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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0일

『아버지의 통곡』(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 양무리서원)을 읽고.

1. 월터스토프는 미국 캘빈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자이다. 1983년 여름,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월터스토프 씨인가요?" - "네" - "에릭의 아버지 되십니까?" - "네". 이 책은 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등산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일 년 뒤 아들의 묘지를 찾을 때까지 그의 삶에, 그의 마음 속에,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2. <구약>에는 내가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구절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직접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고 하고, 법궤를 만지면 죽는다고 하고 할 때면 ,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거룩이 중요해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할 수 있을까. "내가 죽고 싶지 않기에 정면으로 당신을 보지 않고, 죽지 않고 싶어 법궤를 만지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마음이었다. "힘 없는 게 죄지,뭐"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통곡』을 읽다가 처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는 게 <약자의 설움>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다음 대목을 읽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나는 늘 이 말이 아무도 그분의 빛나는 영광을 보고는 살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한 친구는 내게 어쩌면 이 말이 아무도 그 분의 슬픔을 보고는 살 수가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p.92).

3. 내가 하나님을 크게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가끔 하나님이 너무 <폼을 잡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슬픔을 자기 마음에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담고> 계신 하나님의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 명령은. 아들아, 나를 정면으로 보지마. 나를 만지지 마. 내 슬픔은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단다, 였다. 이 경고 들을 때 나 더 이상 기분 상하지 않는다. 괜히 죄송할 뿐.

2016.4.20.

p.s.
(1) 원서의 제목은 『Lament for a Son』이다. 나는 1992년에 '양무리서원'에서 번역한 책으로 읽었다. (2014년에 출판사 '좋은씨앗'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오기도 했다.) 내가 읽은 양무리서원판에는 손봉호 교수의 추천사가 붙어 있다. 그 추천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 몇 년 전에 나는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개최되었던 기독교 학자들의 모임에서 그를 만났고, 그의 예리한 판단력과 그리스도인다운 겸손과 부드러움, 그리고 철저히 일관성 있는 행동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굶주리는데, 그리스도인이 관광같은 것을 즐길 수 없다해서, 그는 그 나라의 유명한 빅토리아 폭포 관광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같이 행동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

(2) "월터스토프 부부는 아들 에릭을 기리기 위해 작곡가 캐리 랫클리프에게 자기들이 주로 성경에서 따와 만든 가사에 맞추어 진혼곡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다. <레퀴엠 : 에릭 월터스토프를 기리며>는 1986년 5월 18일 미국 미시간 주의 그랜드래피즈에서 처음 연주 되었다. " (『아버지의 통곡』, '부록' 중에서).

2016년 4월 16일

나는 아주 형식적인 교회에 다닌다

1. 왜 루터 교회로 정했어요?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때마다 나는, 나이드니까 점점 예전(禮典,liturgy)에 끌려서요. 예전이 살아있는 교회를 다니고 싶었어요, 라고 대답을 한다. 그러면 아,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거요? 라는 후속 질문이 들어오고 나는 그와 함께 웃는다. 맞아요!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거요! 매주 성찬도 하고요.

2. 나의 스승(c.s.lewis)께서는, 인간의 <육체>에 대해 여러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셨는데, 지금 까페에 있는 관계로 그냥 기억에 의지해서, 내가 자주 떠올리는 말씀 한두 개 소개하면: 사람들은 자주 육체가 정신을 유혹하고 넘어뜨린다고 생각하는데 , 우리를 넘어뜨리는 건 사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스승님 왈, 죄를 짓는 건 정신이지 육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많은 경우 육체가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피곤하다며 “이제 그만 자자”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던 걱정>, <하던 원망>을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육체가 없었다면 - 육체의 그 한계가 없었다면 - 우리는 일 주일 내내  <하던 걱정>을 하며, 잠시의 쉼도 없이 <하던 원망>을 하며, 보낼 수도 있었다. (특히, 나! -.-) 주기적으로 허기지고, 피곤하고, 졸리다는 건, 그래서 정신이 육체에 굴복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큰 다행이고 유익인가.  

3. 스승께서는 이런 비슷한 말씀도 하셨다.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지! 무릎 꾾고 기도하는 유익을 모르니 말이야."  이 말씀을 하시는 스승께서는 결코, 하나님은 무릎 끓고 드리는 기도만 받으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게 아니다. 설마 우리 스승께서 진심으로 기도할 때, 자세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시겠는가. 스승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존재인 우리는,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보다 많이. 그렇기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더 쉽게> 알 수 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은 형식을 따지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셔"라는 말에 속는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육체와 형식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잊고 무시하는지. 

4. 어떤 강렬한 <느낌>이 와야만 뭔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거라는 <오래된 오해>가 가장 큰 걸림돌인 거 같다. 그래서 별다른 느낌 없이 지난 주와 똑같은 예전 <형식>을 따라 할 때 우리는 자주 우리의 행동이 <가식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느낌 없는 형식은 가식이 아니다>. 가식은 느낌 없는 형식이 아니라, 자기가 실제 믿지 않는 걸 믿는 것처럼 보이려는 형식이다. 자기가 믿는 바를 - 느낌이 안 와도 -  표현하고 행하는 건 훌륭한 일이고 훌륭한 믿음이다. (오, 주여, 우리를 두 번째 가식에서 구해주소서! 느낌 없는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기뻐 받으시는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

5. 다음 순서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합창 순서였다. (나는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었다). 줄 맞춰 입장한 가족들의 노래가 시작 됐다. 오늘 합창을 위해 '평화의 나무 합창단'이 한 달반 동안 가족들과 미리 만나 함께 노래 연습을 했다. 도종환 시인의 화인 ‘화인(火印)’ 을 합창 했다. 처음이었다. 세월호 집회에서 가족들에게 이런 <형식>이 주어진 것은. 너무나 큰 슬픔과 분노를 표현할 방법 없던 가족들에게, 자유 발언대라는 <무형식>과는 다른, 슬픔과 염원을 차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런 합창이란 형식이 주어진 것은. 합창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슬픔이 있었지만, 진정성 있는 가사와 선율 안에서,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쉼을 얻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한 소절, 한 소절 노래를 부르는 가족들을 보면서, 합창이라는 이 미리 짜여진 형식을 준비한 분들에게 깊이 깊이 감사드렸다.   

6. 나는 내일도 무척 <형식적인 교회>에 가서 무척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것이다. 종종 사랑과 감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가끔 표현할 방법 없는 종류와 크기의 감정 때문에 <낙심하는> 나에게, 여전히 예전과 형식이 살아있는 교회에 다닌다는 건 큰 힘이고 격려가 된다. 참, 천국에선 형식이 없어질까? 그때는 <진심>과 <마음의 중심>만 남을까? 나는 하늘나라에서도 형식은 존재할 거라고 본다. 우리는 거기서도 여전히 육체적인 존재일테니. 다만, 이런 상상은 해 본다. 어쩌면 그때는 <느낌>과 <형식>이 하나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느낌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온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2016.4.16.

p.s.
지금 내가 출석하는 루터교회의 예전을 말할 때 내가 꼭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촛불점화, 기도송, 영광송, 성찬식을 할 때 교회 뒷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2016년 4월 4일

『신학용어사전』(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그리심)을 읽고.

1. "어떤 교리에 관한 진짜 비판은 그 교리의 역사다"라는 경구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경구다. 진짜 이 경구에 동의한다. 교리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종종 <지금 내가 꽂혀있는 이 교리>가 사실은 <간신히 합의>에 이른 교리라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나는 낙심된다기 보다는 기쁘다. 하나님은 교리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묵상할 수 있게 돼서 말이다. 이렇게 교리를 역사적으로 파들어가보는 지난한 작업을 후스토 곤잘레스는 <수백 개>의 <신학 용어들>을 두고 수행했다. (역사신학을 전공해서 가능했으리!) 곤잘레스의 『신학용어사전』을 읽으며 신학 용어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수 백번 만났...(오바 같다 -.-) "나의 신학 수업 첫 주는 흥분으로 시작되었다가 좌절로 끝이 났다. (...) 용어들은 항상 예상했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루터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을 시작했지만 루터파(Lutheranism)는 개혁파(Reformed)가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 (곤잘레스, 『신학용어사전』 '들어가는 말' 중에서).

2. 곤잘레스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신학 용어 약 300개(A~Z)를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A 항목에 나오는 '적그리스도(Antichrist)' 라는 용어를 읽을 때 나는 알게 됐다. 아, 내가 이 책을, 이 사전을, 끝까지 읽겠구나! (좀 유치해보이는 용어에서 감명 받은 거 같아 좀 민망하다.) 곤잘레스는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적그리스도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 적그리스도.신약성경에 5번만 나타나는 용어로 요한일서에 4번, 요한이서에 1번 나온다.그러나 기독교 종말론(Eschatology)에서는 매우 자주 논의되는 주제이다". 딱 두 줄이었지만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요한계시록에는 안 나오는구나. 당근 나올 줄 알았는데... -.- 그리고 이 용어를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하던 곤잘레스는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 이 모든 것들과 관련하여 지적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요한서신에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는 최후의 적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전부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요한일서 2장 18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으니' " 그래서 나는 또 확실히 알게 됐다. 적그리스도는 복수(複數)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 예상은 다음 구절에서도 또 한 번 깨졌다. " 한편 그러한 악은 단순히 요란스럽게 참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진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유사한 존재로 나타나며,이를 통해 기만하는 모든 세력들의 토대를 놓는다." (이 대목 읽을 때 목사 네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이렇게 적용해도 되는 건가, 혼자 자문했다.계속 자문 중.)

3. 하나 뭐니 뭐니 해도 역사신학자로서의 곤잘레스의 장기는 성찬 , 삼위일체 , 성육신 , 필리오케 등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었던 용어들을 소개할 때였다. 요즘 루터 교회를 출석하기에 '성찬' (Eucharist)을 주의 깊게 보았는데 흥미롭고 유익했다. 일단, 평신도에겐 포도주를 주지 않고 빵만 주는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알고- 나 혼자 책 앞에서- 충격에 휩싸였다.(평신도는 더 경건해서, 성직자와 달리, 피 없이 살만 먹어도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혼자서 궁시렁궁시렁...-.- ). 초기 성찬은 "그의 나라에서 있을 최종 연회를 고대" 했기에 "기뻐"하는 시간이었다는 사실, "성찬식이 장례식 부위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중세 초기"라는 사실 등을 새로 알게 됐다. 화체설,실제적 임재설, 영적 임재설 등을 설명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예상하지도 못했고 원하지도 않았던 하나의 결과는 수많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성찬이 매우 드물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전 형식의 글 속에, 이런 역설과 아이러니까지 빼놓지 않고 다 버무릴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4. 내가 특히 지적 쾌감을 느낄 때는 바로 그런 때였다. 역사학자로서 곤잘레스가, 큰 맥락이나 흐름에 대해 한마디 툭 코멘트 할 때. 논쟁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나올 때. "2세기 말엽까지 그리고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점차 예수에게보다는 마리아(Mary)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동정녀 탄생). "의미심장하게도, 2세기에 일어났던 동정녀 탄생이라는 주제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예수가 처녀에게서 탄생하였다는 생각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탄생했다는 개념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믿기가 어렵고 거북스러웠던 것은 처녀가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황송하옵게도 여자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셨고 아기로 나셨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현재 사도신경의 전신인 고대 로마 상징(Old Roman Symbol)은 예수에게 인간 아버지가 있다고 주장하던 자들에게 반대해서가 아니라, 예수가 탄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고백된 것이다". (동정녀, 한 번 더 -.- ). "이러한 근거에서 최근의 많은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권위'(authority)에 관한 논의보다 해석학에 초점을 둔다 " (성경). "의미심장하게도 전반적으로 헬라 문화권 교회의 절대 다수는 휘포스타시스를 선호했고, 프로소폰이라는 용어를 거절했다." (인격, 위격)." 기독교가 처음 시작되던 때부터 기독교회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다루어야만 했다" (해벌 解罰)

5. 마지막으로 '거룩한 변화'(Transignification)라는 용어를 보자.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1965년 교황 바울 6세는 자신의 교서 '미스테리움 피데이'(Mysterium Fidei)에서 거룩한 변화설을 이단으로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이에 대항하여 중요한 보류(coveat)를 선언하였다" (p.264). 『신학용어사전』는 내가 태어나서 완독한 최초의 사전임과 동시에,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비문과 오탈자가 제일 많은 책이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읽으며 무척 많이 배운 이 책에 대해서, 절판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으나,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추천에 있어서만큼은, 중요한 보류(coveat)를 선언하....-.-

2016.4.4.

* 요즘도 책을 읽다가 곤잘레스의 이름이 나오면 반갑다. 제일 최근에 그를 다시 만난 건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 (앤서니 C. 티슬턴 지음, 새물결플러스)을 읽던 때였다. "역시 곤잘레스야!"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던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곤잘레스는 예컨대 기독교의 창조론이 처음 세상의 기원에 대한 물음을 묻는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생명과 실존에 대한 감사에서, 유한성과 피조성과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에 대한 인간의 자각에서, 그리고 인간의 선물과 세상의 선함에 대한 그분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려는 욕구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p.40).

2021. 4. 4.

** 오늘 쓴 서평을 처음 페북에 올린 때는 2016.4.4. 그후 2018.4.4 에 수정본 올림. 그리고 2021. 4.4 오늘 재수정본 올림. 내게 4월4일은 곤잘레스의 날. 썰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