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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6일

『예언자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천규 옮김, 비아 ) 를 읽으며

 책의 첫 쎈텐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학교에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장 칼뱅이 정착시킨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전통은 바로 기도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 책은, 이제는 은퇴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드렸던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니, 안 봐도 어떻게 했을지 뻔한 수업 시작 기도들을 책으로 냈다고?" 였다). 그리고 책을 폈다. 첫 기도는 이렇게 시작 됐다 : " 우리는 / 거룩하신 당신을 통제하기 위해 / (...) / 경건한 행위를 하고, 교리를 만들고 ... " .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가지 이유에서. (어떻게 이런 공중대표기도가 있을 수 있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했지?). 이 첫 기도문 끝에는 <구약학 수업, 1998.10.15>이라는 메모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밑에,  내가 <따라 읽으며 기도드린> 날짜를 적었다. <특집부에 와서, 2021.1.12>. 올해 들어 <작은 전통>을 하나 만들었다. 회사 오면 일 시작하기 전에 이 기도문을 한 편씩 읽는 것. 얼마전 내가 2월22에 읽은 기도는, 월터 브루그만이 1998년 1월8일 수업 중에 드린 <끝없이 추락할 때>라는 기도였다. 기도문을 읽고 내가 읽은 날짜를 적었다. <2021.2.22.월. 지옥같은 금,토,일을 보내고 와서> . 기도는 이렇다. "주님, 우리에게는 몰락이 익숙합니다 / 삶의 중심을 대적하며 우리 자신을 파괴합니다 / (...) / 주님, 우리의 중심이 되소서 /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 /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 ". 나는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를 읽을 때 '절망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바꿔 읽었다. 그래, 힘들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고통스럽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그런 과장은 거짓말이 될 테니까. 내가 용기만 낸다면 다시 일어설 여지는 항상 있는 것이니까.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 다시 주말을 맞는다. 퇴근길에 기도문을 챙겼다). 

2021년 2월 24일

『몸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지음, 두란노)을 읽는 중에

1. (인용)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장로교 목사 프레드 로저스가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로저스 아저씨네 동네>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로저스는 (...) 소품이나 첨단 장비를 별로 쓰지 않았다.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인상을 풍기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 그는 곧 유명해졌고 상도 많이 받으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 강연도 시작했다. 그가 강연마다 어김없이 넣는 순서가 있었는데 바로 청중에게 2분 동안 침묵하며 각자 자기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 그는 말했다. "매번 사람들이 [제 강연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 침묵의 시간입니다". (...) 한번은 백악관에서 열린 고위급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동 문제와 관련해 딱 8분 발언 시간을 얻었다. '짧디짧은 이 귀한 시간의 4분의 1을 꼭 침묵에 할애해야 할까?'.... " (그는 망설인다) (8분 중 2분 침묵은 오버일까?) (여기까지).  

 
2. 위 이야기는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필립 얀시가 쓴 글에서 발췌했는데 한 쎈텐스만 내가 임의로 순서를 바꾸었다. 책의 본 내용과는 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데도 참 인상적이어서 여러 차례 읽었다. 책의 부제는 '우리 몸에 새겨진 복음의 경이와 한 몸의 의미'이다. 통증, 외모, 얼굴, 피부, 촉각, 뼈, 근육, 피, 뇌, 세포 등에 얽힌 신비로운 과학적 사실들과 묵상을 담았다. 

2021년 2월 22일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의 제1장을 읽고.

1. 좋은 스테이크는 다 먹지 않고 한 입만 먹어봐도 알 수 있듯이,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은 제1장만 <씹었는데도> - 논문집이라서 말 그대로 <씹어야> 한다 - <일등급 한우>로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미국 신학자의 글은 한우에 비유하는 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보라! (ㅋㅋ)) 밴후저는 각 시대마다 철학에서는 중요한 핵심 질문이 있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고대에는, 실재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중요했는데 (예:  만물은 물로 돼 있다, 아니다, 공기다, 아니다, 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만물이 '존재'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는데 여전히 사용하는 많은 범주인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실존(existence) 등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즉, 형이상학이] 고대 세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 '제1철학(first philosophy)'이었다. 우리는 한 시대의 제1철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함으로써 그 시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 12세기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업과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중세의 많은 신학자가 형이상학을, 혹은 그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1신학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p.28-29). 지적 허세 있는 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축약본까지 사서 읽었지만 아퀴나스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에 대해 파고들었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2. 고대와 중세를 다뤘으니 그럼 이제 자연스럽게 <근대의 제1철학은 무엇이었나>를 묻게 되는데, 밴후저에 따르면 그것은 <인식론>이다. "이성의 시대에 뜨거운 쟁점은 인식의 본성과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알 수 있을까? 나의 신념이 단순한 견해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 (p.29)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 <절차>이다. "어떤 주장들을 정당화하는 것은 더 이상 권위적인 자료들에 대한 호소"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게 된 객관적인 절차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의 우선 순위상의 이러한 변화는 르네 데카르트의 고전의 긴 제목전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제목은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여 학문 연구에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담론 』이다 (...) 이 점에 있어서는 자연과학의 성공이 전형적(paradigmatic)이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방법은 다른 학문 분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 근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용(matter)에 대한 방법의 우위이며, 형이상학에 대한 인식론의 우위이다". 반 하비(Van Harvey)는 그의 책 『역사가와 믿는 자(The Historian and the Believer)』에서 충분한 증거를 토대로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믿는 것은 사실상 <부도덕>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더니티를 변호한다. 하비는 우선적으로 역사가들에 대해 생각하지만, 동일한 요구 사항들이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 또는 근대 시대의 다른 누구에게나 적용되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약 200년이 지난 후에도 많은 학문 종사자가 여전히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비평적 물음>들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 (p.29-30).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성경에 대한 <비평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나는 영락없는 <근대의 아들>이었다.    

3. 이어서 밴후저는 근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제1신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힌다. 그 내용이 이 제1장의 핵심을 이루지만 <개인 사정으로> 생략한다. (ㅋㅋ)  대신, 내 평생 잊지 못할 1장 결론부의 한 대목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밴후저는 우리가 <신학적 해석학> 작업을 수행하는 목적이 말씀을 따라 "살아감의 문제, 말씀을 행하는 문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 " 만일 우리가 본문을 따라서 (...) 살아가지도 않는다면, 성경 권위에 대한 우리의 교리들도 쓸모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값싼 무오론'과 더불어 남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쓴다. 값싼 무오론과 더불어 남게 될 것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누군가> 앞에서 내밀 수 있는 게 <값싼 무오론>과 <값싼 은혜>뿐이라면....  


<서플먼트> 

1) 내가 올리는 책 서평의 대부분은 일반 평신도를 위한 것인데, 이 책만큼은 <난이도>가 좀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밴후저가 이전에 쓴 12개의 논문을 모아서 출간한 논문집인데, 1장 중간중간에 화행이론(speech act theory)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했고, 낌새를 보니 앞으로는 더 자주 나올 것 같다. 평소 독서할 때 내가 제일 어려워하던 게 화행이론이었는데, 하나 이번에는 찬찬히 읽었더니 전체 요지를 파악하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밴후저 덕분인 것 같다. 밴후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렇기에 설명이 난해하지 않다. (모든 저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려운 개념이 나올 때 마다 꼼꼼한 역주를 달아주신 역자에게도 감사한다.  

2) 밴후저가 『제일신학』 제1장에서 제일 길게 인용한 글은 놀랍게도, 반갑게도,  C.S.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에 나오는 '공구실에서 한 생각'(Meditation in a Toolshed)이다. 밴후저에 따르면 루이스의 이 글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간략한 비유인데, 그 비유에서 루이스는 어두운 작업실에 들어가는 간단한 경험을 회상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세상을 전복시키는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루이스의 [이] 간략한 내러티브는 <근대라는 성전>에서 지식을 교환해 주는 자들의 <가판대>를 뒤엎는다. (p.30)

2021년 2월 4일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벤 위더링턴 3세 지음, 이레서원)을 읽고

1.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1세기 고린도의 사회적, 문화적 정황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하는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흥미로웠던  대목 한 군데를 소개하면 이렇다. (총독 갈리오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열리는 만찬회에 참석하려고 신전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신전 입구, 첫 번째 계단 옆에는 새 석판이 세워져 있고, 아스클레피오스 신과 이 신의 상징인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만찬회에 늦은 갈리오는 급히 계단을 올라 신전으로 들어가면서 테라코타  봉헌물이 놓이 방을 지나갔다. 이 방에는 순례자들이 치유를 위한 봉헌과 기도 용도로 바친 여러 부위의 인체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테라코타는 점토로 형상을 빚은 후 구워서 만든 모형인데,  당시에는 병이 난 부위를 테라코타로 만들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치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 여기까지 읽은 내 머릿속에선 <음란마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안 좋아진 부위? 그럼, 그 봉헌 모형들 가운데는 <그 모형>도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일까...흑흑흑" .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갈리오는 팔과 다리 모형이 눈에 익은 모습으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은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가장 흔한 인체 부위 복제품인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는 늘 그랬듯 그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  휴. 나만 쓰레기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트리클리니움, 또는 식당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뒷편에 있었는데, 그런 연회에서 늘 그러듯 크게 떠드는 소리와 흥청거리며 노는 소리가 갈리오의 귀에 들려왔다."     


2. 이제 내 마음에 들었던 점 두 개와 아쉬웠던 점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맺음 ㅋㅋ) 나는 개인적으로 제5장이 좋았는데 그 이유는 <악인>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악인을 제대로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 악인에 대한 묘사가 <두껍지 않고 얇으면>  <이야기>와 <주인공> 모두가 살지 못하고 죽는다. 5장의 악인 묘사는 나름 두꺼웠다. (또 하나의 TMI. 5장에는 '노멩라토르'(nomenclator)라는, 기억력이 나쁜 주인을 위해 "사람 이름을 비롯해 기타 시시콜콜한 일들을 주인 대신 기억하기를 전담하는 노예"가 등장한다. 흥미로워라! )  이 책에서 또 하나 맘에 들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탄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인데 이 책 첫 문단에 등장한다 " 선장은 동틀 무렵 잡은 어린 바닷새로 아침 제사를 드렸다. " 내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을 응시하고 있을 그 시각에, 한 이교도가 차가운 바닷바람 맞으며 어둠 속에서 신에게 제물을 드리고 있다. <전통>과 <형식>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신성한> 형식을 보유하고 있던 시대가 부럽다. (전통 없이 사는 개신교인과 전통 속에서 사는 이교도. 누가 더 자주 행복을 체험할까. 지금 구원 여부를 묻고 있는 게 아님. 피조물의 <위치>를 깨우쳐 주는 <자세>와 <행위>와 <형식> 속에서 피조물이 누리는 행복과 기쁨을 말하는 중.)  다음 센텐스는 이렇게 이어진다. "어린 바닷새가 잡히다니 길조였다." 그 새벽의 상기된 기쁨이 상상된다.  

3. 이제 흡족하지 못했던 부분을 말할 차례가 왔다. 바울이 등장하거나 그가 말을 할 때마다 - 신학서적 독자 입장에선 수용할만 했으나 -  문학서적 독자 입장에선 아쉬움이 있었다. 성경에서 수백 번 읽었기에 거의 외우고 있는 <성경 구절들>이 그대로 바울이 말하는 <대사>로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됐다. 그런데 이게 꼭 저자의 무능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소설을 읽다보면 저자가 사건을 전개하고 대화를 풀어나가는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 저자는, 필요하다면, 19금적 묘사도 능히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럼, <재미있는 구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포기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내가 나중에 1세기 고린도의 기독교를 증언하는 이런 식의 책을 써야한다면, 그때 나는, 이 저자와 달리, 소설적 재미를 살리기 위해 <바울이란 카드>를 버리는 전략을 취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손실>을 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되는 아주 흥미로운 질문들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