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16년 10월 8일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E.P.샌더스 지음, 알맹e)를 구매하고.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이사로 있는 맹호성 페친이, 한국 신학(출판)계가 39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방금 했어요 ^^ 1977년 출간 이후 바울 연구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는 평가받는 E.P.샌더스의『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전자책으로 냈어요. 페친이 직접 디자인한 표지를 보고 저는 제 석사학위 논문의 주 분석 대상이었던 마이클 폴라니의 주저『Personal Knowledge』(1958년)가 바로 떠올랐어요. 둘 모두 표지는 단순해도, 우리가 세상과 기독교를 보는 시각을 참 많이 <흔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만남 있잖아요, 그 만남 이후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식론과 신학에 <약간의 사전 지식>(이런 난 얼마나 많이 안다고 ㅜㅜ)이 있는 분들께 두 책 모두 적극 추천.

(참고) ① 폴라니의 책은 아카넷에서『개인적 지식』이란 이름으로 나온 적 있는데 (적어도 제게는) 해독 불가 였어요. 인식론에 관심 있는 교수나 학생이 있다면 영어책을 권합니다. ② 이번에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번역은 제가 신뢰하는 신학서적 전문 번역가 박규태 목사가 해주셨어요. 완전안심. ③ 우리나라 신학서적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맹호성 페친은 이 책을 PDF 형식으로 출간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양한 구매 옵션>을 제공하는데요, 제 페친의 성격이 잘 묻어나는 <하드보일드한>의 책 구매 방법 소개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장 쾌락적인...읽기라는 행위에 푹... :)
https://www.facebook.com/Rmaenge/posts/1228529727188938

2016년 10월 7일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IVP)를 읽고.

한 개의 구(句), 하나의 문장(文章)이 나로 하여금 이 책 구매케 했으니 먼저 구부터 소개하면: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라는 이 책의 부제). 원부제 '신학자의 회고록' 가볍게 킬하고 매혹적인 상기 부제 단 이, 출판사는 포상해야함. 한편, 상기 구와 함께 날 유혹한 ‘쎈텐스’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신학교수 세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쓴 추천사에 등장하는데 그 정확한 워딩은 다음과 같다: “『한나의 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전통을 당당하게 잇는다.” (후기,p.523). 특정 답만을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한국 교회에 신물난 내게, 『고백록』을 좋아하여 선한용 역, 최민순 역, R. S. Pine-Coffin 역으로 『고백록』 세 권 갖고 있는 내게, 상기 두 홍보 포인트는 내 <성감대>를 정확하게 터치한, 내가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음. 하나 아무리 책을 읽어도 상기 구와 문장에서 촉발된 나의 <설렘과 흥분>은 절정으로 이어지지 않고....계속 <무언가 다 안 채워진 듯한> 미진함.....때문에 책을 다 읽고 돌아누운 나는....좋았어? 라고 스탠리가 계속 묻는데도 아무 대답 않고.....
2016. 10. 7.
신동주
서플먼트
1) 책을 덮었을 때 가슴에 남은 건 ‘당혹감’이었고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불친절’. 내가 이 책 왜 불친절하다 생각하나 하면: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스탠리가 씨름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문제들>을 알아야 하는데, 542쪽 되는 이 책에서 스탠리는 자신의 결론과 결정만을 <일방적>으로 소개. 스탠리가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을 비판했고 존 요더를 만나는 가운데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됐다는 <팩트>는 알겠는데, 그런 <결과의 나열>이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담? 나는 어떤 신학적 입장도 <100>로만 구성됐다고 보지 않음. 그렇기에 여전히 무시해선 안 될, 계속 귀기울여할 <니버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봄. 니버가 갖고 있었던 <두려움>과 <꿈>과, 특정 성경 본문을 스탠리와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든 <성서관> 등 니버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충분히> <매력적으로> 소개할 때 비로서 <스탠리의 이야기>도 산다고 봄. <레옹>에서 게리 올드먼이 레옹와 마틸다의 이야기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주었듯이 말임. 레이 올슨(Ray Olson)이란 이가 “대부분의 현대 회고록 저자들은 일인칭 소설 화자와 비슷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명한 신학자 하우어워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라고 말했으나 나 그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음. 이 회고록엔 적(敵)에 대한 <명단>은 있으되 그 <적들의 이야기>는 없음. 다시 말하지만 이 회고록엔, 스탠리가 신학자로서 성서를 해석하며 다른 해석 방법(그러니까 ‘다른 삶’)과 조우할 때 그가 느꼈을 두근거림, 두려움, 망설임은 등장하지 않음. <저명한 신학자>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 <흔들리는 신학도>는 만나지 못한다는 게 몹시나도 애석함. (나는 <그걸> 듣고, 보고 싶어 이 책을 펼쳤는데 말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적들의 이야기만 빈약한 게 아님ㅠㅠ 가장 강력한 아군인 요더와 매킨타이어의 고민과 꿈에 대해서도 나 더 알게 된 거 <정말 한 줄>도 더 없음. (참고: 내가 아는 요더는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IVP)에 등장하는 요더가 전부. 내가 읽은 매킨타이어의 저서는『덕의 상실』(문예출판사)이 유일.) 이제 나, 스탠리와 내가 쓰는 언어가 과연 <같은 언어>인지 회의에 빠짐. 왜냐고? 스탠리가 돌아누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 그다음에 이것을 썼다’식의 서술을 피하려”고 했어.(<맺음말>,p.508) 나는 나보다 <훌륭한> 그에게, <24> 그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림. “스탠리,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게 정확하게 바로 그거예요.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그 다음에 이것을 썼다...라고만 하는 거....내가 원하는 건....내 몸에서....당신이 만져주기를 바랐던 곳은....”
2) 이제 이어지는 건 독서 중 내가 체험한 총 다섯 번의 “멀티-당혹감(multi-confusions)”. 멀티 오르가즘은 들어봤어도 멀티 당혹감은 첨 들어봤을 당신에게 그 당혹들 좀 구체적으로 소개하면(후방주의? -.-): "앤과 함께하는 삶이 신학자로서의 나의 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p.287) ( 아니, <가끔>이라니? 『한나의 아이』 구매자 대다수는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스탠리 답변 듣고 싶어 이 책 샀을 터인데.) 어쨌든 상기 질문에 대한 스탠리의 답변: “모른다는 것이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p.287). 모른다....저자가 모른다...고 하는 마당에 이제 더 물을 수도 없다....(이게 첫 번째 당혹) "앤과 함께 살며서 나는 삶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이 내 신학적 통찰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지만, 앤과 애덤과 함께한 시간이 내가 배운 신학을 펼치는 방법을 좌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나친 억측인 듯하다." (p.288). 이런, <내 예상>이 억측에 불과했구나. 그의 <24>이 <그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내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을 억측이라 호(呼)하다니. (이게 두 번째 당혹). 어쨌든 왜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갈 때 앤과 함께 한 시간과 경험에 기대지 않는지 스탠리가 밝히는 이유 들어보면: "내러티브에 대한 강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신앙 언어의 의미를 시험하거나 결정하는 데 쓰라는 요구가 아니다." (p.288) 스탠리의 이런 <신념과 태도> 때문에 우리는 스탠리의 <신학적 사유>에 <앤과 함께한 삶>이 끼친 영향의 <정도와 내용>에 대해 <충격적일 정도>로 <무지한채로> 책을 덮게 됨. (세 번째 당혹). 오케이, 스탠리, 알겠어요, 그럼 당신의 신학적 통찰, 당신의 그 내러티브 신학에 영향을 <끼친> 경험은 뭔가요? “내러티브가 기독교적 확신에 필요한 문법이라는 말은 존재의 이런 종말론적 특성을 뜻한다. 확신컨대 이것은 나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과 그의 연구 결과를 만났기 때문에 내 저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p. 291). 그렇다. 스탠리에 따르면, 스탠리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이는, <앤>이 아니라, <존 하워드 요더>임. (ㅠㅠ) 정리해보자. 이제 우리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요더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게 됐음. 동시에, 아무리 『한나의 아이』를 읽어도 요더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참고: 서플먼트 2) 역시 이미 알고 있음. (네번 째 당혹). 난 이제 곤고한 독자...이 당혹스러운 회고록에서 누가 나를 건저낼 수 있을까 흑흑흑. 나 이번 여행에서, 수많은 신학자들과 올레길 걸으며, 개인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경험 들을 기회 있을 줄 알았는데, 인솔자 스탠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파킹랏. 요더와...니버와...매킨타이어와...그리고 스탠리 자신의...차만 <파킹돼 있었음>. 그게 다.(that’s all). 나 신학자들 차만 보고 왔음. 이 연속되는 네 번의 당혹은 우리에게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문학적 질문>을 하나 야기함.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임. 회.고.록.이.란.무.엇.인.가. <도대체> 회고록이란 무엇인가....세라, 『한나의 아이』가 어거스틴의 『고백록』 전통을 잇는다고 했죠? 세라....세라, 내 말 들려요?
3) 이제 다섯 번째, 마지막 당혹 남았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앤이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떴을까. 그러다 등장한 스탠리와 앤의 이혼 소식. 내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내게는 큰 충격이었음. 나 지금 원론적인 기독인의 이혼 가능 여부 묻는 거 아님. 내가 묻는 건,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 배우자의 천식이 심하다고, 오른쪽 다리가 썩는다고, 정신질환 증세가 심해진다고, 이혼해도 돼? 다시 말해, 자녀의 안전 등을 위해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게 아니라 <이혼>하는 게 기독인에게 <옵션>이 될 수 있나. 배우자의 잘못이 없는 한 – 질환은 잘못이 아니다 – 우리는 평생을 상대의 배우자로 <살아야만> 하는 거 아니었나. 한편, 내 이 당혹감이 단순히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면 이제 내가 인용하는 페친 K의 글은 이번 회고록에서 들리지 않았던 <병자/환자의 목소리>에 주목함. “저자나 이 책을 만든 출판사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직접 고통을 겪은 당사자인 앤의 입장에서 그의 목소리는 누가 대변해 주나 싶어 안쓰럽고 먹먹했다.” (페친 K의 2016년 10월3일 페북 포스팅에서 인용).
4) 거듭되는 당혹감에 당혹한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생각 궁금해, 2016년 8월 22일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일곱시에 열린『한나의 아이』 출간 기념 공개 강연회에 참석. “그럼 이제 플로어의 질문 두 개만 받겠습니다” . 강연 후 사회자가 말하자 나와 함께 강연회에 왔던 회사 후배 L이 손을 듦. (난 지금도 이 질문이 그 강연회의 백미라고 생각. 참고로 L은 나와 함께 지금 <새롭게하소서> 연출 중. 맞음. 나 지금 프로그램 홍보 중.) “믿지 않는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니. 그냥 열심히 최선 다해 사는 거지. 그럼, 그 답 없음과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정답 없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최선을 다해 사는 그 친구에게 우리의 정답 없는 종교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답은 없고,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정신에 따라, 그날 나온 답변 소개는 생략.
5) 이상 나의 글은 <지극히 사적인> 독후감. 다른 의견, 다른 평가 당연히 존재.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쓰고 IVP가 펴낸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는 국민일보 선정 ‘2016년 올해 최고의 책’으로 뽑힘. “이 책은 출판사와 아카데미 대표 등 12명이 호평, 대상 도서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6.12.28). 이 책 비록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펴낸이와 편집자가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와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무척 소중하다고 믿는다.


2016년 9월 18일

교회와 설거지

오늘 아침 교회 갈 때 처음 설거지를 하는 날이라서 그런지 세례 받는 날처럼 약간 긴장됐다 점심을 빨리 먹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장로님 한 분과 한 조가 되어 설거지를 하는데 점심 메뉴가 카레였기에 그런지 세심하면서도 집요한 터치가 필요했다 -.- 설거지를 마치고 솥까지 다 씻고 났더니 뿌듯했다 내가 30대 초반에 듣고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참 칭찬 받기 쉽다. 설거지를 한 번 하면, 커피를 한 번 타오면, 먹은 자리를 치우면, 뭔가 한 번만 해도 <매너> 좋다고 칭찬을 받는다....반면 그 일을 <매번> 하는 사람들은 <한 번만 안 해도> 여자가....하면서 비난 받는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고했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서 감사했지만 내가 더 바라고 기대하는 건 설거지 하는 남성들이 칭찬 받는 게 아니라.....설거지 안 하는 여성들이...안 해도...뭐라는 사람 없고 자연스러운....남자들처럼 <하고 싶은 날만> 이름 기입하는....그런 교회....( 이 글은 내가 다녔던, 지금 다니는, 앞으로 다닐지도 모를 모든 교회를 생각하며 쓴 글임) )

2016년 9월 10일

『참 재미없는 세상 』 (신동필 지음, 홍성사, 2016년 9월)을 읽고.

동생이 책을 냈어요. 나중에 제가 책을 내면 안 사주시더라도 제 동생 책은 많이 사랑해주세요! (꾸벅) 틈틈이 찍은 사진들에 짧은 시를 덧붙인 책입니다. '추천의 글'은 제가 썼습니다. ^^;; 

저는 한 방송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일하다 보면 저마다 사연을 지닌 분들의 출연 신청을 받습니다. 수북이 쌓인 사연들 중 하나를 채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과 식사를 하다가 동생의 휴대폰에 담겨 있는 사진과 글을 보았습니다. 순간, 감춰져 있는 사진과 글을 세상에 꺼내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동생의 사진과 글을 보는 제 마음은 이중적이었습니다. 먼저, 동생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일상의 순간을 잡아내는 방식이 전혀 상투적이지 않았고, 그 새로움을 통해 독자로서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삶 가운데서 고난받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부디 이 책을 통해 주님 주시는 참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_신동주(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홍성사 링크 바로가기 http://goo.gl/abQNb9

교회 개혁을 위한 아주 작은 실천 방안

돈 전혀 들지 않는 교회 개혁 방안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돈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나 단체에 교회가 돈을 전달할 일이 있으면 담임목사가 아니라 재정담당 직원이 했으면 좋겠다. 전달식에 목사 대신 교회 직원이 왔으면. 사람들은 담임목사가 아니라 그 교회에,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할 것이다. 사람이 영광받는 일이, 사람에게 영광돌리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어려운 현장을 돌아보는 일도 담임목사가 아니라 해외구호일을 제대로 배우거나 경험한 교인이 갔으면 좋겠다. 전문가가 담임목사보다 현장에서 <더 많은 걸 보고> 돌아오리라는 건 상식이다. 교회가 한 사람의 항공비를 추가로 부담할 수 있더라도, 그때도, 담임 목사가 아니라 해외구호에 <관심과 사명>이 있는 교인을 <한 명 더> 보냈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 둘은, 그러니까 그 <교회>는, 담임목사가 그 교회를 떠나고 새로운 목사로 바뀌더라도, 해외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지혜로운 방법들을 축적시켜나가며 해나갈 것이다. 기독교 영화제 개막식에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와서 격려사를 하고 돈을 전달하는 일을 본 적이 있다. 그 행사에 큰 돈을 댄 그 목사는 그날 그 행사장에서 최고의 <귀빈>이었다.그런데, 그날 만약, 그 교회의 영화학과 교수나 연극 배우 교인이 그 행사장에 교회 대표로 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난 확신하건대, 그의 격려사는 지금 막 단편영화나 단막극을 만든 청년들에게 훨씬 더 <구체적인 도전과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식의, 그날 그 담임목사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삶의 현장에, 다양한 요청과 다양한 요구에, 한 사람만 파송하는 건 어색하다. 만사형통(대통령의 형)이 문제를 일으켰듯 만사담통(담임목사)도 문제를 일으킨다. 각 영역의 대표자들이 - 실질적인 대표자들이- 많이 존재하는 교회는 세습도 잘 안 될 거라 믿는다. 오늘의 작은 결론. 돈은 직원이 전달하자. 목사는 자기 개인 돈 전달할 때만 참석하자. 목사의 해외 방문은 자비로 하자. 격려사도...더 구체적으로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하자.(2013.9.10)

2016년 9월 8일

대형교회

나는 종종 ‘대형교회’를 비판하는 데 어느 날 내 삶 속에 대형교회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페이스북 친구 수였다 많아야 좋다고 생각해서 계속 늘렸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천오백이라는 수를 이번 주에 육백이십으로 줄였다 더 줄이려고 한다 성도들의 말을 다 들을 능력도 없으면서 계속 등록을 받는 대형교회가 나였다 누군가의 소중한 이야기를 스크롤 한다는 게 훑는다는 게 미안했다

2016년 9월 3일

『대지의 기둥』(켄 폴릿 지음, 문학동네)을 읽고.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1.『대지의 기둥』은 12세기 영국에서 성당 건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어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스파이 소설인 『바늘 구멍』의 저자 켄 폴릿이 썼어요. 고등학교 때 켄 폴릿의 『바늘 구멍』을 읽고 그에게 반해 요즘도 이런 저런 인터넷 싸이트에서 닉네임을 요구하면 Ken이라고 적곤해요.
2.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이거였어요. 선한 사람은 점점 더 선해지고 나쁜 사람은 점점 더 나빠져요. 선인은, 처음에는 부족한 점 있어도, 점점 더 용감해지고, 더 너그럽고 지혜로워지고. 자기 일을 더 잘 하게 되고. 근데 악인은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사람들을 더 이용하려고만 들고, 점점 더 <괴물>로 변해가요. C. S. 루이스가 어디선가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났어요.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우리가 무언가 훌륭한 일을 했을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은 방금 한 일보다 더 훌륭하고 덕스러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마음이다. 루이스는 또 어디선가, 지옥은 점점 더 자기 중심적으로 변모한 개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죠. 타인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 집중하는 곳! 점점 자기 안으로 쪼그라들고 쭈그러드는, 그래서 지옥은 어떤 의미에서 광활하기보다는 하나의 점처럼 아주 작을 거라는 말은 한 게 기억나요. 여하튼 켄 폴릿도 이 장편 소설을 쓰면서 “몇 십 년에 걸쳐 이야기가 전개되고 등장인물들이 <성숙해감에 따라> 그들의 삶에 새로운 굴곡을 만들어 넣”는게 제일 어려웠다고 고백해요. (1권, 서문).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재미 포인트. 이 책의 저자 켄 폴릿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어요. 그런데 이 장편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수도원장이지요! 그래서 발생하는 켄 폴릿의 고민: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하느님의 사람’에 속하는 부류여야 했다. 이 점은 내게는 까다로운 문제였다. 아마 상당수 독자들도 그럴테지만 내세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물에 흥미를 갖는 일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거 같았다”. 제가 볼 때 켄 폴릿, 그 일을 무척 성공적으로 해내요. (비기독교 신자 켄 폴릿이 쓴 특정 문장을 읽다가 제 불신앙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어요.)
3. 미술, 건축, 조각, 미학에 나름 <조예(?)가 있는> 저로서는 (자뻑만렙-.-) 내심 성당 건축을 맡은 톰과 그의 의붓아들 잭이 <석재와 나무와 나누는 깊은 대화>를 기대했어요. 돌과 나무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숨겨진 최대치>를 보여주지 않잖아요. 상대가 정말 믿을만하다고 여겨질 때만 자신을 <만져도 된다고> 허락하죠. 근데 저자 폴릿은 톰과 잭이 <여자들과 나누는 육체적 대화>만 자꾸 들려주는 거예요. (베리댕큐하면서도 아쉬웠던 부분이에요). 엘렌과 앨리에너 두 여성의 절정을 묘사할 때만큼 돌이 흘리는 땀방울을...강한 바람을 맞을 때 성당의 목재가 휘는 그 긴장을, 그때 터져나오는 깊은 저음의 신음을....좀 더 자세히 들려주었더라면....(근데 이런 지적, 이 책에 대한 디스인가 낚시인가 -.-).
2016.9.3.
신동주
서플먼트
1) 지금 켄 폴릿의 『대지의 기둥』1권, 2권, 3권의 섹스씬을 다시 한 번 훑어보니 처음 읽을 때는 못봤던 특징 하나가 보인다. 거의 매 씬에 nipple이 등장한다. (켄의 개취존중 -.-). 일단 제3권에서만 한 군데 살펴보면: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그가 그녀의 젖꼭지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비틀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더니 그에게서 몸을 떼며 헐떡였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내가 아프게 했나요?”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 게 아녜요!” (3권,p.151). 한편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센테스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물릴 줄 모르는 육체적 정열에 사로잡힌 신혼부부 같았다. 아마도 처음으로 잠글 수 있는 문이 달린 침실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 이제는 아무에게도 들킬 염려 없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엘리에너는] 특별한 전율을 느꼈다. 지난 이 주 동안 자신과 잭이 했던 일 몇 가지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3권, p.495.) 나는 은근한 묘사를 좋아한다.(-.-)
2) 섹스 묘사와 달리 켄 폴릿의 건축 묘사는 약간 아쉬웠다. 다양한 건축 사조와 기법이 등장하지만 난 그가 회반죽 한 번 해보지 않았다는 거에 오백 원 건다. 『대지의 기둥』을 읽는 동안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자서전『한나의 아이』를 동시에 읽었는데 예닐곱 살부터 벽돌 쌓는 조적공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던 스탠리의 묘사가 훨씬 - 당연히 - 더 실제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묘사. “우리는 말 그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정말 지독한 냄새가 났다. 땀이 쉬어 공사 현장의 모든 사람이 악취를 풍겼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는데, 우리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감독하러 현장에 오는 사람들이 그 냄새 때문에 괴로워할 때 특히 좋았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으므로 우리는 계속 물을 마셔야 했다. 물은 나무 물통에 들어 있었고, 아침 일찍 그 안에 얼음을 넣었다. 얼음이 두어 시간 이상 가는 법이 없었지만 뜨거운 물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물을 마시러 갈 때는 조적공이 곧 찾게 될 물건을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조지 하퍼에게 배웠다. 한마디로, 움직임을 최소화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를 끝까지 버티기 힘들었다.”(p.74-75).
3) 나는, 공간과 건축은 사람에게 아주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그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짓는 거라고 믿는다. 교회 건축에 대해서 이전에 썼던 글 하나 첨부. 제목은 ‘교회의 크기와 언어’. http://holyfat.blogspot.kr/2013/12/blog-post.html

2016년 8월 14일

소송 비용 모금을 처음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이번 재판의 판결이 바로 내려지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제가 소송 비용 모금을 제안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밝히려고 합니다. 모금을 제안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일도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원칙과 의지에 따른 자발적인 행동이라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1. 원고 송병현 교수가 피고 이성하 목사와 맹호성 이사를 고소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이 소송의 원고는 <한 명>이지만 피고는 <두 명이 넘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서적 표절반대>(이하, <신표> ) 싸이트에서 한국 기독교 학문 세계의 정화와 성숙을 추구하는 <공익적 성격>을 봤고 그 공익적 성격에 <동의>해서 <신표>에 회원으로 가입, 활동해 온 저에게 <신표> 공동 관리자들의 피소는 <저에 대한 피소>와 다를 바 없었고,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 학문장의 공익성> 자체의 피소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송 비용 모금은 우리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추구, 보전해야 할 권리와 책임이 있는 한 시민인 제게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행동( 더 나아가, 다수의 <신표> 회원들의 행동)을 "피고들의 선동"에 이끌린 행위라고 주장하는 원고 측 주장은 <사실>과 어긋나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건전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공익성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자발성>을 <폄훼>하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언이라고 하겠습니다.
2. 저는 한국 기독교 학문장의 정화와 성숙이라는 <공익적 목표>를 위해 활동하는 <신표>의 이번 송병현 교수 건 문제 제기는 그 <공익적 성격> 때문에 개인들 사이의 <사적인 명예 훼손 행위>와는 달리 법률적 판단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법률신문>(2010.8.25)에서도 소개됐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표절 의혹 제기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 "음해 아니면 연구성과 비판 허용돼야" , 청주지법, 교수에 무죄선고 > 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학술적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연구성과에 대한 의혹 제기는 공적 관심 사안으로서 연구윤리 및 실적 평가의 공정성과 관련된 여론 형성에 기여하는 측면이 강해 순수한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또 "피고인이 피해 교수들에게 소명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감사한 결과를 정보통신망을 통해 일방적으로 적시했고, 오래전의 논문을 문제 삼았으며, 적시한 내용으로 침해되는 개인적 법익이 가볍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방의 목적은 부인된다"고 판시했습니다.
3. 이번 소송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학문적 정직과 성실성>이라는 공공적 가치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확인 받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6.6.11.
신동주 드림 ( <신학서적 표절반대> 회원, 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


2016년 8월 13일

어떤 싸이즈

1. 저는 대형 교회에 대해 엄청 반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당혹스러웠을 때가 있었어요. 한 대형교회 목사가 교회를 반으로 나누겠다고 했을 때였는데요, 꽤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하는 거예요. 근데, 쪼개도 1만이에요, 그 교회는. 두 개로 나눌 게 아니라 백 개로 나눠야 해요. 그래야 한 팀이 200명이 되죠. (내 기준 -.-) 이렇게 대형 교회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제게 이번 주에 엄청난 <대형 사건>이 일어났으니....
2. 그저께 저녁에 페이스북에 올린 <새롭게하소서> 영상 하나가 도달 314만 명, 공유 17만4천회, 좋아요 2만7천명, 댓글 3천 개, 조회 149만 회를 기록한 거예요. 이러면서 제게 <작은> 문제가 생겼어요 ㅋ큐ㅠ(웃어야할지울어야할지). 평범한 숫자 감각을 잃어버린 거예요.
3. 최강희 제2편을 올렸는데, 제2편은 지금 공유 1497회, 좋아요 3386. 그런데 <이게>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사실 공유 1400개는 대단한 거거든요) 그러면서 저는, 아, 이게 대형 교회 목사들이 느끼는 <갈증>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요. 어느 순간, 한 명이 <목적>이 아니라 300만을 구성하는 <단위>로만 느껴지는....더 멀리가기 위해 되도록 빨리 넘어서야할 <단계>로만 느껴지는....200명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네, 제 마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대형 교회> <대형 집회>로 변해 있었어요....제 마음은 <잠실종합운동장>이었어요....
4. 주님, 공유가 많이 되는 간증과 공유가 적게 되는 간증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디와 페북을 하는 유저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셔서 모두가 <크기>에 속지 않게 하여주십시오. 작은 누룩, 작은 씨, 작은 자 한 명, 작은 하나님 나라....
2016. 8. 12.
ps.
네가 페북에 올리지 않은 이야기...네가 올릴 수 없었던 그 포스팅...에 나 혼자 슬퍼요와 화나요 눌렀단다....죄송해요 주님....제 깔끔한 타임라인에 속지 않는 당신에게 이 시간.....

2016년 7월 28일

『천년 동안 백만 마일』(도널드 밀러, IVP)을 읽고.

1.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두 아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얘들아, 이 세상에서 섹스를 완전하게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뭔 줄 아니? 관계를 갖고 난 후 의무적으로 느낀 점 써내라고 하는 거야, A4 용지 하나 가득. 일 년이면 이 세상에서 섹스 없어진다. 어, 아빠 말 안 믿냐?  독후감은 사라져야 해, 독후감 때문에 사람들이 책을 안 읽게 되는 거라고. 듣고 있니?  
2.  인생에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남을 위해 살아봐야겠다는 절박함에서 청소년 멘토링 NGO <러빙핸즈>에 가입하고 첫 교육을 받던 날이었어요. 교육 시작과 함께 진행자가 교육 과정 수료를 위해선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할 숙제가 있다는 거예요. 숙제? (음, 온라인으로 지원서 받을 땐 숙제 얘긴 없었는데 ㅠㅠ 궁시렁 궁시렁). 진행자의 말이 이어졌어요. 저 뒤에 있는 4권의 책 중 하나를 골라 독후감을 써주세요. (뭐라고? 독후감이라고?? 지금 그만두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겠지? ㅠㅠ ) 9시에 시작한 교육은 저녁 6시30분에 끝났고 저는 느릿느릿 독후감용 책이 전시돼 있는 사무실 뒷편으로 걸어갔어요. 이 중에서 고르면 되는 건가요? 네, 넷 중에서 마음대로 고르시면 됩니다. (마음대로가 아니라 의무적이겠지). 저는 기계적으로 제일 왼쪽에 있는 책부터 집었어요.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저는 나머지 셋은 보지도 않고 그 책을 샀어요. 어느새 제 불평은 멎었어요. 홍대역에서 전철에 오르자마자 책을 폈어요. 밀러는 제가 (하이네켄이나 칭따오만큼이나) 좋아하는 작가였어요. 뭐랄까, 횡재를 한 느낌이었어요.
3. 밀러가 쓴 첫번 째 책 『재즈처럼 하나님은』(복있는사람)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45주 이상 올랐을 정도로 성공적이었어요. 저도 읽었었는데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고백하는 이런 구절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내 시간의 95%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데 들어간다". 밀러는 C.S.루이스의 시(詩)도 한 편 인용하며 이런 말을 해요. "처음 읽었을 때 그 심정에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꼭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밀러가 인용한 루이스의 시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재즈처럼 하나님은』, p.32에 나와요.)
이 모두는 당신을 사랑함에 관한 번지르르한 궤변입니다.
태어나던 날부터 나는 이타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철두철미 속속들이 타산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나는 하나님,당신,모든 친구가 나를 챙겨 주기만을 바랍니다.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평온함,안심,즐거움입니다.
나는 내 살갗 밖으로 한 치도 기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학자의 앵무새는 헬라어를 말하겠지요.
내 감옥에 갇힌 나는 언제나 원점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부끄럽지만 이 시, 제게는 <시>가 아니라 저에 대한 <다큐>로 다가왔어요. 제가 추구하는 목표, 정확하게 "평온함, 안심, 즐거움", 이 셋(!)뿐이었어요.(여전히, 이예요.) 신의 은혜가 아니면, 신의 개입이 없으면, "내 살갗 밖으로 한 치도 기어 나올 수 없는" 내 인생. 밀러는 참 가벼운 필치로, 저를 깊이 찔렀어요. 밀러는 첫 책의 성공 이후 계속 해서 책을 냈어요. 하나 계속 실패했어요. "내가 몇 년 전에 쓴 그 책이 많이 팔렸고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자만심에 젖어 내가 대단한 작가나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로 쓴 책들이 잘 팔리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다시 정서가 불안해졌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p.25). 여친과도 헤어졌지요. 영성에 대해 멋진 글을 썼던 밀러는 이제 아침이 와도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TV리모컨만 찾는 그런 사람으로 변했어요. (제가 베스트셀러 작가의 심정은 잘 모르지만, 무기력한 사내 심정은 잘 알아요). 그리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밀러에게 어느날 영화제작자 스티브와 벤이 찾아와요. 밀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한 편 제작하고 싶다면서요.
4.『천년 동안 백만 마일』은 영화를 한 편 찍으려다보니까 다시 바빠졌고, 바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됐다, 라는 얘길하는 책이 아니어요. 다시 바빠짐. 다시 주목 받음. 다시 화려해짐은 사실 변화가 아니잖아요. 단순한 커버링이지요. 그저 잠시 미뤄두기이지요.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엄청난(?) 성공을 경험한 뒤에도 (중복이라 시전한 <썰렁> 조크 -.- ) 저라는 사람은 여전히 저 한 사람 안에 갇혀 있고, 지금 비록 틈틈이 펀치 시즌2를 준비하고 있지만, 혹 시즌2가 성공하더라도, 그 성공이 저를 <진짜>로 만들어주지 못할 거란 것, 너무 잘 알아요. (그런데 저는 진짜로 진짜가 되고 싶어요. ) 그래서 저는 밀러와 함께, 정말 밀러와 <함께> , 제 삶이라는 스토리에 <빠져있는 게> 뭘까, 절박하게 물었어요. 예, 밀러의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밀러가 되었어요. 왜 나는 진짜를 살고 있지 못할까. 제가 묻자, 스티브와 벤이 제게 말했어요. "우린 지금 이야기의 갈등을 구상하는 중이에요 (...) 진짜 갈등다운 갈등이어야 해요. 좋은 이야기가 되려면 도널드는 자기가 부딪치기 싫은 일에 부딪쳐야 합니다".(p.80). 여기에 대한 저와 도널드의 생각? " 나는 (...) 쉬운 이야기를 바랐다. 하지만 쉬운 이야기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p.48). 밀러의 다음 고백은 제 고백이나 마찬가지예요. " 어떤 이야기가 나를 부르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더 나은 이야기를 사는데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더 나은 이야기를 살지 않는 것은 죽기로 작정하는 것과 같다. (...) 죽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p.82).
5. 평온함, 안심, 즐거움, 이 셋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불쌍한 사내가 한국에 한 명 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가 기꺼이 갈등에 부딪치고 <더 나은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소서. 그 새 이야기에선, 불쌍한 주인공이 1센티라도 자신을 뚫고 나올 수 있게 하소서. 1센티라도 이전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다가가게 하소서.

2016. 7.28.
신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