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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5일

『새가족반』 (이정규 지음, 복있는사람)을 읽고.

오늘 『새가족반』(이정규 지음, 복있는사람)을 읽었는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다루는 제6장에서 참 인상적인 구절을 하나 발견했다. (십자가의 고통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고통이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 예수께서는 진노를 받으시며 부르짖으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언뜻 보면 친밀한 외침 같아 보이지만,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직접 부르신 유일한 부분입니다. (각주13). 이는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정말 철저히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 (p.166) *각주 13번: R. T. France, The Gospel of Mattew,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s Rapids, MI: Wm.B. Eerdmans Publication co. , 2007) p. 1076 

2018년 8월 2일

휴가

제가 오늘부터 19일까지 가족을 보러 미국 갔다 오는데, 갖고 가는 건 아래와 같아요. 
1. 227페이지까지 읽은 『누가 성서를 기록했는가』(R.E. 프리드만, 한들출판사)
2. 그림을 그릴 작은 노트 (아이들을 그릴 예정. 아마 아내도 ㅋ )
3. 그림을 그릴 샤프펜슬(2mm)
4. 새번역 성경
5.『조지 맥도널드 선집』(C S 루이스 엮음, 홍성사) (* 요즘 시편과 이 책으로 큐티)
6. 반송되어 온 아내 생일 선물 (건전지 빼고 다시 갖고 감)
7. 둘째에게 줄 샤프펜슬 (3번과 같은 모델 . 샤프는 2천원, 심은 천원).
8. 최종적으로 노라고 한 S기획사 대표의 답변 
9. 10년 전에 주님께 받은 말씀 
잘 다녀오겠습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2018년 7월 29일

어느 가족

미군에서 복무 중인 아들이 2년의 한국 근무를 마치고 다음 주 토요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어제는 아들과 마지막으로 '토요일 목욕'을 했고 오늘은 아들과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예배 광고 시간에 사회 보는 장로님이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더니, 아들은 멋진 미소를 지으며 거수 경례를 하였다. 부대에서 환송식이 있어 아들은 일찍 부대로 돌아가야했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오는데 갑자기 짧은 순간 무서울 정도로 아들이 그리웠다. 아들에게서 오늘 시간 더 많이 같이 보내지 못해서 서운하다는 문자가 왔다. 아빠도 그렇다고, 그래도 어제 같이 목욕하고 <어느 가족>도 함께 봐서 너무 뿌듯하다고 답신을 보냈다. 영화에서 경찰이 남자에게 물었다. 왜 어린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쳤냐고. 남자는, 가르쳐 줄 게 그것밖에 없어서, 라고 대답했다. 이 땅의 애비들은 너무 모순 덩어리이고 부족하오니, 하늘 아버지...

2018년 6월 9일

사탄의 무기 2개

#무척19금 

1. 나는 사탄이, 자기 밑의 가장 똑똑한 영들만 따로 모아서, 오랜 회의를 거쳐, 인간들의 꿈과 삶을 단숨에 무너뜨릴 <만능 무기> 하나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나도 20대 후반 이 무기에 찔렸을 때 피를 철철 흘렸고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사탄의 무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플하다. 그저 다음과 같은 하나의 센텐스(sentence)일 뿐이다 :  "너도 처자식 생겨봐라".  이 말은, 듣는 사람을 순식간에 <무안하게> 만들고, 세상 물정과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한가하게 동화같은 꿈만 좇는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말에 찔려 꿈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 또한 이 센텐스에 깊이 찔려보았기에, 그 뒤로 <무엇을 듣는가>에 무척 주의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찬 사람의 말은 그냥 무시한다. 

2. 또 나는 사탄이 <한반도 지역 공중>에서 활동하는 영들만 특별히 따로 불러, <한국 남자들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 특별한 센텐스를 <또 하나> 만들었다고 믿는데 그건 다름아니라 :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되지". 언제부터인가 성인 토크쇼를 보다보면 <부부관계>가 화제로 오를 때, 이 센텐스가 누군가에 의해 시전되기만 하면 모두가 <웃음>으로 화답한다. (나도 종종 웃었다). 스튜디오 안을 꽉 채우는 웃음 즉, 무언의 격렬한 동의! 배우자와의 관계는 즐겁지 않은, 즐거울 수 없는 <의무>이고, 진정한 즐거움은 <낯선 여성>을 상대할 때만 경험할 수 있다,라는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되지>. 어느 날 이 <익숙한 센텐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내가 딱 한 번만 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나는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이름도 모를 낯선 상대와 나눌 것인가. 아니면 내 <이름>을 알고, 내 불완전함을 알고, 그러면서도 나를 여전히 믿어주는 <익숙한 상대>와 나눌 것인가. (답은 너무 자명하다). 그러자 또 다른 물음이 떠올랐다. 왜 마지막 관계만 그래야 해? 오늘 밤은 왜 안 돼? 

2018년 5월 7일

중년이 되면 찾아오는 변화

나이들면 여유가 생겨 낯선 여성을 만나도 긴장하거나 떨지 않게 된다. 방금도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온 젊은 여성에게 내 욕망을 자연스럽게 전했다.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아서.
"제가 먼저 왔는데요". 
- 2016.5.7 (빽다방)

2018년 4월 2일

갈릴리

오늘 처음 깨달은 사실인데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면서  
몹시 화도 내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무척 어이없어 하시고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정말 놀라기도 하시며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답답해 하기도 하셨지만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결코 하지 않으셨던 한 가지 행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주님은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셔도
결코 경멸하거나 비웃지는  않으셨어요!  

책망은 하시되 경멸하거나 비웃지 않으시는 주님.
어제 또 죄를 지은 제게 
이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자신을 버린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 기다려 주신 주님. 

저도 오늘 믿음으로 갈릴리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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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2019년 8월 1일)  
『고통의 문제』 (C.S.루이스, 홍성사)를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습니다.  "또 모든 기록을 볼 때, 그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65). 오래 전 읽었던 루이스의 이 구절이 제 뇌리에, 무의식에 깊이 박혀, 제가 의도치 않게 위와 같은 <표절>을 하게 된 거 같습니다.  

2018년 3월 10일

TV제작국 이삿날

오늘은 제가 소속돼 있는 TV제작국이 6층에서 4층으로 이사하는 날이었어요. 2002년 아주 적은 인원으로 TV개국을 할 때는 3층에서 일했는데 그 후 사람들이 많아져서 6층으로 이사를 왔고, 이번에 다시 조금 더 넓은 공간 4층으로 가게 됐어요. 지나온 모든 날이 다 아름답지만(ㅋㅋ) 그래도 기억에 남는 대화와 사건을 딱 하나씩만 꼽아보면:
(3층에서)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때였어요. 제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우리 사무실 직원들의 일상을 드라마타이즈해서 시리즈로 올렸어요.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어느날 후배L이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어요. 
"선배님, 선배님 글 너무 웃겨요".
그때 처음으로 제가 글로 남을 웃길 수 있구나,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전 제 자신이 심각한 줄만 알았거든요.
제가 이렇게 페북에 글을 쓸 수 있는 자신감을 얻은 건 그날 3층에서였어요.
(6층에서)
낸시랭의 신학펀치 만들 때 가편과 자막 작업이 끝나면 대개 새벽4시,5시였어요. 집에 가서 조금 자고 오후에 종편하러 다시 나오는 그런 생활을 1년 정도 했어요. 어느날 새벽 6층 빈 사무실에 있는데 너무 감사한 거예요. 제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혹시 사람들이 있나 살펴 본 후에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어요.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요.
(4층에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겠어요. 다만 무언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생각만 하지 않고 <실행>했으면 좋겠고, 또, 제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갚으려는 마음이 (사실 똑같이도 아니어요. 항상 받은 것 이상으로 갚으려해요 ㅠㅠ) 사실은 어리석은 마음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018년 2월 9일

사순절과 나귀(2)

*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쓴 사순절 묵상 원고

3월2일 마가복음 11:1~10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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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제일 궁금해 하는 건 나귀 주인과 예수님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도대체 나귀 주인은 누구길래 ‘주가 쓰겠다’라는 암호 같은 말 한마디에 한 마리 이상(마가복음에선 한 마리, 마태복음에 따르면 두 마리)의 나귀를 두말없이 냉큼 내줬던 걸까요?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도 복음서 저자들의 수많은 ‘주작’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등장 인물의 정체도 모호하고 대화도 현실성이 없다고 하면서요.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 주위에 제자들이 한 명도 없는 순간들이 등장합니다.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갔을 때> 한 여성과 우물가에 <단둘>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인상적인 대화>는 그 여성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4:28). 저는 나귀 주인의 경우도 수가성 여인과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 주위에 제자들과 <현대인들>이 없을 때 – 예수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것 같고,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작은 신세>를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그가 그날 만남에 대해 – 네, 수가성 여인처럼 –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의 이름과 그가 그렇게 한 연유가 복음서 저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 됐을 가능성이 컸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만남과 대화에 대해 제가 아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믿는 것 한 가지는, 그 남자는 그날 만남에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 <자기 자신>도 만났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암호가 ‘주’였다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평소 잊고 사는 주라는 단어가 이 정체 모를 남자와 우리 주님 사이에선 무척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걸 보니 말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자신의 주에게, 자신의 나귀를 즉시 보냅니다.

(기도)
주님, 제가 주님을 주님으로 대우하고 있나요?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사순절과 나귀(1)

한국 루터란아워 사순절 묵상집을 위해 제가 두번 째로 써야 했던 원고 주제는 <마귀>가 아니라 <나귀>였습니다 : )

3월1일 (마태복음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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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가 일하고 있는 방송사에 안토니오 구테헤스가 녹화를 위해 왔습니다. 구테헤스가 누구냐고요? 현 유엔사무총장입니다. 관례상 유엔사무총장은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국가 원수급 예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경호도 국가원수급 수준으로 하게 됩니다. 녹화를 하는 카메라 감독들은 물론이고 녹화 전 구테헤스의 메이크업을 맡은 분장실 여성들 인적 사항도 사전에 청와대로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국가 수반급 인물이 저희 방송사에, 나귀를 타고 등장했다면 어떻게 보였을까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코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유대인들이었다면 의아하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당시에 왕이나 부자들은 대개 힘을 상징하는 노새를 탔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한 남자가 굳이 나귀를 타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 모두에 나귀가 나오지만 예수님이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 곳은 마태복음뿐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겸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사람에 따라 겸손을 정의하는 방법은 다 다를 터인데 마태복음 저자를 보면 멍에라는 단어 없이는 겸손을 설명 못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12장에선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용하네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내가 너희의 모든 멍에를 벗겨 주겠다’라고 하는데 오늘 우리 앞의 남자는 정반대입니다. ‘내 멍에를 메거라’. 우리의 상식과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멍에를 멘 인간>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천국에서도 우리에겐 메야 할 멍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룩하라는 명령이 – 마음껏 음란하고 싶은 인간에게는 무거운 멍에처럼 느껴지지만 – 사실 그게 얼마나 가볍고, 적당하고, 즐거운 무게인지는, 음란 후에 찾아오는 허무와 죄책의 무게를 경험해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겸손하다면 멍에가 우리를 살리는 줄 알기에 멍에 벗으려 발버둥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나귀처럼.

(기도)
나귀를 타고 오늘 제 앞으로 지나가시는 주님 앞에서 모든 멍에 벗어던지려고만 하는 제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하소서.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사순절과 향유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시도한 사순절 묵상 원고 쓰기.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주제를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교회력에 따라 주어지는 주제에 대해 <무조건> 써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떨리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 ) 첫번 째 묵상 원고입니다.
2월28일 / 마가복음 14:3-11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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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 진퇴양난에 처한 것처럼 보일 때가 여러번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볼까요?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태 22장). 더 드라마틱한 주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교활한 시험 중에 나왔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한 8장).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피는 본문도 잘 읽어보면 이런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한 노동자의 일년치 임금인 3백 데나리온을 줘야 겨우 살 수 있는 비싼 향유를 -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에 따르자면 - ‘장례 준비’ 하는데 ‘소비’한 한 여성의 행동을 놓고 어떤 사람들이 따집니다. 지금도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데, 고작 ‘사랑 표현’에 3백 데나리온이나 사용하는 게 가합니까? 오히려 진정한 사랑 표현은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상하게 저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여성을 야단치는 사람들의 말에 수긍이 많이 갑니다.
이런 지적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듣고도 저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장례 준비’에 대한 제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이 죽는다고 하시지만 3일 뒤엔 부활하게 되어 있는 분이잖아요. 이미 정해져 있는 승리를 위해 거쳐야 하는 죽음이라는 ‘요식 행위’를 위해 3백 데나리온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 갑자기 이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예수의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요식 행위가 아니었단 말일까?

(기도)
사순절을 맞아 주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죽음이셨기에, 오늘만큼은 가난한 이뿐만 아니라 나도 위로를 받고 싶구나, 하는 고백을 하셨는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습니다.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제임스 사이어 세상을 뜨다

방금 페친 Y의 포스팅을 읽고 2018년 2월6일, 제임스 사이어가 세상을 떴다는 걸 알게 됐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고전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썼다. 나 또한 그의 영향을 <크게>, <오래> 받았다. 그 책에 대한 내 평가? 2013년 난 <박샘의 위대한 수다>라는 팟캐스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읽은 책들을 소개했다. 첫 녹음 때 내가 정한 첫 화 제목은 ‘내가 버린 책들’. 제임스 사이어의 책을 소개했다.
아래는 팟캐스트 첫 화를 정리한 기사 (링크 http://adzero.kr/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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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박샘의 위대한 수다>가 5월 개편을 맞아 전문 패널을 섭외했다. 그 첫 번째 손님은 기독교 방송국 TV국에서 일하는 신동주 피디. 신 피디는 1993년 CBS에 입사하여 라디오에서 8년, TV에서 10여 년 일했다. 그는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는데, <한국 대중영화 속 기독교>와 <언더우드와 한국개신교 120년>이 신 피디의 작품이다. 이중 <한국 대중영화 속 기독교>는 영화에서 재현되는 기독교에 대해 반성적으로 살펴본, 나름의 화제작이었다. 그리고 신 피디는 2000년도 기윤실의 ‘거짓말 논쟁’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이윤의 Lies' burger'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성에 관해 부정적 접근 일색이던 기독교 문화에서 섬세하고 솔직한 성 이야기로 작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2013년, 어렵사리 신 피디가 박샘의 위대한 수다 책 코너 패널로 걸음 했다. 제작진은 평소 책을 많이 읽는 신 피디가 어떤 책을 선정하여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했다. 그런데 주문과 달리, 그는 추천 책이 아니라 읽지 말아야 할 책을 들고 왔다. 코너 제목도 ‘내가 버린 책들’이었다. 그가 실제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그 책은 기독교 세계관 분야에서 고전으로 알려진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이었다.
신 피디는 기독 지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 세계관의 폐해를 짚었다. 그가 가장 심각하게 본 점은 은유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은유는 단연 ‘안경’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하나님나라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이나 관점을 바로잡아줄 수 있다고 기독교 세계관은 말한다. 하지만 신 피디는 이 관점과 비유에 반대한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안경’을 비유로 회자된 것은 그것이 가진 편리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람의 인생관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서서히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마치 세계관을 기독교적으로 바로 잡으면 온전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반대하는 또 다른 비유는 ‘도미노 비유’이다. 근본적 질문에 대해 기독교적 관점을 수립하고, 그것이 인격을 형성하고, 그리고 다시 행동으로 이어지는 도미노식 설명은 동화에 불과하다는 게 신 피디의 생각이다. 실제로 우리의 인격이 형성되고 행동이 결정되는 것은 도미노식의 일선형적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 피디는 안경과 도미노 비유로 설명되는 기독교 세계관이 하나의 동화, 혹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은유는 ‘거미줄’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우리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도 100%의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여 기독교적인 인격과 삶을 이뤄갈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매력을 느끼는 일과 사상에 충실하고 고민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혹여나 비기독교적인 것에 오염될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결국 답이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이며, 우리는 다양한 생각 안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뤄갈 것이다.
다음은 '[박샘의 위대한 수다 에피소드 11] 내가 버린 책들'에서 신동주 PD, 박샘, 정도령이 나눈 대화들이다.
신동주: 기독교 방송국 TV국에서 일하고 있다. 93년 입사했고, 올해가 20년째 일하는 해다. 라디오에서 8년, TV에서 10년 정도 일했다.
박샘: 오늘 대화 주제가 ‘내가 버린 책들’이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데, 추천할 책이 아니라 버린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나.
신동주: 무언가 긍정적인 것을 소개하여도 어떤 사람을 알 수 있지만, 싫어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다. 이번에 내가 버린 책들을 통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오늘 소개할 책을 한 번 버렸다가 인용할 일이 있어 다시 중고 서점에서 샀다. 그 책은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IVP)이다.
박샘: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고전이다. 어떤 이유로 이 책을 ‘내가 버린 책들’로 소개하는가.
신동주: 30년 넘게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사용했던 용어와 그 뒤에 숨겨진 비유가 있다. 그 비유가 적절한 건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 내가 쓰레기통에 버린 건 비유였다. 아시겠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애용하는 비유는 안경이다. 기독교 세계관 관련 책 서문을 보면, 빨간색 안경을 끼면 빨간색이라고 보인다,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불교적으로 보인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면 기독교적으로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박샘: 아무래도 안경이 시각을 교정시켜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쓴 거 같다.
신동주: 안경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하는 건 아니다. 콘택트렌즈도 있다. 그리고 가령 빨간 안경을 끼면 세상이 빨갛게 보이지만 조명을 빨갛게 사용해도 동일한 효과가 있다. 내가 볼 때 안경 비유를 애용하는 이유는 편리성 때문이다. 우리가 안경점에 가서 “이 안경으로 주세요”라고 하듯이, 세계관도 여러 세계관 중 맘에 드는 걸 하나 골라 착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샘: 편리하면 좋은 거 아닌가. 어떤 문제인가.
신동주: 엄청난 문제다. 살다 보면 알게 되지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성숙한다는 건 싸우고 실수하고 무안당하면서, 용기를 내고 사물을 제대로 보는 과정을 거치는 거다. 그런데 어떤 안경 쓴다고 해결되겠나. 모든 건 시간이 걸리는데 안경 비유는 시간이 안 걸린다. 어느 날,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의 영어 제목을 살펴봤다. ‘The Universe Next Door: A Basic Worldview Catalog’라고 나와 있다. 우리의 옆에 있는 세계라고 해놓고 카탈로그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 책은 8개 정도의 세계관을 소개하고서 어떤 세계관을 선택할지 질문을 한다. 이게 상품 카탈로그를 보다가 구매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과연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는 건가?
정도령: 저 같은 경우에도 학부 때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읽었다. 회상해 보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사상을 접하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허무주의나 부조리를 이야기할 때, 사무엘 베케트나 카뮈 책을 읽기보다는 제임스 사이어가 소개한 허무주의를 먼저 읽었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해야지 다른 사상을 접할 때도 흔들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신동주: 사람들은 오염되는 걸 두려워한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시각으로 보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다며 오염되지 않는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미친 C.S 루이스나 칼 바르트는 다르다. 그들의 책을 읽으며 나는 그 사람의 깊이에도 놀랐지만, 또 하나 더 놀라운 건, 그들의 신앙 형태가 달라진다는 거다. C.S. 루이스 처음엔 무신론자, 그다음엔 이신론자가 되는 식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변했다. 바르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엔 자유주의자로 사회 운동을 열심히 펼쳤지만, 나중엔 하나님과 인간의 간극을 주장하는 신정통주의가 됐다. 지금 이 순간에 완벽하게 기독교적으로 되는 건 가능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믿고 있는 그 순간에 진실한 것이다. 지금 내게 끌리는 것을 끝까지 가 보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갔을 때, 아닌 것은 아닌 걸로 밝혀진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박샘: 사람들이 비유를 수단으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비유에 묶이고 비유에 따라 살아가는 거 같다. 혹시 안경 말고 또 다른 문제의 비유는 없나.
신동주: 도미노 비유가 있다. 우리는 무언가 하나를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되고, 인격은 행동이 되어, 기독교적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첫 단계를 바로잡아 놓고 다음 단계로 진행되면 아주 기독교적인 결론까지 나갈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사람은 바로 전 단계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것의 영향을 받는다. 도미노처럼 하나의 라인으로 우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박샘: 그렇다면 신 피디가 생각하는 대안적 비유는 무엇인가.
신동주: 최근에 진화론을 비판하는 학자가 펼친 거미줄 이론을 본 적이 있다. 변이와 진화에는 거미줄처럼 수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 아이에게 기독교 세계관 책을 읽힌다고 기독교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볼 때, 비기독교적으로 보이는 책을 읽더라도 그 안에서 뭔가를 깊이 느껴서 정말 멋진 기독교적 통찰을 끄집어낼 수 있다.
박샘: 기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독교적인 왕도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신 피디는 그런 왕도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기독교적이지 않은 경험도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입장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발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게 항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신동주: 그게 사실인데 어떡할 거냐? 사실이 중요하다. 그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지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옛날 <복음과 상황>에서 정정훈 편집위원이 ‘환상 속에 기세(기독교 세계관)가 있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동의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에게 실재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동화를 들려준다.
박샘: 말처럼 적용하는 게 쉽지 않다. 구체적인 현상으로 설명해 달라.
신동주: 최근에 두 개의 웹툰을 봤다. 하나는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고, 또 하나는 <무한 동력>이다. <신과 함께>는 무속이나 불교적 세계관으로 사후 세계를 재밌게 그렸다. 그리고 <무한 동력>은 강풀의 순정만화처럼 한 가족의 삶을 담담하고 재밌게 그렸다. 두 개의 웹툰을 보면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사실 <신과 함께>를 보다가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만두고 <무한 동력>을 봤다. 처음엔 작가 이름을 몰랐다. 웃고 울며 정말 재밌게 봤다. 그런데 작가 이름을 확인했더니 같은 작가였다. 혼자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내가 <무한 동력>을 보면서 저 작가의 무속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을까. 이런 질문은 습관적이고 트라우마적인 거다. 비기독교적 영향을 받게 되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40년 넘게 해왔다.
박샘: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식의 교육을 받다 보면, 무의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이 생기는 거 같다. 약간 비극적이다.
신동주: 약간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기독교와 대중이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거 같다. 대중은 늘 즐거워하거나 열광할 것을 찾지만, 크리스천은 늘 조심스럽기만 하다. 기윤실도 ‘성’을 대할 때 위험과 죄로 접근했다. ‘<거짓말> 사태’ 때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었다. 나한테 육체적인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발기한 게 아니라 눈물을 흘렸다. 한 번도 성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그 당시 <거짓말>을 반대한 기독교인들이 “너는 이 작품을 보면 너의 성기는 발기할 수밖에 없어”라고 주장했다는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자기의 경험이나 생각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100%를 순수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100%이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강요하게 된다. 고종석이 “모든 순수주의는 폭력과 맞닿아있다”고 했다. 크게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