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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30일

아키모토의 달

(*19금적 표현 등장)  1.<도연초(徒然草)>라고, 14세기에 쓰여진 일본 수필집을 한 권 읽었다. 지은이는 겐코 법사(法師)인데, 교토의 요시다 지방에 살았다고 해서 '요시다 겐코'라고 불린다.(참고로, 법사는 설법하는 승려). 총 244개의 글로 구성된 이 수필집은, 각 글의 길이가 들쭉날쭉. 어떤 글은 단 한 줄,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돼 있고, 어떤 것은 서너 쪽에 이른다. 내가 중학교 때 배운 에세이에 대한 정의 딱 그대로,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의 전형이다. (나 또한) 순서를 무시하고 이곳저곳 기분 내키는대로  읽다가 31번 글을 읽게 됐다. 14세기의 운치가 이런 것이라고나 할까, 자기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짧기에 전문을 소개하면: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 아침에 어떤 사람에게 용무가 있어 편지를 전하는데 눈 내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더니, "오늘 아침의 눈을 어떻게 보셨는지 같은 한 마디 인사도 없는, 멋을 모르는 사람의 말씀은 유감스럽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실망스럽군요"라는 답장이 왔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고인과의 추억인지라 이런 작은 일조차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도연초>, 31번 글)  2. 그렇다고 내가 (오늘 쓰고 있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31번 때문은 아니다. 내가 <그 센텐스>를 만난 건 며칠 뒤였다. 우연히 펼친 5번 글은 <두 센텐스>로 된 지극히 짧은 글이었는데 나를 사로잡은 건 <두 번째 센텐스>였다. (재미 삼아 밝히자면, 첫 번째 센텐스는 지금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 고대 조정의 관직인 중납언(中納言, 일본어로는 츄나곤 혹은 주나곤)으로 봉직 중이던 아키모토라는 사람이 한 말을, 저자 겐코가 인용하고 있는데 채혜숙 번역본(바다출판사,2001)에는 이렇게 나온다 :   아키모토(顯基) 츄나곤(中納言)이 "유배지에서 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천상의 달을 바라보고 싶구나"라고 한 것 또한 과연 이해가 간다.  3. 좋은 것들은 대개 <가까이> 있는 것들인데, 여기에는 매일 뜨는 달, 시원한 바람, 퇴근 후 집에서 보는 아내, 스마트폰 대신 집어 든 스케치북 등속이 포함된다. 종종 우리는 이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서도 여전히 <빈곤>하다고 느낀다. 너무 자주 등장해 이제는 하나의 관용구가 된 로 인해 해임되었다>라는 문장을 한번 보자. 부적절한 관계 전에 <부적절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 부적절한 생각은, 포기하고 무시하기엔 너무나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느껴졌을 것이고 반면 <적절한 생각들>은, 다시말해 좋은 보통의 것들은, 자신의 즐거움에 짐과 손해와 방해로 여겨졌을 것이다. 종종 주위에 흥미를 잃음. 자주 적절하지 않은 대상이 너무나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느껴짐. 이것이 B와 나의 특징이다. 그런데 아키모토는 지금 달에서 생동감을 느낀다고 한다.  4. 왜 아키모토는, 그저 달을 보고 싶다 하지 않고, 죄 없이 보고 싶다고 했으며, 또 하필 그 얘기를 죄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유배지라는 장소를 특정하면서 했을까. 게다가 아키모토는 끝없이 이어지는 이 질문들을 한 센텐스 안에 다 넣었다. 쑤셔넣었다는 느낌 전혀 없다. 단어와 단어 사이는 널찍하니 여유로우며, 그 사이로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무척 <스미마셍>하게도, <도연초>를 읽자니 만나보고 싶어진 이는 겐코가 아니라 아키모토이다.  5.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나 실로 불행한가. 아니. 영등포 문래동에서 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천상의 달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진대.  2022.5.29. 신동주 <서플먼트> 1) <도연초(徒然草)>라는 책 제목 중 앞 두 자 도연(徒然)은 이 책 서문에 등장하는 '하는 일 없이 무료하고 쓸쓸함'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것'을 '무위도식'(無爲徒食)이라고 하듯이 도(徒)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이란 뜻이 있고, 여기에 '그러함,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연(然)이 붙어 도연(徒然)이 나옴. 제목의 마지막 초(草) 역시 서문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서 없이) 적어 가노라'에서 따온 것으로서, 한자 초(草)에는 초고(草稿), 초안(草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글,이라는 의미 있음. 한편, 역자 채혜숙의 해설을 보면 "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라는 말은 일본 고전에서도 제일 멋있는 머리말로 유명하다"(p.11). 일본 문학에서 유명하다고 하고 또 길지도 않기에 전문을 소개하면: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 온종일 벼루를 마주하고 앉아 마음 속에 떠오르는 걷잡을 수 없는 상념들을 두서 없이 적어 가노라니 묘하게도 기분이 상기되어 온다>. 2) 무료-벼루-상념-두서 없이 적기-상기(上氣:흥분이나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짐)와 같이 <마음의 흐름>을 시간 순으로 차례차례 묘사해 나가는 본 서문을 읽다보니 (마지막 '상기'라는 단어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불현듯 성애(性愛)가 떠오름. (성에 대해서 쓰자니, 또 잘 모르면서 쓰자니, 이중으로 쑥스러운데) 성애(性愛)시에는 상대의 쾌감을 너무 일찍 <터트리지 않고>(이런 고상하지 않은 표현이라니!) 조금씩 애태우며 충분히 빌드업(build-up)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트리는 것>(상대가 샴페인도 아니고ㅠㅠ)이 중요. 한국어 번역에선 이런 빌드업이 잘 살았는데 과연 영역(英譯)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하는 궁금증 생김. 왜냐하면 (내 짧은 영어 상식에 따르자면) 상기 서문은 < what a strange feeling I have as I .... > 같은 문장 구조로 영역될 확률이 큰데, 이렇게 일단 결론부터 <터트리는> 서양식 번역 통해 서양 독자는 과연 나 같은 동양 독자가 느끼는 <빌드업 절정감>을 맛볼 수 있을까, 겐코가 그런 영역본 읽었다면 실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문학적 염려> 생김. 그래서 영어 번역 확인해 보기로 함. 3) 오래 살펴보지 않았는데도 두 가지 사실이 금방 드러남. 첫째, 그동안 <도연초>를 영어로 번역한 책은 여러 권 나왔으나 영어판 결정본(the definitive english translation)으로 평가 받는 건 Donald Keene(1967)의 번역. 둘째, Keene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그때까지 나온 예닐곱 개의 영어와 독어 번역본을 읽어 본 결과 가장 뛰어난 건 George B. Sansom(1911)의 번역이었다고 평가. 그래서 나 이제 Keene와 Sansom, 이 두 사람의 번역본 통해 내 궁금증 풀어보기로 함.(연구주제: 과연 서양 독자도 진정한 <문학적 오르가즘>을 경험했을까). 먼저 Keene가 영역한 (1967)에서 서문을 확인해 보니 내가 우려한 바대로 : "What a strange, demented[미친] feeling it gives me when I realise I have spent whole days before this inkstone[벼루], with nothing better to do, jotting[적어두다] down at random whatever nonsensical thoughts that have entered my head." (내 결론: 서양 독자가 경험한 쾌감과 내가 경험한 절정의 수위는 다르겠구나). 이어서 Sansom이 영역한 의 서문을 보니 :  "To while away[즐겁고 느긋하게 보내다] the idle hours, seated the livelong day before the inkslab[벼루], by jotting down[적어두다] without order or purpose whatever trifling[사소한] thoughts pass through my mind, truely this is a queer[기묘한] and crazy thing to do! ".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내가 Keene와 Sansom의 번역 중 어느 것을 더 선호할지 쉬이 알 수 있으리. 심지어 Sansom은 문장의 마지막을 <무언가 터졌을 때> 어울리는 느낌표로 마무리. 4) 겐코 별세 후 약 삼백 년 뒤에 출생한 마쓰오 바쇼는 일본 하이쿠의 성인(聖人)으로 불림. 오늘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그의 하이쿠 한 수 소개하며 긴 글 읽어준 독자들에게 내 감사의 마음 표하려 함. 류시화 작가가 번역한 <바쇼 하이쿠 선집>(열림원,2015)에서 골랐다. 절에서 자니 참된 얼굴이 되는 달구경 참고로, 미국의 하이쿠 시인 Jane Reichhold은 같은 시를 아래와 같이 번역. sleeping in the temple the serious-looking face is moon-viewing <끝> 

2022년 4월 1일

필립 K. 딕

나는 필립 K.딕을 좋아한다. 최근 <필립 K.딕 : 나는 살아있고 , 너희는 죽었다>라는 평전이 번역됐기에 (당연히) 사서 단숨에 읽었다. 문장과 구성이 몹시 괜찮았다. 평전을 쓴 엠마뉘엘 카레르라는 저자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또 한 권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었다. <왕국>(열린책들). 사서 읽고 있다. 카레르는 (나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과 성경을 공부하다가 어느날, 불가지론자가 되었음. 그런 그가, 초기 기독교의 발생과 복음서의 형성 과정을 693쪽에 걸쳐 <정말 독창적으로> 구성해 냈는데 그게 이 <왕국>. 띠지(!)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 <왕국>은 모든 장르에 도전한다. 해설, 조사, 에세이, 역사책이자 자성록이며 시종일관 흥미진진하다. - 프랑수아 뷔넬, <리르> ]. 이 책의 장점은 그 서로 다른 장르들이 절묘하게 섞인다는 것. 종종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기는 하지만, 절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또 다시 시작되는) 다른 장르>의 글 읽기가 주는 문학적 쾌감이 크다. 이제 인상적이었던 대목 하나 소개하며 페북다시컴백 인사글을 맺으려 함. 루카(누가)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다가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왕국>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발레 지방의 산골 마을에서 지낸 저녁 시간들을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얘기고, 난 어떤 저녁들에는 인터넷에서 포르노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 내가 가장 지속적으로 끌리는 테마는...(여기까지).

2022년 1월 12일

드라이브 마이 카

운전을 못하는 내가 오늘 본 영화는 하루키 원작의 드라이브 마이 카. 비록 나 흡연을 혐오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흡연씬은 섹스씬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흡연을 혐오하는 내가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흡연씬은 밀양에서 송강호가 교회 앞 골목에 쭈그려 앉아 피는 담배. 그 장면에서 송강호가 너무 짠해 보여 그 담배 연기 내가 다 들이마시게 되더라도 그냥 그 옆에 앉아있어주고 싶었다. )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인상적인 대화가 많았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자면 ). 누군가, 연극 감독인 남주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이번에 연출만 하고 출연은 하지 않으시나요? (남주가 대략 이런 식으로 말한다). 안톤 체호프의 극본은, 제대로 읽고 연기하게 되면, 극본이 묻는 질문에 답하며 진짜 나의 모습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고 싶지 않아요. (이 대목에서 성경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도 성경을 잘 안 읽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