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16년 11월 20일

동영상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찬수 목사 설교, 스탠드네트워크 제작)를 시청하고.


1. 약 한 달 전, 제게 엄청난 쇼크를 가져다 준 영상물 하나를 봤어요. 혹시 인천에서 한 유부녀가, 오롯이 한 유부남 목사의 기도 힘으로만, 그 목사 빼다 박은 아이 출산했다는 ‘제보자들’이란 프로는 아니냐고요? 아니어요. 제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영상물은, 교회란 어떤 곳인가를 묻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3분5초짜리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라는 유튜브 동영상이었어요.

2. 상기 동영상에서 이찬수 목사는 젊은 목사와 전도사들에게 (a)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삶의 자세, (b) 본인이 부목사 시절 담임 목사로 모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과의 일화 등을 소개했는데요, 저는 설교자가 숭앙하는 고인의 교회관에 대해 <단 한 프레임>도 동의할 수 없었어요.

3. 상기 동영상에는 고인이 화요 교역자 회의에서 부목사들을 심하게 다잡는 대목이 나오는데 고인의 언어는 다음과 같아요: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실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구 목사, 그 성도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 반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날. 목사님은 좀 다혈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왜 너 같은 게 이 교회 와 가지고 성도를 괴롭히냐는 거예요. <나가라고 이 교회>! 왜 사랑의교회 와가지고 성도들을 괴롭히느냐고!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 (상기 물맷돌 영상 중에서. < >표시 강조는 신피디.)
저는 고인이 사용하신 언어의 <폭력성>에서 심한 충격을 받았는데요 - 왜 내가 존경하는 고인이 하필 내가 싫어하는 스티브 잡스를 닮은 것일까 - 그래서 이제 저는, 누군가에겐 몹시도 <교회적>일 수 있는 고인의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 드러내는 한 일환으로 이런 <질문> 하나 던지고 답해보려 해요. <나라면 언제 화를 낼 것인가>.

4. 제가, 같은 교회에서 동역하는 후배 부목사를 부르고 이렇게 말합니다. (후배 목사의 이름은 편의상 민기라고 하겠습니다.) 민기야, 내가 오늘 네가 맡고 있는 2교구의 권사님들 몇 분을 만났는데 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라. (잠시 긴장했던 후배의 얼굴 표정이 좀 풀립니다) 지난 2년 동안 민기 네가 실수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야. 왜 그랬니. (이제 후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민기야, 여긴 교회야. 불완전해도 되는. 왜 완전한 성자 코스프레를 한 거야. 그렇게 교회 <밖에> 있지 말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줘. 안 그러면 내가 슬퍼. 지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민기는 잔뜩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성도들의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요...) 저는 말합니다. 민기야, 그때 그 교회에서 있었던 일, it's not your fault. 그래, it's not your fault. 삼만 명 되는 교회를 만든 건 네가 아니야. <어떡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사정 잠시 몰랐다고, 네 안에 사랑이 없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고민과 아픔을 네게 매번 <보고>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네가 <항상 다 아니>. 게다가 교인들 중에는 <담임목사>에게만 고민 오픈하는 사람들 많다는 거, 우리 잘 알잖아. (제가 사랑하는 후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습니다).

5. 예, 제가 담임 목사라면, 타인의 고민과 어려움은 <완전 파악>하고 있지만, 자신의 고민과 갈등, 실수와 약점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부목- 그러니까 <칭찬자자>, <백퍼완전> 부목- 불러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간청하겠어요. 흠 많았던 열두 제자 닮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약자 <대형교회 부목> 1인 향해,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고함치는 대신.

2016.11.17
신동주


서플먼트
1) 지금 내가 쓰는 글은 이찬수 목사와 고 옥한흠 목사님이 살고계신, 살다가신, <인생>과 <신앙>에 대한 비판 아님. 내게 그런 비판할 자격, 능력 없음. 다만, 상기 동영상에서 <언어를 통해> 드러난 교회<관>과 신앙<관>을, 다시 <언어를 통해> 되물어 보고, 이를 통해 우리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뭘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해 보는 중. 고인 살아생전 이 글 보셨다면, 내 진심 알아보시고 좋아요 눌러주셨을 거라고 믿음, 차단하는 대신.

2) 상기 동영상의 출처와 링크는 다음과 같음. 출처: 스탠드네트워크
링크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Q-wCf8oXQQ
내가 정리한 텍스트 버전은 다음에서 확인 할 수 있음.
http://holyfat.blogspot.kr/2016/11/blog-post.html

3) 우리 한국 교회엔 이상한 신화 하나 존재하는데 나 이제 앞으로 그걸 <숟가락 신화>(spoon myth)라 부르겠음. <모름지기 진정한 목회자는 성도들 가정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아야 한다>라는 이 숟가락 신화는 <당장 파악하란 말이야>, <몰라? 그러면 넌 진정한 목회자 아니야>라는 - 젓가락과 포크처럼 사람 <찌르는> - 율법과 정죄로 쉽게 이어짐. 각설하고, 내가 이 신화에서 가장 의아하게,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점 하나 있으니, 이 신화에서 <알다>는 왜 한 번도 <쌍방향>이었던 적 없나 하는 점. 왜 항상 목회자는 <알아야만>하고, 교인은 <알려져야만> 하는 거임? (이 신화에서 목회자집 숟가락 숫자는 안 나옴). 교인이 무슨 <남성>이나 <백인>에 의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려야만하는 <여성>이나 <아시아>임? (문장력이 달려 써놓고 보니 내가 여성과 아시아를 디스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내 의도는 정반대임. 여성과 아시아가 남성과 백인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듯, 교인도 목회자의 컨펌 필요로 하지 않음. 알려짐, 사랑받음, 기도받음, 이라는 수동성은 - 진정 성숙한 자만 이런 <수동성>을 당당히 긍정할 수 있지만 - 교인과 목회자 공히 <배우고 실천해야>하는 덕목임. 서로 돕지 못하는 일방적 관계의 결혼 오래 가지 못하듯, 소위 일방적 돌봄과 섬김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숟가락(신화)만 빠는 교회, 오래 가지 못함. 그래서 한국 교회 <이렇게> 됐음.

2016년 11월 12일

동영상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텍스트)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찬수 목사) 라는 3분5초짜리 동영상을 보고 넘 큰 쇼크를 받은 나는, 한 번 더 들으며 영상 내용을 받아적었습니다 ㅠㅠ 어떻게 <교회관>과 <분노의 지점>이 나와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설교자, 그리고 설교자가 인용하는 분 모두.
======================
-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무슨 청년들 데리고 성경공부만 하면은
세계복음화, 아프리카가 나를 부른다, 조국 통일,
민족복음화 떠는는데 손에 물맷돌이 없어요.
있습니까?
우리 젊은 목사님들, 또 전도사님들
손에 물맷돌이 있습니까?
이 물맷돌은요 40일 금식기도해서
얻어낸 게 아닙니다.
내 삶터에서 보잘 것 없는
양 지키는 일이지만
이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여기에 온 마음을 쏟을 때
나온 부산물이 물맷돌입니다.
물맷돌 있습니까?
물맷돌도 없으면서 자꾸 골리앗 이긴다고 그러니까
허풍쟁이들밖에 더 되냐고요.
우리처럼 뻥이 센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뻥이 센 사람들이 모였는데
한국교회는 왜 이 꼴입니까?
왜 절에 교회를 팔아야 하는 비극이 왜 일어납니까?
옥한흠 목사님의 어느 부분이 그리운지 아십니까?
화요일 교역자 회의 할 때
지금 생각해도 등꼴이 오싹해요
한 번도 옥한흠 목사님이
“야, 이목사 왜 고등부 숫자가 안 느냐?”
이걸 가지고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실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구 목사, 그 성도가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 반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날
목사님은 좀 다혈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왜 너 같은 게 이 교회 와 가지고 성도를 괴롭히냐는 거예요.
나가라고 이 교회!
왜 사랑의교회 와가지고 성도들을 괴롭히느냐고!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지금도 소리가 들려요 지금도.
화요일날 기도회 인도하시다가
막 우시는 거예요.
막 우시는 거예요.
왜 우시는지 아세요?
하나님, 어느 권사가 지금 암이랍니다.
암으로 신음하는데
이 종이 무능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어서
하나님, 마음이 힘듭니다.
그러시면서 우시는 거예요.
옥목사님이 언제 대형교회한다고
대형교회 하자고 그러신 적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있는 성도도 관리도 안 하고
방치해 놓으면서
뭐하러 자꾸 배가 배가 그러고 있느냐고요.
두당 얼마씩 팔려고 그러십니까?
다윗은요
조국통일
민족 부흥, 타도 골리앗
그렇게 떠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양 지키는 일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양 지키는 일이 내게 맡겨진 일이면
이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그게 나라를 구하더라고요.
출처: 스탠드네트워크 . 2016.10.16.
링크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Q-wCf8oXQQ
====================================

2016년 10월 8일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E.P.샌더스 지음, 알맹e)를 구매하고.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이사로 있는 맹호성 페친이, 한국 신학(출판)계가 39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방금 했어요 ^^ 1977년 출간 이후 바울 연구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는 평가받는 E.P.샌더스의『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전자책으로 냈어요. 페친이 직접 디자인한 표지를 보고 저는 제 석사학위 논문의 주 분석 대상이었던 마이클 폴라니의 주저『Personal Knowledge』(1958년)가 바로 떠올랐어요. 둘 모두 표지는 단순해도, 우리가 세상과 기독교를 보는 시각을 참 많이 <흔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만남 있잖아요, 그 만남 이후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식론과 신학에 <약간의 사전 지식>(이런 난 얼마나 많이 안다고 ㅜㅜ)이 있는 분들께 두 책 모두 적극 추천.

(참고) ① 폴라니의 책은 아카넷에서『개인적 지식』이란 이름으로 나온 적 있는데 (적어도 제게는) 해독 불가 였어요. 인식론에 관심 있는 교수나 학생이 있다면 영어책을 권합니다. ② 이번에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번역은 제가 신뢰하는 신학서적 전문 번역가 박규태 목사가 해주셨어요. 완전안심. ③ 우리나라 신학서적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맹호성 페친은 이 책을 PDF 형식으로 출간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양한 구매 옵션>을 제공하는데요, 제 페친의 성격이 잘 묻어나는 <하드보일드한>의 책 구매 방법 소개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장 쾌락적인...읽기라는 행위에 푹... :)
https://www.facebook.com/Rmaenge/posts/1228529727188938

2016년 10월 7일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IVP)를 읽고.

한 개의 구(句), 하나의 문장(文章)이 나로 하여금 이 책 구매케 했으니 먼저 구부터 소개하면: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라는 이 책의 부제). 원부제 '신학자의 회고록' 가볍게 킬하고 매혹적인 상기 부제 단 이, 출판사는 포상해야함. 한편, 상기 구와 함께 날 유혹한 ‘쎈텐스’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신학교수 세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쓴 추천사에 등장하는데 그 정확한 워딩은 다음과 같다: “『한나의 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전통을 당당하게 잇는다.” (후기,p.523). 특정 답만을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한국 교회에 신물난 내게, 『고백록』을 좋아하여 선한용 역, 최민순 역, R. S. Pine-Coffin 역으로 『고백록』 세 권 갖고 있는 내게, 상기 두 홍보 포인트는 내 <성감대>를 정확하게 터치한, 내가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음. 하나 아무리 책을 읽어도 상기 구와 문장에서 촉발된 나의 <설렘과 흥분>은 절정으로 이어지지 않고....계속 <무언가 다 안 채워진 듯한> 미진함.....때문에 책을 다 읽고 돌아누운 나는....좋았어? 라고 스탠리가 계속 묻는데도 아무 대답 않고.....
2016. 10. 7.
신동주
서플먼트
1) 책을 덮었을 때 가슴에 남은 건 ‘당혹감’이었고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불친절’. 내가 이 책 왜 불친절하다 생각하나 하면: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스탠리가 씨름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문제들>을 알아야 하는데, 542쪽 되는 이 책에서 스탠리는 자신의 결론과 결정만을 <일방적>으로 소개. 스탠리가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을 비판했고 존 요더를 만나는 가운데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됐다는 <팩트>는 알겠는데, 그런 <결과의 나열>이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담? 나는 어떤 신학적 입장도 <100>로만 구성됐다고 보지 않음. 그렇기에 여전히 무시해선 안 될, 계속 귀기울여할 <니버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봄. 니버가 갖고 있었던 <두려움>과 <꿈>과, 특정 성경 본문을 스탠리와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든 <성서관> 등 니버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충분히> <매력적으로> 소개할 때 비로서 <스탠리의 이야기>도 산다고 봄. <레옹>에서 게리 올드먼이 레옹와 마틸다의 이야기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주었듯이 말임. 레이 올슨(Ray Olson)이란 이가 “대부분의 현대 회고록 저자들은 일인칭 소설 화자와 비슷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명한 신학자 하우어워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라고 말했으나 나 그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음. 이 회고록엔 적(敵)에 대한 <명단>은 있으되 그 <적들의 이야기>는 없음. 다시 말하지만 이 회고록엔, 스탠리가 신학자로서 성서를 해석하며 다른 해석 방법(그러니까 ‘다른 삶’)과 조우할 때 그가 느꼈을 두근거림, 두려움, 망설임은 등장하지 않음. <저명한 신학자>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 <흔들리는 신학도>는 만나지 못한다는 게 몹시나도 애석함. (나는 <그걸> 듣고, 보고 싶어 이 책을 펼쳤는데 말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적들의 이야기만 빈약한 게 아님ㅠㅠ 가장 강력한 아군인 요더와 매킨타이어의 고민과 꿈에 대해서도 나 더 알게 된 거 <정말 한 줄>도 더 없음. (참고: 내가 아는 요더는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IVP)에 등장하는 요더가 전부. 내가 읽은 매킨타이어의 저서는『덕의 상실』(문예출판사)이 유일.) 이제 나, 스탠리와 내가 쓰는 언어가 과연 <같은 언어>인지 회의에 빠짐. 왜냐고? 스탠리가 돌아누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 그다음에 이것을 썼다’식의 서술을 피하려”고 했어.(<맺음말>,p.508) 나는 나보다 <훌륭한> 그에게, <24> 그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림. “스탠리,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게 정확하게 바로 그거예요. 그때 나는 그것을 했고, 그 다음에 이것을 썼다...라고만 하는 거....내가 원하는 건....내 몸에서....당신이 만져주기를 바랐던 곳은....”
2) 이제 이어지는 건 독서 중 내가 체험한 총 다섯 번의 “멀티-당혹감(multi-confusions)”. 멀티 오르가즘은 들어봤어도 멀티 당혹감은 첨 들어봤을 당신에게 그 당혹들 좀 구체적으로 소개하면(후방주의? -.-): "앤과 함께하는 삶이 신학자로서의 나의 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p.287) ( 아니, <가끔>이라니? 『한나의 아이』 구매자 대다수는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스탠리 답변 듣고 싶어 이 책 샀을 터인데.) 어쨌든 상기 질문에 대한 스탠리의 답변: “모른다는 것이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p.287). 모른다....저자가 모른다...고 하는 마당에 이제 더 물을 수도 없다....(이게 첫 번째 당혹) "앤과 함께 살며서 나는 삶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이 내 신학적 통찰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지만, 앤과 애덤과 함께한 시간이 내가 배운 신학을 펼치는 방법을 좌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나친 억측인 듯하다." (p.288). 이런, <내 예상>이 억측에 불과했구나. 그의 <24>이 <그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내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을 억측이라 호(呼)하다니. (이게 두 번째 당혹). 어쨌든 왜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갈 때 앤과 함께 한 시간과 경험에 기대지 않는지 스탠리가 밝히는 이유 들어보면: "내러티브에 대한 강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신앙 언어의 의미를 시험하거나 결정하는 데 쓰라는 요구가 아니다." (p.288) 스탠리의 이런 <신념과 태도> 때문에 우리는 스탠리의 <신학적 사유>에 <앤과 함께한 삶>이 끼친 영향의 <정도와 내용>에 대해 <충격적일 정도>로 <무지한채로> 책을 덮게 됨. (세 번째 당혹). 오케이, 스탠리, 알겠어요, 그럼 당신의 신학적 통찰, 당신의 그 내러티브 신학에 영향을 <끼친> 경험은 뭔가요? “내러티브가 기독교적 확신에 필요한 문법이라는 말은 존재의 이런 종말론적 특성을 뜻한다. 확신컨대 이것은 나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과 그의 연구 결과를 만났기 때문에 내 저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p. 291). 그렇다. 스탠리에 따르면, 스탠리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이는, <앤>이 아니라, <존 하워드 요더>임. (ㅠㅠ) 정리해보자. 이제 우리 스탠리를 알기 위해선 요더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게 됐음. 동시에, 아무리 『한나의 아이』를 읽어도 요더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참고: 서플먼트 2) 역시 이미 알고 있음. (네번 째 당혹). 난 이제 곤고한 독자...이 당혹스러운 회고록에서 누가 나를 건저낼 수 있을까 흑흑흑. 나 이번 여행에서, 수많은 신학자들과 올레길 걸으며, 개인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경험 들을 기회 있을 줄 알았는데, 인솔자 스탠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파킹랏. 요더와...니버와...매킨타이어와...그리고 스탠리 자신의...차만 <파킹돼 있었음>. 그게 다.(that’s all). 나 신학자들 차만 보고 왔음. 이 연속되는 네 번의 당혹은 우리에게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문학적 질문>을 하나 야기함.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임. 회.고.록.이.란.무.엇.인.가. <도대체> 회고록이란 무엇인가....세라, 『한나의 아이』가 어거스틴의 『고백록』 전통을 잇는다고 했죠? 세라....세라, 내 말 들려요?
3) 이제 다섯 번째, 마지막 당혹 남았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앤이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떴을까. 그러다 등장한 스탠리와 앤의 이혼 소식. 내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내게는 큰 충격이었음. 나 지금 원론적인 기독인의 이혼 가능 여부 묻는 거 아님. 내가 묻는 건,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 배우자의 천식이 심하다고, 오른쪽 다리가 썩는다고, 정신질환 증세가 심해진다고, 이혼해도 돼? 다시 말해, 자녀의 안전 등을 위해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게 아니라 <이혼>하는 게 기독인에게 <옵션>이 될 수 있나. 배우자의 잘못이 없는 한 – 질환은 잘못이 아니다 – 우리는 평생을 상대의 배우자로 <살아야만> 하는 거 아니었나. 한편, 내 이 당혹감이 단순히 <병자/환자와의 이혼> 가능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면 이제 내가 인용하는 페친 K의 글은 이번 회고록에서 들리지 않았던 <병자/환자의 목소리>에 주목함. “저자나 이 책을 만든 출판사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직접 고통을 겪은 당사자인 앤의 입장에서 그의 목소리는 누가 대변해 주나 싶어 안쓰럽고 먹먹했다.” (페친 K의 2016년 10월3일 페북 포스팅에서 인용).
4) 거듭되는 당혹감에 당혹한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생각 궁금해, 2016년 8월 22일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일곱시에 열린『한나의 아이』 출간 기념 공개 강연회에 참석. “그럼 이제 플로어의 질문 두 개만 받겠습니다” . 강연 후 사회자가 말하자 나와 함께 강연회에 왔던 회사 후배 L이 손을 듦. (난 지금도 이 질문이 그 강연회의 백미라고 생각. 참고로 L은 나와 함께 지금 <새롭게하소서> 연출 중. 맞음. 나 지금 프로그램 홍보 중.) “믿지 않는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니. 그냥 열심히 최선 다해 사는 거지. 그럼, 그 답 없음과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정답 없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최선을 다해 사는 그 친구에게 우리의 정답 없는 종교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답은 없고, 답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정신에 따라, 그날 나온 답변 소개는 생략.
5) 이상 나의 글은 <지극히 사적인> 독후감. 다른 의견, 다른 평가 당연히 존재.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쓰고 IVP가 펴낸 『한나의 아이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는 국민일보 선정 ‘2016년 올해 최고의 책’으로 뽑힘. “이 책은 출판사와 아카데미 대표 등 12명이 호평, 대상 도서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6.12.28). 이 책 비록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펴낸이와 편집자가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와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무척 소중하다고 믿는다.


2016년 9월 18일

교회와 설거지

오늘 아침 교회 갈 때 처음 설거지를 하는 날이라서 그런지 세례 받는 날처럼 약간 긴장됐다 점심을 빨리 먹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장로님 한 분과 한 조가 되어 설거지를 하는데 점심 메뉴가 카레였기에 그런지 세심하면서도 집요한 터치가 필요했다 -.- 설거지를 마치고 솥까지 다 씻고 났더니 뿌듯했다 내가 30대 초반에 듣고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참 칭찬 받기 쉽다. 설거지를 한 번 하면, 커피를 한 번 타오면, 먹은 자리를 치우면, 뭔가 한 번만 해도 <매너> 좋다고 칭찬을 받는다....반면 그 일을 <매번> 하는 사람들은 <한 번만 안 해도> 여자가....하면서 비난 받는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고했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서 감사했지만 내가 더 바라고 기대하는 건 설거지 하는 남성들이 칭찬 받는 게 아니라.....설거지 안 하는 여성들이...안 해도...뭐라는 사람 없고 자연스러운....남자들처럼 <하고 싶은 날만> 이름 기입하는....그런 교회....( 이 글은 내가 다녔던, 지금 다니는, 앞으로 다닐지도 모를 모든 교회를 생각하며 쓴 글임) )

2016년 9월 10일

『참 재미없는 세상 』 (신동필 지음, 홍성사, 2016년 9월)을 읽고.

동생이 책을 냈어요. 나중에 제가 책을 내면 안 사주시더라도 제 동생 책은 많이 사랑해주세요! (꾸벅) 틈틈이 찍은 사진들에 짧은 시를 덧붙인 책입니다. '추천의 글'은 제가 썼습니다. ^^;; 

저는 한 방송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일하다 보면 저마다 사연을 지닌 분들의 출연 신청을 받습니다. 수북이 쌓인 사연들 중 하나를 채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과 식사를 하다가 동생의 휴대폰에 담겨 있는 사진과 글을 보았습니다. 순간, 감춰져 있는 사진과 글을 세상에 꺼내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동생의 사진과 글을 보는 제 마음은 이중적이었습니다. 먼저, 동생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일상의 순간을 잡아내는 방식이 전혀 상투적이지 않았고, 그 새로움을 통해 독자로서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삶 가운데서 고난받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부디 이 책을 통해 주님 주시는 참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_신동주(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홍성사 링크 바로가기 http://goo.gl/abQNb9

교회 개혁을 위한 아주 작은 실천 방안

돈 전혀 들지 않는 교회 개혁 방안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돈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나 단체에 교회가 돈을 전달할 일이 있으면 담임목사가 아니라 재정담당 직원이 했으면 좋겠다. 전달식에 목사 대신 교회 직원이 왔으면. 사람들은 담임목사가 아니라 그 교회에,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할 것이다. 사람이 영광받는 일이, 사람에게 영광돌리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어려운 현장을 돌아보는 일도 담임목사가 아니라 해외구호일을 제대로 배우거나 경험한 교인이 갔으면 좋겠다. 전문가가 담임목사보다 현장에서 <더 많은 걸 보고> 돌아오리라는 건 상식이다. 교회가 한 사람의 항공비를 추가로 부담할 수 있더라도, 그때도, 담임 목사가 아니라 해외구호에 <관심과 사명>이 있는 교인을 <한 명 더> 보냈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 둘은, 그러니까 그 <교회>는, 담임목사가 그 교회를 떠나고 새로운 목사로 바뀌더라도, 해외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지혜로운 방법들을 축적시켜나가며 해나갈 것이다. 기독교 영화제 개막식에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와서 격려사를 하고 돈을 전달하는 일을 본 적이 있다. 그 행사에 큰 돈을 댄 그 목사는 그날 그 행사장에서 최고의 <귀빈>이었다.그런데, 그날 만약, 그 교회의 영화학과 교수나 연극 배우 교인이 그 행사장에 교회 대표로 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난 확신하건대, 그의 격려사는 지금 막 단편영화나 단막극을 만든 청년들에게 훨씬 더 <구체적인 도전과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식의, 그날 그 담임목사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삶의 현장에, 다양한 요청과 다양한 요구에, 한 사람만 파송하는 건 어색하다. 만사형통(대통령의 형)이 문제를 일으켰듯 만사담통(담임목사)도 문제를 일으킨다. 각 영역의 대표자들이 - 실질적인 대표자들이- 많이 존재하는 교회는 세습도 잘 안 될 거라 믿는다. 오늘의 작은 결론. 돈은 직원이 전달하자. 목사는 자기 개인 돈 전달할 때만 참석하자. 목사의 해외 방문은 자비로 하자. 격려사도...더 구체적으로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하자.(2013.9.10)

2016년 9월 8일

대형교회

나는 종종 ‘대형교회’를 비판하는 데 어느 날 내 삶 속에 대형교회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페이스북 친구 수였다 많아야 좋다고 생각해서 계속 늘렸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천오백이라는 수를 이번 주에 육백이십으로 줄였다 더 줄이려고 한다 성도들의 말을 다 들을 능력도 없으면서 계속 등록을 받는 대형교회가 나였다 누군가의 소중한 이야기를 스크롤 한다는 게 훑는다는 게 미안했다

2016년 9월 3일

『대지의 기둥』(켄 폴릿 지음, 문학동네)을 읽고.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1.『대지의 기둥』은 12세기 영국에서 성당 건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어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스파이 소설인 『바늘 구멍』의 저자 켄 폴릿이 썼어요. 고등학교 때 켄 폴릿의 『바늘 구멍』을 읽고 그에게 반해 요즘도 이런 저런 인터넷 싸이트에서 닉네임을 요구하면 Ken이라고 적곤해요.
2.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이거였어요. 선한 사람은 점점 더 선해지고 나쁜 사람은 점점 더 나빠져요. 선인은, 처음에는 부족한 점 있어도, 점점 더 용감해지고, 더 너그럽고 지혜로워지고. 자기 일을 더 잘 하게 되고. 근데 악인은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사람들을 더 이용하려고만 들고, 점점 더 <괴물>로 변해가요. C. S. 루이스가 어디선가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났어요.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우리가 무언가 훌륭한 일을 했을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은 방금 한 일보다 더 훌륭하고 덕스러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마음이다. 루이스는 또 어디선가, 지옥은 점점 더 자기 중심적으로 변모한 개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한 적이 있죠. 타인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 집중하는 곳! 점점 자기 안으로 쪼그라들고 쭈그러드는, 그래서 지옥은 어떤 의미에서 광활하기보다는 하나의 점처럼 아주 작을 거라는 말은 한 게 기억나요. 여하튼 켄 폴릿도 이 장편 소설을 쓰면서 “몇 십 년에 걸쳐 이야기가 전개되고 등장인물들이 <성숙해감에 따라> 그들의 삶에 새로운 굴곡을 만들어 넣”는게 제일 어려웠다고 고백해요. (1권, 서문).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재미 포인트. 이 책의 저자 켄 폴릿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어요. 그런데 이 장편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수도원장이지요! 그래서 발생하는 켄 폴릿의 고민: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하느님의 사람’에 속하는 부류여야 했다. 이 점은 내게는 까다로운 문제였다. 아마 상당수 독자들도 그럴테지만 내세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물에 흥미를 갖는 일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거 같았다”. 제가 볼 때 켄 폴릿, 그 일을 무척 성공적으로 해내요. (비기독교 신자 켄 폴릿이 쓴 특정 문장을 읽다가 제 불신앙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어요.)
3. 미술, 건축, 조각, 미학에 나름 <조예(?)가 있는> 저로서는 (자뻑만렙-.-) 내심 성당 건축을 맡은 톰과 그의 의붓아들 잭이 <석재와 나무와 나누는 깊은 대화>를 기대했어요. 돌과 나무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숨겨진 최대치>를 보여주지 않잖아요. 상대가 정말 믿을만하다고 여겨질 때만 자신을 <만져도 된다고> 허락하죠. 근데 저자 폴릿은 톰과 잭이 <여자들과 나누는 육체적 대화>만 자꾸 들려주는 거예요. (베리댕큐하면서도 아쉬웠던 부분이에요). 엘렌과 앨리에너 두 여성의 절정을 묘사할 때만큼 돌이 흘리는 땀방울을...강한 바람을 맞을 때 성당의 목재가 휘는 그 긴장을, 그때 터져나오는 깊은 저음의 신음을....좀 더 자세히 들려주었더라면....(근데 이런 지적, 이 책에 대한 디스인가 낚시인가 -.-).
2016.9.3.
신동주
서플먼트
1) 지금 켄 폴릿의 『대지의 기둥』1권, 2권, 3권의 섹스씬을 다시 한 번 훑어보니 처음 읽을 때는 못봤던 특징 하나가 보인다. 거의 매 씬에 nipple이 등장한다. (켄의 개취존중 -.-). 일단 제3권에서만 한 군데 살펴보면: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그가 그녀의 젖꼭지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비틀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더니 그에게서 몸을 떼며 헐떡였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내가 아프게 했나요?”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 게 아녜요!” (3권,p.151). 한편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센테스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물릴 줄 모르는 육체적 정열에 사로잡힌 신혼부부 같았다. 아마도 처음으로 잠글 수 있는 문이 달린 침실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 이제는 아무에게도 들킬 염려 없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엘리에너는] 특별한 전율을 느꼈다. 지난 이 주 동안 자신과 잭이 했던 일 몇 가지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3권, p.495.) 나는 은근한 묘사를 좋아한다.(-.-)
2) 섹스 묘사와 달리 켄 폴릿의 건축 묘사는 약간 아쉬웠다. 다양한 건축 사조와 기법이 등장하지만 난 그가 회반죽 한 번 해보지 않았다는 거에 오백 원 건다. 『대지의 기둥』을 읽는 동안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자서전『한나의 아이』를 동시에 읽었는데 예닐곱 살부터 벽돌 쌓는 조적공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던 스탠리의 묘사가 훨씬 - 당연히 - 더 실제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묘사. “우리는 말 그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정말 지독한 냄새가 났다. 땀이 쉬어 공사 현장의 모든 사람이 악취를 풍겼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는데, 우리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감독하러 현장에 오는 사람들이 그 냄새 때문에 괴로워할 때 특히 좋았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으므로 우리는 계속 물을 마셔야 했다. 물은 나무 물통에 들어 있었고, 아침 일찍 그 안에 얼음을 넣었다. 얼음이 두어 시간 이상 가는 법이 없었지만 뜨거운 물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물을 마시러 갈 때는 조적공이 곧 찾게 될 물건을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조지 하퍼에게 배웠다. 한마디로, 움직임을 최소화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를 끝까지 버티기 힘들었다.”(p.74-75).
3) 나는, 공간과 건축은 사람에게 아주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그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짓는 거라고 믿는다. 교회 건축에 대해서 이전에 썼던 글 하나 첨부. 제목은 ‘교회의 크기와 언어’. http://holyfat.blogspot.kr/2013/12/blog-post.html

2016년 8월 14일

소송 비용 모금을 처음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이번 재판의 판결이 바로 내려지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제가 소송 비용 모금을 제안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밝히려고 합니다. 모금을 제안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일도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원칙과 의지에 따른 자발적인 행동이라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1. 원고 송병현 교수가 피고 이성하 목사와 맹호성 이사를 고소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이 소송의 원고는 <한 명>이지만 피고는 <두 명이 넘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서적 표절반대>(이하, <신표> ) 싸이트에서 한국 기독교 학문 세계의 정화와 성숙을 추구하는 <공익적 성격>을 봤고 그 공익적 성격에 <동의>해서 <신표>에 회원으로 가입, 활동해 온 저에게 <신표> 공동 관리자들의 피소는 <저에 대한 피소>와 다를 바 없었고,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 학문장의 공익성> 자체의 피소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송 비용 모금은 우리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추구, 보전해야 할 권리와 책임이 있는 한 시민인 제게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행동( 더 나아가, 다수의 <신표> 회원들의 행동)을 "피고들의 선동"에 이끌린 행위라고 주장하는 원고 측 주장은 <사실>과 어긋나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건전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공익성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자발성>을 <폄훼>하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언이라고 하겠습니다.
2. 저는 한국 기독교 학문장의 정화와 성숙이라는 <공익적 목표>를 위해 활동하는 <신표>의 이번 송병현 교수 건 문제 제기는 그 <공익적 성격> 때문에 개인들 사이의 <사적인 명예 훼손 행위>와는 달리 법률적 판단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법률신문>(2010.8.25)에서도 소개됐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표절 의혹 제기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 "음해 아니면 연구성과 비판 허용돼야" , 청주지법, 교수에 무죄선고 > 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학술적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연구성과에 대한 의혹 제기는 공적 관심 사안으로서 연구윤리 및 실적 평가의 공정성과 관련된 여론 형성에 기여하는 측면이 강해 순수한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또 "피고인이 피해 교수들에게 소명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감사한 결과를 정보통신망을 통해 일방적으로 적시했고, 오래전의 논문을 문제 삼았으며, 적시한 내용으로 침해되는 개인적 법익이 가볍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방의 목적은 부인된다"고 판시했습니다.
3. 이번 소송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학문적 정직과 성실성>이라는 공공적 가치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확인 받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6.6.11.
신동주 드림 ( <신학서적 표절반대> 회원, 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


2016년 8월 13일

어떤 싸이즈

1. 저는 대형 교회에 대해 엄청 반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당혹스러웠을 때가 있었어요. 한 대형교회 목사가 교회를 반으로 나누겠다고 했을 때였는데요, 꽤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하는 거예요. 근데, 쪼개도 1만이에요, 그 교회는. 두 개로 나눌 게 아니라 백 개로 나눠야 해요. 그래야 한 팀이 200명이 되죠. (내 기준 -.-) 이렇게 대형 교회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제게 이번 주에 엄청난 <대형 사건>이 일어났으니....
2. 그저께 저녁에 페이스북에 올린 <새롭게하소서> 영상 하나가 도달 314만 명, 공유 17만4천회, 좋아요 2만7천명, 댓글 3천 개, 조회 149만 회를 기록한 거예요. 이러면서 제게 <작은> 문제가 생겼어요 ㅋ큐ㅠ(웃어야할지울어야할지). 평범한 숫자 감각을 잃어버린 거예요.
3. 최강희 제2편을 올렸는데, 제2편은 지금 공유 1497회, 좋아요 3386. 그런데 <이게>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사실 공유 1400개는 대단한 거거든요) 그러면서 저는, 아, 이게 대형 교회 목사들이 느끼는 <갈증>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요. 어느 순간, 한 명이 <목적>이 아니라 300만을 구성하는 <단위>로만 느껴지는....더 멀리가기 위해 되도록 빨리 넘어서야할 <단계>로만 느껴지는....200명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네, 제 마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대형 교회> <대형 집회>로 변해 있었어요....제 마음은 <잠실종합운동장>이었어요....
4. 주님, 공유가 많이 되는 간증과 공유가 적게 되는 간증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디와 페북을 하는 유저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셔서 모두가 <크기>에 속지 않게 하여주십시오. 작은 누룩, 작은 씨, 작은 자 한 명, 작은 하나님 나라....
2016. 8. 12.
ps.
네가 페북에 올리지 않은 이야기...네가 올릴 수 없었던 그 포스팅...에 나 혼자 슬퍼요와 화나요 눌렀단다....죄송해요 주님....제 깔끔한 타임라인에 속지 않는 당신에게 이 시간.....

2016년 7월 28일

『천년 동안 백만 마일』(도널드 밀러, IVP)을 읽고.

1.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두 아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얘들아, 이 세상에서 섹스를 완전하게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뭔 줄 아니? 관계를 갖고 난 후 의무적으로 느낀 점 써내라고 하는 거야, A4 용지 하나 가득. 일 년이면 이 세상에서 섹스 없어진다. 어, 아빠 말 안 믿냐?  독후감은 사라져야 해, 독후감 때문에 사람들이 책을 안 읽게 되는 거라고. 듣고 있니?  
2.  인생에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남을 위해 살아봐야겠다는 절박함에서 청소년 멘토링 NGO <러빙핸즈>에 가입하고 첫 교육을 받던 날이었어요. 교육 시작과 함께 진행자가 교육 과정 수료를 위해선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할 숙제가 있다는 거예요. 숙제? (음, 온라인으로 지원서 받을 땐 숙제 얘긴 없었는데 ㅠㅠ 궁시렁 궁시렁). 진행자의 말이 이어졌어요. 저 뒤에 있는 4권의 책 중 하나를 골라 독후감을 써주세요. (뭐라고? 독후감이라고?? 지금 그만두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겠지? ㅠㅠ ) 9시에 시작한 교육은 저녁 6시30분에 끝났고 저는 느릿느릿 독후감용 책이 전시돼 있는 사무실 뒷편으로 걸어갔어요. 이 중에서 고르면 되는 건가요? 네, 넷 중에서 마음대로 고르시면 됩니다. (마음대로가 아니라 의무적이겠지). 저는 기계적으로 제일 왼쪽에 있는 책부터 집었어요.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저는 나머지 셋은 보지도 않고 그 책을 샀어요. 어느새 제 불평은 멎었어요. 홍대역에서 전철에 오르자마자 책을 폈어요. 밀러는 제가 (하이네켄이나 칭따오만큼이나) 좋아하는 작가였어요. 뭐랄까, 횡재를 한 느낌이었어요.
3. 밀러가 쓴 첫번 째 책 『재즈처럼 하나님은』(복있는사람)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45주 이상 올랐을 정도로 성공적이었어요. 저도 읽었었는데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고백하는 이런 구절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내 시간의 95%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데 들어간다". 밀러는 C.S.루이스의 시(詩)도 한 편 인용하며 이런 말을 해요. "처음 읽었을 때 그 심정에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꼭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밀러가 인용한 루이스의 시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재즈처럼 하나님은』, p.32에 나와요.)
이 모두는 당신을 사랑함에 관한 번지르르한 궤변입니다.
태어나던 날부터 나는 이타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철두철미 속속들이 타산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나는 하나님,당신,모든 친구가 나를 챙겨 주기만을 바랍니다.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평온함,안심,즐거움입니다.
나는 내 살갗 밖으로 한 치도 기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학자의 앵무새는 헬라어를 말하겠지요.
내 감옥에 갇힌 나는 언제나 원점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부끄럽지만 이 시, 제게는 <시>가 아니라 저에 대한 <다큐>로 다가왔어요. 제가 추구하는 목표, 정확하게 "평온함, 안심, 즐거움", 이 셋(!)뿐이었어요.(여전히, 이예요.) 신의 은혜가 아니면, 신의 개입이 없으면, "내 살갗 밖으로 한 치도 기어 나올 수 없는" 내 인생. 밀러는 참 가벼운 필치로, 저를 깊이 찔렀어요. 밀러는 첫 책의 성공 이후 계속 해서 책을 냈어요. 하나 계속 실패했어요. "내가 몇 년 전에 쓴 그 책이 많이 팔렸고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자만심에 젖어 내가 대단한 작가나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로 쓴 책들이 잘 팔리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다시 정서가 불안해졌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p.25). 여친과도 헤어졌지요. 영성에 대해 멋진 글을 썼던 밀러는 이제 아침이 와도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TV리모컨만 찾는 그런 사람으로 변했어요. (제가 베스트셀러 작가의 심정은 잘 모르지만, 무기력한 사내 심정은 잘 알아요). 그리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밀러에게 어느날 영화제작자 스티브와 벤이 찾아와요. 밀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한 편 제작하고 싶다면서요.
4.『천년 동안 백만 마일』은 영화를 한 편 찍으려다보니까 다시 바빠졌고, 바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됐다, 라는 얘길하는 책이 아니어요. 다시 바빠짐. 다시 주목 받음. 다시 화려해짐은 사실 변화가 아니잖아요. 단순한 커버링이지요. 그저 잠시 미뤄두기이지요.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엄청난(?) 성공을 경험한 뒤에도 (중복이라 시전한 <썰렁> 조크 -.- ) 저라는 사람은 여전히 저 한 사람 안에 갇혀 있고, 지금 비록 틈틈이 펀치 시즌2를 준비하고 있지만, 혹 시즌2가 성공하더라도, 그 성공이 저를 <진짜>로 만들어주지 못할 거란 것, 너무 잘 알아요. (그런데 저는 진짜로 진짜가 되고 싶어요. ) 그래서 저는 밀러와 함께, 정말 밀러와 <함께> , 제 삶이라는 스토리에 <빠져있는 게> 뭘까, 절박하게 물었어요. 예, 밀러의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밀러가 되었어요. 왜 나는 진짜를 살고 있지 못할까. 제가 묻자, 스티브와 벤이 제게 말했어요. "우린 지금 이야기의 갈등을 구상하는 중이에요 (...) 진짜 갈등다운 갈등이어야 해요. 좋은 이야기가 되려면 도널드는 자기가 부딪치기 싫은 일에 부딪쳐야 합니다".(p.80). 여기에 대한 저와 도널드의 생각? " 나는 (...) 쉬운 이야기를 바랐다. 하지만 쉬운 이야기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p.48). 밀러의 다음 고백은 제 고백이나 마찬가지예요. " 어떤 이야기가 나를 부르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더 나은 이야기를 사는데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더 나은 이야기를 살지 않는 것은 죽기로 작정하는 것과 같다. (...) 죽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p.82).
5. 평온함, 안심, 즐거움, 이 셋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불쌍한 사내가 한국에 한 명 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가 기꺼이 갈등에 부딪치고 <더 나은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소서. 그 새 이야기에선, 불쌍한 주인공이 1센티라도 자신을 뚫고 나올 수 있게 하소서. 1센티라도 이전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다가가게 하소서.

2016. 7.28.
신동주

2016년 7월 19일

『터프 토픽스 Tough Topics : 기독교의 난제 25가지』(샘 스톰스 지음, 새물결플러스)를 읽다가.

지하철에서, 내 앞 여성의  <짧은 청 반바지>에서 급히 눈을 뗀 나는 손에 쥐고 있던『터프 토픽스 Tough Topics : 기독교의 난제 25가지』로 다시 눈을 돌렸다.샘 스톤스 저, 장혜영 역, 새물결플러스 간. 목차를 훑다가 제17장 <천국에도 섹스가 있을까?> 에 잠시 눈길을 두었지만 나는 평소 읽던 습관대로 제1장 첫 페이지를 폈다. 1장의 제목은 <성경은 무오한 책인가?>. 그리고 난 충격에 빠졌으니! 저자는 그리스도인에게 세 가지 권위의 근거가 있으니 어떤 이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어떤 이는 <성경>을, 무언가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최종 권위 출처로 삼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세 번째 출처를 인정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앙과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 최종적인 권위는 성경이다”. 충격충격! “교회”(혹은 공동체 혹은 사회 혹은 전통)와 “개인”과 “성경”을 이렇게 독립적인, 서로 배타적인 관계로 보는 이런 주장이, 2016년 요즘도 나올 수 있다니! ‘인식론’을 조금만 공부해도 위 주장은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는데! 모든 성경은 ‘해석’해야만 하기에 자동적으로 <해석하는 개인>이 인식 과정에 들어가고, 개인은 무엇을 해석함에 있어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전통과 해석>에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기에 <교회>(혹은 공동체 혹은 전통 혹은 사회)가 성경해석이란 과정에 필수적으로 침투하게 되는데. 이런 ‘인식의 실재’를 무시하고 <용감무식하게> 나는 당신이 <전통>이나 <개인>이 아니라 <성경>을 삶의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권위로 삼기를 바란다, 같은 주장을 2016년에도 여전히 할 수 있다니! (믿을 수 없다). 이어서 저자는 그 다음 페이지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분이 성경에 대해 가르치신 바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구약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대하셨다”라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샘(Sam) 네 생각일 뿐이지. 구약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고백하는 것이 내게는 가능하니. 그 좋은 예가 요나 이야기의 역사성. (여기에 대해 내가 이전에 쓴 글 첨부하면: 요나의 물고기를 좇다가 만난 질문들. http://holyfat.blogspot.kr/2014/05/blog-post_7.html ). 
이렇게 책을 사서 제1장 처음 몇 쪽 읽다가 ‘급피로’를 느낀 나는 잠시 17장을 열어 몇 줄 살펴보다가 그냥 책을 덮었으니. 지하철은 동작역을, 계절은 여름을 지나고 있었으니. 난제는 샘 바로 너이니.

2016년 7월 8일

『신학자가 풀어 쓴 유교이야기 』(배요한 지음, IVP)의 서론을 읽고.

배요한 교수가 쓴 『신학자가 풀어 쓴 유교이야기 』(IVP)의 서론을 읽고 있는데 넘 좋아요. 신학교를 졸업하고 유교를 <제대로>공부하고 싶어 성균관대학교에 또 들어간 일 등 자신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진실성과 성실성이 느껴졌어요.(신학교와 성균관대 양쪽에서 적지 않은 오해 비난을 받았다고 하세요 ㅠㅠ) . 다음 구절을 읽는데 가슴이 찡. "그후 박사과정을 위해 유학길에 오른 저는 2002년 4월11일 동양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비교 연구로 명성이 자자했던 보스턴 대학교의 총장이자 제 지도교수가 될 로버트 네빌(Robert C. Neville)을 만났습니다. 네빌은 이 분야에 있어 미국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분으로, 청교도 신앙 위에 세워진 도시 보스턴의 대표적인 대학교 학장답게 비교종교라는 학문적 방법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재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뛰어난 신학자입니다.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가 제게 했던 질문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짧게 인사를 나눈 그는 다그치듯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한, 자네는 한문을 독해하고 한문으로 된 고전을 읽을 수 있나?" "심성론에서 퇴계와 율곡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나?" 저는 단호한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네빌은, 자신은 지금까지 이 두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학생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며 저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었습니다." (p.14) 이상하게 옛날부터 스승과 제자가 만나는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보다 더 제 마음을 뛰게 만듭니다. " 마지막으로 다른 종교를 공부하기 전에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과 본질을 비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모든 종교는 하나의 종교 전통으로 사회 속에서 그 종교의 본질적 측면과 비본질적 측면 혹은 왜곡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 (p.22)

(서플먼트)!
내 몸의 두 배는 돼 보이는 거구의 헤비 (N.T. Heavy) 교수가 내게 물었다. "동주, 자네는 헬라어를 독해하고 헬라어로 된 1세기 자료들을 읽을 수 있는가?" "자네는 구원론에 있어서 바울과 당시 1세기 유대교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나?"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very negative"라고 대....(여기까지)

2016년 5월 28일

'표절' 여부 관련 첫 재판을 앞두고.

1. 최근 개신교 신학계가 주목하고 있는 사건 하나가 있는데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백석대학교 송병현 교수가 자신의 저서 <엑스포지멘터리>에 대한 '표절 의혹' 문제를 제기한 이성하 목사(원주가현침례교회)와 맹호성 이사(알맹2) 때문에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면서 두 사람에게 각각 1억원 씩 총 2억원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한편 송병현 교수가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지자 국내외의 <신학서적 표절반대> 그룹 회원들 수백명은, 이번 소송 사건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 한국 신학계에 바른 연구 풍토가 세워지기를 바라면서, 피고 이성하 목사와 맹호성 이사의 재판 비용을 모금하는 운동을 벌였고, 자발적인 이 운동을 통해 9,987,113원(2016.5.2.현재)의 재판 비용이 모였다. 민사 소송 건 첫 공판은 6월 10일 오후 2시30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다.
2. 지난 며칠 동안 나는 한국의 개신교 신학교 교수들에게 <호소문> 하나를 쓰고 있는데 아직도 완성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 어떻게 이번 사건의 실상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신학자들이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고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있지, 라는 생각에 약간 분노에 차서 격정적으로 썼다. 호소문의 마지막에선 에스더 4장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하는 말을 인용할 생각이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 4: 13-14). 하나 점점 쓰다보니, 이런 글을 써도 아무 손해 보지 않는 나와, <입장 표명>을 하게 되면 이런저런 유형무형의 손해, 피해, 고통을 당할 신학 교수들의 처지가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적하려고만 했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부족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내가 <그 위치>에 있다면 과연 용기 있게 행동할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썼던 글을 지우고, 신학 교수들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호소하는 글을 쓰기로 했다. 그렇기에 아래 글은, 미래의 내가 어느날 오늘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꼭 용기를 내라고 나에게 쓰는 글이다. 정말 상식 수준의 이 글을, 지금 고민 중인 분들에게 생각을 정리하는 작은 메모지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부끄럽지만 나누려고 한다. 아래와 같은 생각을 했다.
● <매일 얼굴 보는 사람>. <앞으로도 계속 얼굴 볼 사람>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더 생각해보지도 않고,"그걸 어떻게 해!"하며 바로 못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하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대와 마주치는 일은 몹시 불편할 수는 있어도 죽는 일은 아니다. 이번 주 이렇게 <얼굴>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런 결정을 내릴 때는 매일 보는 동료 원고/ 피고의 얼굴도 생각해야겠지만, 다른 <두 얼굴>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면해야 할 <하나님의 얼굴>. 그리고 내가 아침 저녁 거울을 통해서 마주 볼 <내 얼굴>. 결국,누구를 더 두려워할 것인가, 같다.
● 우리 사회는 내부고발자에 대한 편견이 심한 곳이다. 마음 고생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잃는 것만 있을까? 얻는 것은 없을까? 내가 만약 입장 표명을 한다면, 사회적으로, 혹은 학내에서, 유형무형의 핍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나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 또한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학생들의 눈빛>. 내 수업 시간 내 교실에서 나는 <진짜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총장(비유적 표현이다)의 사랑과는 다른. 어느 것을 더 귀히 여길 것인가. 역시 선택의 문제란 생각이 든다. 총장의 사랑과 제자들의 존경을 동시에 받으려는 건 실현 불가능한 욕심일 것이다.
3. 이번 글처럼 쓰면서 스스로 겸연쩍고 부끄러운 경우도 없었다. 의를 위해서 핍박 받아본 일 없는 사람이 지금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 의를 위해 핍박 받으라고 하고 있으니. 몹시부끄럽다.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내가 부디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를 위해 기도드릴 뿐이다. 나는 언제쯤나,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와는 먼 얘기처럼 느껴지는, 이 의와 박해라는 단어와 친해질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016.5.28.
<참고>
1) <신학서적 표절반대>에 '피고' 한 분이 올린 기도 제목을 나눕니다.
첫째, 좋은 판사들 만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에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부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재판 과정을 통해서 표절의 문제를 정확하게 판결할 수 있는 정의로운 그런 판사를 만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도의 힘이 부탁합니다.
둘째, 이 재판 과정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신학교, 그리고 그 지도자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정의가 뭔지 깨닫고, 양심이 회복되는 기회가 되도록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2) <뉴스앤조이>에서 상기 사건을 소개한 내용입니다.
- 베스트셀러 구약 백과사전, '짜깁기 표절' 의혹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9259
송병현 교수, '표절 반대' 운영진에 2억 손해배상 청구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415
3) 신학서적 표절반대(https://www.facebook.com/groups/1602665126689416/)는
공개 페이지입니다. 이곳에 오시면, 지금까지의 사건의 진행 상황 등을 알 수 있습니다.
4) 첫 공판 시간과 장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시 2016년 6월 10일 오후 2:30
장소 서울중앙지방법원 (교대역 11번 출구방향)
여러분이 함께 방청으로 참여해주신다면, 재판에 임하는 이성하 목사, 맹호성 이사 두 분에게 큰 힘이 될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4월 20일

『아버지의 통곡』(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 양무리서원)을 읽고.

1. 월터스토프는 미국 캘빈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자이다. 1983년 여름,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월터스토프 씨인가요?" - "네" - "에릭의 아버지 되십니까?" - "네". 이 책은 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등산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일 년 뒤 아들의 묘지를 찾을 때까지 그의 삶에, 그의 마음 속에,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2. <구약>에는 내가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구절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직접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고 하고, 법궤를 만지면 죽는다고 하고 할 때면 ,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거룩이 중요해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할 수 있을까. "내가 죽고 싶지 않기에 정면으로 당신을 보지 않고, 죽지 않고 싶어 법궤를 만지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마음이었다. "힘 없는 게 죄지,뭐"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통곡』을 읽다가 처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는 게 <약자의 설움>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다음 대목을 읽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나는 늘 이 말이 아무도 그분의 빛나는 영광을 보고는 살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한 친구는 내게 어쩌면 이 말이 아무도 그 분의 슬픔을 보고는 살 수가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p.92).

3. 내가 하나님을 크게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가끔 하나님이 너무 <폼을 잡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슬픔을 자기 마음에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담고> 계신 하나님의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 명령은. 아들아, 나를 정면으로 보지마. 나를 만지지 마. 내 슬픔은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단다, 였다. 이 경고 들을 때 나 더 이상 기분 상하지 않는다. 괜히 죄송할 뿐.

2016.4.20.

p.s.
(1) 원서의 제목은 『Lament for a Son』이다. 나는 1992년에 '양무리서원'에서 번역한 책으로 읽었다. (2014년에 출판사 '좋은씨앗'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오기도 했다.) 내가 읽은 양무리서원판에는 손봉호 교수의 추천사가 붙어 있다. 그 추천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 몇 년 전에 나는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개최되었던 기독교 학자들의 모임에서 그를 만났고, 그의 예리한 판단력과 그리스도인다운 겸손과 부드러움, 그리고 철저히 일관성 있는 행동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굶주리는데, 그리스도인이 관광같은 것을 즐길 수 없다해서, 그는 그 나라의 유명한 빅토리아 폭포 관광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같이 행동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

(2) "월터스토프 부부는 아들 에릭을 기리기 위해 작곡가 캐리 랫클리프에게 자기들이 주로 성경에서 따와 만든 가사에 맞추어 진혼곡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다. <레퀴엠 : 에릭 월터스토프를 기리며>는 1986년 5월 18일 미국 미시간 주의 그랜드래피즈에서 처음 연주 되었다. " (『아버지의 통곡』, '부록' 중에서).

2016년 4월 16일

나는 아주 형식적인 교회에 다닌다

1. 왜 루터 교회로 정했어요?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때마다 나는, 나이드니까 점점 예전(禮典,liturgy)에 끌려서요. 예전이 살아있는 교회를 다니고 싶었어요, 라고 대답을 한다. 그러면 아,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거요? 라는 후속 질문이 들어오고 나는 그와 함께 웃는다. 맞아요!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거요! 매주 성찬도 하고요.

2. 나의 스승(c.s.lewis)께서는, 인간의 <육체>에 대해 여러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셨는데, 지금 까페에 있는 관계로 그냥 기억에 의지해서, 내가 자주 떠올리는 말씀 한두 개 소개하면: 사람들은 자주 육체가 정신을 유혹하고 넘어뜨린다고 생각하는데 , 우리를 넘어뜨리는 건 사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스승님 왈, 죄를 짓는 건 정신이지 육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많은 경우 육체가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피곤하다며 “이제 그만 자자”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던 걱정>, <하던 원망>을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육체가 없었다면 - 육체의 그 한계가 없었다면 - 우리는 일 주일 내내  <하던 걱정>을 하며, 잠시의 쉼도 없이 <하던 원망>을 하며, 보낼 수도 있었다. (특히, 나! -.-) 주기적으로 허기지고, 피곤하고, 졸리다는 건, 그래서 정신이 육체에 굴복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큰 다행이고 유익인가.  

3. 스승께서는 이런 비슷한 말씀도 하셨다.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지! 무릎 꾾고 기도하는 유익을 모르니 말이야."  이 말씀을 하시는 스승께서는 결코, 하나님은 무릎 끓고 드리는 기도만 받으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게 아니다. 설마 우리 스승께서 진심으로 기도할 때, 자세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시겠는가. 스승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존재인 우리는,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보다 많이. 그렇기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더 쉽게> 알 수 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은 형식을 따지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셔"라는 말에 속는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육체와 형식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잊고 무시하는지. 

4. 어떤 강렬한 <느낌>이 와야만 뭔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거라는 <오래된 오해>가 가장 큰 걸림돌인 거 같다. 그래서 별다른 느낌 없이 지난 주와 똑같은 예전 <형식>을 따라 할 때 우리는 자주 우리의 행동이 <가식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느낌 없는 형식은 가식이 아니다>. 가식은 느낌 없는 형식이 아니라, 자기가 실제 믿지 않는 걸 믿는 것처럼 보이려는 형식이다. 자기가 믿는 바를 - 느낌이 안 와도 -  표현하고 행하는 건 훌륭한 일이고 훌륭한 믿음이다. (오, 주여, 우리를 두 번째 가식에서 구해주소서! 느낌 없는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기뻐 받으시는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

5. 다음 순서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합창 순서였다. (나는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었다). 줄 맞춰 입장한 가족들의 노래가 시작 됐다. 오늘 합창을 위해 '평화의 나무 합창단'이 한 달반 동안 가족들과 미리 만나 함께 노래 연습을 했다. 도종환 시인의 화인 ‘화인(火印)’ 을 합창 했다. 처음이었다. 세월호 집회에서 가족들에게 이런 <형식>이 주어진 것은. 너무나 큰 슬픔과 분노를 표현할 방법 없던 가족들에게, 자유 발언대라는 <무형식>과는 다른, 슬픔과 염원을 차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런 합창이란 형식이 주어진 것은. 합창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슬픔이 있었지만, 진정성 있는 가사와 선율 안에서,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쉼을 얻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한 소절, 한 소절 노래를 부르는 가족들을 보면서, 합창이라는 이 미리 짜여진 형식을 준비한 분들에게 깊이 깊이 감사드렸다.   

6. 나는 내일도 무척 <형식적인 교회>에 가서 무척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것이다. 종종 사랑과 감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가끔 표현할 방법 없는 종류와 크기의 감정 때문에 <낙심하는> 나에게, 여전히 예전과 형식이 살아있는 교회에 다닌다는 건 큰 힘이고 격려가 된다. 참, 천국에선 형식이 없어질까? 그때는 <진심>과 <마음의 중심>만 남을까? 나는 하늘나라에서도 형식은 존재할 거라고 본다. 우리는 거기서도 여전히 육체적인 존재일테니. 다만, 이런 상상은 해 본다. 어쩌면 그때는 <느낌>과 <형식>이 하나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느낌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온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2016.4.16.

p.s.
지금 내가 출석하는 루터교회의 예전을 말할 때 내가 꼭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촛불점화, 기도송, 영광송, 성찬식을 할 때 교회 뒷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2016년 4월 4일

『신학용어사전』(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그리심)을 읽고.

1. "어떤 교리에 관한 진짜 비판은 그 교리의 역사다"라는 경구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경구다. 진짜 이 경구에 동의한다. 교리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종종 <지금 내가 꽂혀있는 이 교리>가 사실은 <간신히 합의>에 이른 교리라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나는 낙심된다기 보다는 기쁘다. 하나님은 교리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묵상할 수 있게 돼서 말이다. 이렇게 교리를 역사적으로 파들어가보는 지난한 작업을 후스토 곤잘레스는 <수백 개>의 <신학 용어들>을 두고 수행했다. (역사신학을 전공해서 가능했으리!) 곤잘레스의 『신학용어사전』을 읽으며 신학 용어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수 백번 만났...(오바 같다 -.-) "나의 신학 수업 첫 주는 흥분으로 시작되었다가 좌절로 끝이 났다. (...) 용어들은 항상 예상했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루터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을 시작했지만 루터파(Lutheranism)는 개혁파(Reformed)가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 (곤잘레스, 『신학용어사전』 '들어가는 말' 중에서).

2. 곤잘레스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신학 용어 약 300개(A~Z)를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A 항목에 나오는 '적그리스도(Antichrist)' 라는 용어를 읽을 때 나는 알게 됐다. 아, 내가 이 책을, 이 사전을, 끝까지 읽겠구나! (좀 유치해보이는 용어에서 감명 받은 거 같아 좀 민망하다.) 곤잘레스는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적그리스도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 적그리스도.신약성경에 5번만 나타나는 용어로 요한일서에 4번, 요한이서에 1번 나온다.그러나 기독교 종말론(Eschatology)에서는 매우 자주 논의되는 주제이다". 딱 두 줄이었지만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요한계시록에는 안 나오는구나. 당근 나올 줄 알았는데... -.- 그리고 이 용어를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하던 곤잘레스는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 이 모든 것들과 관련하여 지적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요한서신에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는 최후의 적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전부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요한일서 2장 18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으니' " 그래서 나는 또 확실히 알게 됐다. 적그리스도는 복수(複數)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 예상은 다음 구절에서도 또 한 번 깨졌다. " 한편 그러한 악은 단순히 요란스럽게 참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진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유사한 존재로 나타나며,이를 통해 기만하는 모든 세력들의 토대를 놓는다." (이 대목 읽을 때 목사 네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이렇게 적용해도 되는 건가, 혼자 자문했다.계속 자문 중.)

3. 하나 뭐니 뭐니 해도 역사신학자로서의 곤잘레스의 장기는 성찬 , 삼위일체 , 성육신 , 필리오케 등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었던 용어들을 소개할 때였다. 요즘 루터 교회를 출석하기에 '성찬' (Eucharist)을 주의 깊게 보았는데 흥미롭고 유익했다. 일단, 평신도에겐 포도주를 주지 않고 빵만 주는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알고- 나 혼자 책 앞에서- 충격에 휩싸였다.(평신도는 더 경건해서, 성직자와 달리, 피 없이 살만 먹어도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혼자서 궁시렁궁시렁...-.- ). 초기 성찬은 "그의 나라에서 있을 최종 연회를 고대" 했기에 "기뻐"하는 시간이었다는 사실, "성찬식이 장례식 부위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중세 초기"라는 사실 등을 새로 알게 됐다. 화체설,실제적 임재설, 영적 임재설 등을 설명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예상하지도 못했고 원하지도 않았던 하나의 결과는 수많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성찬이 매우 드물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전 형식의 글 속에, 이런 역설과 아이러니까지 빼놓지 않고 다 버무릴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4. 내가 특히 지적 쾌감을 느낄 때는 바로 그런 때였다. 역사학자로서 곤잘레스가, 큰 맥락이나 흐름에 대해 한마디 툭 코멘트 할 때. 논쟁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나올 때. "2세기 말엽까지 그리고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점차 예수에게보다는 마리아(Mary)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동정녀 탄생). "의미심장하게도, 2세기에 일어났던 동정녀 탄생이라는 주제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예수가 처녀에게서 탄생하였다는 생각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탄생했다는 개념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믿기가 어렵고 거북스러웠던 것은 처녀가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황송하옵게도 여자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셨고 아기로 나셨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현재 사도신경의 전신인 고대 로마 상징(Old Roman Symbol)은 예수에게 인간 아버지가 있다고 주장하던 자들에게 반대해서가 아니라, 예수가 탄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고백된 것이다". (동정녀, 한 번 더 -.- ). "이러한 근거에서 최근의 많은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권위'(authority)에 관한 논의보다 해석학에 초점을 둔다 " (성경). "의미심장하게도 전반적으로 헬라 문화권 교회의 절대 다수는 휘포스타시스를 선호했고, 프로소폰이라는 용어를 거절했다." (인격, 위격)." 기독교가 처음 시작되던 때부터 기독교회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다루어야만 했다" (해벌 解罰)

5. 마지막으로 '거룩한 변화'(Transignification)라는 용어를 보자.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1965년 교황 바울 6세는 자신의 교서 '미스테리움 피데이'(Mysterium Fidei)에서 거룩한 변화설을 이단으로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이에 대항하여 중요한 보류(coveat)를 선언하였다" (p.264). 『신학용어사전』는 내가 태어나서 완독한 최초의 사전임과 동시에,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비문과 오탈자가 제일 많은 책이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읽으며 무척 많이 배운 이 책에 대해서, 절판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으나,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추천에 있어서만큼은, 중요한 보류(coveat)를 선언하....-.-

2016.4.4.

* 요즘도 책을 읽다가 곤잘레스의 이름이 나오면 반갑다. 제일 최근에 그를 다시 만난 건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 (앤서니 C. 티슬턴 지음, 새물결플러스)을 읽던 때였다. "역시 곤잘레스야!"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던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곤잘레스는 예컨대 기독교의 창조론이 처음 세상의 기원에 대한 물음을 묻는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생명과 실존에 대한 감사에서, 유한성과 피조성과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에 대한 인간의 자각에서, 그리고 인간의 선물과 세상의 선함에 대한 그분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려는 욕구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p.40).

2021. 4. 4.

** 오늘 쓴 서평을 처음 페북에 올린 때는 2016.4.4. 그후 2018.4.4 에 수정본 올림. 그리고 2021. 4.4 오늘 재수정본 올림. 내게 4월4일은 곤잘레스의 날. 썰렁.

2016년 3월 27일

입교식

오늘 내가 다니는 루터중앙교회에 입교를 했다. 이제 정식 교인이 되었다. 투표권도 있고, 짐도 같이 지는 거란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이 무겁게 다가왔다. 입교식을 거행하기 위해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내 뒤에서,누군가의 손이 슬며시 다가와, 내 가죽재킷의 '칼라'를 내리는 것이었다...! 휙 돌아보면 상대방이 놀랄 거 같아 천천히 뒤를 돌아봤더니 노란 한복을 입으신,어머님 연배의 권사님 한 분이 인자한 미소지으며 앉아계셨다...권사님을 위해...칼라를 다시 올리지않았다... 젊은여성이 내렸다면...(여기까지)

2016년 3월 19일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미메시스)를 읽고.

1. < 혼밥생활자의 책장>이라는 팟캐스트를 제작하는 후배 K가 선배,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 30분이면 다 봐요, 라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빨려들어가서 30분만에 다 봤다. 2012년 「보도이(BoDoi)」 선정 〈올해 최고의 만화〉와「그래픽노블 리포터」선정 〈2012년 최고의 그래픽노블〉로 뽑힐만 했다. 다비드라는 남자가 두 딸과 두 번째 아내를 남겨놓고 암에 걸려 죽는 이야기다.
2. 나는 마지막 컷이 제일 좋았다. 방금 막 숨을 거둔 다비드가,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컷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약물 치료 받는, 점점 말라가서 뼈만 앙상한 다비드가 아니라 처음으로 <다비드의 원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에 왜 그렇게 끌렸는지 모르겠다. 아주 젊은 얼굴도 아니었다. 하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얼굴에선 내 부러움을 자극하는 그 어떤 싱그러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작가는 다비드의 이 <진짜 모습>을 - 이 그래픽노블 한 권을 작화하는 내내 - 이미 <보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도 잊지 않고. 혹시 제일 먼저 그리지는 않았을까? C.S.루이스는 『영광의 무게』에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나 여신이 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더없이 우둔하고 지루한 사람이라도 언젠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미래의 그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무릎 꿇고 경배하고 싶어질 존재가 되거나, 지금으로선 악몽에서나 만날 만한 소름끼치고 타락한 존재가 되거나. (...)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고, 같이 일하고, 결혼하고,무시하고,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거나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입니다." 마지막 컷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루이스가 떠올랐는지, 루이스를 읽었기에 마지막 컷이 그렇게 좋았는지, 잘 모르겠다.
2016.3.19.

2016년 3월 10일

알파고

1. 이세돌과 겨루는 알파고를 개발한 건  한국의 한 영세한 스타트업이었다. 올해 41세의 민기에게 알파고는 마지막 기회였다. 민기는 7년 전 연주와 결혼 했고 5살 된 딸이 있었다. 전세를 살고, 갚아야 할 대출금이 있고, 조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지인의 소개로 어렵게 이세돌을 섭외할 수 있었다. 한 판이라도 이겨야 했다. 알파고는, 마지막 기회였다.

2. 시합이 시작됐다. 후배가 불러주는 알파고의 착점이 리시버를 통해 민기의 귀에 들려왔다. 다섯 수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는 후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기 선배, 작동을 안 해요. 알파고가 전혀 작동을 안 해요".

3. 바둑알을 쥔 민기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이세돌이 의아하다는 듯 민기를 바라봤다.

4. 할아버지가 깍아주시던 참외, 할아버지와 두던 오목,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두려워 하는 곳으로 가야한다, 민기아. 두려운 곳으로 가서 집을 만들어야 해 ". 바둑알을 쥔 민기의 손이 천천히 좌변 중앙 쪽으로 향했다.

5. 대국이 끝났다. 알파고를 설치해 놓았던 대국장 뒷편 방에서 아내가 후배와 나왔다. 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선 말없이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여보..." 말을 잇지 못하는 여자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두 부부 옆으로 청색 수트를 입은 이세돌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대국장을 취재하던 그날 언론은 중소업체에서 개발한 알파고가 세계 챔피온을 상대로 거둔 1승을 대서특필했다.

2016년 3월 9일

『칼 바르트』(에버하르트 부쉬 지음, 복 있는 사람)를 읽고.

바르트의 조교였던 에버하르트 부쉬가 지은 <칼 바르트>를 막 다 읽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바르트가 씨름하며 넘어서고자 했던 <문제>를 알아야 하는데, 935쪽 되는 이 책에서 부쉬는 바르트가 비판하는, 다른 진영의 학자 불트만 등이 했던 고민을, 일절 소개하지 않고, 그저 바르트의 일방적인, 선언적인 글만을 소개. (내가 평전의 저자라면, 바르트의 적수들이 했던 고민들을, 최소 3백 페이지는 할애해서, 최대한 매력적으로 소개했을 거 같다. 그게 <칼 바르트>를 살리는 길인데...) 몹시 지루했던 평전은 그런데, 바르트 서거 1년 전부터 갑자기 내 마음을 사로잡음. 평생 학문적으로 다투고 싸웠던 , 임종을 앞둔 브룬너에게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바르트는 친구에게 부탁. 그에게 말해주시오...내가 그에게 맞서 '아니야! '라고 외쳐야 했던 시간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고. 지금 우리는 위대하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롭게 '그래'라고 말해주셔서 그 덕분에 살고 있는 거라고. 이 말은 브룬너가 살아서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p.820) 바르트의 다음 고백이 나를 특히 부끄럽게 했다. "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내가 해야 할 마지막 말은 '은총'과 같은 어떤 개념어가 아니라 하나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은총이다. " (p.845)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궁극의 신학적 개념 하나 찾아헤매던 나는....갑자기 무안해졌다...

2016년 2월 22일

밀레니엄

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생태공원에 12대문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내게는 그런 아이디어가 발렌타인데이 때 전국에 3층 높이의 초콜릿바 12개를 세우겠다는 얘기만큼이나 기괴하고 우습게 느껴진다. 그런 구색맞추기식 상징으로 정말 우리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나에게 그 예산이 주어진다면, 그 12대문 지을 돈으로, 우리가 관습적으로 지어놓은 전국의 건축들을 <체계적으로 허물고> 싶다. 수많은 기념탑들, 수많은 전시관들, 수많은 아파트들을. 그것들을 하나하나씩 허물고 그 장면을 TV로 생중계 하고 싶다. 밀레니엄을 맞아 어떤 상징적인 행동을 해야만 한다면 난 ‘허뭄’에서 그걸 찾고 싶다. 꼭 무언가 하나를 세워야 한다면 나에게도 세우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난 <유치원>하나를 삼풍백화점 자리에 짓고 싶다. 정말 제대로 지은 유치원 하나. 동사무소에 건축 신고할 때부터 어떤 범법도 저지르지 않고, 아이들에게 위험하지 않은 재료로, 소방과 안전에 만전을 기한, 화장실에서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아이들의 눈높이 중심인, 그곳에서 근무하는 교사들도 성적순이 아니라 사랑과 열정을 보고 뽑은, 그런 유치원을 하나 짓고 다. 정말 예산이 허락된다면 그런 유치원을 전국에 12개 짓고 싶다. (1999.12.) * 방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17년 전에 쓴 글이 나와서 읽어보았어요. 여전히 무언가를 세우는 나라...댐과 박정희 기념관과 사드와.....

2016년 2월 19일

지하철 환승역

한 젊은 여성이 한 젊은 남성을 잡고 도망가지마! 라고 외쳤어요. 둘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두 사람은 조금씩 제게서 멀어져 갔어요. 사람들은 그냥 무심히 그 두사람 옆을 지나치고. 그냥 가면 너무 부끄러울 거 같았어요. 에스컬레이터 위에 발을 올려놓고,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올라갔어요.

혹시 사귀는 사이신가요? 아니요. 여자가 대답했어요. 무슨 일인가요?  이 남자가 나를 밀고 도망가는 거예요.왜 미셨나요? 청년에게 물었어요. 아저씬 그냥 가세요. 그냥 가시라고요. 싫습니다. 저는 항상 준비해 두었던 답변을 했어요. (사실 이런 상황을 종종 상상하기에 한 두가지 답변은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 제3자는 빠지세요 라고 했다면, 저는 저는 이 분과 같은 도시에 사는 시민이고, 이 분이 당하는 어려움은 제 어려움이기도 하기에, 저는 제3자가 아니라 관련자입니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누가 먼저 밀었는지에 대해서 설전을 벌였어요. 남자는 실실 웃고 있었고 여자는 몹시 분노에 차 있었어요. 여자분이 참 용감했어요. 말싸움에서 지지 않고 끝까지 싸웠어요. 제가 남자에게, 어쨌든, 어떻게 시작됐든, 마지막에 세게 밀었기에 여자분이 안전에 위협을 느낀 것은 사실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하세요, 라고 말했어요. 남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미안해 됐지, 하면서, 자리를 뜨려 했고, 저는 남자의 길을 막아섰어요.  제대로 사과하세요.

남자는 다시 구차한 변명을 시작했어요.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가세요, 라고 제가 말했어요. 그리고 여자분에게 말했어요. 저 사람은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사람이 아니기에,
더 요구하는 게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아까 형식적 사과를 받은 걸로 만족해야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라는 여자분의 인사를 받았어요. 

지하철을 탔는데, 아, 이렇게 말할 것을...더 논리적이고, 더 압박을 주는 말들이 떠올랐지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매번 완벽하지 못한 언변. 그렇지만 오늘 경험이 있었기에 다음에는 조금 더 지혜롭게 말할 수 있겠지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옆에 있어주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 목표를 완수했다는 생각만 하기로 했어요. 용기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요. 여성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짧게 기도 했어요.

지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요. 그런데 정말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그 청년이겠구나.     

2016년 2월 10일

『예언자적 상상력』(월터 브루구만 지음, 복 있는 사람)을 읽고.

1. 한두 해 전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구만의 이름이 자주 언급돼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사서 읽었다. 브루구만은 이 책을 1978년에 썼고, 개정판 서문은 2000년에 썼다. 나는 이 책에서 개정판 서문이 제일 좋았다. 브루구만에겐 조금 미안한 얘기인데, 서문까지만 좋았다. 1장부터는 약간 과하게 느껴지는 '의미 부여' 때문에 오히려 감동이 반감되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의 표현: "모세가 의도했던 일은, 적은 무리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 모세가 한 일은 이집트 제국의 의식(意識)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제국을 사회 관습과 신화적 주장의 양면에서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p.59). 나는 타격이나 해체가 아니라 어리둥절, 안절부절, 조마조마,긴가민가 같은 단어들이 '역사적 모세'를 더 사실적으로 그려주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뭘 할 때 매번 그렇게 큰 그림을 다 보면서 하나? 안 보며, 못 보며, 하는 건 안 멋진 일인가? -.- )

2. 이제 나를 파고든 개정판 서문에 대해서. 이런 말이 나온다. "완전한 자유로 행하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든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말과 행위에 권위를 부어 주실 수 있다. (...)어떤 사회적 환경의 경우 다른 환경에 비해 (...)예언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장소로 더 적절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p.36) 브루구만은 예언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큰 공동체의 특징을 넷 얘기하는데 그 두 번째 특징에서 내 독서와 내 삶 모두 콱 막혔다. " [그 공동체에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이용 가능한 고통에의 감각이 있다."(p.37). 몹시 찔렸다. 신학적인 용어에는 점점 친숙해져 가는데, 내게는, 이용 가능한, 예언자적 삶을 살기 위해선 필수적인, "고통에의 감각"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면서, 고통의 감각을 몸 속에 지닌 채 살아가는 한 후배가 떠올랐다. 페북에서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방금 브루구만 책을 읽을 때처럼 찔렸다. 그는 세월호 현장에 있고, 청소년들을 돌보고, 동료들과는 자신이 먼저 경험한 어려움과 극복 방안을 나눴다. 예언서를 읽는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예언서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2016.2.10.

ps.
브루그만은 아브라함 헤셀이 쓴 『예언자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예언자는 고통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 예언자가 나서서 이루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고난을 감당하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요, 삶과 고통 사이에 가로놓인 장막을 찝어 버리는 것이다". (p.35). 난 그 막이 더 튼튼해지기를, 질겨지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고통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