “원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관하여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결했습니다. 저는 맹호성 이사가 저작권 에이전트로서 본인의 직업상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위협”이나 “단정”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판정을 존중합니다>.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법원이 결정했으니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오래 전 한 신학교수와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태복음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 소장 학자에게 제게 언젠가 물었습니다. “신학자로서 당신의 꿈을 무엇입니까?” 그의 답변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제게는 의외였습니다. “제대로 된 마태복음 주석을 한 권 쓰는 것입니다.” “겨우 주석 한 권이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신학 주석 한 권 쓰는 일은 종종 평생의 연구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참고로, 송병현 교수가 엑스포지멘터리 시리즈에서 낸 책으로는 이번에 문제가 됐던 <창세기> 외에도 아래와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 아래 -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에스더,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역대상, 역대하, 에스라,느헤미야, 이사야1, 이사야2,예레미야Ⅰ,예레미야Ⅱ, 예레미야애가, 이사야1, 이사야2,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호세아, 스가랴. 말라기.
송병현 교수가 상기 책들을 저술할 때는, 문제가 있다고 법원이 이번에 확인해 준 <창세기> 저술 원칙과는 <다른 원칙>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존재하는 그 가능성과 관련해선 이 자리에서 더 말하거나 논의하고 싶은 마음 없고, 그 실상의 확인 및 증명은 제 능력 밖입니다.

4. 서론이 길었습니다. 저는 2016년 6월 11일, <소송 비용 모금을 제안드리며> 라는 글에서 “원고 송병현 교수가 피고 이성하 목사와 맹호성 이사를 고소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이 소송의 원고는 <한 명>이지만 피고는 <두 명이 넘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학서적 표절반대> 싸이트에서 한국 기독교 학문 세계의 정화와 성숙을 추구하는 <공익적 성격>을 봤고 그 공익적 성격에 <동의>해서 <신표>에 회원으로 가입, 활동해 온 저에게 <신표> 공동 관리자들의 피소는 <저에 대한 피소>와 다를 바 없었고,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 학문장의 공익성> 자체의 피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법원이 결정한 1000만원의 손배배상액은 제게도 청구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5.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 두 분, 정말 잘 싸우셨습니다. 정말 소중하고 의미있는 확인입니다. (“법원, 송병현 교수 표절 사실상 인정”, 뉴스앤조이, 2017.1.21.) 동료들을 대표해서 앞에서 싸운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불어오는 바람을 더 많이 맞고, 더 긴장해야 하고, 더 많은 배신과 상처를 경험하는 곳이 앞자리인 것 같습니다. 비록 싸우는 과정에서 손해배상을 해야하는 일이 발생했지만, 만약 제가 앞자리에서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면 이번보다, 이 두 분보다, 더 용감하게 더 지혜롭게 싸울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싸우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비용, 제 싸움이기도 하기에 함께 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저만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 주위 분들과 얘기해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표 멤버로서 이렇게 제 의사를 표하오니, 신표 운영진께서는 손해배상액을 모으는데 신표 멤버들, 그리고 공감하는 시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계좌공지 등 방법과 절차를 마련하고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소송과 재판을 통해 우리는 5백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에 작게나마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연구하시며 바른 결정 내려주신 판사님들과, 옳음을 위해 소송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 주신 일곱 분 교수님들과, 긴장되는 긴 재판 과정 묵묵히 견뎌주신 두 분 변호사님과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와 응원의 말씀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 1. 22
신동주 드림 ( <신학서적 표절반대> 회원, 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

2016년 11월 20일

동영상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찬수 목사 설교, 스탠드네트워크 제작)를 시청하고.


1. 약 한 달 전, 제게 엄청난 쇼크를 가져다 준 영상물 하나를 봤어요. 혹시 인천에서 한 유부녀가, 오롯이 한 유부남 목사의 기도 힘으로만, 그 목사 빼다 박은 아이 출산했다는 ‘제보자들’이란 프로는 아니냐고요? 아니어요. 제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영상물은, 교회란 어떤 곳인가를 묻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3분5초짜리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라는 유튜브 동영상이었어요.

2. 상기 동영상에서 이찬수 목사는 젊은 목사와 전도사들에게 (a)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삶의 자세, (b) 본인이 부목사 시절 담임 목사로 모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과의 일화 등을 소개했는데요, 저는 설교자가 숭앙하는 고인의 교회관에 대해 <단 한 프레임>도 동의할 수 없었어요.

3. 상기 동영상에는 고인이 화요 교역자 회의에서 부목사들을 심하게 다잡는 대목이 나오는데 고인의 언어는 다음과 같아요: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실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구 목사, 그 성도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 반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날. 목사님은 좀 다혈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왜 너 같은 게 이 교회 와 가지고 성도를 괴롭히냐는 거예요. <나가라고 이 교회>! 왜 사랑의교회 와가지고 성도들을 괴롭히느냐고!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 (상기 물맷돌 영상 중에서. < >표시 강조는 신피디.)
저는 고인이 사용하신 언어의 <폭력성>에서 심한 충격을 받았는데요 - 왜 내가 존경하는 고인이 하필 내가 싫어하는 스티브 잡스를 닮은 것일까 - 그래서 이제 저는, 누군가에겐 몹시도 <교회적>일 수 있는 고인의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 드러내는 한 일환으로 이런 <질문> 하나 던지고 답해보려 해요. <나라면 언제 화를 낼 것인가>.

4. 제가, 같은 교회에서 동역하는 후배 부목사를 부르고 이렇게 말합니다. (후배 목사의 이름은 편의상 민기라고 하겠습니다.) 민기야, 내가 오늘 네가 맡고 있는 2교구의 권사님들 몇 분을 만났는데 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라. (잠시 긴장했던 후배의 얼굴 표정이 좀 풀립니다) 지난 2년 동안 민기 네가 실수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야. 왜 그랬니. (이제 후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민기야, 여긴 교회야. 불완전해도 되는. 왜 완전한 성자 코스프레를 한 거야. 그렇게 교회 <밖에> 있지 말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줘. 안 그러면 내가 슬퍼. 지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민기는 잔뜩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성도들의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요...) 저는 말합니다. 민기야, 그때 그 교회에서 있었던 일, it's not your fault. 그래, it's not your fault. 삼만 명 되는 교회를 만든 건 네가 아니야. <어떡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사정 잠시 몰랐다고, 네 안에 사랑이 없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고민과 아픔을 네게 매번 <보고>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네가 <항상 다 아니>. 게다가 교인들 중에는 <담임목사>에게만 고민 오픈하는 사람들 많다는 거, 우리 잘 알잖아. (제가 사랑하는 후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습니다).

5. 예, 제가 담임 목사라면, 타인의 고민과 어려움은 <완전 파악>하고 있지만, 자신의 고민과 갈등, 실수와 약점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부목- 그러니까 <칭찬자자>, <백퍼완전> 부목- 불러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간청하겠어요. 흠 많았던 열두 제자 닮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약자 <대형교회 부목> 1인 향해,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고함치는 대신.

2016.11.17
신동주


서플먼트
1) 지금 내가 쓰는 글은 이찬수 목사와 고 옥한흠 목사님이 살고계신, 살다가신, <인생>과 <신앙>에 대한 비판 아님. 내게 그런 비판할 자격, 능력 없음. 다만, 상기 동영상에서 <언어를 통해> 드러난 교회<관>과 신앙<관>을, 다시 <언어를 통해> 되물어 보고, 이를 통해 우리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뭘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해 보는 중. 고인 살아생전 이 글 보셨다면, 내 진심 알아보시고 좋아요 눌러주셨을 거라고 믿음, 차단하는 대신.

2) 상기 동영상의 출처와 링크는 다음과 같음. 출처: 스탠드네트워크
링크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Q-wCf8oXQQ
내가 정리한 텍스트 버전은 다음에서 확인 할 수 있음.
http://holyfat.blogspot.kr/2016/11/blog-post.html

3) 우리 한국 교회엔 이상한 신화가 하나 존재하는데 나 이제 앞으로 그걸 <숟가락 신화>(spoon myth)라 부르겠음. <모름지기 진정한 목회자는 성도들 가정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아야 한다>라는 이 숟가락 신화는 <당장 파악하란 말이야>, <몰라? 그러면 넌 진정한 목회자 아니야>라는 - 젓가락과 포크처럼 사람 <찌르는> - 율법과 정죄로 쉽게 이어짐. 각설하고, 내가 이 신화에서 가장 의아하게,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점 하나 있으니, 이 신화에서 <알다>는 왜 한 번도 <쌍방향>이었던 적 없나 하는 점. 왜 항상 목회자는 <알아야만>하고, 교인은 <알려져야만> 하는 거임? (이 신화에서 목회자 집 숟가락 숫자는 안 나옴). 교인이 무슨 <남성>이나 <백인>에 의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려야만하는 <여성>이나 <아시아>임? (문장력이 달려 써놓고 보니 내가 여성과 아시아를 디스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내 의도는 정반대임. 여성과 아시아가 남성과 백인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듯, 교인도 목회자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음. 알려짐, 사랑받음, 기도받음, 이라는 수동성은 - 진정 성숙한 자만 이런 <수동성>을 당당히 긍정할 수 있지만 - 교인과 목회자 공히 <배우고 실천해야>하는 덕목임. 서로 돕지 못하는 일방적 관계의 결혼 오래 가지 못하듯, 소위 일방적 돌봄과 섬김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숟가락(신화)만 빠는 교회, 오래 가지 못함. 그래서 한국 교회 <이렇게> 됐음.

2016년 11월 12일

동영상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텍스트)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찬수 목사) 라는 3분5초짜리 동영상을 보고 넘 큰 쇼크를 받은 나는, 한 번 더 들으며 영상 내용을 받아적었습니다 ㅠㅠ 어떻게 <교회관>과 <분노의 지점>이 나와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설교자, 그리고 설교자가 인용하는 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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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무슨 청년들 데리고 성경공부만 하면은
세계복음화, 아프리카가 나를 부른다, 조국 통일,
민족복음화 떠는는데 손에 물맷돌이 없어요.
있습니까?
우리 젊은 목사님들, 또 전도사님들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 물맷돌은요 40일 금식기도해서
얻어낸 게 아닙니다.
내 삶터에서 보잘 것 없는
양 지키는 일이지만
이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여기에 온 마음을 쏟을 때
나온 부산물이 물맷돌입니다.
물맷돌 있습니까?
물맷돌도 없으면서 자꾸 골리앗 이긴다고 그러니까
허풍쟁이들밖에 더 되냐고요.
우리처럼 뻥이 센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뻥이 센 사람들이 모였는데
한국교회는 왜 이 꼴입니까?
왜 절에 교회를 팔아야 하는 비극이 왜 일어납니까?
옥한흠 목사님의 어느 부분이 그리운지 아십니까?
화요일 교역자 회의 할 때
지금 생각해도 등꼴이 오싹해요
한 번도 옥한흠 목사님이
“야, 이목사 왜 고등부 숫자가 안 느냐?”
이걸 가지고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실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구 목사, 그 성도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 반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날
목사님은 좀 다혈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왜 너 같은 게 이 교회 와 가지고 성도를 괴롭히냐는 거예요.
나가라고 이 교회!
왜 사랑의교회 와가지고 성도들을 괴롭히느냐고!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지금도 소리가 들려요 지금도.
화요일날 기도회 인도하시다가
막 우시는 거예요.
막 우시는 거예요.
왜 우시는지 아세요?
하나님, 어느 권사가 지금 암이랍니다.
암으로 신음하는데
이 종이 무능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어서
하나님, 마음이 힘듭니다.
그러시면서 우시는 거예요.
옥목사님이 언제 대형교회한다고
대형교회 하자고 그러신 적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있는 성도도 관리도 안 하고
방치해 놓으면서
뭐하러 자꾸 배가 배가 그러고 있느냐고요.
두당 얼마씩 팔려고 그러십니까?
다윗은요
조국통일
민족 부흥, 타도 골리앗
그렇게 떠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양 지키는 일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양 지키는 일이 내게 맡겨진 일이면
이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그게 나라를 구하더라고요.
출처: 스탠드네트워크 . 2016.10.16.
링크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Q-wCf8oX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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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8일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E.P.샌더스 지음, 알맹e)를 구매하고.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이사로 있는 맹호성 페친이, 한국 신학(출판)계가 39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방금 했어요 ^^ 1977년 출간 이후 바울 연구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는 평가받는 E.P.샌더스의『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전자책으로 냈어요. 페친이 직접 디자인한 표지를 보고 저는 제 석사학위 논문의 주 분석 대상이었던 마이클 폴라니의 주저『Personal Knowledge』(1958년)가 바로 떠올랐어요. 둘 모두 표지는 단순해도, 우리가 세상과 기독교를 보는 시각을 참 많이 <흔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만남 있잖아요, 그 만남 이후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식론과 신학에 <약간의 사전 지식>(이런 난 얼마나 많이 안다고 ㅜㅜ)이 있는 분들께 두 책 모두 적극 추천.

(참고) ① 폴라니의 책은 아카넷에서『개인적 지식』이란 이름으로 나온 적 있는데 (적어도 제게는) 해독 불가 였어요. 인식론에 관심 있는 교수나 학생이 있다면 영어책을 권합니다. ② 이번에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번역은 제가 신뢰하는 신학서적 전문 번역가 박규태 목사가 해주셨어요. 완전안심. ③ 우리나라 신학서적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맹호성 페친은 이 책을 PDF 형식으로 출간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양한 구매 옵션>을 제공하는데요, 제 페친의 성격이 잘 묻어나는 <하드보일드한>의 책 구매 방법 소개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장 쾌락적인...읽기라는 행위에 푹... :)
https://www.facebook.com/Rmaenge/posts/1228529727188938

2016년 10월 7일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IVP)를 읽고.

한 개의 구(句), 하나의 문장(文章)이 나로 하여금 이 책 구매케 했으니 먼저 구부터 소개하면: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라는 이 책의 부제). 원부제 '신학자의 회고록' 가볍게 킬하고 매혹적인 상기 부제 단 이, 출판사는 포상해야함. 한편, 상기 구와 함께 날 유혹한 ‘쎈텐스’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신학교수 세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쓴 추천사에 등장하는데 그 정확한 워딩은 다음과 같다: “『한나의 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전통을 당당하게 잇는다.” (후기,p.523). 특정 답만을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한국 교회에 신물난 내게, 『고백록』을 좋아하여 선한용 역, 최민순 역, R. S. Pine-Coffin 역으로 『고백록』 세 권 갖고 있는 내게, 상기 두 홍보 포인트는 내 <성감대>를 정확하게 터치한, 내가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음. 하나 아무리 책을 읽어도 상기 구와 문장에서 촉발된 나의 <설렘과 흥분>은 절정으로 이어지지 않고....계속 <무언가 다 안 채워진 듯한> 미진함.....때문에 책을 다 읽고 돌아누운 나는....좋았어? 라고 스탠리가 계속 묻는데도 아무 대답 않고.....
2016. 10. 7.
신동주
서플먼트
1) 책을 덮었을 때 가슴에 남은 건 ‘당혹감’이었고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불친절’. 내가 이 책 왜 불친절하다 생각하나 하면: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스탠리가 씨름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문제들>을 알아야 하는데, 542쪽 되는 이 책에서 스탠리는 자신의 결론과 결정만을 <일방적>으로 소개. 스탠리가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을 비판했고 존 요더를 만나는 가운데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됐다는 <팩트>는 알겠는데, 그런 <결과의 나열>이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담? 나는 어떤 신학적 입장도 <100>로만 구성됐다고 보지 않음. 그렇기에 여전히 무시해선 안 될, 계속 귀기울여할 <니버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봄. 니버가 갖고 있었던 <두려움>과 <꿈>과, 특정 성경 본문을 스탠리와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든 <성서관> 등 니버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충분히> <매력적으로> 소개할 때 비로서 <스탠리의 이야기>도 산다고 봄. <레옹>에서 게리 올드먼이 레옹와 마틸다의 이야기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주었듯이 말임. 레이 올슨(Ray Olson)이란 이가 “대부분의 현대 회고록 저자들은 일인칭 소설 화자와 비슷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명한 신학자 하우어워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라고 말했으나 나 그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음. 이 회고록엔 적(敵)에 대한 <명단>은 있으되 그 <적들의 이야기>는 없음. 다시 말하지만 이 회고록엔, 스탠리가 신학자로서 성서를 해석하며 다른 해석 방법(그러니까 ‘다른 삶’)과 조우할 때 그가 느꼈을 두근거림, 두려움, 망설임은 등장하지 않음. <저명한 신학자>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 <흔들리는 신학도>는 만나지 못한다는 게 몹시나도 애석함. (나는 <그걸> 듣고, 보고 싶어 이 책을 펼쳤는데 말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적들의 이야기만 빈약한 게 아님ㅠㅠ 가장 강력한 아군인 요더와 매킨타이어의 고민과 꿈에 대해서도 나 더 알게 된 거 <정말 한 줄>도 더 없음. (참고: 내가 아는 요더는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IVP)에 등장하는 요더가 전부. 내가 읽은 매킨타이어의 저서는『덕의 상실』(문예출판사)이 유일.) 이제 나, 스탠리와 내가 쓰는 언어가 과연 <같은 언어>인지 회의에 빠짐. 왜냐고? 스탠리가 돌아누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 그다음에 이것을 썼다’식의 서술을 피하려”고 했어.(<맺음말>,p.508) 나는 나보다 <훌륭한> 그에게, <24> 그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림. “스탠리,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게 정확하게 바로 그거예요.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그 다음에 이것을 썼다...라고만 하는 거....내가 원하는 건....내 몸에서....당신이 만져주기를 바랐던 곳은....”
2) 이제 이어지는 건 독서 중 내가 체험한 총 다섯 번의 “멀티-당혹감(multi-confusions)”. 멀티 오르가즘은 들어봤어도 멀티 당혹감은 첨 들어봤을 당신에게 그 당혹들 좀 구체적으로 소개하면(후방주의? -.-): "앤과 함께하는 삶이 신학자로서의 나의 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p.287) ( 아니, <가끔>이라니? 『한나의 아이』 구매자 대다수는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스탠리 답변 듣고 싶어 이 책 샀을 터인데.) 어쨌든 상기 질문에 대한 스탠리의 답변: “모른다는 것이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p.287). 모른다....저자가 모른다...고 하는 마당에 이제 더 물을 수도 없다....(이게 첫 번째 당혹) "앤과 함께 살며서 나는 삶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이 내 신학적 통찰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지만, 앤과 애덤과 함께한 시간이 내가 배운 신학을 펼치는 방법을 좌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나친 억측인 듯하다." (p.288). 이런, <내 예상>이 억측에 불과했구나. 그의 <24>이 <그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내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을 억측이라 호(呼)하다니. (이게 두 번째 당혹). 어쨌든 왜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갈 때 앤과 함께 한 시간과 경험에 기대지 않는지 스탠리가 밝히는 이유 들어보면: "내러티브에 대한 강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신앙 언어의 의미를 시험하거나 결정하는 데 쓰라는 요구가 아니다." (p.288) 스탠리의 이런 <신념과 태도> 때문에 우리는 스탠리의 <신학적 사유>에 <앤과 함께한 삶>이 끼친 영향의 <정도와 내용>에 대해 <충격적일 정도>로 <무지한채로> 책을 덮게 됨. (세 번째 당혹). 오케이, 스탠리, 알겠어요, 그럼 당신의 신학적 통찰, 당신의 그 내러티브 신학에 영향을 <끼친> 경험은 뭔가요? “내러티브가 기독교적 확신에 필요한 문법이라는 말은 존재의 이런 종말론적 특성을 뜻한다. 확신컨대 이것은 나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과 그의 연구 결과를 만났기 때문에 내 저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p. 291). 그렇다. 스탠리에 따르면, 스탠리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이는, <앤>이 아니라, <존 하워드 요더>임. (ㅠㅠ) 정리해보자. 이제 우리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요더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게 됐음. 동시에, 아무리 『한나의 아이』를 읽어도 요더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참고: 서플먼트 2) 역시 이미 알고 있음. (네번 째 당혹). 난 이제 곤고한 독자...이 당혹스러운 회고록에서 누가 나를 건저낼 수 있을까 흑흑흑. 나 이번 여행에서, 수많은 신학자들과 올레길 걸으며, 개인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경험 들을 기회 있을 줄 알았는데, 인솔자 스탠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파킹랏. 요더와...니버와...매킨타이어와...그리고 스탠리 자신의...차만 <파킹돼 있었음>. 그게 다.(that’s all). 나 신학자들 차만 보고 왔음. 이 연속되는 네 번의 당혹은 우리에게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문학적 질문>을 하나 야기함.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임. 회.고.록.이.란.무.엇.인.가. <도대체> 회고록이란 무엇인가....세라, 『한나의 아이』가 어거스틴의 『고백록』 전통을 잇는다고 했죠? 세라....세라, 내 말 들려요?
3) 이제 다섯 번째, 마지막 당혹 남았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앤이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떴을까. 그러다 등장한 스탠리와 앤의 이혼 소식. 내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내게는 큰 충격이었음. 나 지금 원론적인 기독인의 이혼 가능 여부 묻는 거 아님. 내가 묻는 건,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 배우자의 천식이 심하다고, 오른쪽 다리가 썩는다고, 정신질환 증세가 심해진다고, 이혼해도 돼? 다시 말해, 자녀의 안전 등을 위해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게 아니라 <이혼>하는 게 기독인에게 <옵션>이 될 수 있나. 배우자의 잘못이 없는 한 – 질환은 잘못이 아니다 – 우리는 평생을 상대의 배우자로 <살아야만> 하는 거 아니었나. 한편, 내 이 당혹감이 단순히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면 이제 내가 인용하는 페친 K의 글은 이번 회고록에서 들리지 않았던 <병자/환자의 목소리>에 주목함. “저자나 이 책을 만든 출판사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직접 고통을 겪은 당사자인 앤의 입장에서 그의 목소리는 누가 대변해 주나 싶어 안쓰럽고 먹먹했다.” (페친 K의 2016년 10월3일 페북 포스팅에서 인용).
4) 거듭되는 당혹감에 당혹한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생각 궁금해, 2016년 8월 22일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일곱시에 열린『한나의 아이』 출간 기념 공개 강연회에 참석. “그럼 이제 플로어의 질문 두 개만 받겠습니다” . 강연 후 사회자가 말하자 나와 함께 강연회에 왔던 회사 후배 L이 손을 듦. (난 지금도 이 질문이 그 강연회의 백미라고 생각. 참고로 L은 나와 함께 지금 <새롭게하소서> 연출 중. 맞음. 나 지금 프로그램 홍보 중.) “믿지 않는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니. 그냥 열심히 최선 다해 사는 거지. 그럼, 그 답 없음과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정답 없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최선을 다해 사는 그 친구에게 우리의 정답 없는 종교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답은 없고,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정신에 따라, 그날 나온 답변 소개는 생략.
5) 이상 나의 글은 <지극히 사적인> 독후감. 다른 의견, 다른 평가 당연히 존재.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쓰고 IVP가 펴낸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는 국민일보 선정 ‘2016년 올해 최고의 책’으로 뽑힘. “이 책은 출판사와 아카데미 대표 등 12명이 호평, 대상 도서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6.12.28). 이 책 비록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펴낸이와 편집자가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와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무척 소중하다고 믿는다.


2016년 9월 18일

교회와 설거지

오늘 아침 교회 갈 때 처음 설거지를 하는 날이라서 그런지 세례 받는 날처럼 약간 긴장됐다 점심을 빨리 먹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장로님 한 분과 한 조가 되어 설거지를 하는데 점심 메뉴가 카레였기에 그런지 세심하면서도 집요한 터치가 필요했다 -.- 설거지를 마치고 솥까지 다 씻고 났더니 뿌듯했다 내가 30대 초반에 듣고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참 칭찬 받기 쉽다. 설거지를 한 번 하면, 커피를 한 번 타오면, 먹은 자리를 치우면, 뭔가 한 번만 해도 <매너> 좋다고 칭찬을 받는다....반면 그 일을 <매번> 하는 사람들은 <한 번만 안 해도> 여자가....하면서 비난 받는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고했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서 감사했지만 내가 더 바라고 기대하는 건 설거지 하는 남성들이 칭찬 받는 게 아니라.....설거지 안 하는 여성들이...안 해도...뭐라는 사람 없고 자연스러운....남자들처럼 <하고 싶은 날만> 이름 기입하는....그런 교회....( 이 글은 내가 다녔던, 지금 다니는, 앞으로 다닐지도 모를 모든 교회를 생각하며 쓴 글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