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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6일

안식년 휴가 중 몇 권의 구약 성경을 읽고.

1. 이곳 미국에 와서 잠시 지내는 동안 오래간만에 성경을 읽었다. 나이가 있다보니 전도서를 먼저 읽었고 (아주 좋았음), 다음으로 어디를 읽을까 잠시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사무엘상을 폈다. 그렇게 사무엘상,하를 읽고, 이어서 열왕기로 넘어가려다가 사무엘상,하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 다시 한 번 더 읽고, 그리고 열왕기상,하를 읽고, 이어서 예레미야를 읽고 있는 중. (예레미야를 선택한 이유: 아주 흥분해서 읽었던 열왕기하의 마지막 사건들이,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와 겹치기에 스토리가 잘 이어지기도 하며, 사무엘/열왕기와는 다른 장르(즉, 예언서)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음.) 사무엘서를 읽기 시작할 때 결심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 "영적인 교훈을 깨달으려고 하지 말자". 2년 전에 로버트 알터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그 책에서 하는 말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알터는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 "성경도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구약을 읽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문학적 재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지면 알터의 <할애비>가 와도 재미를 경험하지 못할 뿐이다. 다행히(?) 구약(이라는 문학)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은 편이기에 (도대체 내가 누구관대 이런 말을 ㅋ) ,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층위에서 <문학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아래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문학적 재미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미리 말하지만, 내 재미가 누군가에게는 노잼일 수도 있겠다. 흑흑. 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참 인상적인 책 제목이 있다. 이 제목에 라임을 맞춰 내가 사무엘서 읽은 소감을 표현해 본다면: "사무엘서는 재미있는데 다윗은 맘에 안 들어". 나는 너무 능수능란한 사람, 빈틈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데 다윗은 (소름끼칠 정도로) 권력 유지(Power Yuji)와 전쟁,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수였고 능란했다. 사람을 죽일 때도 그냥 죽이지 않았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이긴 다윗은 "포로들을 줄을 지어 세운 다음에, 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매 석 줄 중에 두 줄은 죽이고, 한 줄은 살려주었다." (사무엘기하 8:2)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다윗은 포로들을 <그런 식으로 죽이고(두 줄)>, <그런 식으로 살렸고(한 줄)>, 나는 <그런 다윗>에게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3. 그럼, 사무엘서에서 인간적으로(?) 제일 정이 갔던 사람은? 그 사람은 아히도벨이었다. 아히도벨은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다윗이 죽인 우리야는, 그의 손녀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 (아름다운 손녀, 용감한 사위를 둔 아히도벨은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의 탐욕스러운 사내가 나타나 그의 손녀에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사위까지 <살해>한다. 가해자는 (전자발찌도 차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녔다. 그래서였을까, 나중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압살롬 편에 선다. 그리고 (도망간) 다윗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략을 냈다. 평소 그가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사람들은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삼하 16:23). 어떻게 된 일인지 압살롬이 이번에는 그의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신이 개입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주님께서 이미 압살롬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좌절시키셨기 때문이다." (삼하 17:14). 이제 사무엘서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사건이 펼쳐진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 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 (삼하 17:23). 그가 목을 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을 깊은 정적의 시간. (사건은 바로 전에 일어났다. 아히도벨이 <매달려> 있는 줄은 지금도 <여전히>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아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종들이 마당에서 일하는 건강한 소음이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와 방 안의 정적과 섞인다. 비록 역모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시도해 봤고, 집의 대소사까지 다 정리하고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 남자. 방 안의 공기는 (적어도 내게는) 무겁다기보다는 차라리 평온하게 느껴진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 이야기가 내게 깊이 각인 되었을까. 아히도벨이 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떠난 시점은, 압살롬이 다윗성 점령에 성공했을 때. 아히도벨은 자신 편의 군사력이 가장 왕성한 그 때, 압살롬의 필패를 미리 <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요즘 내가 <내 끝>에 자주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4. 열왕기상 22장에는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미가야 예언자 사이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크게 두 번>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두 번 놀라기를 바란다.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고 믿는다). 먼저 상황 설명을 하면: 아합 왕은 미가야 예언자를 싫어했다. 이유는, 늘 그에 대해 <안 좋은 예언>만 해서 그렇다. 지금 전쟁을 막 시작하려는 왕이 미가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나는 속으로) 늘 안 좋은 예언만 한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예언을 하겠지, 라고 나는 합리적인 예상을 했다. 웬걸, 15절에서 미가야는 "올라가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라는 축복의 예언을 한다! (여기가, 나의 첫번 째 놀람) 그런데 이어지는 왕의 대답은 방금 전 예언만큼이나 의외였고 나는 두번 째로 놀랐다. 왕이 한 말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다. "너 왜 지금 진실을 말하지 않냐?" 왕은 "역정"(공동번역)을 낸다.(당황한 나는) 15절의 단어 하나 하나에 주목하며 서너 번을 읽었지만 <역정을 낼만한 건덕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번뜩 깨달았다. 미가야 예언자는 15절을 <조롱하듯이> 말했던 것이다! 아합 왕은, 그 예언(이 조롱이라는 것)을 제대로 읽어냈다. (그랬기에 그는 미가야를 옥에 가둔다). 나는 몹시 흥분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낭독하거나 암송할 때, 낭독자나 암송자는, (성경에) 조롱하듯이 읽으시오 라는 지문(地文) 없어도, 이 부분을 조롱하듯이 읽거나 암송했겠구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이 사실이 너무너무 신기했다! ) "주님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15절)"라고 <아무리 분명하게> 성경에 쓰여 있더라도, (그리고) 이 부분은 조롱입니다, 라는 지문이 없더라도, 우리는 기존 문자를 읽을 때와는 <다른 톤>으로 해당 본문을 읽어내야 할 경우가 있는 거구나! 성경은, 우리가 당연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고 있구나! (나 여기서 괜히 깊은 감동 받음. 흑흑). 혹시, 신약에서도, 내가 지금 읽는 톤이 아닌 다른 톤으로 읽어주길 기다리는 구절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그 구절들은 어디일까. 5. 예수님은 구약이 "자기에 관해" 쓴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눅 24:27) 구약의 역사와 이야기는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힐끗) 그 연결점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모두 내가 보기에는 '시작은 좋았으나 끝에 가서는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역사라는 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12:7)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백성이 정신 차리고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나 이스라엘을 원수에게 아무리 <넘겨 주어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들을 <넘겨 주신다>. 이렇게 <백성을 넘겨주는> 구약은 <아들을 넘겨주는> 신약과 이어지고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엠마오 가던 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다시 보니, 여기서도 <넘겨 주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0). 2021.9.25.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신동주 <서플먼트> 1) 이 글의 초반부에 언급한 <문학> 관련 이야기는 로버트 알터의 『성서의 이야기 기술』 (원제: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 39쪽에 등장한다. “성서도 문학[이라고] 본다면, 문학적 분석의 틀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 모든 다른 접근법은 (...) 성서 이야기가 지닌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영적인 교훈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문학적 재미만은 놓치지 말자. 이게 내 가이드라인이었음. 내가 문학적 재미를 놓친다면, 계시의 통로로 구태여 문학을 선택했던 성경 저자들이 몹시 서운해할 것 같았음. 2) 예레미야서를 읽다보니, 적혀 있는 문자를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른 톤>으로 읽어내야 할 상황이 그 어떤 책보다 자주,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음. 예를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쳤다" (15:6)는 어떤 톤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지문(地文)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거 같음. 당신의 지문이 무엇일지 궁금함.

2021년 9월 22일

45세 시절의 조용기 목사 설교(1981.2.25. '겉옷을 벗어 버리고' )를 듣고.

1. 한 명의 목사가 세상을 떴다. 향년 86. 유튜브에는 '조용기 목사 45세 때 설교' 라는 동영상이 떴고 나는 한번 끝까지 들어보았다. 나보다 어린 나이의 한 중년 사내가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었다. 한번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적은 있었으나 (설교 제목이 '겉옷을 벗어버리고'였고, 조목사는 설교 도중 양복 웃도리를 벗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거기서 웃었다), 내 고개는 설교 내내 주로 아래 위가 아닌 좌우로 흔들렸다. 살면서 내가 그에 대해서 꽤 진지하게 숙고했던 적이 <두 번> 있다. 그리고 두 개의 <결론>을 내렸다. 오늘 (대단치 않은, 개인적인) 그 두 결론을 나누고자 한다. 2. 2002년 월드컵 직후였던 것 같다. 교회에서 보내온 그의 설교를 편집하고 있었다. (피디들은, 교회에서 설교 파일을 보내주면, 규정된 방송 시간을 초과하는 분량이나, 방송법 법에 저촉되는 내용 등을 편집해서 잘라내고 내보낸다). 설교 중에 대략 이런 말이 등장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한다).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그런 성장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그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람을 만나더라도 규모가 되는 교회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제 후배 목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교인 수가 적은 목사들 말고, 어느 정도 교회 규모가 되는 목사 동료들과 어울려라." (설교에서는 교인 숫자까지 말했으나, 그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적지 않음). 3.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멘붕에 빠져 편집기를 멈췄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질문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게 맞나?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 그러나 하나님 판단은 내 판단과 다르니, 내가 그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구원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다음 한 가지는 비록 신 앞이지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적인가?"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신 앞에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후, 누군가 내게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구원 여부에 대해선 제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20여년이 흘러도 내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4. 이제, 두 번째 이야기. 다들 잘 알다시피,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요한3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 한번은, 그동안 내가 공부한 신학을 근거로 해서 그의 삼박자 구원을 한번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비평'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함). 평신도로서 그간 신학책을 읽으며 배운 것을, 삼박자 구원론을 살피는 데 <적용>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확인하고 거기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신학책에서 강조하는 첫번 째 원칙이었다. 시(시편)를 읽을 때는 시로 읽어야 하고, 묵시(계시록)를 읽을 때는 묵시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한3서는 편지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 그렇기에, 요한3서는 편지로, 편지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이 편지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을 편지로, 편지처럼, 읽거나 해석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5. 그럼 이 편지에서 삼박자 구원론의 근간이 되는 센텐스는 어디에서 등장할까? 놀랍게도 그 구절은 곧바로 2절에 나온다. 즉, '누구에게(1절)' 바로 다음에 나온다. 대개의 편지에선, 우리가 <의례적인 인사>라고 일컫는 문장이 <그 위치>에 등장한다. 이제, 작은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정말 전형적인 <인사>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조카야), 네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너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개역개정과 현대인의 성경을 혼합). 6. 나는 요한이 상기 편지를,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을 조기 은퇴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삼겹살 고깃집을 개업하는 성도에게 (지금) 쓰고 있다면, 2절은 아마 이런 모습을 띠지 않았을까 싶다 :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사장님), 사장님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이번 고깃집 완전 대박나고, 사모님과 두 분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인사에는 좀 오버하는, 과장된 축복 멘트가 들어가도 괜찮다. '대박' '돈벼락' 같은 말이 들어가도 괜찮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원래 인사가 그런 것이다. 다들 감안해서 듣는다.)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의) 문제는, 어느 정도는 <흘려 듣고> 마음만 받아야 하는 인사말을 <진지 빨고> 들으면서, 자신의 신학을 그런 (한갓) 인사말 위에 세웠다는 데 있다. 그러한 <진지 빤 신학>에서는 이제 '대박'은 진정한 믿음의 표징,증거,의무가 된다. (대박과 십자가를 연결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결론을 정리하면: 인사말은, 듣고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본격적인 신학을 세우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다른 말씀, 다른 심오한 말씀들 많잖아! 왜 66권 수많은 말씀 중에서 하필 거기야!) 2021.9.20. 신동주

2021년 9월 7일

<스토커>(Stalker ,1979 )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를 보고.

1. 영화 두 편을 봤다. 둘 모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1932~1986)의 영화였다. 인터넷 서점에선 DVD로도 판매하고 있지만 (이 말은, 한글 자막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기에 유튜브로 봤다. (이 말은, 러시아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봤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 영화 모두 런닝 타임이 3시간). 나는 영어 이해가 빠르지 않기에 대사 하나 등장할 때마다 포즈 버튼을 누르고는 (모르는 단어 영어 사전에서 찾고)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이 말은, 한 영화당 내가 포즈 버튼을 누른 횟수가 최소 백 번은 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건 영화 감상이 아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음. 인정.) 영화 감상이 아니었어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래 그 이유와 결과를 간단히 적는다. (내 영화평이 늘 그렇듯이 본문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 등장 않는다. 각주에는 나온다). 2. <스토커> (Stalker) / 1979 2019년 5월28일 화요일 오후 6시, 나는 회사 업무가 종료되는 순간,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 되는 고려대 베리타스 포럼에 접속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강연 주제는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였고, 남자 한 명이 왼쪽에 서서 동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 잊혀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강연 초반에 소개한 영화 한 편이었다. 스미스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를 소개했다 : "<스토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세 사람이 어딘가로 갑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은,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줍니다. 누군가 입으로 말하는 바램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죠. 문제는, 그 세 사람이, 그 방 앞에 도착해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정말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3. 2년 전에 들은 이 짧은 영화 줄거리는 이상하게 듣는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입을 통해, 페북을 통해, 경건해지고 싶습니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기고 있습니다, 비아에서 나온 『사막의 지혜』를 읽고 있습니다, 참 멋진 말들을 많이도 해오고 있는데, 막상 그런 나는, 내 입술의, 내 페북의 갈망을 현실화 시켜준다는 그 방, 더 룸(the Room)에 <들어가길> 원할까? 페북에 그렇게 종교와 경건에 대한 포스팅 많이 하는 나이지만, 일단 <지금>은 못 들어간다. (누가 뒤에서 실수로 밀까봐 두려울 정도다). 나 또한 내 깊이 내재한 갈망이 무엇인지 미리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의자에 앉자, 내 앞에, 벌거벗은 남녀 몸뚱아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적거리며 꿈틀대는 세상이 영원히 펼쳐진다면? 내가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어 영원히 꿈틀대(야만 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확실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정욕을 극복하는데 혹시 고행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수도사처럼, 그래서 자기 등 채찍으로 밤마다 쳤듯이, 나는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라는 <고행>을 계속했다. 마치 이 고행 통해 내 갈망 정화되기라도 하듯이. (맞다. '영화 감상'이라 불릴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행의 효과는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속 세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갔을까,에 대한 답변은 생략. 4.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 1966 이십 여년 전, 라디오 방송사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시절, 녹음기 하나 들고 서울 전 지역을 돌아다니던 시절, 내 지갑 속에는 내가 볼펜으로 쓴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한 말이었는데 힘들 때면 꺼내 읽었다. "영화 감독으로 산다는 건 레드카펫 위를 걷고 카메라 플래쉬 받으며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감독으로 사는 건, 촬영 장비를 지고 비오는 새벽 집을 나서는 것이다." 화질 안 좋은 VHS 비디오로 그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본 건 그 무렵이었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삼위일체','블라디미르의 성모' 같은 이콘(icon)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15세기 러시아 화가이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거세게 불던 바람, 무너진 성당 벽에 기대선 남자의 긴장한 얼굴 표정은 또렷이 기억난다. 40대와 50대를 사는 동안 문득문득 흑백 영화 속 그 <거친 바람>이 떠올랐고, 얼마 전 영화평론가 C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중, 그 거친 바람을 <다시 맞고> 싶어졌다. 내 삶의 쭉정이를 다 날려보내고, 그리고 남는 내 삶의 알곡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남을까).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유튜브를 통해 부는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다시 불기를 (역시) 백 번 정도했다. (자막 ㅠㅠ) 런닝 타임 3시간 동안 안드레이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안드레이가 붓을 쥐고 있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다 보고나니 그건 결점이 아니었다. 2021.9.6. 신동주 서플먼트 (*스포일러 등장) 1)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보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원작이 있는 경우 무조건 원작부터 본다, 는 내 오래된 원칙 지키기 위해 SF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 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 (두 형제는 소비에트 시대 작가로서 원작은 1972년에 출간). 출판사 소개문을 발췌, 인용하자면 : " 『노변의 피크닉』은 외계 생명체나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을 다루는 ‘퍼스트 콘택트’ 유의 소설에 속하"며, "불법적으로 ‘구역’(the Zone)에 숨어들어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물체들을 찾아내고, 그걸 팔아 살아가는 ‘스토커’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와 비슷한 동기를 갖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장편 소설에 <그곳은 우리의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라는 식의 문장이 단 일 회만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음.(현재 미국에 와 있어서 소설 속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 못하는 것을 양해 구함). 소설 속 그 한 줄의 문장이, <스토커>에서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 더불어, 이 소설을 통해 '스토커'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좇아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잠입자,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됨. 소설과 영화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임. 2) <스토커>의 주인공 세 사람(스토커, 교수, 작가)은 두려워서 결국 '더 룸'에 들어가지 못함. 세 시간 내내 세 사람 꽁무니 졸졸 따라갔던 <피디> 한 명도 그 방 문턱에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남. (도대체 인간 중에 누가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이런 생각이 듦.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방에 들어간 거 아님? 너무 커서 그렇지, 그 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님? 왜냐하면, 각자가 갈망을 뿌린대로 거두는 모습을 이 방 안에서 매일 목도하고 있으니. 만델라. 이명박. 트럼프. 그레타 툰베리. 윤석열. 신동주...열매가 맺히는 속도만 다르지, 그 방과 이 세상은, 어쩌면 같은 공간일 듯. 그래서 결론: 방 안으로의 진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 3)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열기구가 추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총 9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짐. 그 중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세 개만 아주 짧게 소개하면 : (a) 젊은 청년이 영주를 위해서 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맞아 죽을 수 있음. 드디어 종을 치던 날, 몇 년째 입을 닫고 묵언수행해 오던 안드레이가 입을 열고는... (b) 타타르족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을 폐허로 만듦. 끔찍함.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름).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까지 들어와 사람들을 도륙하고, 교회의 보물을 찾겠다고 끓는 물을 사람의 입에 부음. 그런 행동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함. 장수로 보이는 듯한 이가 말을 탄 채로 성당 벽을 바라보며 묻는다. "저기에 누워 있는 아기는 누군가?" " 예수입니다" "아기 옆에 있는 여자는?" "동정녀 마리아 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면 동정녀가 아니지" 성당을 불태우고 타타르족이 떠난다. 이제 안드레이는 벽에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 누군가에게 아무런 영향 미치지 못한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화가는, 이제 <어떻게> 그려야 할까. 아니, <그려야 할까>. (c)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초반부에 나옴. 안드레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키릴이, 성상화(聖像畫)의 대가 테오판 그릭을 만나는 중. "나와 함께 일해주겠나?"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요. 제 공동체와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저를 지명해주십시오" (당시 안드레이가 더 인정 받고 있던 상황). "그러지". 얼마 뒤, 테오판 그릭이 보낸 전령이 수사들이 다 모인 앞에서 테오판의 후계자를 발표한다. "안드레이!"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의 키릴. "아, 머리가 빠개지는 거 같군". 전날 밤 술을 잔뜩 마신 듯한 전령은 말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함. 난 이 부분을 여러번 돌려봤는데, 만약, 테오판은 키릴을 생각했으나 숙취에 시달리던 전령이 이름을 착각한 것이라면? 이 도입부가 참으로 매혹적). 4) 실존 인물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실제 그린 성상화(聖像畫, icon)들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 내게는 성상화들을 <즐겨보고> 싶은 로망이 줄곧 있어왔음. 이콘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내가 짐작하기론) 중세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중세인의 태도가 내 삶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근현대인인 내게는 그것이 결여돼 있는 듯. C.S. 루이스는 『폐기된 이미지 - 중세 세계관과 문학에 관하여』 (C.S.루이스 지음, 홍종락 번역, 비아토르)에서 중세인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는 (...)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들은 무엇보다 "올려다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함. 누군가를,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걸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영락없는 근대인인 나는, 어쩌면 이콘마저도 내려다 보고 있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