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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9일

<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다 > - CBS 아카데미 숲 제작을 마치며

제가 올 3월 프로그램 중간부터 연출을 맡기 시작했던 이 가을 개편을 맞아 어제 방송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새로운 주제와 함께 시즌2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시즌2가 언제 방송될지, 담당 피디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함정 -.- ) 그동안 함께 해주셨던 분들의 멋진 강의가 떠올라요. 한성열 교수의 심리학 콘서트, 성현 목사의 이 시대의 영성 작가들, 최주훈 목사의 우리가 몰랐던 종교개혁 이야기, 김홍기 작가의 옷장 속 인문학 이야기, 민경식 교수의 우리의 신앙을 다져주는 사본학, 성경 인쇄와 번역 이야기, 임정혁 목사의 누구나 알아야 할 성(性) 이야기, 옥성득 교수의 다시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기민석 교수의 구약성경은 현재 진행형! , 덕은동 공동체 최규창 대표의 '공동체는 힘이 세다!' , 최은 영화평론가의 영화 이야기 '스크린 속에 지금 우리 삶이 있다'. (제가 연출 맡기 전에 출연하여 좋은 강의 해주신 김학철 교수, 배덕만 교수, 백소영 교수, 김진혁 교수, 김근주 교수, 김응교 교수 외 여러 강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숲을 제작하면서, 우리가 각자의 '전문성'을 키우면 언젠가 주위 이웃에게 큰 힘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됐습니다. 그것이 그림에 대한 안목이든 카운셀링에 관한 것이든, 주제가 패션이든 영화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든지요.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전문적인 주제와 씨름해오신 강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강사분들 외에 또 빼놓을 수 없는 분들! 녹화 때마다 멋진 질문 던져주신 패널 박수진, 최령, 차유주, 김원구, 박인영, 지니, 김진철 외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CBS 아나운서들의 멋진 활약 감사드립니다.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다. 올 봄 프로그램 맡으면서 제가 지었던 캐치프레이즈였어요. 그때는 숲이 인문학만을 은유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그램을 마치는 지금, 제게 있어서 숲은 오히려 제가 만난 사람들이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고 싶어요. 한 번 더라도!
감사합니다.
2017.10.29.
숲 스태프를 대표해서
신동주PD드림
ps.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었던 스태프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어요. 강사 섭외, 강의안 구성과 제목 정하기, PPT 제작, 녹화/편집과 자막 등 프로그램의 모든 걸 다 함께 했던 멤버들이어요. 사진 속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숲은 지금과 달리 '앙상'했을 거예요. (사진 왼쪽부터: 신피디, 김민현 조연출, 이경남 조연출, 특별게스트 김현정 씨, 김보영 작가). 자비하신 그 분께서 50대 중년 남성으로부터 20대 여성 청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후 길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를!





2017년 10월 5일

『알라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IVP)를 읽고.

1. 미셸 푸코는 총 673쪽에 달하는 『광기의 역사』를 쓰면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짧게 언급한다. 겨우 3쪽 분량이었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는 나머지 670쪽에 대해선 아무 언급도 없이 그 3쪽만 물고 늘어졌다. 그 3쪽 안에 『광기의 역사』의 근간을 흔드는 결정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은 그렇게 시작됐고 둘의 관계는 이후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데리다처럼 나 또한, 달랑 8줄 나오는 『알라』 제13장 23번 각주 인용문에, 전체 『알라』 394쪽을 무력화시킬 결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2. 먼저  문제의 각주가 달린 본문부터 살펴보면 이렇다. 볼프는 "공통의 신을 믿으며 그 신을 비슷하게 인식한다는 사실을 공동으로 인정"하는 행위가 "공동생활에 관한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p.325)"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로, 볼프는 <공통의 신을 믿는다>는 행위와 <의견 충돌의 해결>이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을 394페이지 되는 이 책 <전체>에서 끊임없이 주장해 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순간에 문제의 각주가 등장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를 하기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꼼꼼하게 각주까지 다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아마 <이 문장>을 <지금 처음 접했을 것이다>.  한편, 각주에 등장하는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라는 말은 문맥상 <평화 공존을 위한 논의> 등으로 얼마든지 바꿔쓸 수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재진술도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평화 공존을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이제 독자들은 참으로 난감해진다. 평화 공존을 위해 공통의 신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독자들은 왜 <장장 394쪽에 걸쳐> 이슬람과 기독교 두 종교의 신이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을까. 하지만 이제, 이런 <근본적의 질문> 잠시 옆으로 제쳐놓고,  저자가 <394쪽>에 걸쳐 펼쳐놓은 이야기 논리 속에 다른 문제점은 없는지 알아보련다.   

3. 볼프는, 어느 두 집단에서 <믿는 신이 동일하다>면 <평화가 구축될 것이다>라고 믿기에, 자신의 책   『알라』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두 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나는 볼프의 이런 접근을 <크로아티아에서 배태된 신학>이라고 명명해 보겠다. (볼프는 종족 간의 많은 내전을 겪은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이에 반해 <신의 동일성 여부는 갈등 해소 및 평화 구축에 주요 변수가 아니다>라는 나의 신념과 접근법은 <강남 서초역을 거친 신학>이라고 부르려 한다. (서초역 근처에는 큰 교회가 하나 있고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표절 후에도 사임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그 교회를 출석하는 신도들의 수는 수 만을 헤아리며, 이 신도들과 그 교회를 갱신하려는 구성원들 사이에는 수 년간 <평화>가 없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소위 <크로아티아 신학>은 한국의 강남 서초역이라는 <공간>에서도 <작동>하는가?

교회를 갱신하려는 자들과, 그들을 보며 교회를 허문다고 비판하는 자들은, 같은 <개역개정>으로 성경을 읽는다. 두 측이 믿는 신은 동일한 날 십자가에 못 박혔고, 동일한 날 부활했다. 이슬람-기독교 비교에서처럼, 소위 <가까스로 동일신>이 아니라 <한눈에 동일신>이다. 하지만 이런 <동일성>은 오히려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아!>라는 분노를 증폭시킬 뿐이다. 안타깝게도, 양측에서 똑같이! 『알라』를 읽으면서 답답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나는 비록 총성도, 폐허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자꾸 볼프보다 <더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동일신의 실제적 <무력함>에 대해서만큼은.

4. <동일신>이 그렇게 무능하다면, 즉 양측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는 신이라면,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떤 신>을 바라보아야 할까?  볼프는 <각주 23번>에서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라는 사람이 쓴 『Thick and Thin』의 서문 한 대목을 길게 인용한다. 그 서문에서 저자 왈저는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벨벳혁명의 한 장면을 기록한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 그것은 프라하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이었다. 그들은 단순하게 '진실' 혹은 '정의'라고 쓰인 표지판을 들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즉시 그 표지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고, 똑같은 사진을 본 모든 사람도 다 그랬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나는 행진을 하는 그 사람들이 옹호하고 있는 가치를 이해했고 (...)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 행진을 하던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화는 나에게 이질적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런 반응을 하게 만들었던 경험을 나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마도 그들 사이에서 아주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역시 똑같은 표지판을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이, 394쪽 분량 『알라』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킨, 여덟 줄이다. (줄 수는 원문 기준).  

5. 이질적이고 낯선 사람들 사이로 걸어들어갈 용기는 <동일신의 확인>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 왈저의 회상. 이렇게 양쪽이 믿는 신의 동일성은,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왈저 에피소드에 대한 볼프의 반응은? 한마디로 말해서 볼프, 수긍을 하되,  <동일신에 대한 로망>을 버리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공통성>은 왈저가 파악한 <도덕적 최소치>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 만약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공통의 신을 가지며, 그들이 신의 성격과 명령을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중복>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강조 첨가). 이렇게 볼프는 여전히 동일신 로망 안에 머문다. 두 신의 <중복>이 <유익>을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을 포기할 생각이 그에겐 없다. 그럼, 그의 말대로 두 종교는 중복되는가? 

6. 『꾸란』을 읽는 동안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내 <충격 포인트>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꾸란』을 읽기 전에는 예수도 <그저 그런 여러 예언자 중 한 명>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이 가장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꾸란』를 읽어본 지금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느끼는 대목은 다음이다 : "그러나 그들이 그를 (실제로는) 죽이지도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다...오히려 그들에게 그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나타났으며 (그들은 그를 예수와 혼동하여 죽였다)." ( 『꾸란』 4:157 중에서. 상기 우리 말 번역은 한스 큉이 쓰고 손성현이 번역한 『이슬람』 제4장 각주 40번에서 인용. 같은 대목을 N.J. Dawood는 다음과 같이 영역하였다. " They did not kill him, nor did they crucify him, but they thought they did." ) 이제 이 대목에 대한 한스 큉의 해설을 들어보면: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이 꾸란 구절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다른 해석들도 가능하다. 예컨대 이 구절이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만을 부정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그러나 고전적 꾸란 주석가, 현대의 꾸란 주석가 대부분은 이 구절을 대치(代置, substitution)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요컨대 예수 대신 다른 사람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함마드 주변에 널리 퍼져 있던 견해였다." (한스 큉,『이슬람』, pp.886-887 . 강조는 한스 큉). 기독교적 메시지가 십자가 사건에서 정점을 이룰진대 그 <정점>이 빠진 종교가 기독교와 중복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와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과연 <중복되는 문장>일까. 

7. 『알라』에 대한 이번 서평에서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 다음 세 가지였다. ①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를 하기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각주 23)" 라고 믿으면서도 394쪽에 걸쳐 두 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려 하는 볼프의 행동은 상호 모순이다. ( "왜 볼프는 문제 해결에 <필수적인 사항>부터 밝히고 다루지는 않는 것일까?") ② 갈등 중인 양쪽의 신이 동일하다는 게 밝혀져도 실제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동일신은 보기와 다르게 무력하다") ③그런데 사실 양쪽의 신은 애당초 <중복>되지도 않는다. ("십자가는 중요한데 한 명은 십자가에 오르지 않았다"). 만약 볼프가, 『알라』 마지막 장 각주23에서 <지나가듯이> 밝힌 내용을, 책 서론에서 <제일 먼저> 밝히고, 그 문제와 394쪽에 걸쳐 씨름했다면, 『알라』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용과 영향력에서). 나는 볼프가 그런 후속작을 냈으면 좋겠다. 
2016.3.25.
신동주

<서플먼트>
1)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한 달 넘는 시간을 『알라』를 읽고 쓰는데 매달리게 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장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문장으로서의 효용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걸까, 회의하고 있던 바로 그때 볼프가 들고온 <동일성>과 <중복>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고, 그래서 조금은 <데리다>식으로 볼프에게 딴지를 걸었던 것 같다. 볼프의 학문적 깊이와 역량 그리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평생에 걸쳐 기울인 노력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2) 서평을 쓰면서 읽고 참고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꾸란 선 : 35개 장의 의미번역과 주해』(손주영 번역,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알라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IVP) , 『한스 큉의 이슬람 : 역사 현재 미래』(한스 큉 지음, 시와 진실), 『The Koran』( N.J.Dawood 번역, Penguin Books ). 한국외대에서 나온 상기 『꾸란 선』은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여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다음에 한번 더 꾸란을 읽는다면 한스 큉을 번역할 때 번역자 손성현 선생이 기준으로 삼은 『성 꾸란 : 의미의 한국어 번역』(파하드국왕꾸란출판청 발간)으로 읽어보고 싶다. (『이슬람』을 읽으면서도 또 확인하고 느낀 거지만 손성현 선생의 번역은 참 좋다.)

3) 마지막으로, 볼프가 이번 『알라』에서는 <들어서지 않겠다고 한 길>을 잠시나마 걸어보면서 이 서평을 맺으려 한다. 볼프는 『알라』를 시작하며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신과 지금 세상에 관한 것이지, 신과 장차 올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 이 책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며,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지는 않는다.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는 남겨 두기로 한다. 전문용어로 이 책은 정치신학에 관한 책이지, 구원론에 관한 책이 아니다." (p.26) 이제 잠시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 짧게나마 하고 싶다. 나는 본문에서 꾸란과 성경이 증언하는 신은 동일한 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다른 신을 믿는 무슬림들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C.S.루이스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은 100 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퍼센트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나는 루이스의 말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내가 모르는 다양한 방법과 능력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하기 원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루이스의 상기 발언 중에서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란 대목에 눈길이 더 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 타종교인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루이스의 경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시각에선, 지금 한국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몇 갈등>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믿는 이들>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일 수도 있을 거란 무서운 생각이 든다.하나님은, 하나님만, 아시고 보실 수 있으시리.

2017년 9월 28일

『두 지평(The Two Horizons)』 (앤터니 티슬턴 지음, Eerdmans 출판사) 을 읽고.

1. 열여섯살 여고생, 부모님 볼까 이불 쓰고 몰래 할리퀸 읽는 느낌이, 재수 학원 다니는 남자 애들, 쉬는 시간에 드래곤볼 신간 보는 느낌이, 91년 내가 앤터니 티슬턴의 『두 지평』을 읽을 때만큼 달콤하고 짜릿했을까. 아내는 있었지만 직업은 없던 시절, 그러니까 한 여자에겐 '올'이었지만 사회에선 '낫씽'이었던 그때, 나는 하루 열여덟 시간씩 상식 문제를 외웠다. (그걸 상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보에서 산 언론사 기출문제집에서 발견한 <낯선 문장들>. 1990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 친선 축구대회에서 북한 선수들이 입은 상하 유니폼 색깔이 올바로 짝지워진 것은? ① 상의: 붉은 색, 하의: 붉은 색 ② 상의: 붉은 색, 하의 : 청색 .....두렵고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이런 낯선 상식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내 이름 호명 받는 날 과연 올까? 꾸역꾸역 무의미한 문장 집어삼키다가 끝내 한계에 도달하면, 당 떨어진 사람 허겁지겁 초콜릿 꺼내 먹듯 『두 지평』을 펴고 읽었다. (티슬턴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의미(있는 문장)에 목말랐다. 의미만 충만하다면 문장이, 내용이 아무리 어려워도 상관 없는 때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티슬턴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글은 어렵지 않은 법이다.
2. 『두 지평』 은 총 3개의 파트, 15개 챕터, 61개의 절로 탄탄하게 구축된 영국식 성(城). 난생 처음보는, 목차에서 드러나는 그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에 '이런 미친...!' 하며 놀라움과 즐거움의 탄성 질렀던 기억있다. 각주 하나하나까지, 그 성 구석구석 안 가본데 없이 다 가봤지만 그 <아름다운 성>에 대한 안내 나 포기하려 한다. 25년 전 기억 의지해 이 큰 성 누군가에게 가이드 하겠다는 건 무리 & 욕심. 그래서 나, 이 시간 그저, 내가 그 성 거닐며 찍었던, < 내 얼굴 > 크게 나온 나온 몇 장의 인스타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3. 인스타 #1: 얼마 전에도 후배 L이 물었다. 왜 아까 회의 시간에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내가 옛날에 읽은 『두 지평』 이란 책에는 E. Fuchs라는 사람이 한 이런 말이 나와. 사람들이 집에서 입을 여는 건 다른 가족을 이해시키고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 왜 여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야. 이해 받기 때문에 입을 -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 여는 거지. "at home one does not speak so that people may understand, but because people understand".(p.344) 회의 석상에서, 설득하면 이해해 줄 거란 믿음 내게 있는가, 먼저 판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입 열지 않는다. 아이들 키우면서도 - 바로 이 Fuchs의 말 때문에 - 우리 대화하자,라는 말 한 번도 안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믿음 심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4. 인스타 #2: 소위 <해석학적 간격>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건 『두 지평』 을 읽으면서였다. "어떤 경우에는 비유( parable)를 설명(explain)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명해줘야만 되는 비유라는 건, 설명해줘야만 하는 조크처럼, 이미 비유로서의 가치를 훼손(ruined) 당한 거 아닐까?" (p.15) 질문 던진 크로산(Crossan)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현대의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전통 속 <자기 자신의 자리>에 의해 한계(conditioned) 지워진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의 해석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대 독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이 바리새인 역할 맡게 되는 걸, 자신의 삶이 <바리새적이라고> 규정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거부하는 바리새주의를, 그저 다시 한 번 더 비판하고 확인해주는 하나의 도덕적 이야기로만 <소비>된다. 비유에 주어진 근본적인 역할 즉 청자들의 삶을 흔들고(unsettling), 그의 신념과 가치를 전복(overturning) 시킨다는 원래의 역할은 사라지고 이제, 청자가 갖고 있는 기존 가치를 재확인해주는 역할로서만 비유는 존재한다". 처음으로 깊이 깨달았다. 복음서를 기록한 2천 년 전 화자(話者)와 그 말을 2천 년 지나서 듣는 나라는 청자(聽者) 사이에는 메꾸기 힘든 해석학적 간격이 있구나. 처음 독자나 청자들이 받았던 <충격>을 어쩌면 나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무엇을 읽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 어쩌면 내 독서는 -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내 <오래된> 기존 생각을 재확인,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겠구나. 『두 지평』 어디에선가 한 신학자가 이런 제안을 했다. 그 <처음 독자들>이 눅 18장 비유 들으며 느꼈을 충격 조금이나마 경험해볼 수 있는 방법 하나 있는데 그건: 바리새인 자리에 지금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 그리고 세리 자리엔 우리가 가장 경멸하는 그리스도인, 을 대입 시켜 보는 것. 그래서 나 종종 뉴스앤조이에 등장하는 철면피들의 이름 눅 18에 대입해보곤 한다. 말도 안 돼, 였을 것이다, 첫 독자들의 반응은, 나처럼, 예수님의 최종 판정을 들었을 때.
5. 인스타 #3: 미국에서 중고등 시절을 보낸 나의 두 아이는 - 미국에서 교회 중고등부를 보냈는데 - 참으로 <신비한 질문>을 내게 하곤 했다. 그 질문이 내게 신비로왔던 이유는 그 두 아이의 질문이, 그 두 아들의 <애비>가 중고등부 시절에 했던 질문을 꼭 닮아서였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동일했다>. 아빠, 어떻게 하면 24시간 주님만 생각할 수 있어? 35년 전의 나 역시 - 고1때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 24시간 주님만 생각하지 못했고, 그런데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라 교육 받았고, 그 결과 좌절감과 죄의식을 <끼고 살았다>. 그러다가 H.G. Gadamer가, 육십 넘어 쓴 자신의 첫 책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게임이 진정 완성되는 시점은 플레이어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망각할 때이다". (Play fulfills its purpose only if the player loses himself in his play). (Gadamer, 『진리와 방법』, p.92; 『두 지평』, p.297에서 재인용). 중요한 것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의식이 아니라 플레이 자체"이다. ("the primacy of play over the consciousness of the player")( Gadamer, 『진리와 방법』, p.94 ; 『두 지평』, p. 297에서 재인용).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여러 신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점점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주님을 24시간 생각하면 주님이 슬퍼하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잊는 걸> 좋아하셔. ....생각해보니 아빠도 그런 거 같아. 지난 주 너희가 친구들과 농구할 때, 옆에 있는 이 아빠의 존재 완전히 망각하고 게임에 <완전히 빠져있는 모습> 보던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아빠 안 잊겠다고 친구들과 놀지 않고 이 아빠 앞 떠나지 않으려 하면, 아들의 24시간 주목 받는 이 아빠는 <비통한> 마음 들 거 같아. 신은 피조물들이, 그리고 애비는 자녀들이, 인생이란 게임을 '풀필'(fulfill)하기 원한단다. <망각>은 가장 큰 찬양이고 효도인 거 같아.
2017.9.28.
신동주
서플먼트
티슬턴의 『The Two Horizons』은 1980년 Eerdman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 한국에선 2002년 C신학교 출판사에서 『두 지평 : 신약해석학과 철학적 기술 』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 있으나 독자들의 호응 크지 않았던 것으로 앎. 최근 IVP가 박규태 선생의 탁월한 번역으로 『두 지평 : 성경 해석과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제목 하에 출간. 번역자는 원저자가 인용한 독일어 원전의 오류까지 바로잡았을만큼 심혈을 바쳐 번역을 했고 독자들을 위한 별도의 역주까지 제공했다 하니, 나 이 원본보다 나은 번역본도 사야하는 건가....(여기까지)

2017년 9월 16일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박소현 외 3인, 아토포스)을 읽고.

아들이 어제 저녁 때 루터교회에서 열리는 종교개혁 세미나에 가볼까 하길래 그러지 말고, 아들아, 그 시간에 아주 좋은 북콘서트가 하나 있는데 거기 가보는 거 어떠냐, 했더니 아들은 그러겠다고 했다. ( 나 혹시 이러다가 루터교회에서 파문 당... ㅋㅋㅋㅋ) 그렇게 아들은 공저자 4명이 모두 참석하는 <지극히 사적인 페니니즘>(아토포스 출판사) 북콘서트에 갔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무척 궁금하다. 책은, 얼마전에 다 읽었다. 네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 모두 소중했지만 내게 <사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박소현 (Sohyun Park) 작가가 들려주는 첫번 째 이야기에 등장. 어찌보면 사소하고, 누군가에겐 과잉 반응,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난 공감하고 또 공감. 지금 그 책, 나와 같은 루터교회 다니는 여성 한 명에게 빌려줬기에 기억에 의지해서 나누자면: 기혼자인 박 작가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면, <그 즉시>, 시댁 식구들과 친정 식구들처럼 가까와질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한국 문화에 대해,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라고 조용히 자기 생각 표명. 예의를 갖춰 누군가를 대한다는 것과 친해지는 건 다른 문제이고 후자에는 시간이 필요. 우리 주변에는 <그 즉시>와 <당연히> 때문에 오히려 싹도 틔우지 못하고 죽은 아까운 관계의 씨앗, 가능성의 씨앗 얼마나 많은지. < 제가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가겠다는 것은 당신을 진짜 존경하고 싶어서예요. 진짜 사랑하고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이에요 >.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게 적어 이런 말하는 게 쑥스럽지만, 페미니즘은, 중간에 오해를 받고 시행착오를 좀 겪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썩지 않는 쇼윈도 플래스틱 관계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든지 얼마든지 썪을 수 있는, 그렇기에 진짜 열매 맺을 수도 있는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될까...내게 천천히 다가온 며느리...와 캔맥주 마시며 영화와 루이스와 칭의론과....(여기까지).

2017년 2월 20일

손원영 교수에 대한 파면 결정에 <공감>하는 분들에게

1. 2016년 1월 경북 김천 개운사 법당에 한 60대 개신교 신자가 밤늦게 들어가 불상 등을 부쉈습니다. 1억원 가량의 재산피해가 났고 주지 스님은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기독대학교의 손원영 교수는 한 명의 개신교인으로서 불상 훼손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는 사과문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하고 법당 복구를 위한 보상비를 모금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운사의 요청에 따라 이렇게 모인 260만원의 모금액은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이해와 종교평화를 위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는데 쓰였습니다. 같은 해 12월 19일 서울기독대 이사회는 손교수에 대한 징계안을 제청했고, 2017년 2월17일, 이사회는 파면 결정을 내렸습니다. 2월 20일 오늘, 손교수가 작성, 낭독한 기자회견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저는 지난 주 ‘성실의무 위반’이란 죄목으로 파면당했습니다. (...)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지어서는 안 되는 소위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2. <어떤 분들>은 서울기독대학교 이사회의 상기 파면 결정에 대해 <공감하고 찬성>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불상을 우상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저는 C.S.루이스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한번 찬찬히 읽어봐주시겠어요.
“세상은 100 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퍼센트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예컨대 선한 의지를 가진 불교도가 불교의 다른 가르침은 뒷전에 밀어둔 채(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비에 대한 가르침에만 점점 더 집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3.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자비>라는 가르침에만 집중하던, 그래서 어쩌면 얼마 후 기독교라는 <타종교> 안에서 자비의 성육을 발견하고 <개종>했을지도 모를 한 불자가 위와 같은 불상훼손을 경험한다면, 그가 그 <타종교>로 개종할 확률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한 개신교도가 마음을 담은 사과문을 대신 올리고 보상비 모금이라는 실천을 통해 그 사과의 진정성을 보여줄 때, 그 <타종교>에 대해 닫혔던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다시 생길까요.
4. 저는 손원영 교수가 오히려 <성실의 의무>를 누구보다 잘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와 목사로서의 그의 신앙과 모범을 통해, 그동안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오던 사람들, 기독교라는 타종교에 마음 문 더 열리고,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워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손원영 교수가 신앙과 삶으로 <숭배>한 것은 우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비>를 <가르쳐주시고 명령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입니다.

2017. 2.20.
신동주 드림


(참고) 손원영 교수의 기자회견 전문 보기 
https://www.facebook.com/sohnwo/posts/1603409536343104


2017년 2월 11일

<새롭게하소서>를 제작하며, 떠나며















1. 후배 L피디와 둘이서 새롭게하소서를 연출한지 10개월이 됐습니다. 그리고 보름 전, 저와 L피디, 다른 프로그램 배정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소위 ‘디졸브 타임’이라고 부르는, 피디들에게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존 프로 마무리 제작, 새로운 프로 사전 제작을 동시에 하는 시기입니다. 한 동안 긴 글 쓸 시간 없을 거 같아 오늘 토요일, 동네 커피숍에서, 제게 <참으로> 소중했던 지난 열 달을 돌아봅니다. 흑흑.
2. 새롭게하소서가 작년만큼 언론에 많이 회자됐던 해도 없었던 거 같아요. 라이즈업 코리아의 이동현 목사(성추행), 중국동포교회의 김해성 목사(성추행), 최순실과 관련된 차은택 씨(국정농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상기 인물들의 과거 새롭게하소서 출연 캡처 사진이 인터넷에 떴습니다. 그때마다 두 연출자, <간증>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많은 젊은 세대에게 이미 <오래 전에 잊혀진 장르> 간증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토론하며 섭외의 원칙을 세웠고, 그렇게 열 달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시죠?
3. <섭외의 원칙에 대해서>. 일단 숫자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누군가 하루 세 시간 매일 기도한다 해도, 그가 일 년에 성경을 백 번 통독한다 해도 <우리는 그의 신앙에 대해 전혀 모른다>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듣기 전까지는. 최근 큰 슬픔을 최근 겪은 분은 그 스토리가 아무리 극적이어도 좀 천천히 모시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객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그 분께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목소리가 좋은 성악가라도 만약 그 성악가가, 주일에 교회 주차장에, 타고간 그의 차와 함께 그의 뇌까지 “파킹”하고 예배당에 들어가 설교 듣는 기독인이라면,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인격을 멸시해서가 아니라 굳이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 싶은 신앙”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제 관심은 선교에 있어요, 지금 하는 일은 선교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하는 거죠, 라는 간증은 열 달 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식당, 운동코치, 그 무엇을 하더라도,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보내는 그 직업과 일 속에서/하며 즐거워하는 분 모시고 싶었어요. 나, 내 자식들, 은혜 받고 축복 받고 인도함 받는 이야기도 소중하지만, 자신의 삶 속에 <이웃>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분을 모시고 싶었어요. (연출 맡고 있는 내가 못살고 있는 <그 삶> 사는 분들). 또, 얼마 전에 <부끄러움>을 느낀 적 있다고 말하는 분들, 명함에는 대표 타이틀 붙어 있더라도, 지금도 직원과 동료로부터 무언가 배우고 있는 분들, 여전히 더 성장해야 한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완성되지 않은 분들> 모시고 싶었어요. (반어법이어요. 완성되지 않은, 이란 저의 최상의 존경담은 무례한 과장법을 용서해주세요). 누군가를 가르친 이야기 외엔 들려 줄 게 없는 분들은 모시고 싶지 않았고, 여전히 넘어지고 여전히 헷갈린다고 고백하는 분들 모시고 싶었어요. (왜 눈물이 나죠 ) 가끔 목회자를 모실 때는 “성도로서 함께 길을 걷는 느낌” (시청자가 페북에 올려주신 글)을 주는 분, 그렇게 사는 분들을 모셨어요.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지만 논리만 탄탄한 분들은 모시지 않았어요. 지금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맘의 부담을 이해하는, 그분들을 여전히 대화의 상대로 여기는 분들 모셨어요.
4. 섭외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페이스북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네요. (페북 좋아요/팔로우 수가 10개월만에 2,500에서 3만으로 <변경>되었다는 소식! ㅋㅋ) 새롭게 두 피디 중 한 명인 후배 L이 “우리 프로그램, 페이스북으로 꼭 나눠야 해요”라고 강력하게 제안을 해서 시작된 새롭게 페북 프로젝트 <간증, 또 하나의 제자도>. CBS의 가장 올드한 프로그램, 가장 올드한 간증 장르 , 새롭게하소서가, 페이스북을 통해, 수많은 기독인, 젊은이, 타종교인, 무종교인들과 만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는 일은 가슴 뛰는 경험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널리 확산될 수 있었을까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진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저희 제작진이 자주 나눴던 이야기는, 사람들에겐 소위 복을 받고 싶다는, 행복하고 성공하고 싶다는 갈증 외에도, <훌륭하게, 제대로 살고 싶다는 깊은 갈증>이 있는데, 새롭게 출연자들의 삶과 신앙이 그런 갈증에 대한 해답이 되었던 게 아닐까, 였습니다.
5. 이제 새롭게의 주인공을 소개하며 글을 맺으려 합니다. 사람은 슬플 때뿐만 아니라 진실함과 마주칠 때도 눈물이 나나봐요. 형제들을 보고 옆 방에 들어가 울고 나온 이집트의 요셉처럼, 녹화 중에 옆 세트 창고 들어가 울고 나온 적이 많았어요. 카메라 앞이라는 낯설고 부담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부담 기꺼이 져주신 새롭게하소서 출연자 백스무 분께 이 자리 빌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새롭게하소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 2.11.
신동주 드림
*지난 열 달 동고동락한 새롭게 스태프들이 떠오릅니다. MC를 맡으셨던 김학중 목사님과 전혜진 집사님, 강신해, 강민경, 박민정, 장문정 네 분의 작가, 송영호· 임에덴 두 조연출, 그리고 제 글에 자주 후배L로 등장했던 임지은(Jee Eun Lhim)PD(사진 왼쪽)에게, 비록 새로운 프로와 팀으로 흩어지지만,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용감하고 억센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지금까지 함께 하셨듯이 앞으로도!
**사진설명: 녹화와 녹화 중간에도 토론을 쉬지 않았던 두 피디ㅋㅋ

2017년 1월 28일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표절 관련 손해배상액 모금을 제안하며

저도 손해배상액을 함께 내겠습니다! 
-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의 저자 송병현 교수가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에게 청구한 손해배상액 모금을 제안하며
1. 송병현 교수(백석대)가 자신의 저서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에 대해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맹호성 이사(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와 이성하 목사(가현침례교회)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3억원 청구 소송과 관련,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4민사부는 2017년 1월 13일, 이성하 목사에 대한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고 맹호성 이사에 대해서는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다 하여 1,000만 원을 배상하고 몇몇 관련 게시물은 삭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 판결문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는 동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 하나가 우리 사회에 참으로 의미있는 <확인들>이었습니다. 몇 대목만 뽑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판결문 내 ‘표절 문제 제기의 공익성’ 중에서
“피고들의 이 사건 서적에 대한 표절 문제 제기는 공공의 관심 사안에 관한 것으로 충분히 공익성이 인정된다고 할 것이다.”
○ ‘표절 문제 제기의 상당성’ 중에서
“[원고는] 5가지 문헌을 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 본문에서 내주[즉, ‘(Hamilton; Mathews; Sarna; Waltke; Walton)']가 전혀 표시되지 않는 사례, 다른 연구자가 밝힌 견해를 마치 원고가 주체가 되어 이 사건 서적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된 사례가 각 발견되고”
○ ‘표절 문제 제기에 관한 수단의 사회상규 적합성’ 중에서
“피고들이 공개그룹인 번역이네집, 신표 페이스북에 각종 글을 작성,게시하고 (...) 회원들을 상대로 표절 의혹에 관한 제보,의견을 구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 피고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지식,경험을 공유하여 국내 신학계의 광범위한 표절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취지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 그 자체로 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 ‘소결’ 중에서
“[피고 맹호성과 이성하의 대상 행위는] 이 사건 서적의 표절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허용되는 정당한 행위이거나, 설령 그 중 일부가 명예훼손 및 모욕 등 비방행위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공익성, 상당성, 수단의 사회상규 적합성이 인정되어 그 위법성이 조각된다” (*조각된다: ‘성립되지 않는다’, ‘해당하지 않는다’)
3. 맹호성 이사에게 부과된 1000만원이라는 손해배상액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법원은 맹호성 이사가 “이 사건 서적의 표절 문제 제기를 넘어서 저작권 침해, 이에 따른 법적 책임 등의 문제까지 제기”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 [엑스포지멘터리] 시리즈의 다른 서적에도 상당한 저작권 침해가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표현 및 행위 등을 했기에 “원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관하여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결했습니다. 저는 맹호성 이사가 저작권 에이전트로서 본인의 직업상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위협”이나 “단정”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판정을 존중합니다>.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법원이 결정했으니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오래 전 한 신학교수와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태복음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 소장 학자에게 제게 언젠가 물었습니다. “신학자로서 당신의 꿈을 무엇입니까?” 그의 답변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제게는 의외였습니다. “제대로 된 마태복음 주석을 한 권 쓰는 것입니다.” “겨우 주석 한 권이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신학 주석 한 권 쓰는 일은 종종 평생의 연구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참고로, 송병현 교수가 엑스포지멘터리 시리즈에서 낸 책으로는 이번에 문제가 됐던 <창세기> 외에도 아래와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 아래 -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에스더,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역대상, 역대하, 에스라,느헤미야, 이사야1, 이사야2,예레미야Ⅰ,예레미야Ⅱ, 예레미야애가, 이사야1, 이사야2,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호세아, 스가랴. 말라기.
송병현 교수가 상기 책들을 저술할 때는, 문제가 있다고 법원이 이번에 확인해 준 <창세기> 저술 원칙과는 <다른 원칙>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존재하는 그 가능성과 관련해선 이 자리에서 더 말하거나 논의하고 싶은 마음 없고, 그 실상의 확인 및 증명은 제 능력 밖입니다.

4. 서론이 길었습니다. 저는 2016년 6월 11일, <소송 비용 모금을 제안드리며> 라는 글에서 “원고 송병현 교수가 피고 이성하 목사와 맹호성 이사를 고소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이 소송의 원고는 <한 명>이지만 피고는 <두 명이 넘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학서적 표절반대> 싸이트에서 한국 기독교 학문 세계의 정화와 성숙을 추구하는 <공익적 성격>을 봤고 그 공익적 성격에 <동의>해서 <신표>에 회원으로 가입, 활동해 온 저에게 <신표> 공동 관리자들의 피소는 <저에 대한 피소>와 다를 바 없었고,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 학문장의 공익성> 자체의 피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법원이 결정한 1000만원의 손배배상액은 제게도 청구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5.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 두 분, 정말 잘 싸우셨습니다. 정말 소중하고 의미있는 확인입니다. (“법원, 송병현 교수 표절 사실상 인정”, 뉴스앤조이, 2017.1.21.) 동료들을 대표해서 앞에서 싸운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불어오는 바람을 더 많이 맞고, 더 긴장해야 하고, 더 많은 배신과 상처를 경험하는 곳이 앞자리인 것 같습니다. 비록 싸우는 과정에서 손해배상을 해야하는 일이 발생했지만, 만약 제가 앞자리에서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면 이번보다, 이 두 분보다, 더 용감하게 더 지혜롭게 싸울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싸우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비용, 제 싸움이기도 하기에 함께 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저만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 주위 분들과 얘기해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표 멤버로서 이렇게 제 의사를 표하오니, 신표 운영진께서는 손해배상액을 모으는데 신표 멤버들, 그리고 공감하는 시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계좌공지 등 방법과 절차를 마련하고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소송과 재판을 통해 우리는 5백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에 작게나마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연구하시며 바른 결정 내려주신 판사님들과, 옳음을 위해 소송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 주신 일곱 분 교수님들과, 긴장되는 긴 재판 과정 묵묵히 견뎌주신 두 분 변호사님과 맹호성 이사, 이성하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와 응원의 말씀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 1. 22
신동주 드림 ( <신학서적 표절반대> 회원, 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