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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2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황동규 시인의 산문을 읽다가 그가 브람스의 소나타를 묘사한 글을 읽고는 유튜브에서 브람스의 소나타를 찾아들었고 그러다가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총 16회를 울면서 봤다. 네 사람이 각각 '(그게 사람이든, 목표, 욕망이든) 자기만의 '내려놓음'을 통해서 성숙해져 가는 과정이 감동적이었다. (요즘 내게 내려놓음이 필요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제8화 중 마스터 클래스에서 만난 박은빈과 박지현이 나눈 연주의 흐름과 확신에 대한 대화를 받아적었다 : 확신은 어떻게 해야 생길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답을 찾으시면 저한테도 알려주시겠어요? 네, 꼭 그럴게요. --- 네 사람 모두 진실하다는 것도 멋졌다. 진실하게 살기에 플레이하는 연주에, 하는 말에, 내리는 선택에 힘이 실렸다 --- 박지현은 어떻게 이렇게 우아할까.     

2025년 10월 12일

신형철을 읽는 일요일

오늘은 일요일. 평소와 달리 큰 갈등 없이 교회 가기로 결정함. (웃음포인트). 가면서 신형철이 32개의 시에 대해 해설한 <인생의 역사>를 읽으며 갔는데 너무 잘 써서 와,와 감탄 하면서 감. 오늘 예배 중에 와,와 한 적이 두 번 있었음. 참 아름다운 장면이었음. --- 오늘 성찬 봉사자는 내 대학 동기 P였음. 성찬을 다 받은 사람은 (앞에 나가 줄을 서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 후) 빈 포도주 잔을 봉사자가 들고 있는 함에 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음. 이것이 성찬의 절차인데, P의 아내가 성찬을 받는 모습이 눈에 띄였음. 포도주를 마신 그녀는 돌아서서 남편 쪽으로 걸어오더니 남편 P를 바라보며 남편을 향해 정말 부드러운 미소를 한번 지은 후에 포도주 잔을 함에 넣었음. 나중에 집에 가면 "P, 너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문자 보내야지 하는 생각을 함. --- 성찬을 다 마치면 함께 부르는 찬양이 있음. 그 찬양을 부르고 있는데 내 앞 쪽에 있던 두 젊은 부부가 손을 잡음. 참 아름다운 장면을 짧은 성찬 시간에 두 번 목격함. ---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가깝게 지내는 A와 차를 마시러 커피숍에 가서 주문하는 사이에 내가 "오늘 정말 감동적인 장면을 두 번 봤어요"라고 하며 P의 아내가 남편에게 지었던 미소 이야기를 했다. "아! 저도 봤어요!" "정말요!" 나는 P에게 문자를 보낼 거란 말을 했다 (ㅋㅋ) A가 "두 번째는 뭔가요!"라고 물어 내가 젊은 부부 얘기를 했더니 "아! 저도 봤어요!" (ㅋㅋㅋ) 이럴 수가! (ㅋㅋㅋ) 어쩌면 오늘 예배 중에 감동한 사람이 나와 A 둘만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A에게는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 덧붙인다. (아까 그 예배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찬송을 부르던 내 앞의 젊은 부부가 손을 잡았다. 나도 마음 속으로 미국에 있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2025년 10월 11일

<우리가 기댄 모든 것>(마쓰모토 도시히코, 요코미치 마코토 지음, 김영사)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와 담배 못 끊는 정신과 의사가 나눈 의존증 이야기.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는데 술 못 끊는 문학 연구자에게는 술 외에도 도벽, 섹스, 과식 등의 의존증도 있(었)다. 

모든 챕터가 흥미롭지는 않았다. 나는 제2장이 좋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나는 제2장만 좋았다. 2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구절을 아래 정리한다. 

"왜 일부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고 특정 약물을 반복해서 사용하며 도박이나 게임에 집착해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해버리는 걸까요? 생각건대, 그들을 약물로 몰아넣는 것은 쾌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쾌감이라면 금방 싫증이 날 테니까요. 아마도 그것은 쾌감이 아니라 고통의 완화가 아닐까요? 즉, 사람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아찔한 쾌감을 얻으려 약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겪어온 고통이 그 약물로 인해 일시적으로 사라지거나 약해지기 때문에 빠지는 것입니다. 쾌감이라면 질리겠지만, 고통의 완화는 질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그 고통의 완화를 놓을 수 없게 되겠지요." (p.37)

"사람이 무언가에 빠져들게 되는 데는 반드시 위기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소중한 관계의 상실이나 파탄 같은 중대한 사건일 수도 있고, 조금 무리를 하거나 현재 있는 곳이 왠지 불편하다는 정도의 작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것이 위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p.38).

"이 서신 교환을 통해 '끊는다/끊지 못한다'라는 단순한 의존증 담론을 넘어,의존증 이면에 있는 심연에 줄을 드리워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p.39)

내게 있어 '오래전부터 겪어온 고통'은 무엇일까 자문해 보았다. 위기가 반드시 중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교회에서 참 만족스러운 예배를 드리고 돌아온 후에도 의존증이 발생한다면, 예배도 내게 진정한 치유가 아니었던 건가. 


헤밍웨이가 멈추라고 한 곳에서 멈췄다


 











2025년 10월 6일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민음사)를 읽으며.

이런 대목이 나온다. '황야의 이리'라는 별명을 가진 하리 할러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일터에서 오시는 길인가 보지요? 그래요, 그 방면에 대해선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나는 좀 옆 길에, 이를테면 가장자리에 살고 있지요." (p.26)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일터'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왔다. 나는 책 제일 뒷장에 연필로 이런 메모를 남겼다. "일터에서, 그러니까 직장 생활 가운데서 가장자리 삶을 경험하는 주인공이 등장해도 좋을 거 같음".  

(참고) 주제 의식은 좋았으나 글의 전개 방식이 내 취향이 전혀 아니어서 읽기 중단. 

2025년 9월 17일

로버트 레드퍼드 (1936~2025)

 










부끄럽게도 난 참 오랫동안 누군가의 부고를 들을 때 "그는 죽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지"라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했던 거 같다. 슬픔과 안타까움을 안 느낀 건 아니지만, 돌아보면 그렇게 느끼는 슬픔과 안타까움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그런 '안심'과 '우월의식(?)"이라는 틀 안에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 생각은 차츰 바뀌었다.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더 낫다거나, 더 나은 무언가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것을 나이 많이 들어서야 깨닫다니 부끄럽다). '충만히' 세상을 살고 떠난 누군가의 부고 기사를 읽을 때, 누군가의 부고 기사에서 '사랑과 도전'이 가득차 있는 것을 발견할 때 이제 나는 우월의식 대신 부러움을 느낀다. (인간으로서, 혹은 피조물로서의) 사명을 다 이룬 삶이 몹시 부럽다. 한 사람의 부고 기사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의 그날 일기보다 더 생명으로 가득차 있을 수 있다는 걸 요즘 느낀다. 평생의 연기와 그가 만든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희열과 꿈을 선물로 준 로버트 레드퍼드의 부고 소식을 들으면서 또 한 번 부럽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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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 키드’ 로버트 레드퍼드 별세…향년 89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로 스타덤
‘스팅’ ‘추억’ 등서 활약한 ‘할리우드 전설’
선댄스영화제 창립·환경운동도 펼쳐


미국 할리우드 스타이자 영화감독, 제작자이며 선댄스영화제의 설립자인 로버트 레드퍼드가 별세했다. 향년 89. 뉴욕타임스는 16일(현지시각) 레드퍼드가 미국 유타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이날 보도했다. 젊은 시절 가장 미국적인 미남 배우로 사랑받았던 찰스 로버트 레드퍼드 주니어는 1936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야구와 미술 등에 두각을 나타내며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한 뒤 미국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1960년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는 1969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출연하며 배우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 평단의 찬사와 흥행 성공까지 거머쥐면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를 열어젖힌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단숨에 스타 배우로 부상했다. 훗날 그가 설립한 ‘선댄스영화제’는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했던 인물 ‘선댄스 키드’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후 ‘스팅’(1973), ‘추억’(1973)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레드퍼드는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추억’과 ‘코드네임 콘돌’(1975),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등 많은 명작을 함께 만들어낸 시드니 폴락 감독은 평생의 친구이기도 했다. 또 감독으로도 활동하면서 ‘보통 사람들’로 1981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브래드 핏이 ‘제2의 로버트 레드퍼드’라는 별명을 얻으며 스타로 출세한 ‘흐르는 강물처럼’을 감독, 제작해 큰 호평을 받았다. 2017년에는 제인 폰다와 함께 황혼의 로맨스를 연기한 넷플릭스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에 출연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함께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년에 들어서며 레드퍼드는 영화감독과 제작자뿐 아니라 환경보호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80년에는 신진 영화인을 위해 선댄스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독립영화의 제작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곳에서 그가 창립한 선댄스영화제는 전세계에서 가장 젊고 영향력 있는 영화제로 자리 잡으면서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꿈의 영화제가 되었다. (한겨레 신문) 김은형 선임기자

2025년 9월 13일

나쓰메 소세키를 읽고.

 최근 한 달 사이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5권을 읽었다. 먼저 <도련님>(1906), 이어서 소세키의 전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산시로>(1908),<그후>(1909), <문>(1910)을 읽었다. 이어서 <마음>(1914)과 (큰애가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 <명암>(1916)을 읽으려 했는데, <마음>만 읽고 멈췄다. 

오래 살다보니, 살면 살 수록, 용기가 절실하다. 용기가 없어서 <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 사람은 아무리 무서워도, 아무리 부끄러워도, 용기를 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그 사실을 무서울 정도로 잘 보여준다).  소세키가 소설 속에서 그리는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건 인간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용기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의 결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 결과를 직시할 용기, 그 결과의 한계 내에서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소세키가 그리는 또 다른 주인공의 얘기를 한 번 더 들을 마음과 시간이 내게는 없다. 

<그후>에서 내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문장 하나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전개에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대목인데, 이상하게 내게는 주인공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고 느껴졌다.) "다이스케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는 않았다." (P.189,현암사)  

<문>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 건너 앞에 있던 사내가 일어나 갔을 때는 잠시 후 안쪽에서 악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거리가 멀어 소스케의 고막을 심하게 때릴 만큼 세게 울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최대한의 위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목구멍에서 나온 개인의 특색을 띄고 있었다. 자기 바로 앞의 사람이 일어났을 때는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는 의식에 압도되어 한층 불안해졌다."(p.240, 현암사) 이 문장 역시 소설의 전개에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대목을 읽는데 요한계시록의 한 대목이 떠올랐을 뿐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요한계시록 2:17)

2025년 9월 1일

퇴직 6개월 전에 하는 생각

오늘은 9월 1일. 정확하게 퇴직(2026.2.28) 6개월 전이다. 사랑하는 일, 애정하는 가까운 동료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은 통증에 가까운 슬픔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 전 새벽에 눈을 떴을 때도 그런 통증이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 보고 싶을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다가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고, 그러자 통증이 사라졌다. 내가 했던 생각은 이런 거였다.  

나에게는 "내 모든 걸 쏟아부어 본 시간"들이 있다. 내게는 "인간적으로 깊은 신뢰를 주고 받는 동료들"이 있다. 만약 이런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런 관계들이 없었다면 내 재직 기간은 커다란 공허로 다가왔을 것이고, 남은 6개월은 그 공허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며, 퇴직은 정녕 날카로운 비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니 감사하게도 내 지난 30년은 "채워져"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떠남이 두렵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퇴직을 앞 둔 이에게는 남은 기간보다 받은 은혜를 돌아보는 게 더 필요하구나.    

"5년이 더 주어진다면 좋겠니?"라는 질문도 내게 도움이 됐다. 아니오,가 내 대답이었다. 나는 나의 재직 기간을 더 완전하게 <보수>하기 위해 시간을 더 요청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즉  피조물이다. 유한한 상태에서 입사했다가 유한한 상태로 퇴직하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5년이 더 내게 주어지더라도 그 5년 때문에 내가 지금의 나보다 완전한 존재가 될 거 같지는 않다. 불완전한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지금보다 더 온전하게 보수될 거 같지도 않다. 어떤 아쉬움도 느끼지 않는 퇴직을 꿈꾼다면, 그러지 못함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어리석고 건강하지 못한 생각일 거 같다. 늘 그래왔듯이, 나는 아쉬움도 느끼겠지만 '괜찮다' 위로해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함께 경험할 것이며, 그분께 또 한 번, 나의 <완벽하지 않은 퇴직 후 계획>을 들려드릴 것이다. 1993년 한 명의 어리숙한 신입사원을 신실하게 인도하신 그분께서는 2026년, 이번에는 (여전히 어리숙한ㅠㅠ) 한 명의 퇴직자를 또 한 번 신실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다.   

남은 6개월이, 한 명의 피조물이 완전해지려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과 한계까지도 향유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2025.9.1. 

신동주 드림


* '내 자신의 결핍을 향유함'이란 말은 도심 속 수도 교회 '신비와 저항'의 박총 원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2025.8.18)에 나옵니다.


2025년 8월 27일

<산시로>(나쓰메 소세키 지음, 최재철 옮김)를 읽고.

"하숙집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에 들어가 앉아 보니 역시 바람소리가 들린다. 산시로는 이러한 바람소리를 들을 때마다 운명이라는 글자를 떠올린다. '윙-'하고 울려 올 적마다 움츠러든다. 자기 스스로도 결코 강한 남자라고는 여기지 않고 있다. 생각해 보면, 상경한 이래 자신의 운명은 대개 요지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다소간 화기애애한 우롱을 받는 것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요지로는 사랑스러운 장난꾸러기다. 앞으로도 이 사랑스러운 장난꾸러기에게 자기 운명이 쥐어져 있을 것같이 여겨진다. 바람이 계속 불어댄다. 확실히 요지로 이상의 바람이다." (p.210)

소세키의 책을 처음으로 읽고 있다. 먼저 <도련님>(1906)을 읽고 이어서 <산시로>(1908)를 읽었다. 전자에선 24세, 후자에선 23세 남자가 주인공이다. 도련님에선J.D.샐린저 냄새가 났고, 산시로에선 하루키 냄새가 났다. (출생 연도를 따지자면 거꾸로 말해야 맞을 것이다). ---- 산시로의 미숙함. 그것에 끌렸다. 그가 불완전하게 그려졌기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 같다. 몹시도 미숙하고 불완전했던 20대 초반 내 모습이 많이 떠올랐다. 마음껏 불완전해도 됐던 그 젊음의 시기.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몹시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이제 깨닫는다. 


2025년 8월 17일

ABC 살인사건

 

최근 심한 무기력증 때문에 교회에 못 가다가 오늘 한 달만에 교회에 갔다. 아내의 조언대로 지난 월요일부터 운동을 다시 시작했는데 운동의 효과가 있었다. ---- 교회 가는 길 지하철에서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었다. '도련님'이란 단어의 등장 순간이 절묘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의 첫 등장 순간만큼이나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렸다. --- 예배를 마치고, 준비해간 생일 선물을 00에게 주었다. 점심도 00와 같이 먹었다. 요즘은 "우르르 용병단"이라는 어드벤처 RPG 게임에 빠져있다고 했다. 내게 전략적으로 게임을 운용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줬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나도 초5때 이랬을까. ---- 교회 가기 전 유튜브에서 동기 부여에 관한 짧은 쇼츠를 하나 봤다. 의지력에 관한 거였다. (의지력이 약한 나는 의지력에 관한 영상을 자주 본다). 출연자가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은 의지력이 강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의지력이 강한 게 아니라 그게 그냥 습관이 돼서 그런 거예요. 아침에 의지력을 갖고 이를 닦는 사람이 있나요. 습관적으로 닦는 거지요." 이 지적에 공감이 됐다. 당분간 예배(참석)에 큰 의미 부여 하지 않고 그냥 이를 닦는 거라고 여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