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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2일

『찔림』 (신동필 지음, 시커뮤니케이션 , 개정판 2021 )의 저자에 대해서

"당신을 위로하지 않는 책 『찔림』 "의 저자 이름(신동필)이 제 이름(신동주)과 비슷한 이유는 제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선친께서 장남은 '동방의 주인'이 되라고, 차남은 '동방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다 -.- 제 동생은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참 재미없는 세상』 (홍성사,2016) / 『찔림』 (시커뮤니케이션 , 2017 ). 이번에 『찔림』의 개정판(2021)이 새로 나왔습니다. 많은 구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제9계명

며칠 전, 회사 동료 A가 내게 말했다. "미국에 있는 B교수님과 줌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끝나고 제게 피디님 안부를 물으셨어요". 예의를 중시하는 신 모 피디, 멀리서도 기억하고 안부 물어주심에 대해 감사하다는 짧은 메일을 B교수님에게 보냄. 아주 짧게 내가 요즘 하는 일을 썼음. "틈틈이, 새로운 신학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하기 위해 신학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케빈 밴후저의 <제일신학>을 읽었는데, 연구자들에게 제9계명(거짓 증거하지 말라)은, 다른 이의 주장과 글을, 내 입맛대로 변형시키지 않고, 비판하기 쉬운 측면만 골라 읽지 않고, 일단 그의 논지 전체를 제대로 읽어주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이 제게 참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책을 읽으며 그러지 못한 때가 자주 있었거든요." 이 메일에 대해 B 교수님이 답신을 보내주심. 한 가지 부탁을 해오심. 밴후저의 견해를 상기시켜 주어서 고맙다, 책을 한국에 두고 와서 미국에 이 책이 없어서 그런데, 상기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줄 수 있는지, 라고. 나는 기뻤음. 그래서 오늘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림. 사진 찍은 그 대목을 그대로 적어보면: "어떤 저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읽는 자의 의견들과 생각들을 본문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는 대신에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고 행한 바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황금률과 제9계명,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의 함의라고 본다. " - 『제일신학』 (케빈 밴후저 지음, IVP), p.55-56

2021년 4월 18일

< Sports Wit > (Lee Green 지음, 출판사 확인 불가)을 40년 전에 사서 읽고.

1. 이 책은, 내가 사서 지금까지 갖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온갖> 스포츠에 관련된 <온갖> 조크, 명언,경구들을 모아놓았다. 40년 전에 이 책에서, 내가 지금도 항상 마음에 떠올리는 경구 하나를 만났다.

2.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대만 타이페이에 있는 미국 학교에 들어갔고 영어를 못했다. 미국 친구가 없었던 나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던 헌책방에서 산 (살인과 애정행각이 난무하는) 3류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소설을 읽으며 영어 공부를 했고 (그래서 그런지) 끝내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Lawrence Sanders라는 작가가 쓴 <The First Deadly Sin> , <The Second Deadly Sin> , <The Third Deadly Sin>을 읽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지금 내가 소개하는 책도 이곳에서 샀다.
3. 나는 스크린 골프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골프에 관한 경구들에는 많이 끌린다. (볼링에 관한 경구도 좋아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도 골프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Golf is mostly a game of failures." - Tommy Aaron (프로 골퍼). (*골프는 대부분 실패로 이루어진다. 실패한다는 것과 친해져야 한다). coaches & coaching (감독 & 코칭)이라는 항목도 있다. 내게는 다음 두 개가 참 인상적이었다. (1) "No coach ever won a game by what he knows : it's what his players have learned. - Amos Stagg (대학 미식축구팀 감독) (*설사 자기가 알고 있더라도, 선수들이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 (2) "A coach isn't as smart as they say he is when he wins, or as stupid when he loses." - Darrell Royal (텍사스 미식축구팀 감독) (* 경기에 이겼다고 해서 그 사람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경기에 진 사람 말이라고 다 쓸모 없는 것도 아니다).
4. 이제 <내가 만난 경구>를 소개하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혐오하는 '투우 경기' (bull-fighting)에 관한 경구이다. '용기'에 대한 것이라서 알파벳 C 항목('courage')에 들어가 있다. 누구의 말인지도 알려지지 않는 그 경구를 소개하면: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not scared is nothing.
And to not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is nothing.
But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that is something.
- Anonymous
(의역을 해보면)
두려운 마음이 전혀 안 생기는 사람이 황소와 싸우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황소와의 싸움을 피한다면 (당연히) 이것 역시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있는데 황소와 싸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5. 나는 겁과 두려움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신학펀치 시즌1을 시작할 때도, 시즌2를 시작할 때도 이 말에서 힘을 얻었다. 아마 시즌3를 하게 된다면, 아마 그때도 이 말을 가장 많이 생각할 거 같다.

2021년 4월 8일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 (민영진 지음, 대한기독교서회)를 오래 전에 읽고.

1.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궁금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질문을 남겼다.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자 현 대한성서공회 번역자문위원인 민영진 목사가 답을 달았다. 그 중 대표적인 질문 49가지를 모아 만든 이 책을, 어느 날  손에 쥐게 되었다.

2. 책의 구성은 이런 식이다. 예를 들어 45번 질문을 보자. : "민영진 목사님께.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전서』라고도 하고, 『구약전서』 혹은 『신약전서』라고도 하는데, 『성경』이나 『구약』이나 『신약』 등 기독교의 경전과 관련된 이러한 이름들의 유래를 알고 싶어요. 이런 질문도 대답해 주실 거지요? 고맙습니다. 궁금이 올림. " 45번 질문에 대한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 "궁금이 님께, (...)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로마서,고린도전후서,야고보서라고 하지, 로마경,고린도전후경,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 답변은 훨씬 다양한 측면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여기서는 부득이하게 인상적인 한 문장만 소개). 

3.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하나를 위 질문과 답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필명>이다.  대부분의 질문자는 필명을 쓴다. 그리고 저자는 답변을 시작할 때 그 필명을 불러준다. 질문자가 김궁금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면, 답변은 김궁금 장로님께,로 시작한다. 게으름뱅이 올림, 게으름뱅이 님께. 열 받은 신자 드림, 열 받은 신자 님께. 이런 식이다. ( 참고로, 바로 전 질문자가 열 받은 이유는 누가복음 16장 1절~9절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다. "민영진 목사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 있습니다. 본문의 문장이나 구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진술된 내용 자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이 말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도 된다는 뜻입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이 '뇌물'과 다른 게 뭔가요? 열 받은 신자 드림." )  

4. 개인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질문들(과 답변들)을 먼저 읽었다. 그랬기에 <8번 질문>을 읽게 된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난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8번 질문은 이러했다. "목사님, 디모데전서 2:15에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저는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보다는 저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 제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아기는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은 우리 같은 석녀(石女)를 너무나도 괴롭힙니다. 석녀 올림."  나 역시 평소 읽을 때마다 좀 의아해 하던 구절이었기에, 나는 저자가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해 하며 답을 보기 위해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전체 답변은 몰랐지만 적어도 첫 문장이 어떻게 시작할지는 알았다. 석녀에게. 

5. 그리고 나는 틀렸다. <자매님께>. 답변은 그렇게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 순간 갑자기 내가 왜 그렇게 심하게 울기 시작했는지. 목젖이 뜨거워지고 가슴에서부터 딱딱한 울음 덩어리가 올라와 나는 꺽꺽대며 울었다. 그렇게 몇 분을 울었다. 필명을 그대로 부르던 분이, 그 여성에게만큼은, 이 책에서 지켜오던 원칙을 깨고, 석녀라고 부르지 않고 자매님이라고 불러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소개하는 도중에 석녀, 자매님 얘기만 하게 되면 나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될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매번 그랬다. 심지어 한번은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 책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내 눈에선 민망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로는 사람들 앞에서 이 책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아, 딱 두 번 더 꺼낸 일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연출하던 <새롭게하소서>에 민영진 목사님을 모셨을 때였다. 녹화전 대기실에서 민목사님께,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차분하게> 말하다가 자매님,에서 또 울고 말았다. 나머지 한 번은, 신학펀치 섭외를 위해 인천으로 사본학 전문가 M교수를 만나러 갔을 때였다. 그날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요즘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그 <울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2021.4.7.
신동주 


*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 수록된 질문들 중 일부는 (저자가 정기적으로 글을 싣고 있는) 성경연구 월간지 <햇순> 독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왔다. 공동체성서연구원(http://newsprout.org)을 방문하면 <햇순>이 나오는데  메뉴에서 '성서 난해구 해설'을 클릭하면 이 책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에는 실리지 않은 수백 편의 질문과 답변들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돼 있다.

2021년 3월 31일

『삐딱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쾌한 희망사전(Wishful Thinking: A Seeker's ABC ) 』 (프레드릭 뷰크너 지음, 복 있는 사람)을 읽고.

1. 이 책은 사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62개 단어를 고른 후 저자가 아주 개인적인 설명을 달았다. 'ㅂ' 항목을 찾아보면 저자의 이름인 '뷰크너'도 등재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뷰크너(Buechner)'.  내 이름이다. 뷰크너라고 발음한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바보스럽게 잘못 발음하면 마치 내가 바보인  것 같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잊어버리면 마치 내가 잊혀진 것 같다. 내가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듯이 내 이름에도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뭔가가 있다. 헬드라든가 메릴, 아니면 흘라바첵 같은 다른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일 내 이름이 달랐다면 나도 달라졌을 것이다. 내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상대방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나에 대한 영향력을 넘겨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이름을 부르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멈추고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말씀하신다. 그 후로 하나님은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다. (p.75)

2.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연출을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는 목사님 한 분을 뵈러 간 적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셨고 스탭들과 같이 갔다. 점심 초대였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드렸더니 목사님은 반가운 얼굴로  "어서와요, 박동주 피디". 그후 꽤 오랫동안 서운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엔 그 분의 그 실수가 인간에 대한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느껴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요즘은 그날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내 스스로 조금 부끄러워진다. 그 실수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인간적인 실수였을 뿐이다. 이제는 누군가 실수로 나를 신동추 혹은 신통주,라고 부르더라도 웃으며 <정확한 발음>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3. 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건 '역사'(History)이다. 저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 '역사' . 불교나 힌두교와는 달리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본을 좇아 역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역사를 매우 의미 있게 여기셔서 그것을 시작하셨고, 그 속에 들어오셨고, 언젠가 의미 있는 결말을 맺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견뎌 내야만 하는 부조리도 아니고 거부해야 하는 환상도 아니며 해탈해야 하는 영겁의 순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를 어딘가로 인도해 가기 위한 일련의 중대하고 반복될 수 없는 소중하고 유일한 순간들이다. 인류와 개인의 진정한 역사는 역사책이나 전기나 자서전에 수록된 정보와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역사는 영혼을 구원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역사는 자기 영혼이 위태로운 사람을 포함해 사람들 대다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일어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전환점은, 선거에 당선되거나 결혼식을 올린 날보다는 어떤 편지를 부치지 않기로 결정한 아침이나 눈이 소복이 쌓인 숲을 바라보던 오후일 수도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진정한 전환점은, 바퀴가 발명되거나 로마가 멸망한 날이 아니라 어느 유대인 부부에게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일 수 있다. (p.125)

4. 저자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비크너는 1926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작가로서의 이력을 쌓고자 뉴욕에 체류하던 중, 예수님은 신자의 고백과 눈물과 '큰 웃음' 가운데 신자의 마음에 즉위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했다".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글 1번에서 '뷰크너'로 표기 됐던 저자의 이름이 지금 글 4번에선 '비크너'로 바뀐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뷔크너’, ‘뷰크너’, ‘뷔히너’, ‘부크너’ 등 다양하게 불러왔는데 저자가 원하는 발음은 '비크너'이다. 위키피디아와 '프레드릭 비크너 페이지'(https://www.frederickbuechner.com )에도 '비크너'(pronounced BEEK-ner)로 소개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읽은 비크너의 책은  그의 설교문 37편을 모아놓은  『어둠 속의 비밀(Secrets in the Dark)』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 옮김, 포이에마)이었는데  - 방금 위에서 소개한 비크너의 회심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 소개문에 나온다 - 처음 읽으며 "이런 설교가 있을 수 있다니" 하며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도 북리뷰에서 비크너를 이렇게 소개했다. "비크너는 끝내 독자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 독자를 웃게 함으로써, 때로는 경악한 나머지 거의 기도하게끔 함으로써, 가장 좋을 때는 둘 다 하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 (비아)를 쓴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도 비크너를 언급하며 "단어의 힘을 망각한 나를 발견할 때, 나는 프레드릭 비크너를 읽는다"라고 말했다. 상투적인 설명과 설교에 지쳤다면 비크너 읽기를 추천한다. 비크너의 책에는 진부함이 없으니.

2021년 3월 15일

『성스러움의 의미 』(루돌프 오토 지음,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를 읽는 중에

제4장 '두려운 신비'에는 <The Inquirer >(July 14, 1923 )에 실린 글이 한 대목 등장한다.  O.Schreiner 이 쓴 『Thoughts on South Africa』라는 책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저자는, 키가 크고 힘세며 강인한 성격을 소유한, 말이 없는 보어인 한 사람이 말한 의미심장한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책을 쓰는] 저자는, 그[보어인]가 고작해야 자기 양과 가축들, 혹은 그가 잘 알고 있는 표범들의 습성 외에는 거의 어떤 심오한 얘기라고는 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 약 두 시간 가량이나 넓고 넓은 아프리카의 평원을 건너질러 간 후 그는 탈(Taal) 언어로 서서히 말했다. "한 가지 오랫동안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하셨을테니까요. 이런 들에 혼자 있을 때, 그리고 태양이 잡목들에 내리쬐고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인가가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너무나 너무나 작아지는 듯하며 다른 어떤 것은 너무나 커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작은 일들이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집니다".

2021년 3월 9일

잘잘법 Ep. 61을 시청하고.

1. 잘잘법 Ep. 61 '비기독교인들에게 인간이 죄인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에서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이 일종의 <사투리>가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교회 내부의 구성원들만 알아듣고, 교회 외부의 비기독인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가 되었다는 뜻이죠. 잘잘법 이번 편에서는 <죄인>이란 말의 의미를 비기독교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주고 있는데, 저는 <이런 작업>이 비기독인에게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기독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단지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는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돼'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요. 내가 믿는 바를, 내 이웃에게, 내 이웃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저는 제가 <설명하는 바>를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잘잘법의 <이번 작업>은,  우리 기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일' 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런 작업> 없이 너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왔습니다.  

 
2. C.S. 루이스도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가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평범한 이웃>에게 설명해 보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루이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죠. "예를 들어, [우리 같은 기독교인들은] 대속(Atonement)이나 성직(Orders)이나 영감(Inspiration)에 대해 자신이 [어느 정도 확립된] 특정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같은 부류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그 견해를 논하고 옹호합니다. 비판자들에게 답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여러 부분에서 다듬고, 모호한 부분을 명확하게 해주는 듯한 기발한 비유들을 고안하고, 다른 견해들과 비교하여 대강의 '위치'를 가늠해 보[다보면] 자신의 견해가 일류 사상들 사이에서 확고히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지적인 기계공이나, 진지한 호기심은 있지만 겉으로는 상당히 불경해 보이는 학생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려고 해보십시오. (식자들 사이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을) 유치한 질문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검술의 첫 번째 원칙조차 모르는 상대의 칼에 어이없이 꿰뚫린 능숙한 검객의 신세가 됩니다. 상대의 유치한 질문은 치명적인 한 방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장했던 내용을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견해를 철저히,끝까지,'완전히 끝장을 볼 때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견해를 포기하거나 , 아니면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참을성과 통상적인 노련함을 발휘하는데도 분별 있는(들을 마음이 있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한 가지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 C.S.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  제2부 '의사소통의 전제 조건' 중에서 ). 

2021년 3월 2일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를 읽으며

 "정보망이 낙후되어 형편없었던 고대에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들은 기발한 수를 많이 개발했다. 그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 시판(詩板)을 들 수 있다. 당나라 사람들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시장의 상점이나 명승고적,역참, 사원 등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벽을 골라 회칠을 한 뒤에 자신의 시를 벽 위에 쓰고, 나머지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벽은 유한하고 당나라 사람들의 시정(詩情)은 무한하여 벽이 금세 부족해졌다. 많은 지역에서 시인에게 나무 널빤지 하나를 제공하는 것으로 방식을 바꾸었고 (...) 이 작은 널빤지가 바로 시판이다. (...) 시판을 쓰는 데 신분의 제약도 없었고 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 한족이나 이민족, 남녀노소 모두 시판 앞에서는 평등했다. 그러나 뛰어난 작품은 필시 매우 드물고 열등한 시판이 매우 많아지자 누군가 나서서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행해야 했다. 유우석은 백제성을 떠날 때 시벽을 지나다가 엉망인 시가 무수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걸음을..." (여기까지)


"당나라 후기의 유명한 재상인 배도(裴度)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늦봄에 우연히 남쪽 정원을 노닐다 모란이 아직 피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난간에 기대어 유감을 금치 못했다. “내가 이 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니 슬프구나.” 그런데 이튿날 남쪽 정원에 한 무리의 모란이 먼저 피었다. 하인이 다급히 이 소식을 알리자 배도가 그 말을 듣고 마치 원진이 친한 친구인 백거이가 폄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의 반응처럼 “죽을병에 걸렸다 놀라 일어나 앉아” 기를 쓰고 나가서 모란을 감상했다. 배도는 활짝 핀 모란을 보며 깊은 위로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사흘 뒤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두 대목 모두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 에서. 

2021년 2월 26일

『예언자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천규 옮김, 비아 ) 를 읽으며

 책의 첫 쎈텐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학교에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장 칼뱅이 정착시킨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전통은 바로 기도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 책은, 이제는 은퇴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드렸던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니, 안 봐도 어떻게 했을지 뻔한 수업 시작 기도들을 책으로 냈다고?" 였다). 그리고 책을 폈다. 첫 기도는 이렇게 시작 됐다 : " 우리는 / 거룩하신 당신을 통제하기 위해 / (...) / 경건한 행위를 하고, 교리를 만들고 ... " .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가지 이유에서. (어떻게 이런 공중대표기도가 있을 수 있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했지?). 이 첫 기도문 끝에는 <구약학 수업, 1998.10.15>이라는 메모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밑에,  내가 <따라 읽으며 기도드린> 날짜를 적었다. <특집부에 와서, 2021.1.12>. 올해 들어 <작은 전통>을 하나 만들었다. 회사 오면 일 시작하기 전에 이 기도문을 한 편씩 읽는 것. 얼마전 내가 2월22에 읽은 기도는, 월터 브루그만이 1998년 1월8일 수업 중에 드린 <끝없이 추락할 때>라는 기도였다. 기도문을 읽고 내가 읽은 날짜를 적었다. <2021.2.22.월. 지옥같은 금,토,일을 보내고 와서> . 기도는 이렇다. "주님, 우리에게는 몰락이 익숙합니다 / 삶의 중심을 대적하며 우리 자신을 파괴합니다 / (...) / 주님, 우리의 중심이 되소서 /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 /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 ". 나는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를 읽을 때 '절망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바꿔 읽었다. 그래, 힘들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고통스럽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그런 과장은 거짓말이 될 테니까. 내가 용기만 낸다면 다시 일어설 여지는 항상 있는 것이니까.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 다시 주말을 맞는다. 퇴근길에 기도문을 챙겼다). 

2021년 2월 24일

『몸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지음, 두란노)을 읽는 중에

1. (인용)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장로교 목사 프레드 로저스가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로저스 아저씨네 동네>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로저스는 (...) 소품이나 첨단 장비를 별로 쓰지 않았다.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인상을 풍기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 그는 곧 유명해졌고 상도 많이 받으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 강연도 시작했다. 그가 강연마다 어김없이 넣는 순서가 있었는데 바로 청중에게 2분 동안 침묵하며 각자 자기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 그는 말했다. "매번 사람들이 [제 강연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 침묵의 시간입니다". (...) 한번은 백악관에서 열린 고위급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동 문제와 관련해 딱 8분 발언 시간을 얻었다. '짧디짧은 이 귀한 시간의 4분의 1을 꼭 침묵에 할애해야 할까?'.... " (그는 망설인다) (8분 중 2분 침묵은 오버일까?) (여기까지).  

 
2. 위 이야기는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필립 얀시가 쓴 글에서 발췌했는데 한 쎈텐스만 내가 임의로 순서를 바꾸었다. 책의 본 내용과는 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데도 참 인상적이어서 여러 차례 읽었다. 책의 부제는 '우리 몸에 새겨진 복음의 경이와 한 몸의 의미'이다. 통증, 외모, 얼굴, 피부, 촉각, 뼈, 근육, 피, 뇌, 세포 등에 얽힌 신비로운 과학적 사실들과 묵상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