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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3일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1.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사람이 있다. 책에도 그런 책이 있다.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다.) 나는 서평을 쓸 때, 그 책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것>을 소개한다. (저자가 내 얘기 들으면 "아니 왜 그거를?"이라고 어이없어 할 수도 있고, "아니,당신도 거기서!"라고 감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 것은 <모른다>라는 단어였다. 2. 그냥 몇 군데 살짝 맛보기로 소개하면 :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에 책을 편찬하고 모으는 일과 책을 쓰는 일의 역할 구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언서의 저자가 실제로 누구였는지) .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구약 저자들의 직업을 이야기하며). "(거의) 알지 못합니다" (누가 구약을 썼는지).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4개 복음서들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많은 경우 답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저자의 확정과 경전의 인정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에 대해 ). 그런데, 이 모른다라는 단어와 더불어 소개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저자가 이 모른다라는 말을 할 때의 <톤>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게 핵심이다). 저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5호선은 오목교역을 통과합니다>라고 말할 때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이제 독자들은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의 명예 교수인 저자의 <여유있고 자연스럽고 당당한> 톤에 취해(?), 평소(?)와는 달리 한결 넉넉해진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을 누가 썼나, 언제 썼나,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고해서 내 기독교 신앙이 꼭 흔들리는 건 아닌가봐? 내 기독교 신앙이 꼭 부끄러운 게 되진 않나봐? 2021.10.13. 신동주 <서플먼트> (1) 『성서의 형성』은 200쪽이 채 안 돼 한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기에, 성경 통독을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무척 유익할 듯. 나는 『최신구약개론』(레이몬든 딜러드, CH북스)와 『구약성서탐구』(버나드 앤더슨,CLC)도 읽으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큰 그림을 <빨리>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한편,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두 가지 그림 이미지에 무척 끌림. 첫번 째는 식물 이미지. "성서는 어떤 규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듯, 성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나 성서가 되었습니다". 두번 째는 이메일 이미지."우리는 책이라고 하면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기승전결이 있으며, 시종일관 같은 문체로 기록[된] (...) 물체를 떠올리지요. 고대 세계의 책은 오늘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여러 이메일을, 이것들이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왔음을 숨기고 하나로 묶어 단일한 형식으로 인쇄한 모음집 정도가 될 것입니다." (2) <모른다>라는 단어 외에 한 단어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난 망설임 없이 (이번에는 '흥분'보다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 단어인데) <오늘날>을 추가 하겠다. 출간물 하나하나에 일일이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를 부여하고, 저자 역자 발행인을 각각 기록하고, 1쇄와 2쇄 날짜를 구분하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전승되어 온 본문에 종종 후대의 이름 모를 인물들이, 원저자와 현대 독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절과 구와 장을 과 장을 첨가하는 행위가 진본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임.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오늘날 문화에서는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p.58). (이 단어 역시 이 책에서 끊임없이 등장). 이 책에선 아니지만 G.K. 체스터튼 역시 구약의 욥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함 : "이 서사시에서 어떠한 부분이 원저자가 계획하였던 것이고 어떠한 부분이 훨씬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한 토론이 이어져 왔다.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불일치하는데 - 사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학자들의 주된 업무이긴 하다 - 전반적인 연구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실제로 어떠한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면, 산문으로 기록된 서론과 후기는 [확실히]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젊은이 [엘리후]의 연설과 마지막의 [욥의] 회개가 후대의 첨가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든지, 이 문제에 관하여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일반적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어떠한 고대의 예술 작품을 다루고자 한다면, 고대의 저작이 점진적으로 [즉 후대에 계속적으로 첨가되었다는] 쓰였다는 사실이 이 저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건축되어 왔던 것처럼, 욥기도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건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구전 시가를 쓴 사람들은, 실제 연대와 실제 저자에 대해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원저자와 원연대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그러한 중요성이란 모든 면에서 근대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개인주의의 창조물인 것이다. (...)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설사 다른 사람들이 어떤 구절을 이 저작에 삽입하였다 하여도, 그 당시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과 같은 개인주의적 시대에 그러한 행동이 불러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부족이 창조한 서사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부족의 사원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 부족 전체의 창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한다면, 욥기의 서문과 후기,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이 원래의 저작이 쓰인 이후에 삽입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삽입이 근대의 개인화 혹은 개별화된 책에서 이루어지는 삽입처럼 책을 명백히 위조물로 만든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삽입을 조지 메러디스가 쓴 책에서 이후에 실제로는 그가 쓰지 않은 한 장을 발견한 것과 같이 취급해서도 안 되고, 입센의 희곡에서 윌리엄 아처에 의해 교묘하게 삽입된 장면 일부처럼 간주해서도 안 된다. 일리아스나 욥기처럼 오래된 시를 만들어 낸 옛 시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전통을 언제나 지켜 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을 자기 자식이 추수하도록 물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쓰던 시를 자기 자식이 마무리하도록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통일성(Homeric unity)’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리아스는 한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백 명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통일성이란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 당시에는 한 도시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마치 내전 중에 있는 한 도시인 것처럼 보인다." ( '카이로스: 비평루트'가 번역한 G.K.체스터튼의 욥기 '서론' 중에서. 번역 전문은 https://cairos.tistory.com/215 에서 확인 가능.)

2021년 10월 11일

『성서, 역사와 만나다』(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비아 VIA)를 읽고.

1. 성경 말씀 중에 유독 <한국>에 와서 고생 <이빠이> 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구절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면". 표절,성폭력,횡령 목사들이 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다시 <설교>하는 모습 볼 때면 나 환장하겠다. ( 이렇게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데> 사용된다는 건, <성전을 정화>하신 분을 따르는 조직에서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두 번째 구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성경 본문의 불일치나 모순을 <살펴보며> (이를 통해) 성경(과 신앙)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들어가 보려고> 질문 하나 할라치면 바로 당장 등장하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는 디모데후서 말씀을 인정하면 해결되는데, 넌 그걸 안 믿는구나?". (나 두 번째로 환장하고 슬픔 ㅠㅠ).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다면>, 이 <영감> 구절은,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더 깊은 세계로의 진입을 <막는다>. 오늘은 후자에 대해서만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참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세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먼저 공유함.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디모데후서 3:16)"의 영어 번역은 이렇다 :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NASB) (2)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은 포함되지 않는다. 디모데가 디모데후서를 받을 당시 신약성서라는 책은 아직 없었다. <모든 성경>은 우리가 흔히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을 지칭. (3) 유대인들은 이 히브리 성경을 <타낙>이라고 부름. 유대인들은 성경 속 책들을 세 종류로 구분. 토라(율법서),네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 이렇게 셋인데, (그래서 성경을 호칭할 때) 이 셋의 앞 부분을 따서 타낙(혹은 타나크)라고 불렀다. 이제 <모든 성경>과 <영감>과 <타낙> 이렇게 세 단어가 <제대로> 결합될 때 - 기름 목사와 달리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데 - 우리 앞에는 <놀라운 결론>이 주어진다. 정말이다. 2. 히브리 성경의 원래 본문은 모음은 하나도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음들로만 이뤄져 있다. 우리 한글로 예를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ㅅㄴㄷㅇㅈㄴㄴㅁㄴㅁㅇㄷㅁ ㄹㅅㄱㅎㅂㄴㄷㅋㅋ.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간단히 말해, 히브리 성경은, 독자들이 추후에 모음을 추가로 집어넣지 않고서는 <읽어 낼 수> 없는 글이라는 뜻이다. 모음을 추가해야, 비로서 의미 있는 문장이 생성된다. 위에서 예로 든 한글 자음들에 (제대로 된) 모음을 추가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된다: "신동주는미남이다미리사과합니다ㅋㅋ" 책에는 모음이 없더라도, 읽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모음을 집어넣어 주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음의 종류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음을 넣으면 다른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위의 똑같은 자음들이, 다른 모음들을 넣을 경우) "신동주너는왜이렇게사냐ㅋㅋ"(라는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독자들이 <어떤 모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독서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타낙 본문에 히브리어 자음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만을 전달 받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히브리어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서는 모음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아주 이른 시기부터 타낙의 자음에 어떤 모음이 가장 적합한지를 논하는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렇게 전달된 모음은 본문으로 기록된 성서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기억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7)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한 말은, 사실은 이렇게 풀어써야 할 것이다 : "모든 <기록된 자음>과 (모든) <기억된 모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방금 내가 한 이 말은 사실 펠리칸이 한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교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타낙, 즉 구약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문서'라면 성서 본문에 기록된 자음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남아 한참 후에 기록된 모음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영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즉 구전 전승 역시 기록된 본문과 동일한 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128) 3. 이제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역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글을 맺으려 한다. 나는 영어로 본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가 영어책에선 "from teacher to pupil through countless generations"이라고 나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세대>. (그런데) 그 많은 세대, 긴 시간 중에서, 이사야처럼 <높이 들린 보좌>나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 <너를 예언자로 세웠다>, <아닙니다.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라고, 예레미야처럼 직접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의 밀당 할 수 있었던 순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 형성의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은, 환상을 보는 시간이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다음과 같은 선생과 학생들 사이의 <평범한 대화>로 채워져 있다고 본다 : 이 글자는 뭐라고 읽나요? 알레프라고 읽는다. 선생님 '바브'와 '요드'를 쓸 때 획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되나요. 오늘은 드바림(신명기)의 첫 장을 암송할 것이다. 테힐림(시편) 22편에서 '내 손과 발을 거칠게 다루었습니다'는 '내 손과 발에 구멍을 뚫었습니다'라고 읽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요? 스승님이 사무엘하 15장 7절을 '4년'이 아니라 '40년'으로 읽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답하던 스승과 제자들이 죽는다. 자녀들이 태어나 다시 처음부터 글을 배우고 스승들에게 질문을 한다). 하고 싶은 말,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만약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외웠다면, 서너 세대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수 백 세대, 수천 년 이어졌다는 것은, 그 내용을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무언가를 후에 누군가에게 (다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충분히 묻는다>이다. (지금) 충분히 묻지 않으면, (후에) 충분히 답변하지 못하고, 구전 전승은 <끊긴다>. 오늘 날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본다. 온전한 이해로 이끌어주는 첫 단추 의문과 질문을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의문과 질문을 무시하는 것은 비-영감적, 비-타낙적, 비-모든성경적이다. 한마디로 비-디모데후서적이다. 2021.10.11. 신동주 <서플먼트> 1) 시편22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은 각각 마소라 사본과 70인역에 등장.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9에서 인용함. 2) 줌에서, 오프에서, 성경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나누고, 신학 서적을 구매해 함께 읽으며 궁금증을 풀어가고, 지인들끼리 모여 신학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이 모든 비-이사야적인 시간들을 영감의 원천이신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시기를.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