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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30일

개인적으로 읽은 마가복음

모든 이야기들은 거의 항상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 조나난 고트쉘(Jonathan Gottschall)


1. 작년에 <크게 넘어진> 적이 하루 있었다. 다음 날 <다시> 일어서는데 마가복음의 힘이 컸다. 나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며, 나 또한 <자빠져 누워있지만 않고>, 마가복음의 제자들처럼 <다시 일어나> 갈릴리로 가서 <용서와 치유>를 받으리라, 다짐했다. 이번에『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베르너 H. 켈버 지음, 감은사)를 읽으며 무척 놀랐던 이유는 - 읽다가 정말 내 눈을 의심했는데! -  저자 켈버가, 제자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끝까지 누워있었으며> , 끝내 <회복 되지 못한다>고 주장해서 였다. <못난 제자들>의 회복 <여부>는, 살아가면서 <자꾸 넘어지는> 내게는 심각하고 절박한 사안이었다. 나는 마가복음과 내러티브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읽으며 켈버의 주장을 따져보았다. 아래, 작년에 내가 넘어졌을 때 마가복음을 읽으며 지은 짧은 시를 먼저 소개하고, 본격적인 논의는 3번 글에서부터 시작하겠다.


2.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면서 / 몹시 화도 내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무척 어이없어 하시고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 정말 놀라기도 하시며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 답답해 하기도 하셨지만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 결코 하지 않으셨던 한 가지 행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 주님은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셔도 / 결코 경멸하거나 비웃지는  않으셨어요! //  책망은 하시되 경멸하거나 비웃지 않으시는 주님. / 어제 또 죄를 지은 제게 / 이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 자신을 버린 제자들보다 먼저 /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 기다려 주신 주님. // 저도 오늘 믿음으로 갈릴리로 갑니다. (2018. 4. 2).


3. 켈버가 제자들의 회복을 <부인>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여자들>이, 무덤 속 흰 옷 입은 청년이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주님의] 회복의 약속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무서워 떨며 정신 없이 무덤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겁에 질려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막 16:8).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해서 켈버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 여성들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지가 이 여성들의 실패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고] <좌초> 되어 버리고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갈릴리로 되돌아 가라는 신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 p.142)  바로 이어지는 켈버의 다음 문장은 이렇다. “여성들의 실패는 (...) 자신들의 운명을, 제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확정>짓는다.” (p.142) 그래서 켈버는, 마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자들의 회복이 아닌 <몰락>으로 끝맺”었다고 본다.(p.144)  나는 켈버에게 묻고 싶었다. 언급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은 것인가.


4. 제자들이 <회복되지 못했다>는 주장은 난생 처음 접해보았기에, 켈버 말고  다른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있나, 내가 갖고 있는 몇 권의 책에서 확인해 봤다. 일단, 마가복음에 제자들의 회복에 대한 묘사가 없다는 점은 다른 많은 학자들도 주목하고 있는 사항이었다.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뒤 나타나 그들을 회복시키지 않는다”. (『복음서와 만나다』 , 리처드 A. 버릿지 지음, 비아, p.98).  “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라는 여인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복된 소식(복음)의 선포는 난처함을 준다” (『신약개론』 , 레이몬드 E. 브라운 지음, 기독교문서선교회, p.240). “어떤 책이라도 이런 식으로 끝을 맺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더더구나 기독교 복음(Christian gospel)인 경우에는 더 그렇다”. (『신약 읽기 – 역사와 문헌』, 데일 마틴 지음, 문학동네, ‘제6장 마르코의 복음서’ 중에서. 영서를 읽고 내가 직접 번역하고 있는 관계로, 앞으로 이 글에서 인용하는 마틴의 문장은 국내 번역서와 다름.) “아이러니컬하게 끝나는 마가복음은 자신만만하던 독자들의 기를 한풀 꺽어 놓는다. 왜냐하면 이 끝부분은 독자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등장인물들의 아이러니의 희생자였지만, 이번에는 독자들이 아이러니의 희생자가 된다”. (『이야기 마가 : 복음서 내러티브 개론』 , 데이빗 로즈 외 2인 지음, 이레서원, p.166. 단순히 편의를 위해서, 앞으로 이 책의 저자 이름 인용시 데이빗 로즈만 언급하겠음.  ‘희생물’로 번역돼 있는 것을 이 글에선 ‘희생자’로 고침. 로즈의 상기 문장이 너무 좋아 찾아본 원문(제1판)은 다음과 같음: “The ironic ending of Mark, however, punctures any self-confident superiority the reader might have, for the ending turns irony back upon the reader. Now it is the reader who expects one thing but gets another.” ).  그럼 이제 이들 학자들은, 회복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부재하다고 하여, 켈버와 같은 결론, 즉 “몰락”했다는 “확정”을 내릴까? 그건 아니다. 일단 버릿지부터 살펴보자면, 그도 나와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동정심 많은 독자는 가련한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기쁨의 재회로 마무리 될까?’ ” (p.120). 그런데 버릿지는 이에 대한 대답이 <열려있고> 독자인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제자됨이라는 주제를 다뤄온 일관적인 태도를 고려할 때 , 이 물음은 여전히 열려 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이야기인 마르코의 예수 이야기는 동시에 독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게 될까, 버리게 될까? (...) 갈릴래아로 가서 예수를 만나게 될까, 아니면 무턱대고 빈 무덤만 바라볼까? 이 모든 것은 독자에게 달렸다.” (『복음서와 만나다』, p.120~121). 이런 버릿지 식의 질문과 의문을 로즈도  공유하고 있었다.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과연 제자들이 자기들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 다시 예수를 충실하게 따를 것인가? 이 문제는 <플롯으로 구성한 내러티브>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 내레이터는 이야기 세계 이후의 제자들의 운명을 그냥 열려진 채로 내버려 둔다” (『이야기 마가』 , p.253 ). 이렇게 버릿지와 로즈 양쪽의 독법은 비슷하지만 제자들이 <회복되지 못할 가능성>을 좀 더 심각하게 읽어내는 쪽은  로즈이다. “이야기를 다시 되짚어보면, 독자들은 제자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많은 암시를 받는다. 그렇지만 이에 못지 않게 그들이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혹은 들어가긴 하되 거기에서 가장 작은 자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많이 받는다.” (『이야기 마가』, p.255).


5.  반면에 켈버는,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다른 쪽 출구를 완전히 봉쇄한다.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암시들>은 그 반대 방향[만]을 가리킨다”.(『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p.141. 여기서 ‘반대 방향’은 제자들의 ‘몰락’을 의미.) 이제 켈버가 왜 한 쪽 출구를 완전히 막는 독법을 선택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자. 1세기 후반 <로마-유대 전쟁> 당시, “[예루살렘 교회 내의 많은] 선지자적 인물들은 전쟁 가운데 메시아가 간섭하실 것과,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벌이는 마지막 전투의 정점에서 메시아가 구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베르너 켈버,p.112 ). 그리고 이런 예언과 가르침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싸우고자 하는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켈버, p.111) 그러나 예루살렘은 파괴 되었고, “유대인들의 전쟁 활동에 불을 붙이고 그 활동을 지지[했던]  모든 [ -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도 만연했던 - ] 메시아적 기대들은 성취되지 않았다. (...) 예루살렘 몰락 당시에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겪은 (...)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현재는 절망적이었고 <죽음과 파괴>에 대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켈버, p.156) 켈버가 볼 때 마가는 지금 그 <설명>을 하는 중이다. 켈버에 따르자면, 마가의 설명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① 메시아가 극적으로 개입해서 구원해 줄 거라고 예언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었다고 밝힘. (막 13:6,22). 예수는 그런 극적인 구원을 예언한 적이 없음. 오히려 믿는 자들은 고난을 받게 될 거라고 예언 했음. 그렇기에, 그들이 이번 전쟁 중에 극적인 메시아적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그동안 가져왔던 기독교 신앙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 ② 그동안 예루살렘 및 예루살렘 교회에 주어졌던 과도한 관심, 의미, 권위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마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자들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 (제자들의 권위가 무너지면, 그들이 세운 교회 및 그 교회에 터하고 있던 가르침의 권위 역시 동시에 허물어짐). ③ 아울러,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충격에 빠진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전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해 예수가 원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지역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였다고 해명. 그렇기에 예수가 생전에 자신이 갈릴리로 가 있을 것을 미리 언급한 것이라고 설명.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곤혹스러워할 필요 없음. 이제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갈릴리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나갈 것임. 켈버의 기획을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두 문장으로 요약한다. “켈버(W.Kelber)는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들(the prophets of the Jerusalem church)이, 로마에 대항하여 보호해 줄 파루시아(재림)을 기다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 후, 마가복음은 실패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갈릴리 기독교인의 [비판]으로서 기록되었다고 한다”(『신약개론』, 레이몬드 브라운, p.258). 드디어 이제 우리는, 왜 켈버가, 제자들은 회복되지 못하고 “몰락”했다고 마가복음을 읽어내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켈버는 마가복음을 <갈릴리 문서>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기원이 되는 지역으로 갈릴리 (...) 지방이 가능성이 있다고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 우리는 마가복음이 전혀 다른 남쪽 지역[예루살렘-역주]의 관점이 아닌 북쪽 지역,곧 갈릴리-시리아 관점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 ” (켈버, p.13) 켈버의 논지에 따르면, 마가복음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의 관점>을 반영한 문서이기에,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하는 제자들의 몰락 스토리는, 갈릴리 지역 기독인들에게 <치명타>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갈릴리 기독인들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역할과 사명을 <도드라지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이와 같은 켈버의 마가복음 독법에 동의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도 제자 무리들, 특히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이 혹독한 여행 내러티브의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한 기독교인 저자가 예수를 대표하는 열두 제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열두 제자들에 관한 나쁜 소식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켈버, p.150) 켈버의 답변 논지는 이렇다: 그래야 더 이상 잘못된 예루살렘 교회 중심으로 살지 않고, 주님이 갈릴리에서 보여주셨던 하나님 나라 모습에 우리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게 되니까. 켈버에 따르자면, 제자들이 몰락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가 무너져도, 갈릴리 공동체가 부각되고 대안으로 언급되는 마가복음은, 갈릴리 기독인들에게는 여전히 “좋은 소식”일 수 있다. 그런 논지에서 보자면, 제자들의 회복에 대한 가능성을 완전히 닫으며 16:8에서 급작스레 끝나는 마가복음의 결말 방식은, “복음서의 내적 논리”에 충실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참고: 켈버, p.13).



6. 신학자 한 명의 의견만 더 들어보고 나면 , 마가복음의 독특한 결말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재미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지점을 확보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이제 살펴볼 사람은 데일 마틴. 예일대에서 신약을 가르치는 마틴 역시 마가복음의 결말이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이 중의 하나이다. “어떤 책이라도 이런 식으로 끝을 맺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더더구나 기독교 복음(Christian gospel)인 경우에는 더 그렇다” (『신약 읽기 – 역사와 문헌』, 데일 마틴 지음, 문학동네, ‘제6장 마르코의 복음서’ 중에서. 원서를 읽고 직접 번역하고 있는 관계로, 앞으로 이 글에서 인용하는 마틴의 문장은 국내 번역서와 다름. ) 그럼 마틴은 왜 마가가 마가복음을 <급작스레> 마무리한다고 보는 것일까. 마틴은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약간 변형시켜 되묻는다. “실제 예수가 부활한 모습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마가복음의 이상한 마무리”의 원인은 무엇인가, 라고. (상기서, 제6장에서). 이에 대해 마틴은 “[마가복음의] 저자는 궁극적인 주님의 재림이 아주 임박했다고 믿었기에 이미 과거지사가 된 [첫번 째] 부활 모습을 언급하지 않았을 수 있다. 갈릴리에 있는 기독인들은 [어찌됐든 곧]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추측한다. (상기서, 제6장에서). 즉, 주님의 재림이 <너무 임박>했기에, 다시 말해 조금만 있으면 주님을 직접 볼 것이기에 굳이 이미 지나간 부활은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래서 복음서는 과거의 부활이 빠진채 - 그러다보니 그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이나 회복 장면도 빠진채 - “이상하게 마무리”(the strange ending of the Gospel) 됐다는 마틴의 설명이다.


7.  방금 살펴본 세계적인 두 석학의 주장을 비교하다보면 우리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켈버와 마틴은 <서로 다른> 최종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몹시 인상적이게도, 그 각각 다른 결론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이 채택하고 있는 <전제>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즉, 특정 문서의 역사적 배경(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을 알면, 특정 문서의 글쓰기 스타일(어떻게,왜 그렇게)을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왜 마가복음은 그렇게 독특하게 끝나는가?>라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두 사람은, (예를 들어) 그런 <클로징>이 마가복음의 <오프닝>과 혹시 어떤 <내적 연결 고리>를 갖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식의 <문학적 질문 및 탐색>은 하지 않고 그 대신, 복음서의 수신처로 예상되는 지역과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 분석,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한 정확한 시기 분석, 저자가 관련 맺고 있는 공동체의 상황 분석 등 역사적 · 정치적 분석만을 하고는 -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데! - 그것을 마가복음의 독특한 결말을 설명하는 답으로 <충분하다고> 제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역사적·정치적 분석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석은 나 역시 언제든지 환영이다), 거기서 <멈췄다>는 것이다. (이미 취합한 정보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의 <문학 작품>에 대한 무척이나 <부당한 대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문학적 질문> 없이도 하나의 문학 작품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문학의 본질이 문학 외적인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때로는 정치적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문학적 질문이 빠질 수는 없다.) 모든 존재는 – 인간이든 문학이든 -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제대로 된> 질문을 받을 권리가 있다. 여성 배우가, 몸매 관리법이 아니라, 연기관과 작품관에 대한 질문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마가복음에도, 단순한  역사적 배경 관련 질문을 뛰어넘는, <제대로 된> 문학적 질문을 받을 권리가, 복음서의 독특한 결말을 다른 차원이 아닌 <문학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이런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건 부당한 일이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마가복음에 어울리는 <제대로 된 질문>을 찾는 일일 것이다.



8.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신학자 레이먼드 브라운의 해설에는, 우리 논의를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흥미로운 대목이 포함돼 있다. 거기서부터 <제대로 된 질문>을 찾는 우리의 여정을 시작해보자. 브라운은 마가복음이 16:8에서 끝나는 것을 놓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돌발적인 종결로, 독자들이 본문에 암시된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완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고서도 부활 후의 재회를 확신하며 전하였던 것이다.” (『신약개론』, p.240). 이 <약간 어색해 보이는> 번역문을 조금 다듬어 브라운의 요지를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  ① 마가는 자신이 <암시한 내용들만 가지고도> 독자들 스스로 완전한 이야기를 완성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② 마가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와 <재회했고>, <회복됐다>는 것을 <확신>했는데, 그 확신하는 바를 (굳이 자신이 다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서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브라운의 <이 해설>에 따르면 마가는 지금 <무척 이상한 작업> 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즉, 마가는 자신이 확신하는 (예수와 제자들의) <재회했음> 및 (제자들의) <회복됐음>을 오직 <암시>와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않음>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번 다시 묻게 된다. 마가는 <왜 이러는> 것일까. 단답(單答)이 가능한 질문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내러티브>라는 길로 좀 돌아가 볼까 한다.


9.『성서의 이야기 기술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로버트 알터 지음, 아모르문디)은 히브리 성서 해석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근대적 편협성” 때문에 내가 “일종의 정신적 착시현상”에 빠져서 구약성경을 읽어왔구나,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알터,p.43) 나는 구약 성경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면, 그건 저자들이 <원시적인> 인간이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저자들이 <실수>를 했든지, 아니면 <능력>이 없어서였지,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알터에 따르면:  “히브리 성서의 저자들이 이야기를 써나갈 때 보여주는 <창의적인 기교의 핵심>은 주인공들의 마음 속 동기나 도덕적 성격, 그리고 심리 상태 등을 어느 정도 <불확정한 상태로 모호하게 유지>했다는 것이다. (...) 마지막까지 최종적인 판단은 유보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놓고 경중을 따져보며 ,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부분이 앞으로 어떻게 채워질지에 대해 계속 <상상해볼 여지>를 주는 것이다.” (알터, p.29~30). 한편, 이 책 전반부에는 므나헴 페리(Menakhem Perry)와 마이어 스턴버그(Meir Sternberg )가 공동저술한  「아이러니로 본 다윗 왕 」 이라는 논문 한 편을 놓고 벌어졌던 사건이 소개되는데, 논문의 내용과 요지, 이 논문에 대한 비판, 이에 대한 두 저자의 반론을 저자 알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다윗과 밧세바 사건을 한 구절 한 구절 따라가면서 탁월”하게 분석한 이 논문에서  “[성서] 이야기의 <저자가 말하는 것>과 <우리가 추측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라는 정교한 장치는,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인공들의 동기나 인지 상태에 관한 <최소 두 가지의 상반된 복잡한 해석을 할 여지>를 주고자 [성서 저자가] 교묘히 꾸며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논문에서 두 저자는 사무엘하 속의 이야기와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 속에 담긴 <의도적인 모호함> 사이에 <구조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논문이 발표되자 벌집을 쑤신 듯 이 견해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 일었다. 이 논문을 비평한 이들이 가장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은 성서의 이야기는 결국 의도 면에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교훈적>이기 때문에, 우리 현대인들이 즐기는 <아이러니나 말장난>에 그렇게 치우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 [그러자] 페리와 스턴버그는 오만 단어가 넘는 공동 저작을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자신들은 현대의 문학적 기준을 성서에 <덮어씌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서 내러티브 자체의 일반적 기준이 무엇인지, 문제가 되는 이야기가 그 기준을 어떻게 벗어나는지 <꼼꼼하게 관찰했을 뿐>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p.38.) 위 이야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 “성서를 <꼼꼼하게 관찰>했더니 <아이러니>,<말장난>, <의도적인 모호함> 등 <우리 현대인들>이 문학에서 <즐기는 것들>과 마주하게 됐다”. 이 말을, 정말 아주 쉬운 말로 바꿔보면 : “성서는 상당히 세련됐다, 우리의 선입견과 상당히 다르게”.  그래서 알터는 “성서 원문이 오래되었고, 그 본문의 특징적인 서사 절차가 많은 면에서 현대의 글과 다르다고 해서, 성서 본문이 <세련되지> 못하다거나 단순할 것이라는 식의 무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p.43.)


10. 그런데 말이다, 만약 <그 당시 독자들>이 성서 저자들의 <그런 글들>을 싫어했다면? 그러니까, 당시 독자들(의 수준)이 당시 저자들만큼 <세련되지> 못했다면?  “이런 모호한 글 말고  미와 추, 하나님의 승과 악의 패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구분되는 그런 글을 쓰란 말이야!” 라고 항의 했다면? 이제 소개하려는 건, 내가 알터의 책을 읽다가 제일 <흥분>했던 대목이다. 알터는 그 당시 독자들의 <수준>이 이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  “우리가 고찰하는 현상을 보다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전제하에 좀 더 <과감한 추측>을 해보겠다.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보여주는 여러 무질서한 행태와 신적 계획[의 대립] 사이에는 <적절한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그런 적절한 긴장이 존재한다는]  이러한 의식은 <어떤 이야기들을 성서의 정경에 속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암묵적인 기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현재에는 고대의 히브리 문학 작품들 중 정경화되지 못하고 소실된 부분들에 대해서 <정보가 빈약[했었기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그나마 절제된 표현[평가]이다. 오히려 성서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힌트들은 정반대인 두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우선 열왕기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당장 [열왕기의 ] 내러티브상에서 <별로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은 내용>은, 「유다 왕 역대지략」과 (여기까지 페이지 64) (65)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을 참조[하면] 찾아낼 수 있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나온다]. [더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책들이 정통 민족 전승에서 제외되고 보존되지 못했던 것은 그것들이 왕궁의 역사였으며, 성격상 당파성을 띠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펼쳐지는지 알려주는 차원의 <[깊은] 통찰 없이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듯 기록하는 우를 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짧으면서 수수께끼 같은 암시가 민수기, 여호수아서, 사무엘서 등에 「야살의 책 」과 「여호와의 전쟁기 」에서 인용되는 것이 나온다. 「여호와의 전쟁기」는 전쟁의 주인공으로서 하나님이 함께한 승전의 기록들인 것 같고, 「야살의 책」은 두 군데의 인용문(수 10:13, 삼하 1:18~19)으로 판단해보자면 아마도 시가서로서 기적의 요소들을 갖춘 전쟁 서사시였을 것이다. 내가 감히 추측해보건대 이 두 책은 모두 너무나 전설적이거나 심지어 신화적이었고, 수긍할 만한 역사적 경험이 혼합된 재료가 충분한 평형추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그대로 따라가는> <직접적인 내러티브>에만 너무 치우쳤을 것이다.” (p.65). 놀랍다.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언급>은 많았을지 몰라도, 그 종교적인 언어에 깊은 <통찰>이 담겨있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을거라니! <할렐루야>,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같은 종교적인 언설 가득한 문서를 보며 “이 글엔 현실의 긴장이 결여돼 있어”라며 하며 퇴짜 놓을 수 있었던 2,3천년 전 그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후손들)이, 장르가 역사서가 아닌 복음서라고 해서, 과연 그런 <기준>을 배제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소위 사복음서 외에, 당시에 쓰여진 수많은 다른 복음서들이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 나 또한 추측해 보자면 - <부활>과 <회복>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독자(수신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인생과 신앙의 <아이러니와 역설>을, <저자(발신자)>가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가운데, 너무 <쉬운 답>, 너무 <쉬운 회복>을 제시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11. 알터의 책에는, 수 개월 동안 나를 애먹인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성서 내러티브의 창작자들 역시 다른 모든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픽션의 매개가 되는 유무형의 자원들을 탐구하는 데서 재미를 느꼈으며, 때로는 그 탐험 놀이를 하다가 예기치 않게 자신의 주제를 완벽히 포착해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 중 많은 부분을 놓치고 말 것이다.” (『성서의 이야기 기술』, p.83). 지난 몇 개월, 나는 이 글의 키워드는 “예기치 않게”(unexpectedly)라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마가의 <예기치 않은> 결말에 천착하고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단어에 <집착>했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예기치 않게”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 상태에서 어느 정도 분량이 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내 글이 점점 현학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떨떠름한 느낌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몇 개월만에, 오늘 원문을 다시 찾아 읽어 보았다. “If, however, we fail to see that the creators of biblical narrative were writers who, like writers elsewhere, took pleasure in exploring the formal and imaginative resources of their fictional medium, perhaps sometimes unexpectedly capturing the fullness of their subject in the play of exploration, we shall miss much that the biblical stories are meant to convey.” 오늘, 우리말 번역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저자의 강조점이 보였다. “바로 그”(=very)라는 단어였다.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살린 번역은, 밋밋한 “그 탐험 놀이를 하다가”가 아니라, 탄성 섞인 “바로(!) 그런 탐험 놀이를 하면서”일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자, 이런 <탐험 놀이>라는 핵심 개념이, 글 <전체>에 다양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미를 느꼈으며” - 당연히 탐험 놀이를 하는 과정 중에 경험하는 감정. “다른 모든 작가들” - 다들 그러한 탐험 놀이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 “성서의 내러티브 창작자들” – 역시 같은 놀이를 즐김. “예기치 않게” - 그러한 탐험 놀이 과정 중에 발생하는 순간 가운데 하나. “주제를 온전히 드러냄”(번역 수정) - 이러한 탐험 놀이 과정 중에 일어나는 클라이맥스). 이렇게 모든 것이, <문학적 탐험 놀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이런 시각에서 상기 알터의 글을 아주 적극적으로 의역 해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 “성서 저자들이, 성서의 이야기를 쓰면서,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고 문학적 탐험 놀이를 즐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즐거운 문학적 탐구 놀이의 <당연한 결과물>인 성서 이야기 속 <문학적 층위>를 <당연히>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손실>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위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므나헴 페리(Menakhem Perry)와 마이어 스턴버그(Meir Sternberg )는 자신들의 논문「아이러니로 본 다윗 왕 」을 두고 펼쳐졌던 논쟁을 마무리 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한다. “성서도 문학으로 본다면, 문학적 분석의 틀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실질적이든 상상에 의한 것이든 모든 다른 접근법은 쓸데없는 가설을 세우게 하고 실제 성서 이야기가 지닌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성서의 이야기 기술』, p.39). 성서 이야기가 문학이라면, <문학적 층위가 빠진> 읽기와 비평은, 사실 무엇을 빠트린 게 아니다. 아무런 시작을 하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베르너 켈버와 데일 마틴의 접근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해설을 듣다보면, 문학적 층위에 기대지 않고도, 이야기를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있다는 신념이 읽힌다. 그들은,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 그런 설명을 통해 의문이 <풀린다고> 믿지만, 나는 그들의 설명 속에서는 “이야기가 지닌 문학적 힘”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답변의 가장 큰 특징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 역사와 정치에 대한 연구가 심화된다면, 그들이 제시하는 답변은 더 구체화 되고, 더 정교해질 수는 있겠지만, <다른 울림, 더 깊은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예루살렘 교회 쪽 신학을 효과적으로 논박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와 긴밀한 관련 맺고 있는) 제자들의 회복 장면을 누락 시켰다는 설명(켈버)과, 메시아가 곧 도래할 것이기에 굳이 과거지사가 된 부활(및 그와 연관된 회복 장면)을 굳이 포함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설명(마틴)은, 논리적인 분석으로 도출된 것이기에,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십 년 후 마가복음의 결론을 다시 읽어도, <지금 보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나는 켈버와 마틴이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12. 지금 우리는 내러티브가(街)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히브리 성서의 권위자 로버트 알터가 우리와 동행해 줬는데, 이제 나머지 시간은 가이드를 바꿔, 마가복음의 권위자 데이빗 로즈의 안내를 좀 받아볼까 한다. (알겠지만, 로즈는 우리와 구면이다). 그가 (두 명의 다른 저자와 함께) 쓴『이야기 마가 : 복음서 내러티브 개론』은 “내러티브 비평의 고전”(윤철원 교수), “신약 성경 복음서들을 '문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가장 완벽한 책” (윌리암 G. 도티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던 대목을 소개하면 : “우리는 이 이야기가 하나의 <도덕적인 교훈>을 주거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 정도로만 보이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 [만약] 이야기가 어떤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독자들이 그 사상을 깨달은 후에는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다) 큰 오산이다.” (『이야기 마가』,p.36. 내용이 너무 좋아서 찾아본 원문은 다음과 같음. “A story is not just a vehicle for an idea, such that the story can be discarded once one has the idea.” 나 같았으면 역자가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다”로 번역한 ‘be discarded’를 <버리다>, <폐기하다>와 같이 더 <직접적>인 단어로 번역했을 것 같다. 만약 <쓸모없음>이란 표현을 꼭 사용해야만 한다면, <쓸모없어 더 이상 안 본다>처럼 번역함으로써, 결과적인 측면 즉, <이제는 더 이상 안 본다>는 사실을 강조했을 것 같다.) <이야기라는 것은, (한번 파악하면 더 이상 보지 않는, 보지 않아도 되는) 정보나 매뉴얼과 달리, (한번 읽은 뒤로도) 언제까지고 계속 다시 찾게 되는 그 무엇이다>라는 설명은 이야기에 대한 본격적인 정의라기보다는, 이야기의 여러 특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특성>이, 이야기의 <아주 깊숙한 곳>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를 건드리고> 있는 것일지도.) 지금 자신의 <본질>을 <최종적>으로(once and for all) <선언할 수 없다>는 게, 즉 언제까지나, 무언가 <지금은 다 드러나지 않은 게> 있다는 게, 이야기와 나의 <공통점>이다. 지난번의 누추함과 어리석음을 <가뿐히> 뛰어넘는 이번의 어이없는 내 발걸음. 나는 <그런 나>를 당혹감 속에 마주한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확신한다, 나는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멀리 벗어날 수> 있고,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깊이 떨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러니, <이런 나>를 <이야기>가 과연 <따라올> 수 있을까. 내 껌껌한 <심연>을 목격하면, 이야기도 <할 말>을 <잃지> 않을까. 아니다. 교리나 이론은 나를 버거워할 수 있어도 <이야기>는 나를 놓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이유?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빈 공간>도 그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러티브라는 것이 (...) 손을 대보면 겉은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그 안에는 <빈 공간>이 아주 많다.” (『이야기 마가』,p.26). 로즈는 이야기 속 이런 빈 공간들이 “긴장감이나 혼동 혹은 열려진 끝을 만들기 위한 수사법적인 전략” 때문에 생긴 거라고 설명하는데 (p.28), 이 목록에 <당신과 나의 누추함을 온전히 담기 위해서> 혹은 <어제보다 더 멀리 벗어난 우리와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첨가하더라도 로즈의 논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빈 공간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빈 공간 전혀 없는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C.S.루이스는 어디선가, 단어의 쓸모는, 그 모호함에 있다는 말을 했다. (단어는 모호할 수록 더 많은 유용성을 갖게 된다는 취지의 말이다.) 너무나 정확하게 규정된 단어의 의미는, 단어가 지칭하는 그 대상과 상황을 조금만 벗어나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이 될테니 말이다. (이야기의 경우도 단어의 경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하려는 바와 방법이 너무나 정확하여, 조금만 틀어져도, 다른 누구의 삶에도 포개지지 않는, 오직 저자가 상정한 한 사람의 독자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기괴한 저술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더구나, 그 한 명의 독자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면!). 여기서 잠시, 이야기 속 빈 공간이 하는 역할을 한 편의 시(詩)를 통해 살펴보면: 1941년 서정주는 자신의 첫 시집『화사집(花蛇集)』에 실린 <자화상(自畵像) 〉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라고 선언했다.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는 문장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나머지 ‘이할(二割)의 내용’을 <밝히지 않은> 데 있다. 왜 그럴까. 만약 서정주가 ‘이할’의 내용마저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면, 이미 밝힌 ‘팔할’의 내용(바람)과 더불어, 한 남자를 키운 것이 십 할, 즉 백퍼센트 밝혀지는 아주 희한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삶에 ‘알 수 없(다)는 것’이 들어설 여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그런 상황 말이다. ‘십 할, 백퍼센트, 남김없이’ 설명해버릴 수 있는 것이 당신의 삶이라면? 그런게 당신의 사랑이고, 그런게 당신의 배신이라면? 아니, 그런게,  당신의 어두움이라면? 누군가 나에게, 너에게는 더 이상 미지의 영역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조금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 꽉 막혀있는 ‘계량(計量)의 언어’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당신과 나의 삶을 넉넉히 잡아넣어 둘 빈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미당(未堂)이, 팔레스타인의 마가라는 한 젊은 작가를 만났다면, 둘은 어떤 말을 주고 받았을까. 어쩌면 “당신의 복음서에도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군요”. 그러면 “선생님의 이 할은 바람과도 경쟁하지 않더군요. 이 할이 욕심을 부려 자신도 무언가로 채우려 했다면, 팔 할의 바람은 멈추고 말았겠죠?”



13.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마가복음의 제자들은 회복되지 못했다> 라고 단정한 베르너 켈버의 주장에 <당황>하여 시작된 내 독서 여정은, 주로 <왜 마가는 그렇게 복음서를 끝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몇몇 학자의 답을 들어봤고, 그 답이 왜 충분하지 않은지 살폈다.) 그런데 -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겠지만 - 살다보면 종종 문제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답을 찾고, 그래서 문제가 해결(solve)되는 경우 말고, 풀어야 할, 답을 찾아야 할 <문제 자체>가 해소(disslove)되는 경험 말이다. 종종 그런 해소는, 질문이 잘못됐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왜 마가는 그렇게 복음서를 끝냈나?>라는 질문은 이미 <가치 판단>이 들어간 질문이다. 위와 같이 묻는다는 것은 마가복음의 결말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상하다>, <무언가 빠져있다>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다고 믿는 것에 대해 우리는 왜,라고 묻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제, 겸손히 물어야 할 질문은 이렇다 : “본문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이상하다고 판정할 때 그건 <누구에게> 그렇다는 것인가? 우리인가, 아니면 1세기 독자들인가?” (지금 이 질문을 할 때 나는 정확하게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누구의 정의인가? 어떤 합리성인가?(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상상을 해본다. 매킨타이어가 마가복음의 결말과 관련한 책을 한 권 썼다면, 그 책 제목은 『누구에게 불충분한가? 어떤 자연스러움인가?』 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마가의 결말에 대한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같은 마가의 결론을 두고도, 우리와는 <다른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질문을 들어보기 위해선, 1세기 독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내 글의 마지막 방문지이다.


14.  군데군데 횃불을 밝힌 동굴 속일 수도 있고,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의 집의 거실일 수도 있겠다. 마을 장로가 <빽>을 써서 어렵게 구한 복음서였고,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다들 숨을 죽인 채 오늘 낭독을 맡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낭독자는 머리가 좀 벗겨진 50대 초반의 사내였는데 좀 긴장한 기색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청중은 곧 낭독자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주일 설교 시간에, 어떡하다보니 마가복음 차례가 돌아왔을 때, 서너 절만을 <발췌>하여, 띄엄띄엄 읽는 우리 현대인과 달리, 낭독자는 두루마리 전체를 한번에 다 읽었다. (오늘 낭독은 1시간 27분이 소요되었다). 이럴 경우, 현대인들은 잘 경험하지 못하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현상이 벌어진다. 즉, 낭독자가 <마지막 센텐스>의 낭독을 마칠 때, 그 공간에는, 대략 1시간 30분 전에 읽었던 <첫 센텐스의 여운>도 여전히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가복음은 아주 천천히 읽어도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즉, 1세기 청중들은, 한자리에서, 첫 센텐스와 마지막 센텐스를 <함께> 경험하게 되기에, 그들의 귓가에는 “복음의 시작이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라는 말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라는 말이 동시에 울린다. 그러기에, 현대 독자들에겐 감추어져 있기 십상인 다음과 같은 <전체 구조>가 그들에겐 보인다 : 오디오(마가복음 처음 네 절에 등장하는 오디오와 관련된 단어들을 뽑아보면: “복음”, “외침”, “소리”, “선포”)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그리고 점점 볼륨이 커질 것으로 기대되는 이야기는, 묵음(默音)으로 끝난다. 복음서라는 스피커를 통해, 부활과 용서와 회복과 새로운 파송에 대한 강력한 데시벨(dB)의 오디오가 울려나올 것을 기대하던 청중들은 이런 갑작스런 묵음 앞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놀랐을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① 어떻게 음[音]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묵음(默音)과 침묵을 사용할 생각을 했을까? (이야기의 구조와 표현 방법) ② 이 가시지 않는 설렘의 원인은 무엇이지? 이야기를 들은지 이 틀이 지났는데도, 내가 복음의 의미에 대해 계속 자문하고 있다니,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야기의 영향력). 나는 청중들이 분명 놀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그런 결말에 놀란 이유는, 어이없거나 실망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미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가 – 즉, 부활, 고난, 결단, 인내, 소망, 회복 등에 대한 이야기가 – 이상하게 오늘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지점까지, 깊이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웬만해서는 그 무엇도 들어오지 못하는 그들의 단단하고, 두려움 많고, 게으른 삶 속으로, 그들의 누추한 이야기 속으로, 뚫고 들어와 박힌 마가의 이야기를, 그들은 다시 뽑을 수 없어서 놀랐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대신 - 그래서 이야기가 교훈(敎訓)으로 전락(轉落)하지 않고- 빈 공간을 통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독자들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방법을 작가(作家) 마가가 <발견>한 것이라면, 이제 우리가 마가복음 앞에서 물어야 할 제대로 된 질문은, <왜 마가는 그렇게 끝냈나?>가 아니라 <어떻게 마가가 그렇게 안 끝냈을 수 있었겠나?>일 것이다.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처럼, 마가는, 가서 자기의 모든 센텐스를 다 팔아, 침묵이라는 그 클로징을 샀다.


2019.9.29.
몬트레이에서 신동주



서플먼트


1) 내가 신학 비전문가라는 사실이, 이번 내 글의 성격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인 마가복음 연구와는 거리가 먼 글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빈 공간>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빈 구멍>이 많은 글이다. 글의 주제는 제자들의 회복 및 복음서의 독특한 끝맺음으로 한정 됐고, 그 한정된 주제를 다루어나가는 과정도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을 따랐다. 한편, 나는 마가복음이 16장 8절에서 끝난다고 보고 이야기를 전개했다. 성경 난외주에도 나오듯이, 권위를 인정 받는 대다수의 고대 사본을 보면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난다.『이야기 마가 : 복음서 내러티브 개론』의 저자 데이빗 로즈에 따르면 마가복음의 “원래의 끝[16:8]은 마가의 이야기에 아주 강력한 피날레를 이루며, 마가의 이야기 전체를 해석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p.40) 그렇다고 모든 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 같은 경우에는 : “어떤 사람은 마가가 16:8에서 끝낼 계획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하나님 나라 신약성경』(톰 라이트 지음, IVP), ‘서문’ 중에서). 내 미적 기준에서 보면, 16:8 뒤에 16:9~20을 덧붙이는 건, 멋진 수트를 입은 뒤 그 위에 추리닝을 걸치는 것과 흡사. 한편, 인용문까지 포함하여 내 모든 글에서, 홑화살괄호 < >는 나의 개인적인 강조를 표시.  

 2) 11번에 등장하는 서정주의 <자화상> 관련 글은 2013년에 내가 쓴 『당신을 만든 단어들』의 제1장 「당신의 8할」에서 발췌했다. 원문은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 <거짓말을 배우는 곳> ( https://holyfat.blogspot.com )에서 확인 가능하다.

3) 책을 읽다가 웃음이 터진 적도 한 번 있었다.『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에서 베르너 켈버는 기본적으로 마가복음을 “극적인 플롯으로 구성된 예수의 여행 이야기”로 보면서(p.7), 저자 마가를 <장소, 지리, 길, 여행>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인물로 묘사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켈버는,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 예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도 빼먹지 않고 <구체적인 장소>를 함께 언급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가복음 1:9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등장하실 때부터 ‘오신’ 분, 곧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신 분으로 소개된다” (p.22).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마가에게 지리성애자(地理性愛者)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런데 레이먼드 브라운의 『신약개론』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 거라사 지방의 광인 귀신 축출 사건을 다루는 대목이었다. “돼지가 제방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 빠지는 마가의 장면에서 지리적인 문제가 있다. 거라사는 갈릴리 바다에서 45킬로미터 위에 위치한 지역이다. 또 거라사가 아닌 가다로 읽어도 바다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신약개론』,p.221, 각주 17번). 와우! 45킬로미터를 내리 달리는 돼지떼라니! 상상만해도 장관이고 웃음이 난다. 지리성애자 마가가 저지른 지리 관련 실수를 이렇게 차분하게 지적해주는 노학자라니! 이번에 글을 쓰면서 레이먼드 브라운을 몇 차례 인용했다. 그의 글이라고는『신약개론』(기독교문서선교회)을 읽은 게 전부이지만, 차근차근 근거를 제시해가며 논지를 펼쳐나가는 그의 글쓰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 글이 주제로 삼았던 <제자들의 실패 및 회복>과 관련해서 그의 입장을 들어보면 :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과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그들이 도망쳤음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마가가 박해 받고 <실패한 공동체>에게 이야기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이것은 로마의 박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10장 42절은 이방인을 통치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에 대하여 강하게 비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p.257) “수많은 학자들은 (...) 사도[제자]들이 고난의 과정에서 실패한 이후, 전혀 회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마가가]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이 복음서를 해석한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읽어보면 그와 같은 부정적 해석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들이[제자들이] 계속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은, 단지 모든 사람의 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무능력함[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은 그들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실제로 그들을 포기하셨는가? 14장 28절과 16장 7절은 예수님이 6장 7-13절에서 그들을 내보낼 때 생각하고 있었던 역할을 그들에게 다시금 부여하고자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하지 않는가?” (p.262) “제자들과 관련하여 베스트(E. Best)는, 제자들의 실패 모습을 그린 마가[복음서]는, [소위 예루살렘 교회 선자자들의 ] 거짓 입장에 반대하는 <논쟁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실패를 경험한 마가복음 수신자들>에게 <목회의 본보기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 독자들은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p.250). 레이몬드를 더 읽고 싶어서『성서에 대한 101가지 질문과 응답』(레이먼드 브라운, 1990)을 샀다. 일단, 내가 평소 무척 궁금해하던 질문부터 확인했다. 70번에 그 질문이 있었다. 질문은 이렇다. “Q.70.예수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의 답변은 이렇게 시작된다. “저는 평소 사람들에게 그들이 물었던 질문을 재진술해달라는 요청을 거의 하지 않는데 (to rephrase their question), 지금은 그게 필요한 드문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질문이 제기된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intelligible) 답변을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p.97). 나는 평소, 한번 한 질문을 재진술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짜증이 났는데, 이상하게 이번 브라운의 요청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4) 위에서 언급했던 <현학적>인 글 하나를 기록 차원에서 첨부하면 다음과 같다: 로버트 알터가 『성서의 이야기 기술』에서 말하는 “유무형의 자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말놀이(word-play), 아이러니와 역설,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놓은 등장 인물들의 동기, 달라지는 사건의 진행 속도나 문체 등이 거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왜 알터는 “예기치 않게 자신의 주제를 완벽히 포착”하는 순간이 있음을 모르면, “성서의 이야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 중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지난 몇 개월 동안 화두(話頭)로 삼은 내 질문은 이러했다 :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예기치 않은 발견을 허락하는 신(神)은 어떠한 신인가?” 서너 달이 흘렀지만 여전히 잡힐락 말락, 알 듯 말 듯.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보았다 : “예기치 않은 발견이 <필요 없다고> 하는 신은 어떠한 신인가?” 자기(神)에 대한 계시가, 인간이 예기(豫期)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표현 된다고>고 생각하는 신일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인간이 충분히 예기할 수 있는 신의 계시, 섭리, 심판, 구원. (데이빗 로즈의 용어를 빌려 표현해보면 “빈 공간” 없는 계시. 서정주의 용어로 말한다면 <십 할> 파악되는 계시. C.S.루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경이(驚異)”가 빠진 계시.) 도대체 나를 <넘어서는 게 없는> 계시라니! 그런 계시의 신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는 너무 작다. 다시 질문을 조금 바꿔 보았다 : “예기치 않은 발견을 <허락하지 않는> 신은 어떠한 신일까?” 인간의 예기만으로는 자신의 계시가 충분히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이 <예기할 수 있는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는, 딱 그 정도로만 <자기 곁을 내주는> 신이다. 더 깊이 사귀고 싶어도 그런 틈을 보여주지 않는, 끝까지 우리를 <손님> 취급하는 신. 그러자 조금 이해될 것도 같았다. 성서의 이야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 중 많은 부분을 <놓치고 산다>는 것은, 손님 취급 당하는 삶(성서해석)에 만족한다는 것, 더 이상 경이가 없는 삶(성서해석)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 같았다.

5) 가끔 내 나이를 실감할 때가 있다. 이번에 미국에 와서, 수년  전에 이미 읽었던『고통의 문제』 (C.S.루이스, 홍성사)를 다시 읽는데, 연필로 밑줄 친 이런 구절이 나왔다. “또 모든 기록을 볼 때, 그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