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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8일

『두 지평(The Two Horizons)』 (앤터니 티슬턴 지음, Eerdmans 출판사) 을 읽고.

1. 열여섯살 여고생, 부모님 볼까 이불 쓰고 몰래 할리퀸 읽는 느낌이, 재수 학원 다니는 남자 애들, 쉬는 시간에 드래곤볼 신간 보는 느낌이, 91년 내가 앤터니 티슬턴의 『두 지평』을 읽을 때만큼 달콤하고 짜릿했을까. 아내는 있었지만 직업은 없던 시절, 그러니까 한 여자에겐 '올'이었지만 사회에선 '낫씽'이었던 그때, 나는 하루 열여덟 시간씩 상식 문제를 외웠다. (그걸 상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보에서 산 언론사 기출문제집에서 발견한 <낯선 문장들>. 1990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 친선 축구대회에서 북한 선수들이 입은 상하 유니폼 색깔이 올바로 짝지워진 것은? ① 상의: 붉은 색, 하의: 붉은 색 ② 상의: 붉은 색, 하의 : 청색 .....두렵고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이런 낯선 상식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내 이름 호명 받는 날 과연 올까? 꾸역꾸역 무의미한 문장 집어삼키다가 끝내 한계에 도달하면, 당 떨어진 사람 허겁지겁 초콜릿 꺼내 먹듯 『두 지평』을 펴고 읽었다. (티슬턴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의미(있는 문장)에 목말랐다. 의미만 충만하다면 문장이, 내용이 아무리 어려워도 상관 없는 때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티슬턴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글은 어렵지 않은 법이다.
2. 『두 지평』 은 총 3개의 파트, 15개 챕터, 61개의 절로 탄탄하게 구축된 영국식 성(城). 난생 처음보는, 목차에서 드러나는 그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에 '이런 미친...!' 하며 놀라움과 즐거움의 탄성 질렀던 기억있다. 각주 하나하나까지, 그 성 구석구석 안 가본데 없이 다 가봤지만 그 <아름다운 성>에 대한 안내 나 포기하려 한다. 25년 전 기억 의지해 이 큰 성 누군가에게 가이드 하겠다는 건 무리 & 욕심. 그래서 나, 이 시간 그저, 내가 그 성 거닐며 찍었던, < 내 얼굴 > 크게 나온 나온 몇 장의 인스타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3. 인스타 #1: 얼마 전에도 후배 L이 물었다. 왜 아까 회의 시간에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내가 옛날에 읽은 『두 지평』 이란 책에는 E. Fuchs라는 사람이 한 이런 말이 나와. 사람들이 집에서 입을 여는 건 다른 가족을 이해시키고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 왜 여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야. 이해 받기 때문에 입을 -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 여는 거지. "at home one does not speak so that people may understand, but because people understand".(p.344) 회의 석상에서, 설득하면 이해해 줄 거란 믿음 내게 있는가, 먼저 판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입 열지 않는다. 아이들 키우면서도 - 바로 이 Fuchs의 말 때문에 - 우리 대화하자,라는 말 한 번도 안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믿음 심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4. 인스타 #2: 소위 <해석학적 간격>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건 『두 지평』 을 읽으면서였다. "어떤 경우에는 비유( parable)를 설명(explain)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명해줘야만 되는 비유라는 건, 설명해줘야만 하는 조크처럼, 이미 비유로서의 가치를 훼손(ruined) 당한 거 아닐까?" (p.15) 질문 던진 크로산(Crossan)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현대의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전통 속 <자기 자신의 자리>에 의해 한계(conditioned) 지워진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의 해석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대 독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이 바리새인 역할 맡게 되는 걸, 자신의 삶이 <바리새적이라고> 규정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거부하는 바리새주의를, 그저 다시 한 번 더 비판하고 확인해주는 하나의 도덕적 이야기로만 <소비>된다. 비유에 주어진 근본적인 역할 즉 청자들의 삶을 흔들고(unsettling), 그의 신념과 가치를 전복(overturning) 시킨다는 원래의 역할은 사라지고 이제, 청자가 갖고 있는 기존 가치를 재확인해주는 역할로서만 비유는 존재한다". 처음으로 깊이 깨달았다. 복음서를 기록한 2천 년 전 화자(話者)와 그 말을 2천 년 지나서 듣는 나라는 청자(聽者) 사이에는 메꾸기 힘든 해석학적 간격이 있구나. 처음 독자나 청자들이 받았던 <충격>을 어쩌면 나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무엇을 읽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 어쩌면 내 독서는 -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내 <오래된> 기존 생각을 재확인,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겠구나. 『두 지평』 어디에선가 한 신학자가 이런 제안을 했다. 그 <처음 독자들>이 눅 18장 비유 들으며 느꼈을 충격 조금이나마 경험해볼 수 있는 방법 하나 있는데 그건: 바리새인 자리에 지금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 그리고 세리 자리엔 우리가 가장 경멸하는 그리스도인, 을 대입 시켜 보는 것. 그래서 나 종종 뉴스앤조이에 등장하는 철면피들의 이름 눅 18에 대입해보곤 한다. 말도 안 돼, 였을 것이다, 첫 독자들의 반응은, 나처럼, 예수님의 최종 판정을 들었을 때.
5. 인스타 #3: 미국에서 중고등 시절을 보낸 나의 두 아이는 - 미국에서 교회 중고등부를 보냈는데 - 참으로 <신비한 질문>을 내게 하곤 했다. 그 질문이 내게 신비로왔던 이유는 그 두 아이의 질문이, 그 두 아들의 <애비>가 중고등부 시절에 했던 질문을 꼭 닮아서였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동일했다>. 아빠, 어떻게 하면 24시간 주님만 생각할 수 있어? 35년 전의 나 역시 - 고1때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 24시간 주님만 생각하지 못했고, 그런데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라 교육 받았고, 그 결과 좌절감과 죄의식을 <끼고 살았다>. 그러다가 H.G. Gadamer가, 육십 넘어 쓴 자신의 첫 책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게임이 진정 완성되는 시점은 플레이어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망각할 때이다". (Play fulfills its purpose only if the player loses himself in his play). (Gadamer, 『진리와 방법』, p.92; 『두 지평』, p.297에서 재인용). 중요한 것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의식이 아니라 플레이 자체"이다. ("the primacy of play over the consciousness of the player")( Gadamer, 『진리와 방법』, p.94 ; 『두 지평』, p. 297에서 재인용).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여러 신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점점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주님을 24시간 생각하면 주님이 슬퍼하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잊는 걸> 좋아하셔. ....생각해보니 아빠도 그런 거 같아. 지난 주 너희가 친구들과 농구할 때, 옆에 있는 이 아빠의 존재 완전히 망각하고 게임에 <완전히 빠져있는 모습> 보던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아빠 안 잊겠다고 친구들과 놀지 않고 이 아빠 앞 떠나지 않으려 하면, 아들의 24시간 주목 받는 이 아빠는 <비통한> 마음 들 거 같아. 신은 피조물들이, 그리고 애비는 자녀들이, 인생이란 게임을 '풀필'(fulfill)하기 원한단다. <망각>은 가장 큰 찬양이고 효도인 거 같아.
2017.9.28.
신동주
서플먼트
티슬턴의 『The Two Horizons』은 1980년 Eerdman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 한국에선 2002년 C신학교 출판사에서 『두 지평 : 신약해석학과 철학적 기술 』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 있으나 독자들의 호응 크지 않았던 것으로 앎. 최근 IVP가 박규태 선생의 탁월한 번역으로 『두 지평 : 성경 해석과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제목 하에 출간. 번역자는 원저자가 인용한 독일어 원전의 오류까지 바로잡았을만큼 심혈을 바쳐 번역을 했고 독자들을 위한 별도의 역주까지 제공했다 하니, 나 이 원본보다 나은 번역본도 사야하는 건가....(여기까지)

2017년 9월 16일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박소현 외 3인, 아토포스)을 읽고.

아들이 어제 저녁 때 루터교회에서 열리는 종교개혁 세미나에 가볼까 하길래 그러지 말고, 아들아, 그 시간에 아주 좋은 북콘서트가 하나 있는데 거기 가보는 거 어떠냐, 했더니 아들은 그러겠다고 했다. ( 나 혹시 이러다가 루터교회에서 파문 당... ㅋㅋㅋㅋ) 그렇게 아들은 공저자 4명이 모두 참석하는 <지극히 사적인 페니니즘>(아토포스 출판사) 북콘서트에 갔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무척 궁금하다. 책은, 얼마전에 다 읽었다. 네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 모두 소중했지만 내게 <사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박소현 (Sohyun Park) 작가가 들려주는 첫번 째 이야기에 등장. 어찌보면 사소하고, 누군가에겐 과잉 반응,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난 공감하고 또 공감. 지금 그 책, 나와 같은 루터교회 다니는 여성 한 명에게 빌려줬기에 기억에 의지해서 나누자면: 기혼자인 박 작가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면, <그 즉시>, 시댁 식구들과 친정 식구들처럼 가까와질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한국 문화에 대해,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라고 조용히 자기 생각 표명. 예의를 갖춰 누군가를 대한다는 것과 친해지는 건 다른 문제이고 후자에는 시간이 필요. 우리 주변에는 <그 즉시>와 <당연히> 때문에 오히려 싹도 틔우지 못하고 죽은 아까운 관계의 씨앗, 가능성의 씨앗 얼마나 많은지. < 제가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가겠다는 것은 당신을 진짜 존경하고 싶어서예요. 진짜 사랑하고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이에요 >.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게 적어 이런 말하는 게 쑥스럽지만, 페미니즘은, 중간에 오해를 받고 시행착오를 좀 겪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썩지 않는 쇼윈도 플래스틱 관계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든지 얼마든지 썪을 수 있는, 그렇기에 진짜 열매 맺을 수도 있는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될까...내게 천천히 다가온 며느리...와 캔맥주 마시며 영화와 루이스와 칭의론과....(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