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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8일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E.P.샌더스 지음, 알맹e)를 구매하고.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이사로 있는 맹호성 페친이, 한국 신학(출판)계가 39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방금 했어요 ^^ 1977년 출간 이후 바울 연구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는 평가받는 E.P.샌더스의『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전자책으로 냈어요. 페친이 직접 디자인한 표지를 보고 저는 제 석사학위 논문의 주 분석 대상이었던 마이클 폴라니의 주저『Personal Knowledge』(1958년)가 바로 떠올랐어요. 둘 모두 표지는 단순해도, 우리가 세상과 기독교를 보는 시각을 참 많이 <흔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만남 있잖아요, 그 만남 이후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식론과 신학에 <약간의 사전 지식>(이런 난 얼마나 많이 안다고 ㅜㅜ)이 있는 분들께 두 책 모두 적극 추천.

(참고) ① 폴라니의 책은 아카넷에서『개인적 지식』이란 이름으로 나온 적 있는데 (적어도 제게는) 해독 불가 였어요. 인식론에 관심 있는 교수나 학생이 있다면 영어책을 권합니다. ② 이번에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번역은 제가 신뢰하는 신학서적 전문 번역가 박규태 목사가 해주셨어요. 완전안심. ③ 우리나라 신학서적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맹호성 페친은 이 책을 PDF 형식으로 출간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양한 구매 옵션>을 제공하는데요, 제 페친의 성격이 잘 묻어나는 <하드보일드한>의 책 구매 방법 소개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장 쾌락적인...읽기라는 행위에 푹... :)
https://www.facebook.com/Rmaenge/posts/1228529727188938

2016년 10월 7일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IVP)를 읽고.

한 개의 구(句), 하나의 문장(文章)이 나로 하여금 이 책 구매케 했으니 먼저 구부터 소개하면: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라는 이 책의 부제). 원부제 '신학자의 회고록' 가볍게 킬하고 매혹적인 상기 부제 단 이, 출판사는 포상해야함. 한편, 상기 구와 함께 날 유혹한 ‘쎈텐스’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신학교수 세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쓴 추천사에 등장하는데 그 정확한 워딩은 다음과 같다: “『한나의 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전통을 당당하게 잇는다.” (후기,p.523). 특정 답만을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한국 교회에 신물난 내게, 『고백록』을 좋아하여 선한용 역, 최민순 역, R. S. Pine-Coffin 역으로 『고백록』 세 권 갖고 있는 내게, 상기 두 홍보 포인트는 내 <성감대>를 정확하게 터치한, 내가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음. 하나 아무리 책을 읽어도 상기 구와 문장에서 촉발된 나의 <설렘과 흥분>은 절정으로 이어지지 않고....계속 <무언가 다 안 채워진 듯한> 미진함.....때문에 책을 다 읽고 돌아누운 나는....좋았어? 라고 스탠리가 계속 묻는데도 아무 대답 않고.....
2016. 10. 7.
신동주
서플먼트
1) 책을 덮었을 때 가슴에 남은 건 ‘당혹감’이었고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불친절’. 내가 이 책 왜 불친절하다 생각하나 하면: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스탠리가 씨름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문제들>을 알아야 하는데, 542쪽 되는 이 책에서 스탠리는 자신의 결론과 결정만을 <일방적>으로 소개. 스탠리가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을 비판했고 존 요더를 만나는 가운데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됐다는 <팩트>는 알겠는데, 그런 <결과의 나열>이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담? 나는 어떤 신학적 입장도 <100>로만 구성됐다고 보지 않음. 그렇기에 여전히 무시해선 안 될, 계속 귀기울여할 <니버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봄. 니버가 갖고 있었던 <두려움>과 <꿈>과, 특정 성경 본문을 스탠리와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든 <성서관> 등 니버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충분히> <매력적으로> 소개할 때 비로서 <스탠리의 이야기>도 산다고 봄. <레옹>에서 게리 올드먼이 레옹와 마틸다의 이야기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주었듯이 말임. 레이 올슨(Ray Olson)이란 이가 “대부분의 현대 회고록 저자들은 일인칭 소설 화자와 비슷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명한 신학자 하우어워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라고 말했으나 나 그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음. 이 회고록엔 적(敵)에 대한 <명단>은 있으되 그 <적들의 이야기>는 없음. 다시 말하지만 이 회고록엔, 스탠리가 신학자로서 성서를 해석하며 다른 해석 방법(그러니까 ‘다른 삶’)과 조우할 때 그가 느꼈을 두근거림, 두려움, 망설임은 등장하지 않음. <저명한 신학자>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 <흔들리는 신학도>는 만나지 못한다는 게 몹시나도 애석함. (나는 <그걸> 듣고, 보고 싶어 이 책을 펼쳤는데 말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적들의 이야기만 빈약한 게 아님ㅠㅠ 가장 강력한 아군인 요더와 매킨타이어의 고민과 꿈에 대해서도 나 더 알게 된 거 <정말 한 줄>도 더 없음. (참고: 내가 아는 요더는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IVP)에 등장하는 요더가 전부. 내가 읽은 매킨타이어의 저서는『덕의 상실』(문예출판사)이 유일.) 이제 나, 스탠리와 내가 쓰는 언어가 과연 <같은 언어>인지 회의에 빠짐. 왜냐고? 스탠리가 돌아누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 그다음에 이것을 썼다’식의 서술을 피하려”고 했어.(<맺음말>,p.508) 나는 나보다 <훌륭한> 그에게, <24> 그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림. “스탠리,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게 정확하게 바로 그거예요.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그 다음에 이것을 썼다...라고만 하는 거....내가 원하는 건....내 몸에서....당신이 만져주기를 바랐던 곳은....”
2) 이제 이어지는 건 독서 중 내가 체험한 총 다섯 번의 “멀티-당혹감(multi-confusions)”. 멀티 오르가즘은 들어봤어도 멀티 당혹감은 첨 들어봤을 당신에게 그 당혹들 좀 구체적으로 소개하면(후방주의? -.-): "앤과 함께하는 삶이 신학자로서의 나의 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p.287) ( 아니, <가끔>이라니? 『한나의 아이』 구매자 대다수는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스탠리 답변 듣고 싶어 이 책 샀을 터인데.) 어쨌든 상기 질문에 대한 스탠리의 답변: “모른다는 것이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p.287). 모른다....저자가 모른다...고 하는 마당에 이제 더 물을 수도 없다....(이게 첫 번째 당혹) "앤과 함께 살며서 나는 삶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이 내 신학적 통찰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지만, 앤과 애덤과 함께한 시간이 내가 배운 신학을 펼치는 방법을 좌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나친 억측인 듯하다." (p.288). 이런, <내 예상>이 억측에 불과했구나. 그의 <24>이 <그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내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을 억측이라 호(呼)하다니. (이게 두 번째 당혹). 어쨌든 왜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갈 때 앤과 함께 한 시간과 경험에 기대지 않는지 스탠리가 밝히는 이유 들어보면: "내러티브에 대한 강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신앙 언어의 의미를 시험하거나 결정하는 데 쓰라는 요구가 아니다." (p.288) 스탠리의 이런 <신념과 태도> 때문에 우리는 스탠리의 <신학적 사유>에 <앤과 함께한 삶>이 끼친 영향의 <정도와 내용>에 대해 <충격적일 정도>로 <무지한채로> 책을 덮게 됨. (세 번째 당혹). 오케이, 스탠리, 알겠어요, 그럼 당신의 신학적 통찰, 당신의 그 내러티브 신학에 영향을 <끼친> 경험은 뭔가요? “내러티브가 기독교적 확신에 필요한 문법이라는 말은 존재의 이런 종말론적 특성을 뜻한다. 확신컨대 이것은 나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과 그의 연구 결과를 만났기 때문에 내 저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p. 291). 그렇다. 스탠리에 따르면, 스탠리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이는, <앤>이 아니라, <존 하워드 요더>임. (ㅠㅠ) 정리해보자. 이제 우리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요더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게 됐음. 동시에, 아무리 『한나의 아이』를 읽어도 요더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참고: 서플먼트 2) 역시 이미 알고 있음. (네번 째 당혹). 난 이제 곤고한 독자...이 당혹스러운 회고록에서 누가 나를 건저낼 수 있을까 흑흑흑. 나 이번 여행에서, 수많은 신학자들과 올레길 걸으며, 개인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경험 들을 기회 있을 줄 알았는데, 인솔자 스탠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파킹랏. 요더와...니버와...매킨타이어와...그리고 스탠리 자신의...차만 <파킹돼 있었음>. 그게 다.(that’s all). 나 신학자들 차만 보고 왔음. 이 연속되는 네 번의 당혹은 우리에게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문학적 질문>을 하나 야기함.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임. 회.고.록.이.란.무.엇.인.가. <도대체> 회고록이란 무엇인가....세라, 『한나의 아이』가 어거스틴의 『고백록』 전통을 잇는다고 했죠? 세라....세라, 내 말 들려요?
3) 이제 다섯 번째, 마지막 당혹 남았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앤이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떴을까. 그러다 등장한 스탠리와 앤의 이혼 소식. 내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내게는 큰 충격이었음. 나 지금 원론적인 기독인의 이혼 가능 여부 묻는 거 아님. 내가 묻는 건,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 배우자의 천식이 심하다고, 오른쪽 다리가 썩는다고, 정신질환 증세가 심해진다고, 이혼해도 돼? 다시 말해, 자녀의 안전 등을 위해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게 아니라 <이혼>하는 게 기독인에게 <옵션>이 될 수 있나. 배우자의 잘못이 없는 한 – 질환은 잘못이 아니다 – 우리는 평생을 상대의 배우자로 <살아야만> 하는 거 아니었나. 한편, 내 이 당혹감이 단순히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면 이제 내가 인용하는 페친 K의 글은 이번 회고록에서 들리지 않았던 <병자/환자의 목소리>에 주목함. “저자나 이 책을 만든 출판사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직접 고통을 겪은 당사자인 앤의 입장에서 그의 목소리는 누가 대변해 주나 싶어 안쓰럽고 먹먹했다.” (페친 K의 2016년 10월3일 페북 포스팅에서 인용).
4) 거듭되는 당혹감에 당혹한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생각 궁금해, 2016년 8월 22일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일곱시에 열린『한나의 아이』 출간 기념 공개 강연회에 참석. “그럼 이제 플로어의 질문 두 개만 받겠습니다” . 강연 후 사회자가 말하자 나와 함께 강연회에 왔던 회사 후배 L이 손을 듦. (난 지금도 이 질문이 그 강연회의 백미라고 생각. 참고로 L은 나와 함께 지금 <새롭게하소서> 연출 중. 맞음. 나 지금 프로그램 홍보 중.) “믿지 않는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니. 그냥 열심히 최선 다해 사는 거지. 그럼, 그 답 없음과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정답 없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최선을 다해 사는 그 친구에게 우리의 정답 없는 종교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답은 없고,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정신에 따라, 그날 나온 답변 소개는 생략.
5) 이상 나의 글은 <지극히 사적인> 독후감. 다른 의견, 다른 평가 당연히 존재.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쓰고 IVP가 펴낸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는 국민일보 선정 ‘2016년 올해 최고의 책’으로 뽑힘. “이 책은 출판사와 아카데미 대표 등 12명이 호평, 대상 도서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6.12.28). 이 책 비록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펴낸이와 편집자가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와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무척 소중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