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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7일

입교식

오늘 내가 다니는 루터중앙교회에 입교를 했다. 이제 정식 교인이 되었다. 투표권도 있고, 짐도 같이 지는 거란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이 무겁게 다가왔다. 입교식을 거행하기 위해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내 뒤에서,누군가의 손이 슬며시 다가와, 내 가죽재킷의 '칼라'를 내리는 것이었다...! 휙 돌아보면 상대방이 놀랄 거 같아 천천히 뒤를 돌아봤더니 노란 한복을 입으신,어머님 연배의 권사님 한 분이 인자한 미소지으며 앉아계셨다...권사님을 위해...칼라를 다시 올리지않았다... 젊은여성이 내렸다면...(여기까지)

2016년 3월 19일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미메시스)를 읽고.

1. < 혼밥생활자의 책장>이라는 팟캐스트를 제작하는 후배 K가 선배,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 30분이면 다 봐요, 라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빨려들어가서 30분만에 다 봤다. 2012년 「보도이(BoDoi)」 선정 〈올해 최고의 만화〉와「그래픽노블 리포터」선정 〈2012년 최고의 그래픽노블〉로 뽑힐만 했다. 다비드라는 남자가 두 딸과 두 번째 아내를 남겨놓고 암에 걸려 죽는 이야기다.
2. 나는 마지막 컷이 제일 좋았다. 방금 막 숨을 거둔 다비드가,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컷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약물 치료 받는, 점점 말라가서 뼈만 앙상한 다비드가 아니라 처음으로 <다비드의 원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에 왜 그렇게 끌렸는지 모르겠다. 아주 젊은 얼굴도 아니었다. 하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얼굴에선 내 부러움을 자극하는 그 어떤 싱그러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작가는 다비드의 이 <진짜 모습>을 - 이 그래픽노블 한 권을 작화하는 내내 - 이미 <보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도 잊지 않고. 혹시 제일 먼저 그리지는 않았을까? C.S.루이스는 『영광의 무게』에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나 여신이 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더없이 우둔하고 지루한 사람이라도 언젠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미래의 그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무릎 꿇고 경배하고 싶어질 존재가 되거나, 지금으로선 악몽에서나 만날 만한 소름끼치고 타락한 존재가 되거나. (...)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고, 같이 일하고, 결혼하고,무시하고,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거나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입니다." 마지막 컷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루이스가 떠올랐는지, 루이스를 읽었기에 마지막 컷이 그렇게 좋았는지, 잘 모르겠다.
2016.3.19.

2016년 3월 10일

알파고

1. 이세돌과 겨루는 알파고를 개발한 건  한국의 한 영세한 스타트업이었다. 올해 41세의 민기에게 알파고는 마지막 기회였다. 민기는 7년 전 연주와 결혼 했고 5살 된 딸이 있었다. 전세를 살고, 갚아야 할 대출금이 있고, 조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지인의 소개로 어렵게 이세돌을 섭외할 수 있었다. 한 판이라도 이겨야 했다. 알파고는, 마지막 기회였다.

2. 시합이 시작됐다. 후배가 불러주는 알파고의 착점이 리시버를 통해 민기의 귀에 들려왔다. 다섯 수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는 후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기 선배, 작동을 안 해요. 알파고가 전혀 작동을 안 해요".

3. 바둑알을 쥔 민기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이세돌이 의아하다는 듯 민기를 바라봤다.

4. 할아버지가 깍아주시던 참외, 할아버지와 두던 오목,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두려워 하는 곳으로 가야한다, 민기아. 두려운 곳으로 가서 집을 만들어야 해 ". 바둑알을 쥔 민기의 손이 천천히 좌변 중앙 쪽으로 향했다.

5. 대국이 끝났다. 알파고를 설치해 놓았던 대국장 뒷편 방에서 아내가 후배와 나왔다. 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선 말없이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여보..." 말을 잇지 못하는 여자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두 부부 옆으로 청색 수트를 입은 이세돌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대국장을 취재하던 그날 언론은 중소업체에서 개발한 알파고가 세계 챔피온을 상대로 거둔 1승을 대서특필했다.

2016년 3월 9일

『칼 바르트』(에버하르트 부쉬 지음, 복 있는 사람)를 읽고.

바르트의 조교였던 에버하르트 부쉬가 지은 <칼 바르트>를 막 다 읽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바르트가 씨름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문제>를 알아야 하는데, 935쪽 되는 이 책에서 부쉬는 바르트가 비판하는, 다른 진영의 학자 불트만 등이 했던 고민을, 일절 소개하지 않고, 그저 바르트의 일방적인, 선언적인 글만을 소개. (내가 평전의 저자라면, 바르트의 적수들이 했던 고민들을, 최소 3백 페이지는 할애해서, 최대한 매력적으로 소개했을 거 같다. 그게 <칼 바르트>를 살리는 길인데...) 몹시 지루했던 평전은 그런데, 바르트 서거 1년 전부터 갑자기 내 마음을 사로잡음. 평생 학문적으로 다투고 싸웠던 , 임종을 앞둔 브룬너에게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바르트는 친구에게 부탁. 그에게 말해주시오...내가 그에게 맞서 '아니야! '라고 외쳐야 했던 시간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고. 지금 우리는 위대하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롭게 '그래'라고 말해주셔서 그 덕분에 살고 있는 거라고. 이 말은 브룬너가 살아서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p.820) 바르트의 다음 고백이 나를 특히 부끄럽게 했다. "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내가 해야 할 마지막 말은 '은총'과 같은 어떤 개념어가 아니라 하나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은총이다. " (p.845)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궁극의 신학적 개념 하나 찾아헤매던 나는....갑자기 무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