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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9일

2014년 12월 28일

신약학개론

1965.12.28 에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그에겐 두 가지 꿈이 있는데.... 하나는 낸시랭과 <신학펀치>찍는 것이었고(이뤄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수지와....<신약학개론> 찍는 것입니다(기도해주십시오)....이상입니다....저는 될 거 같습니다...

2014년 12월 27일

『행위없는 구원?』(권연경 지음, SFC)을 읽고.

행위없는 구원?(권연경 지음, SFC)을 읽고.

1.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게하는 책이 있게 마련이어요. 특정 문장이 우리를 <건드리는> 거지요. 그때 우린 알게 돼요, 아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겠구나. 몇몇 그런 문장을 소개하면 이래요. (1) 존 도미닉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 “그가 갈릴리 저지대 마을에 들어설 때, 그는 아직 낯선 사람이었다”. 책이 시작되고 세번 째 센텐스에서 상기 문장을 읽었을 때 – 아...“저지대”라는 말....! - 저는 먼지와 땀으로 범범이 된, 많이 걸어 종아리에 알이 배긴 진짜 발을 봤어요. 교리적인 발이 아니라 역사적인 발이요. 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자의 방법론은 무척 실망스러웠으나 끝까지 책을 읽었던 건 상기 세번 째 센텐스의 힘이었다고 봐요. (2)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그녀의 발은 찼다”. 미국에 있는 아내가 떠올랐어요. 아내의 손발이 무척 차요. (3) 권연경의 『행위없는 구원?』: “에스컬레이터 위의 막연함처럼, 혹은 더 편리한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어색함처럼, 목표한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 현재 우리의 [이미 구원 받은] 삶은 참 어색하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내 맘 속의 그 어색함, 이 남자, 어떻게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세 번 모두, 제가 발-걷기, 여정- 에 꽃혔네요. 아, 페티쉬 아니어요. )
2. 『행위없는 구원?』에서 권연경 교수가 구원에 대해 하는 말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우리가 최종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삶,순종)를 보시고 그에 따라 심판하신다. 전 처음에 무척 놀랐어요. 하나님이 심판대에서 우리 행위를 본다니! 우리의 ‘성행위’를 본다고 했었어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거에요. 썰렁.
3. 그런데 말이죠, 제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조합 – 구원와 행위- 에 대한 얘기를 계속 읽어가는데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데요- 제 맘 속에 <작은 힘>이 생기는 거에요. 저도 놀랐어요. ‘은혜로, 아무리 못(막)살아도, 무조건 구원 받는다’라는 ‘은혜스러운’ 말이 아니라 ‘행한대로 심판을 받는다’라는 ‘무서운’ 말에서 내가 어떻게 힘을 얻고 있는 거지?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맘이 들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 내가 오늘 하는 선택은 엄청 중요해.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이렇게 선택해도, 저렇게 선택해도 결과는 다 똑같은 게 아니야. 나 한번 제대로 싸워보고 싶어.”
4. 우리가 흔히 쓰는 ‘오직 은혜’라는 말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해요. “뒤집어 말하면 우리의 구원은 ‘행위’ 곧 우리 삶의 실천적 , 윤리적 차원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기독교 메시지가 ‘복된’ 소식이 되는 이유로 간주된다” (p.21) 책을 잠시 덮고 제 스스로 제게 물어봤어요. 그게 너에게 복된 소식이니? 제 대답은,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그럼, 어떤 게 복된 뉴스가 될 수 있니? 제가, 거울을 볼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야, 그렇게 될 수 있어야, good, 복된, 뉴스, 이어요.
5. 저자는, 이 책의 저술 과정을 ‘주석적 회개’라고 불러요. 우리의 편견과 욕망과 교리에 따라 관습적으로 읽어온 본문들을 제대로 읽어내겠다는 표현, 결심, 고백이죠. 하나 저자의 주석적 회개는 제게 ‘주석적 쾌감’을 선사했어요. 일견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듯한 성경 본문들 (마태복음 vs 야고보서 ; 갈라디아서 3-4장 vs 5-6장 등) 속에서 성경과 저자의 일관성을 상정하고 그 일관성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는 과정이 흥미진진했어요. 아, 쾌감과 함께 ‘부끄러움’과 ‘용기’도 더불어 받았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되겠네요. 몇몇 부분에선 백퍼센트 동의가 되는 건 아니어요. 하나, 이 책을 읽었기에, 제가 믿는 기독교, 제가 읽는 성경, 제가 따르는 그 분,을 다시는 이전처럼 대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일독을 추천드려요.

2014년 12월 18일

제50회 녹화

올 1월 10일 금요일 2시에 첫 녹화를 했다.
내일, 12월19일 금요일, 48,49,50회 녹화를 한다.
녹화 준비를 마치고, 이제 집으로 간다.

2014년 10월 3일

『신약의 윤리적 비전』(리처드 헤이스, IVP) 제1부를 읽고.

리처드 헤이스가 쓴 『신약의 윤리적 비전』 을 읽고 있는데 참 좋다. 1부 다 읽고 이제 2부로 들어간다. 헤이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나는 독자들이 특정한 도덕적 사안(폭력,이혼,동성애,반유대주의,낙태)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의 후반부 다섯 장으로 즉각 건너뛰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기우였다. 내용이 좋아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 헤이스는 바울의 여러 서신들, 네 개의 복음서,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 등에 나타난 신학의 차이점을 대조하는데 ,( 4복음서 읽으면 같은 책 4번 읽은 느낌드는 내게는) 그런 선명한 차이가 충격이었다. 이제 2부에서는 이런 차이점에 대한 통합을 시도할 것 같다. 이런 웃긴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초대교회의 경우, 많은 이들이 복음서를 네 개 모두 갖고 있지 않았을텐데, 그러면, 그들보다 우리가 더 통합되고 풍부한 그리스도상을 갖고 있다는 말일까.

2014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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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Like-r 에게 자유를 주소서.
출연해 주신 분들을 기억해주소서.
저에게는 12월까지 건강을 주소서.


2014년 9월 25일

낸시랭의 신학펀치 페북 3천 라이크 기념




20-30대 때 저는 십자가와 보혈 이야기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요즘은 성경이 기록된 ‘실제 과정’ 이야기를 들으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책을 남기심에 있어서 ‘오류’와 ‘편견’과 ‘한계’ 있는 인간들 손에 그 작업을 맡기셨다는 걸 생각하면 참 놀랍습니다. 제가 신이라면 제 뜻이 조금이라도 왜곡 되거나,오해 되거나,불명료하게 전달되는 걸 참지 못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성경에 쓰인 모든 것은 완벽, 완전하다는 ‘편견’을 갖고 볼 때는 이성을 잘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 하나님을 어떻게 감히 제 이성으로 분석하나요! – 요즘은 성경을 찬찬히 읽는 가운데 이전에 못 보던 걸 조금씩 보는 것 같습니다. 20회에서, 바울의 논증 자체가 헷갈린다는 지적을 들으면서( 유튜브 20회, 24분23초 지점. 고전 11:6에서는 여자는 머 리를 가려라. 고전 11:15에서는 긴 머리는 가리는 걸 대신해주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모순을 보면 모순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는 것 같습니다. 모순이 저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성경을 더 읽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모순된 표현까지도 허용하시는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

2014년 9월 9일

『아담의 진화』(피터 엔즈 지음, 역자 밝히지 않겠음, CLC)를 읽고.

1. 출애굽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해 준. 출애굽기는 또 큐티하기도 좋다, 소위 ‘적용꺼리’가 많아서. 그런데 요즘 오십 평생, 성경 읽으며 별 관심 두지 않았던 사건에 점점 흥미가 간다. (관심 가져야만 한다는 걸 배우고 있다).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기. 성경(이 갖고 있는 ‘문서’라는 특징)에 한정시켜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출애굽 사건보다 바빌론 포로 및 귀환 사건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창세기를 포함해 성경의 첫 다섯 권(흔히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외 많은 성경 책들의 <최종적인 본문>이 포로기(주전 586- 444)를 전후해서야 <비로서> 완성됐다고 한다. 어떻게 선민이, 약속을 받은 민족이, 망해서 이방인의 포로가 될 수 있지? 기존의 신앙을 뿌리채 흔드는 질문 앞에서, 답이 안 보이는 곤혹스러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수님 오기 불과 약 5백 년 전까지도 기존의 성경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편집되거나 수정되었다니!

기록된 것에 <일점일획>이라도 더하거나 제하는 걸 두려워하는 나였기에, 구약의 최종 편집자들의 이런 <반-요한계시록적> 행동(“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계22:18)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게 구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구약을 보고 바울은 <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이 책들을 보라>고 하였다. 또 바울은 얼마나 자주 자신의 논지를 펴기 위해 구약의 특정 구절들을 자의적으로 <몇 점 몇 획 변형 후> 인용했던가! 그런데 <교회>는 구약을 이렇게 <디스>한 그의 글을 <분서>하는 대신 <정경>으로 삼았다.

2. 욥기나 전도서, 잠언 등 소위 성경에 나오는 지혜 문학의 상당 부분은 - 오래 전 책에서 읽은 내 기억이 맞다면 약 70~80% - 당시 이집트 등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 내용과 겹친다. 겹친다는 말은, 거기서 갖고 왔다는 말이다. 아, 그럼 다시 그 유명한 구약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어떻게 될까?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영어로 하면,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당혹스럽지만 바울은 지금 비기독교인으로부터 유래한 지혜서 70% 분량의 <이교 문장들>(pagan sentences)을 보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됐다고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동안 견지해왔던 <기독교-비기독교> 구분법은, 어쩌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감>을 담기엔 너무 좁은 것이었을 수 있단 생각이 요즘 든다. 이제 난 이렇게 생각한다. 성경 속 하나님의 신(holy spirit)은, 이집트의 어느 오래된 흙집 앞 의자에 앉은 노인이 인생을 돌아보며 겸손히 짧은 경구를 남길 때도, 그 옆에서 바람으로, 숨으로, 그의 얼굴을, 그의 문장을 간지러 주었을 것이라고.

3. 『아담의 진화』는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을 쓴 피터 엔즈의 책이다. 두 책 모두 우리가 신앙의 근거 - 종종 타인에 대한 비판의 근거, 더 나아가 저주의 근거 - 로 삼는 성경, 이란 책이 <실제로는> 어떻게 쓰여진 책인가, 하는 점을 다루고 있다. 성경의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 무엇을 참고하는지, 천지창조와 홍수 이야기는 왜 그렇게 타 종교 신화와 유사한지, 왜 유사해도 되는지,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을 얼마나 <자유롭게> 해석했는지,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지 등등 흥미로운 - 사실 우리에게 절박한 - 주제들에 대해 설득력 있게 해설했다. 비록 책 제목과 부제에 <진화>와 <인류의 기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성서학과 구약학을 다루고 있다. 훌륭한 입문서란 생각이 들어 강추한다.

4. 저자가 곁다리로 소개한 에피소드 하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디모데후서 3장8절은 모세 시대에 바로를 위해 활동했던 마술사의 이름을 ‘얀네’와 얌브레'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이름,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여기에만 나온다. 진짜 3,4천 년 전에 살았던 두 사람의 이름 맞을까? 3,4천 년 동안 그 둘의 이름이 교회에 전승돼 왔다고 하는 주장을 펼 수도 있겠다. 하나 아닐 것이다. “익명의 인물들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성경의 에피소드를 보다 구체화하려는 현상은 제2성전기에 흔한 일”(p.285)이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기입한 성경. 재차 묻게 된다. 성경은 어떤 책일까.

5. 옥에 티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 있었다면 번역. 개정판에선 문장을 많이 다듬어주기를 기대하며.

2014.9.9.
신동주

2014년 9월 3일

『아담의 진화』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매하고.

어제 책을 두 권 샀어요. 먼저, 아담의 진화.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을 쓴 피터 엔즈 교수가 썼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 나아가 창세기 자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를 다루고 있어요. (아담을 보편적 인류를 의미한다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특정인을 의미한다고 봐야 하는지 등등). 무척 기대가 돼요. , 교보에서 책 사다가 좀 놀랐어요. 비싸서 ㅋㅋ 2만원. 두 번째 책을 소개하면 이래요. 어제 페북을 보는데 페친 S님이 제 신약 공부는 허타도의 주 예수 그리스도 읽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라고 쓰셨어요. 세 번을 읽으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는 이 처음 들어보는 허타도 라는 이름의 중국 신학자가 누군인지 궁금해졌어요. 검색을 했더니 윽 ㅠㅠ Larry W. Hurtado. 영국의 저명한 신약학자이자 초기 기독교 연구의 최고 권위자. 현재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부인 뉴 칼리지의 학장으로 재직. 원제 : Lord Jesus Christ: Devotion to Jesus in Earliest Christianity. 다루는 질문들은, 예수의 신성화는 언제 처음 이뤄졌는가, 예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론적 견해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형성기의 기독교는 후대의 기독교 전통에 어떤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가, 초기 기독교는 주위 종교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등등. 추천사를 쓰신 분 중에는 현재 신학펀치에 출연 중이신 권연경 교수님의 이름도 보였어요. “이 책은 단순히 눈에 띄는 지표석 하나를 세우는 정도로 기여하는 것을 넘어, 논의의 풍경 전체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 막스 터너 (런던 바이블 칼리지) ”. “이 분야 연구를 일생의 연구 과제로 삼고 줄곧 매진해온 래리 허타도 교수의 가장 핵심적인 작품이자 이후에 이어진 후속 연구들의 출발 기준선이 된 책이다 / 최재덕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바로 샀어요. 새물결플러스에서 번역, 출간했어요.   

덧붙임:  "만약 진화론이 옳은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다면, 다른 책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진화가 옳다고 전제하는 책이지 진화가 옳다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진화론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라고 인정하게 되었기에, 신앙이 흔들린다면, 본서는 여러분이 신앙을 유지[하]도록 큰 도움을 제공할 것이다. 저자는 진화와 성경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진화』의 역자 서문 중에서 )

2014년 8월 30일



 회사 동료와 함께 5시 쯤에 종교인 동조 단식장에서 단식 중이신 방인성 목사님을 찾아뵈었어요 ^^ 방목사님은 그저께 뵈었을 때와는 달리 조금 피곤해보이셨어요. 오늘은, 저희 신학펀치의 패널이신 권연경 교수님도 함께 단식 중이셨어요. 어제는 녹화하면서, 오늘은, 단식장에서 뵈니 반가왔습니다. 권교수님과 회사 후배와 셋이서 5시반 경부터 시작한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 시작하고 바로 한 여성 가수분이 노래를 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가사 시작하자 마자 갑자기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길이 안 보인다면 제대로 걸어온거야". 이 가수분과 노래제목이 넘 궁금해서 범국민대책위에 페북으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직 답은 못 받았어요.ㅎㅎ 아시는 분 있으면 부디 알려주세요 ^^ 집회 마치고 귀가할 때 지하철을 잘못 타 난생 처음 와보는 청구 라는 곳에서일단 내렸어요. 저도 방향 관련 뇌부위를 100% 쓰고 싶어요 요한슨처럼요.어느 불꺼진 편의점 앞에서 ㅠㅠ

2014년 8월 21일

PD와 조연출

오늘 신학펀치 피디와 조연출은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와서 
피디는 조연출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심부름 하나만 해줘. 이 책좀 발송해줘. 
주소는 안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놨어. / 피디는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회사 지하에 있는 교보에서 
폴 투르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샀습니다. 포스트 잇에 조연출의 주소를 적었습니다. 
마지막에 조연출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마지막에 생일 축하해 ㅋㅋㅋ 라고 적었습니다 ^^

2014년 8월 14일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중 제3장과 제4장을 (다시) 읽고.

1. 메스로 환자의 배를 가르고 잘라내야 할 부위를 찾는다. 조심스럽게 소장을 들춰내자 곪은 부위가 눈에 띈다. 나직한 목소리로 “가위”하며 의사는 장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간호사 쪽으로 손을 내민다. 간호사가 가위를 건넨다. 의사는 날카로운 수술용 가위로 소장을 삭둑 잘라낸다. 날카로운 가위날에 의해 소장이 잘려나가는 그 절삭감은 의사의 손에 <그대로> 전달됐다. 이상 수술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짧게 스케치해보았다. 하루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천 수만 건씩 벌어지는 이런 수술 장면은 마이클 폴라니(1891~1976)가 자신의 <인식론>을 구축하며 제시한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폴라니는 상기 수술실에서 의사가 경험하는 인식의 종류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잘라내야 할 <장기에 대한> 인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장기를 자르는 <가위에 대한> 인식인데 , 폴라니에 따르면, 의사는 장기는 초점적(focal)으로 인식하고, 가위는 부차적(subsidiary)으로 인식한다.

2. 이런 <초점적-부차적 인식>의 이중구조는 실생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망치로 못을 박을 때 망치를 쥔 손바닥에 전해지는 정보를 통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건 벽에 박히(고 있)는 못의 상태이지, 현재 쥐고 있는 망치 손잡이의 질감이 아니다. 우리는 못을 초점적으로 인식하고 망치의 손잡이를 부차적으로 인식한다.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짚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팡이의 손잡이는 부차적으로, 지팡이 끝을 통해 전달되는 지표면의 상황은 초점적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만약 상기 두 경우에서 초점적-부차적 인식 대상을 서로 뒤바꾸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즉, 망치 손잡이와 지팡이 손잡이를 부차적이 아니라 초점적으로 인식하고, 못과 지표면을 초점적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인식하려 한다면? 의사가 수술실에서 장기를 부차적으로, 가위를 초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면? 못질은 빗나가고, 걸음걸이는 불안해지고, 장기는 제대로 절삭되지 못한다..

3. 폴라니는 여기서 우리가 가위를 초점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의사가 가위의 성능을 의심하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 즉, 초점적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 결함을 발견하여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하나 폴라니가 여기서 부각시키고 있는 점은, 의사가 환자의 장기를 초점적으로 인식하며 절삭이라는 의미있는 행동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부차적 인식 대상인 가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은『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레슬리 뉴비긴 지음, IVP)에서 마이클 폴라니의 인식론을 소개하면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제대로 집어내고 있다. (1) 의사들은 학생시절 수많은 의료 기구들의 사용법을 배우는데 “처음 배웠을 때에는 그 기구에 온통 신경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련된 외과 의사가 된 다음에는 그것을 <암묵적으로> 의식할 뿐이고, 의식의 초점은 그것을 통해 발견하는 것에 맞추어질 것이다”. (2) 한편 의사가 가위를 “사용하고 있는 동안은 그 기구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그것이 적절한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것을 버리고 다른 기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한 그것을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것을 신뢰하는 동시에 의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그것을 <무비판적>(a-critical)으로 사용한다. (p.74~75에서 인용했고 꺽쇠는 내가 첨가했다.)

4.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불기시작한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잠시 언급하자면 이렇다. 나는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세계관’을 한 순간의 멈춤도 없이 초점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의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하나 <의미있는 대화>는 자신의 ‘기독교세계관’조차도 <부차적>으로, <암묵적>으로 취급하면서, 오직 상대와 그리고 세상과 나누는 이야기를 <초점적으로> 주목할 때 - 그런 모험(?)을 감수할 때 - 비로서 가능하다. 그 순간은, 내가 나의 ‘기독교세계관’과 상대의 ‘비-기독교세계관’에 무비판적(a-critical)이 되는 순간이다. <이야기에만 주목하는 순간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무비판적인 순간에 내 기독교가 상대의 비기독교에 의해 <오염>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이미 <완벽한 안전을 제공하는 인식론적 방법론이 있다는 환상에 오염된 생각>이라고 본다. 세월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어떤 오염은 <어떤 성숙>이다.

서플먼트

1) 나는 위에서 마이클 폴라니의 방대한 사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개념 중 하나를 간략하게 <스케치>했다. 다시 읽어보니 스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캐리커처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를 읽었으면 하는 마음 못지않게 내 속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폴라니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천구백 년대에 태어난 현대인의 어리석은 교만이었겠지만 난 한때 천팔백 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오래됐다고’ 무시하고 깔봤다. C.S.루이스(1898~1963)와 마이클 폴라니(1891~1976)를 읽으며 나의 이런 교만이 깨졌다. 

2) 폴라니의 책 가운데 세 권이 우리말로 번역됐는데 -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지적 자유와 의미』(Meaning),『과학,신념,사회』(Science,Faith,And Society) - 세 번역본 모두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번역서를 모두 읽었으되 이해를 할 수 없어 다시 영어로 읽은 경험이 있다.) 폴라니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추천하는 순서는 이렇다. 먼저 레슬리 뉴비긴의『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제3장과 제4장을 읽은 뒤에 영문판 『Meaning』을 읽기. 그의 주저 『개인적 지식』은 입문자가 읽기에는 벅차다. 『Meaning』은 폴라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인데 언어, 예술, 종교, 과학, 사회에 대한 그의 방대한 사상이 잘 요약돼 있다. 13장으로 이뤄져 있고 난 13번의 절정을 경험했다. 

2014년 8월 2일

『정통』을 (오래 전에 두 번) 읽고.

1. 조우(遭遇)한다,는 말이 있다. 우연히 서로 만난다는 말.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추리소설 속 주인공 브라운 신부(가톨릭)와, 내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C.S. 루이스(개신교)가 그렇게 <조우>하는 순간을 목격한 적 있다. 루이스의 인터뷰 중에서: “워트: 어떤 기독교 작가들이 교수님에게 도움을 주었습니까? 루이스: 제게 가장 큰 도움을 준 현대의 책은 체스터튼의 『영원한 인간』입니다. 다른 책으로는 에드윈 비번의 『상징과 믿음』,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 그리고 도로시 세이어즈의 희곡들이 있습니다. (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 중 '16. 질의 응답' 중에서)”. 내가 추리소설 작가로만 알고 있던 체스터턴이 기독교 작품도 썼다니! 브라운 신부와 루이스가 G.K.체스터튼 안에서 이렇게 조우했다.
2. 『정통』(G.K.체스터튼 지음, 상상북스)을 읽으며 여러 번 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 내 고정 관념이 깨지는 소리. <미친 사람에 대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은 그의 행동에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이유가 없는 행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사람이 취하는 사소한 행동들이다. 가령, 걸을 때 휘파람을 부는 행위나, 막대기로 잔디를 내리치는 행위나, 신발 뒤꿈치로 차는 행위나 손을 비비는 행위 같은 것들이다. 행복한 사람이라야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지, 병든 사람은 그런 한가한 짓을 할만큼 강하지가 않다. 미친 사람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처럼 이유가 없는, 태평스러운 행동들이다. >(p.51, 제2장 ‘미치광이’ 중에서). 이렇게 시작하고 나서 체스터튼은 이성과 믿음과 신앙의 관계로 넘어간다. <쑥 들어간다>. 당신과 내가 습관적으로 견지해온 <나태한 신념> 속으로. 그래서 필립 얀시는 『정통』이 자신의 영적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 했고, C.S.루이스는 혹 누군가 무신론자로 남고 싶다면 체스터튼의 책을 경계해야 한다 했다.
3.『정통』은 두 번 읽었다. 첫 완독은 강원도 예수원에서 했다. 처음 가 본 태백, 길눈 어두운 내가 간신히 예수원 가는 길목으로 들어섰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내가 제작하던 <성서학당>에 고정 강사로 출연하고 있던 K교수였다. 어떤 일이신가요? 네, 제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하차해야 할 것 같아요. 쉼을 얻으러 가는 길에 걸려온 고정 출연자의 하차 소식.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했다. 대신 제가 괜찮은 사람 한 분 추천해 드릴께요. 아, 누군가요? 권연경 교수라고 계세요. 어떤 분이신가요?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짙은 안개에 가려 아직 예수원은 보이지 않았다.
2014. 8.2.
신동주
서플먼트
1) 체스터튼의 『Orthodoxy』는 2003년에 『오소독시』라는 제목으로 이미 한 번 나온 적 있음. 그 책으로도 읽으려 한 적 있으나 번역 때문에 중간에 포기. 완독은 홍병룡이 번역하고 상상북스에서 출간한 『정통』으로 했다. 당연히 후자를 추천한다. 2011.7.19 예수원에서 1독을 했고, 2011.8.29.에 2독.
2) 체스터튼은 ‘역설의 대가’라고 불리는데 역설과 비유의 진하기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루이스는 투샷, 체스터튼은 에스프레소, 톰 라이트는 - 굳이 여기에서까지 디스를 하다니, 나도 참 - 다 마신 커피 잔에 남은, 얼음 녹아 생긴 미지근한 물.
3) 필립 얀시에 따르면 체스터튼은 “100권도 넘는 책을 썼는데, 그 대부분을 비서에게 받아쓰게 하고 초고를 거의 고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작기 얀시, “몇 주 동안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아, 그래서 나에게도 여비서가 있어야 돼! 강추한다.
4) 그렇게 권연경 교수와 조우했다.

2014년 8월 1일

낸시랭의 신학펀치 공개방송 D-Day








오늘 프로그램 공개방송이 있었다. 페북에 참석자들의 기념 사진이 올라왔다. 이런! 정말 정신이 없어 스탭끼리 기념 사진 찍는 것도 잊었다. 한 참석자가 올린 이 사진이 강사 엠씨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 될 것 같다. 고생한 조연출과 작가와도 한장 찍었어야 했는데! 공개방송을 준비하던 어느 날 저녁 사진으로 대신 기념을 삼는다. 오늘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한다. 그분들의 - 우리들의 - 질문이 중요하다. 신학펀치는 거들뿐이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한다. 신학펀치는 답이 아니고 답을 주지 않는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신학펀치의 답>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해 볼 생각이다.

2014년 7월 26일

『사무엘상』(김구원 지음, 홍성사)을 읽고.

1. 홍성사에서 창립 40주년을 맞아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를 냈는데 그 첫 권이- 아직 첫 권밖에 나오지 않았다 - 김구원 교수의 『사무엘상』이다. 책을 손에 쥔지 사나흘만에 다 읽었다. 시리즈의 첫 저자 김구원 교수가 발간사 격으로 쓴 글 중에서 다음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들을 다루었다”. 제일 먼저  떡볶이가 떠올랐다. 청년부 모임 후 조원들과 떡볶이 먹으며 사리 하나 추가하며 나누었던 고민과 대화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멕시칸 푸드 타코 먹으며 <쉐어링> 해본 적도 있지만 역시 <내 기독교>에는 떡볶이와 순대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코리안 크리스천의 질문이라! 재미있는 콘셉트였다. 그런데, 내 질문은 무엇이었더라?  

2. 성서 사무엘상과 이 책『사무엘상』이 다루는 수많은 이야기는 다 생략하려 한다. (갑자기 저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이 마흔여덟에 사무엘상을 다시 읽었을 때 내게 생긴 - 약간 뜬금없는 - 단 하나의 질문은 아래와 같다.

3. 사울은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지 못하거나 않는다. 반면 다윗은, 매번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고, 승리한다. 기다리(기만하)면, 가부(可否)간에 지시를 받고, 승리를 한다. 이런 다윗의 승리에서 다윗이나 독자는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다윗은 언제, 자기의 결정에 따른 결과를 맛보며 - 그게 쓴맛이든 단맛이든 - 성숙할까?) 이런 다윗의 행동에서 <대단한 건> 도대체 뭘까.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춘다. 에봇을 통해 예스-노로 지시를 받는다. 이건 마치 -불쑥 끼어드는 19금적 표현을 용서 바란다 - 언제 삽입하고 언제 어디를 애무하라고 일일이 하나님에게 -에봇을 통해- 물어보고 갖는 성관계만큼 코믹하고 비성인(非成人)적이다. 아,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에봇적인 인도 없었고, 제사장 없었고, 오직 - 당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침묵>뿐. 네 삶을 내게 맡기되 네가 내려야 할 결정까지 내게 맡기지는 마, 라는 계시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고대근동에선 한 인간이 성숙한다, 는 개념과 구조가 달랐을까. 다윗이 <블레셋일기>를 남겼다면 그 안에 제사장을 기다렸다, 에봇을 가져오라 시켰다, 하나님께 물었다, 말고 또 어떤 말이 들어갈까. 21세기에 제사장과 에봇은 무엇일까. 아, 그런데,  이 내 질문은 한국적인 것일까.

서플먼트
1)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공감하지 못한 상기 <하나님의 뜻 묻기>는 전쟁에 국한된 거란 생각이 들었다. 광야와 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 다윗은 참으로 많은 결정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스스로> 내렸다. 그래서 내 질문 수정하여 다시 해보면: 이런 다윗의 행동에서 <대단한 건> 도대체 뭘까. (이런, 내가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도 아니고 수정 전후 문장이 똑같은 건 뭥미?  

2) <낸시랭의 신학펀치>를 제작하며 김구원 교수를 패널로 섭외한 일이 있다. 그때 요나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 중에 나온 <다큐멘터리>와 <픽션>이란 두 단어가 페이스북 상에서 꽤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 『사무엘상』355쪽에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혼자 미소 지었는데 인용하면 이렇다. “다소 이상한 이 두 상황은 본문이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사무엘서 저자의 문학적 구성임을 암시한다. 저자는 다윗의 등극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울과 익명의 소년 간의 대화를 본문에서 문학적으로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드너,173쪽)”.

3) 이 책의 미덕 한 가지. 고대근동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지식을 갖고 있는 저자의 해설을 흠뻑 맛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울의 번뇌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비아트’는 욥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골리앗 앞에서 사울을 격려하며 다윗이 사용한 말은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알-이폴 레브-아담’인데 (...)성경에서 마음이 ‘떨어지다’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온다” (...) 이것은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 대한 저자의 복선이다>. (복선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생략).

2014년 7월 20일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를 (오래 전에) 읽고.

1. 나에겐 콤플렉스가 하나 있다. 나는 왜 그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이나 <안티-기독교인들>만큼 성경을 <꼼꼼하게> 읽지 못할까. 얼마 전 누가 영화 <노아>에 대한 얘기를 내게 해줬는데, 내가 <수십 번> 읽으면서도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은 ‘천사들’이 스토리 전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했다. 아, 내가 <헐리우드 작가들>만큼만 성경을 꼼꼼하게 읽을 수 있다면! 부끄럽지만 난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짜가 복음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안 게 채 오 년이 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내 <머리>는 폼이었고, <분석>은 죄였고, 오직 그날 받을 은혜 위한 <적용>만 있었다. 아니, 가나의 혼인 잔치 날짜도 아니고 그 중요한 십자가 처형 날짜(!)가 다르게 기록돼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니! 결코 둘 모두 <동시에> 맞을 수는 없다. (1)둘 모두 틀리든지, (2) 하나만 맞든지. 그런데 -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이런 딜레마를 경험할 때, 우린 덫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아주 멋진 곳으로 우리 인도할 낯선 골목길로 들어선 것일까.
2. C. S. 루이스는 어디선가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기로 결단하셨는데, 그 동일한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의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겠다고 하신 게 이상한 일일까? 이 질문 앞에서 난 <개안>을 했다. 이 물음을 만난 후 <불일치>와 <오류>로 보이는 것들은 내게 더 이상 기독교의 한계가 아니라 감격이었다. 오류와 모호함과 모순 존재하는 내 언어의 집까지 내려와, 기꺼이 거기 머무시며, 나에게 읽힘을 당하시고, 나에게 이해당하시고, 오해당하시고, 질문당하시는 그 분! 무오하지 않은 경전 소유한 종교는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는, 무오한 경전의 종교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까? 그런 무오를 부러워해야할까? 
3. 내가『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권연경 지음, SFC 출판부)를 읽으며 재차 깨달은 건, 성경이 <무오하다>는, 혹은 <무오해야만 한다>는 내 신념이 놀랍게도 <성경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경 속 오류와 불일치로 보이는 것들 앞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가 무너지는 거 아냐?> 당황하고 불안해 하는 나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성경의 객관적 사실들 자체가 나의 “무오” 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내가 가진 무오 교리가 애초부터 내가 가진 실제의 성경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저자는 이제 그 <실제의 성경>에 우리 신앙을 맞춰나가는 흥미진진한 작업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그리고 그 흥미로운 작업에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식이 해명되어야 한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언어로, 완전하지 않은 해석자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을 살피다 보면, 어쩌면 당신은 은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웃음).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이 땅을 다 너에게 주리라> 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신이 무언가를 열심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고마움에 가까운 마음.
서플먼트
1) 이 책을 읽으며 배운 것 중 하나는 성경을 읽을 때는 자신이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시는 제일 먼저 시로 읽고, 편지는 우선 무엇보다도 편지로 읽기. 문득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삼박자 구원>의 중심 구절을 상기 기준으로 살펴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요한3서 1장을 찾았다. 1절에 편지의 발송자와 수신자가 각각 장로와 가이오로 나왔다. 이어 2절에 그 유명한 구절이 나왔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제 보니 전형적인 <인사말>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새로 시작한 이벤트 사업은 잘 돼? 대박 나기 바래> 정도의. 누군가 자신의 <신학>을 세우면서,  편지 본문이 아니라 인사말을 핵심 어구로 삼는 게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2) 나는 요즘 상기 책의 저자와 함께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어느 날 책의 저자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프로그램 캐치프레이즈에 나오는 <신앙의 근육>이라는 말, 제 책에 나온 거 아시죠? 어, 제가 생각한 캐치프레이즈인데요! 그는 여전히 미소지으며, 아니에요, 이 책에 나와요. 아, 내가 처음 만든 조어(造語)라고 생각하고 엄청 뿌듯해 했는데! (흑흑). 신앙의 근육을 키워주는 책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를 모든 이에게 강추한다.

2014년 7월 7일

<신학이란 무엇인가> 를 읽고.

1. <신학이란 무엇인가>(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를 읽는 과정은 내게 있어 자전거 타기와 비슷했다. 자전거는 신비롭다. 희열이 오래 지속된다. 오르가즘은 7초면 끝나지만 자전거는 20분, 30분, 페달을 밟는 내내 동일한 쾌감을 선사한다. 유럽과 미국의 주요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한다는 이 책, 내게 한 달 넘게 지속되는 절정을 선사했다. 일반 ‘평신도’ 독자의 입장에서 평신도 동료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평가하자면: 쉽고, 깊고, 체계적이고, 재미있다. 마지막 1131쪽까지. 그렇다. 라스트 드롭(last drop)까지! 추천한다. 머스트-리드(must-read).머스트-드링크(must-drink). 

2. 마음에 드는 주제들을 먼저 찾아 읽었다. 제일 먼저 펴서 읽은 곳 중의 하나가 제10장 삼위일체론 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언제나 날 흥분시킨다. 그 이유를 3번 글에 썼다. 삼위일체론에 관심이 없다면 4번 글로 건너뛰어도 괜찮다.

3. C. S. 루이스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만큼 - 기억에 의지하여 루이스가 한 말을 요약한다 - 비합리적인 교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데 걸림돌이었다. 하나 지금 이 교리는 내가 기독교 신앙을 진리라고 믿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됐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이 관계(혹은 사랑)란 얼마나 중요한 특질인가. 그렇다면 어떤 종교의 신관은 이 관계성이란 것이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신이 단일한 존재라면 - 즉, 신이 삼위일체나 이위일체나 사위일체가 아니라면 - 그의 본질에는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관계를 맺는다는 속성이 포함돼 있지 않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관계성이 신적인(절대적인) 기원을 갖추지 못하게 되고 ‘우연히’ 발생한 상태에 불과해진다. 삼위일체, 설명해내기 힘들지만, 그러나, 삼위일체야말로 인간의 삶 속의 관계성(사랑)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유일한 신관이다. 영원 전부터 서로 관계 맺고 서로 사랑해오던 삼위일체의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은 관계 맺고 서로 사랑하게 됐다. 기독교가 일위일체의 신관을 주장했다면 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4. 구원이라는 ‘간단한(?)’ 교리에 대한 내 이해는 30년 전쯤 내가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을 무렵 수준에서 멈춘 것 같다. 그 상태에서 멈춘 이유는 내가 <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성경을 읽을 때나 신앙서적을 읽을 때나 내가 잘 아는 ‘구원’ 이라는 단어 앞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내 이해의 수준은 멈췄다. 요즘 다시 묻게 됐다. 어쩌면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 분이 나를 구원했다는 게 무슨 뜻일까. 2천년 전 한 ‘청년’이 흘린 피가 내게 왜, 어떤, 어떻게 - 구체적으로 어떻게! - 영향을 끼치나. 물론 보혈임을 믿는다. 하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냥 보혈이라고 외워왔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제13장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읽었다.

5. <교부시대의 신학자들>, <종교개혁>, <다른 종교와 구원의 가능성> 등 맥그래스가 다룬 다양한 주제, 항목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한 내 감상을 일일이 소개하면 지루해질 것 같아 대신 이 책 <신학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했던 생각을 적으며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책을 덮는데 갑자기 한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바르트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너,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동성애,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 타인들의 정답 말고 - 너의 오답은 무엇이니? > . 읽는 건 쉽다. 아무리 책이 두꺼워도. 하나 생각하는 것, 특히 내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다. (그냥 정답을 빨리 얻고 싶다.) 하나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정답 속에서 영원히 빈약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신학자들에게 나 대신 생각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귀찮지만 성경을 찾아보며 나 또한 생각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2014년 6월 24일, 그동안 맥그래스가 차지하고 있던 내 가방속 공간을 <표준새번역 성경>이 새롭게 차지했다. 

2014년 7월 5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2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2

점점 상투적으로 돼가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만의 언어를 갖고 싶었다. 라이코스에 my_own_language@lycos.co.kr 이란 메일을 만들었다.

2014년 7월 4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0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0
개편을 한 달 앞두고 피디들은 편성국 출입구 앞에 붙은 프로그램 배당표를 확인했다. 각자의 이름 옆에, 배정된 프로명이 적혀있었다. 내 이름이 보였다. 내 이름 옆에, 프로명이 없었다. 1995년 가을 난 프로그램을 배정 받지 못했다. ( ‘내가 아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은 퇴직하신 ‘어떤 한 분’의 결정을 내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건 공평하지 않을 것 같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선배 B가 근처 중국집에서 점심을 사줬다. 밥을 먹으러 가기 전만 해도 난, “그래,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좋아, 월급 나오겠다, 그래 푹 쉬어주지”라고 생각했다. B 선배가 사준 점심을 먹고 회사로 오며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게 긴 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을 가지고 너 뭐 할래?” 다큐였다. 내가 피디가 된 가장 큰 이유. 다큐멘터리. FM 라디오 개국을 석 달 앞두고 있었다. 무언가 감동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종소리가 떠올랐다. 새벽마다 경쟁적으로 울리는 한국 교회의 차임벨 소리는 이미 공해였다. 성공, 성장, 복을 외치는 설교는 그보다 더한 공해였다. 교회가 안 그러던 시기가 있을 거 같았다. 안 그러는 교회가 있을 거 같았다. 그런 교회의 종소리를 - 그런 교회에는 왠지 종이 있을 거 같았다 - 그 교회가 겪은 스토리와 함께 들려주면 무척 라디오다큐적일 것 같았다. 그렇게해서 CBS-FM 개국특집 다큐멘터리 <한국 교회의 종(鐘)을 찾아서>. 1995년 12월 15일 방송

2014년 6월 24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9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9
아마 대학로에 있는 흥사단 강당이었을 것이다. 강사도, 그날 강연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선배의 목소리. “강연 좀 따와”. 강대상 앞으로 다가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청중석 중앙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마이크 달린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사방을 살펴보니 강사 목소리는 천장에 달려있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내 머리 위에도 하나가 있었다. 머리를 굴렸다. 가까이에 대면 더 깨끗하게 녹음되겠지. 갈등했다. 마이크 든 오른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강사는 힐끗 날 한 번 쳐다보더니, 하던 강연을 계속 했다. 그랬다. 한 명의 수습 피디가 강연 내내 청중석 중앙에서 오른손을 들고 있었다.

2014년 6월 23일

편집

편집을 마치고 집으로 오며 고민했다. 유익(?)한 편집이 더 나을까 재미있는 편집이 더 나을까. 오늘 정의를 강조하는 대화를 살렸는데 내일 출근하면 정의 덜어내고 안 유익한 거 넣어야겠다. 재미있는 걸 만들어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거 같다.

2014년 6월 22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8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8
처음 삼 년은 힘들었다. 첫 일 년은 특히 고되었다. 입사 동기 J와는 같은 동네에 살아 함께 퇴근할 때가 많았다. (아, 그녀는 2007년에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을 냈다. 그녀의 첫 책이었다. 최근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그의 슬픔과 기쁨』과, 라디오 피디로 일하며 느낀 걸 쓴 『마술 라디오』를 동시에 냈다.) 둘 모두 피곤에 지쳐 버스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침을 흘리며 잤다.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동기가 있다는 건 큰 힘이었다. 어느날 자다 전화를 받았다. 새벽 2시였다. 오빠 나야. 무슨 일이야.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누가 옆에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옷을 입었다. 옷을 입고 부엌으로 가 식칼을 챙겼다. 만감이 교차했다. 아직 신혼이었다. 나는 자고 있는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쩌면 마지막 키스가 될지도 몰랐다. 옆 단지 J의 아파트로 갔다. 현관 손잡이를 돌렸더니 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거실에는 상이 쭉 펼쳐져 있었다. 이상하게 상마다 먹다 남긴 음식들이 가득했다. 이상하게 낮에 사무실에서 봤던 부장과 선배들이 일렬로 앉아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J가 미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식칼까지 가슴에 품던 수습시절이었다.

2014년 6월 20일

퀵 아저씨

메이크업을 끝낸 낸시가 스튜디오에 앉아 있다. K교수와 P교수도 자리에 앉아 있다. 다같이 기다리고 있다. 낸시가 집에 두고 온 게 있어 퀵 아저씨가 갖고 오고 있는 중이다. 퀵아저씨가 오토바이로 코코를 데리고 오고 있다 -.- (오늘 낮 녹화).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7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7
남자는 친절했다, 처음 전화를 받을 때부터 전화를 끊을 때까지. 목소리는 적당하게 명랑했고 신뢰감을 주었다. 난 선한 이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주에 정신대 관련 연속 기획 특집 보도를 하셨잖아요? 네. 했습니다. 내 손과 목소리 둘 모두 떨렸다. 정신대 할머니들 중에 기자님이 이름을 외우고 있는 분 두 분 계신가요? 그가 외울 수 있을까봐 두려웠다. 한 명은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두 명을 물었다. 저는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여전히 친절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외울 수 있는 이름이 한 개는 있나요? 그런데 이름을 외우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난 알고 싶다고 했다. 아니오. 외우고 있는 이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학생이냐고 물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했다. 밥 한 번 사겠다고 한 번 놀러 오라 했다.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나온 부스 안으로 내가 하던 통화를 다 들었을 여학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갔다. 난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저녁 때까지 언론사 상식 기출문제를 외웠다.

2014년 6월 19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6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6
교보에서 그 책을 뽑은 건 우연이었다. 그 페이지를 훑어 본 것도 우연이었다. 미대사관 인질 사태가 끝나고 기자 둘이 뉴욕 번화가에서 시민들에게 물었다. 석방된 미국 시민 52명 중에 당신이 이름을 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질이 잡혀있는 동안, 그러니까 444일, 미국의 뉴스채널들, day-1, day-2, day-75, day-411, day-412... ,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인질 사태 소개하며 뉴스를 시작했다. 444일 동안 심각한 톤으로 소식 전했으나 - 그 거리에서 기자의 질문을 받은 이들 중 - 단 한 명의 억류자 이름이라도 외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중문화에 대한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점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의 폐해는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데 있는 게 아니구나. 문제는, 오히려, 조금도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데 있구나. 그 즈음이었다. 저녁 8시 뉴스를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앵커는 자기가 지금 심각하게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라도 외울 수 있을까? SBS가 정신대 문제를 연속 기획 특집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밥은 주로 어디서 먹나요?

Q: 스탭끼리 밥은 주로 어디서 먹습니까?
A: 제가 잘 아는 훼밀리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Q: 훼밀리 레스토랑! 펀치 팀 대단합니다.
레스토랑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A: 킴스 훼밀리 레스토랑입니다. Gim-Ga-Ne 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Q: 알겠습니다. 그럼 주로 ramyeongimbap 세트 메뉴를 오더하겠군요?
A: 워터는 셀프죠.

Q: 짠해집니다. 조연출, 작가, 피디 중 누가 제일 많이 먹나요?
A: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Q: 알겠습니다. 누가 제일 적게 먹나요?
A: 저요!! 저요!! 제가 제일 적게 먹습니다 !!!
 
Q: 무척 즐거워 보입니다 ^^
A: 미안한 맘도 약간 있습니다 ㅎㅎ
 
 
QA를 한 사람(-.-)이 쓰는 인터뷰, 8
- 밥은 주로 어디서 먹나요

2014년 6월 14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5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5
부암동을 떠나 이수역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간 뒤로 시험공부는 총신대 도서관에서 했다. 한겨레신문을 제일 먼저 읽었다. 고난은 최고의 스파링 파트너이다, 라는 신문 우상단 캠페인 글귀를 지금도 기억한다. 글귀는 매일 바뀌었다. 또 하루를 또렷이 기억한다. 점심을 먹고 – 점심으론 정문 앞에 있는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었다 – 교정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앞으로 갔다. 내일로 미루고 싶었다. 영원히 미루고 싶었다. SBS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성 안내원이 전화를 받았다. 8시뉴스 진행하는 앵커분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제발 통화하기 어렵다고 말해줘. 거절 당하길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난 전화를 했고 거절을 당했어. 그럼 내 할 일을 다 한 거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안내원은 내게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전화 부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여학생 한 명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 들릴 게 분명했다. 전화를 끊고 싶었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네 맹형규입니다. 어떤 일이시죠? 텔레비전에서 매일 듣던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이제 내가 말해야 할 차례였다.

고양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Q: 고양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A: 둘 중 어느 게 문제가 되나요?

Q: 아직 질문 하나밖에 안 했습니다. 
A 고양이,를 어깨에 메는 거와 고양이를 어깨,에 메는 거 둘 중 어느 걸 묻는 건가요? 

Q: 쉼표없이 물었습니다. 고양이를 어깨에 메고 나온다는 이 팩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번에 대답해주십시오. 
A: 뱀을 목에 감은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합니다. 

Q: 보수적인 시청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A: 그래서 고민 중입니다.

Q: 보수층을 위해 고양이를 뺄 생각도 있다는 말입니까? 
A: 낸시의 하얀 목덜미를 더 가려야 할 거 같습니다. 왼쪽 어깨에 
한 마리 더 얹을까 생각중입니다. 근데 어디가십니까. 

Q와 A를 한 사람(-.-)이 쓰는 인터뷰, 제7탄 
- 고양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