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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2일

밀레니엄

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생태공원에 12대문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내게는 그런 아이디어가 발렌타인데이 때 전국에 3층 높이의 초콜릿바 12개를 세우겠다는 얘기만큼이나 기괴하고 우습게 느껴진다. 그런 구색맞추기식 상징으로 정말 우리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나에게 그 예산이 주어진다면, 그 12대문 지을 돈으로, 우리가 관습적으로 지어놓은 전국의 건축들을 <체계적으로 허물고> 싶다. 수많은 기념탑들, 수많은 전시관들, 수많은 아파트들을. 그것들을 하나하나씩 허물고 그 장면을 TV로 생중계 하고 싶다. 밀레니엄을 맞아 어떤 상징적인 행동을 해야만 한다면 난 ‘허뭄’에서 그걸 찾고 싶다. 꼭 무언가 하나를 세워야 한다면 나에게도 세우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난 <유치원>하나를 삼풍백화점 자리에 짓고 싶다. 정말 제대로 지은 유치원 하나. 동사무소에 건축 신고할 때부터 어떤 범법도 저지르지 않고, 아이들에게 위험하지 않은 재료로, 소방과 안전에 만전을 기한, 화장실에서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아이들의 눈높이 중심인, 그곳에서 근무하는 교사들도 성적순이 아니라 사랑과 열정을 보고 뽑은, 그런 유치원을 하나 짓고 다. 정말 예산이 허락된다면 그런 유치원을 전국에 12개 짓고 싶다. (1999.12.) * 방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17년 전에 쓴 글이 나와서 읽어보았어요. 여전히 무언가를 세우는 나라...댐과 박정희 기념관과 사드와.....

2016년 2월 19일

지하철 환승역

한 젊은 여성이 한 젊은 남성을 잡고 도망가지마! 라고 외쳤어요. 둘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두 사람은 조금씩 제게서 멀어져 갔어요. 사람들은 그냥 무심히 그 두사람 옆을 지나치고. 그냥 가면 너무 부끄러울 거 같았어요. 에스컬레이터 위에 발을 올려놓고,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올라갔어요.

혹시 사귀는 사이신가요? 아니요. 여자가 대답했어요. 무슨 일인가요?  이 남자가 나를 밀고 도망가는 거예요.왜 미셨나요? 청년에게 물었어요. 아저씬 그냥 가세요. 그냥 가시라고요. 싫습니다. 저는 항상 준비해 두었던 답변을 했어요. (사실 이런 상황을 종종 상상하기에 한 두가지 답변은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 제3자는 빠지세요 라고 했다면, 저는 저는 이 분과 같은 도시에 사는 시민이고, 이 분이 당하는 어려움은 제 어려움이기도 하기에, 저는 제3자가 아니라 관련자입니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누가 먼저 밀었는지에 대해서 설전을 벌였어요. 남자는 실실 웃고 있었고 여자는 몹시 분노에 차 있었어요. 여자분이 참 용감했어요. 말싸움에서 지지 않고 끝까지 싸웠어요. 제가 남자에게, 어쨌든, 어떻게 시작됐든, 마지막에 세게 밀었기에 여자분이 안전에 위협을 느낀 것은 사실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하세요, 라고 말했어요. 남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미안해 됐지, 하면서, 자리를 뜨려 했고, 저는 남자의 길을 막아섰어요.  제대로 사과하세요.

남자는 다시 구차한 변명을 시작했어요.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가세요, 라고 제가 말했어요. 그리고 여자분에게 말했어요. 저 사람은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사람이 아니기에,
더 요구하는 게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아까 형식적 사과를 받은 걸로 만족해야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라는 여자분의 인사를 받았어요. 

지하철을 탔는데, 아, 이렇게 말할 것을...더 논리적이고, 더 압박을 주는 말들이 떠올랐지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매번 완벽하지 못한 언변. 그렇지만 오늘 경험이 있었기에 다음에는 조금 더 지혜롭게 말할 수 있겠지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옆에 있어주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 목표를 완수했다는 생각만 하기로 했어요. 용기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요. 여성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짧게 기도 했어요.

지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요. 그런데 정말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그 청년이겠구나.     

2016년 2월 10일

『예언자적 상상력』(월터 브루구만 지음, 복 있는 사람)을 읽고.

1. 한두 해 전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구만의 이름이 자주 언급돼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사서 읽었다. 브루구만은 이 책을 1978년에 썼고, 개정판 서문은 2000년에 썼다. 나는 이 책에서 개정판 서문이 제일 좋았다. 브루구만에겐 조금 미안한 얘기인데, 서문까지만 좋았다. 1장부터는 약간 과하게 느껴지는 '의미 부여' 때문에 오히려 감동이 반감되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의 표현: "모세가 의도했던 일은, 적은 무리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 모세가 한 일은 이집트 제국의 의식(意識)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제국을 사회 관습과 신화적 주장의 양면에서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p.59). 나는 타격이나 해체가 아니라 어리둥절, 안절부절, 조마조마,긴가민가 같은 단어들이 '역사적 모세'를 더 사실적으로 그려주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뭘 할 때 매번 그렇게 큰 그림을 다 보면서 하나? 안 보며, 못 보며, 하는 건 안 멋진 일인가? -.- )

2. 이제 나를 파고든 개정판 서문에 대해서. 이런 말이 나온다. "완전한 자유로 행하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든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말과 행위에 권위를 부어 주실 수 있다. (...)어떤 사회적 환경의 경우 다른 환경에 비해 (...)예언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장소로 더 적절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p.36) 브루구만은 예언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큰 공동체의 특징을 넷 얘기하는데 그 두 번째 특징에서 내 독서와 내 삶 모두 콱 막혔다. " [그 공동체에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이용 가능한 고통에의 감각이 있다."(p.37). 몹시 찔렸다. 신학적인 용어에는 점점 친숙해져 가는데, 내게는, 이용 가능한, 예언자적 삶을 살기 위해선 필수적인, "고통에의 감각"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면서, 고통의 감각을 몸 속에 지닌 채 살아가는 한 후배가 떠올랐다. 페북에서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방금 브루구만 책을 읽을 때처럼 찔렸다. 그는 세월호 현장에 있고, 청소년들을 돌보고, 동료들과는 자신이 먼저 경험한 어려움과 극복 방안을 나눴다. 예언서를 읽는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예언서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2016.2.10.

ps.
브루그만은 아브라함 헤셀이 쓴 『예언자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예언자는 고통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 예언자가 나서서 이루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고난을 감당하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요, 삶과 고통 사이에 가로놓인 장막을 찝어 버리는 것이다". (p.35). 난 그 막이 더 튼튼해지기를, 질겨지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고통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