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24년 3월 10일

부부 이야기

"생활고에 택시와 버스를 몰며 선수생활을 유지했던 무라트 나지 초클루(하나은행). 초클루는 이날 1~2세트를 빼앗겼으나, 불굴의 투혼으로 3~6세트를 내리 따내면서 마지막에 웃었다. 영원한 서포터인 아내와 함께해 더 기뻤다. 올 시즌 데뷔해 첫 트로피를 거머쥔 초클루는 우승상금 1억원도 챙겼다. " (한겨레신문, 2024.3.4.에서 발췌) -----나는 부부가 함께 맞는 우승 소식을 들으면 괜히 눈물이 난다. 이전에 이런 짧은 이야기를 지은 적도 있다. ---- 1. 이세돌과 겨루는 알파고를 개발한 건 한국의 한 영세한 스타트업이었다. 올해 41세의 민기에게 알파고는 마지막 기회였다. 민기는 7년 전 연주와 결혼 했고 5살 된 딸이 있었다. 전세를 살고, 갚아야 할 대출금이 있고, 조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지인의 소개로 이세돌을 만날 수 있었다.기적 같은 일이었다. 한 판이라도 이겨야만 했다. 알파고는, 마지막 기회였다. 2. 시합이 시작됐다. 후배 동료가 불러주는 알파고의 착점이 부착한 리시버를 통해 민기의 귀에 들려왔다. 다섯 수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때였다. 후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기 선배, 작동을 안 해요. 알파고가 작동을 안 해요". 3. 바둑알을 쥔 민기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이세돌이 의아하다는 듯 민기를 바라봤다. 4. 할아버지가 깍아주시던 참외, 할아버지와 두던 오목, 바둑 둘 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두려워 하는 곳으로 가야한다, 민기아. 두려운 곳으로 가서 집을 만들어야 해 ". 바둑알을 쥔 민기의 손이 천천히 좌변 중앙 쪽으로 향했다. 5. 그날 언론은 알파고의 1승을 대서특필했다. 컴퓨터 본체가 있는 방에서 아내가 후배와 함께 걸어나왔다.여자의 눈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여보......." 여자는 남편의 목을 끌어 안았다. 두 부부 옆으로 이세돌이 지나갔다. (민망하지만 이런 부부 등장 신파 스토리 좋아함 -.- )

『제일신학(First Theology』(케빈 밴후저 지음, IVP)의 제6장

『제일신학(First Theology』(케빈 밴후저 지음, IVP)의 제6장은 언어와 관계된 화행론(speech act theory)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한 대목이 등장한다. - - - - - - - - - - - 『호빗』(J.R.R. 톨킨 지음, 씨앗을뿌리는사람 역간)의 앞 부분에는 매우 시사적인 대화가 나온다. 그 장면은 간달프(Gandalf)가 빌보 배긴스(Bilbo Baggins)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장면이다.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빌보가 말했다. (...) "그게 먼 뜻으로 하는 말이오?"라고 그[간달프]가 물었다. "내게 좋은 아침을 원한다는 뜻이오? 아니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좋은 아침이라는 뜻이오? 아니면 당신이 오늘 아침을 좋다고 느낀다는 뜻이오? 아니면 아침은 좋은 것이라는 뜻이오?" " 그것들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빌보가 말했다. "더구나 바깥으로 나가서 담배 파이프를 물고서 담배를 피우기에는 더더욱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있다가 빌보는 매우 다른 발화수반적인 의도를 가지고 똑같은 발화행위를 사용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어떠한 모험도 원치 않아요, 감사합니다." " 당신은 참 여러가지로 좋은 아침이란 말을 사용하는구려!" 간달프가 말했다. "지금은 내가 없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내가 떠나야만 좋은 아침이 되겠구먼." (p.262)

2022년 5월 30일

아키모토의 달

(*19금적 표현 등장)  1.<도연초(徒然草)>라고, 14세기에 쓰여진 일본 수필집을 한 권 읽었다. 지은이는 겐코 법사(法師)인데, 교토의 요시다 지방에 살았다고 해서 '요시다 겐코'라고 불린다.(참고로, 법사는 설법하는 승려). 총 244개의 글로 구성된 이 수필집은, 각 글의 길이가 들쭉날쭉. 어떤 글은 단 한 줄,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돼 있고, 어떤 것은 서너 쪽에 이른다. 내가 중학교 때 배운 에세이에 대한 정의 딱 그대로,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의 전형이다. (나 또한) 순서를 무시하고 이곳저곳 기분 내키는대로  읽다가 31번 글을 읽게 됐다. 14세기의 운치가 이런 것이라고나 할까, 자기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짧기에 전문을 소개하면: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 아침에 어떤 사람에게 용무가 있어 편지를 전하는데 눈 내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더니, "오늘 아침의 눈을 어떻게 보셨는지 같은 한 마디 인사도 없는, 멋을 모르는 사람의 말씀은 유감스럽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실망스럽군요"라는 답장이 왔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고인과의 추억인지라 이런 작은 일조차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도연초>, 31번 글)  2. 그렇다고 내가 (오늘 쓰고 있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31번 때문은 아니다. 내가 <그 센텐스>를 만난 건 며칠 뒤였다. 우연히 펼친 5번 글은 <두 센텐스>로 된 지극히 짧은 글이었는데 나를 사로잡은 건 <두 번째 센텐스>였다. (재미 삼아 밝히자면, 첫 번째 센텐스는 지금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 고대 조정의 관직인 중납언(中納言, 일본어로는 츄나곤 혹은 주나곤)으로 봉직 중이던 아키모토라는 사람이 한 말을, 저자 겐코가 인용하고 있는데 채혜숙 번역본(바다출판사,2001)에는 이렇게 나온다 :   아키모토(顯基) 츄나곤(中納言)이 "유배지에서 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천상의 달을 바라보고 싶구나"라고 한 것 또한 과연 이해가 간다.  3. 좋은 것들은 대개 <가까이> 있는 것들인데, 여기에는 매일 뜨는 달, 시원한 바람, 퇴근 후 집에서 보는 아내, 스마트폰 대신 집어 든 스케치북 등속이 포함된다. 종종 우리는 이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서도 여전히 <빈곤>하다고 느낀다. 너무 자주 등장해 이제는 하나의 관용구가 된 로 인해 해임되었다>라는 문장을 한번 보자. 부적절한 관계 전에 <부적절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 부적절한 생각은, 포기하고 무시하기엔 너무나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느껴졌을 것이고 반면 <적절한 생각들>은, 다시말해 좋은 보통의 것들은, 자신의 즐거움에 짐과 손해와 방해로 여겨졌을 것이다. 종종 주위에 흥미를 잃음. 자주 적절하지 않은 대상이 너무나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느껴짐. 이것이 B와 나의 특징이다. 그런데 아키모토는 지금 달에서 생동감을 느낀다고 한다.  4. 왜 아키모토는, 그저 달을 보고 싶다 하지 않고, 죄 없이 보고 싶다고 했으며, 또 하필 그 얘기를 죄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유배지라는 장소를 특정하면서 했을까. 게다가 아키모토는 끝없이 이어지는 이 질문들을 한 센텐스 안에 다 넣었다. 쑤셔넣었다는 느낌 전혀 없다. 단어와 단어 사이는 널찍하니 여유로우며, 그 사이로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무척 <스미마셍>하게도, <도연초>를 읽자니 만나보고 싶어진 이는 겐코가 아니라 아키모토이다.  5.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나 실로 불행한가. 아니. 영등포 문래동에서 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천상의 달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진대.  2022.5.29. 신동주 <서플먼트> 1) <도연초(徒然草)>라는 책 제목 중 앞 두 자 도연(徒然)은 이 책 서문에 등장하는 '하는 일 없이 무료하고 쓸쓸함'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것'을 '무위도식'(無爲徒食)이라고 하듯이 도(徒)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이란 뜻이 있고, 여기에 '그러함,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연(然)이 붙어 도연(徒然)이 나옴. 제목의 마지막 초(草) 역시 서문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서 없이) 적어 가노라'에서 따온 것으로서, 한자 초(草)에는 초고(草稿), 초안(草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글,이라는 의미 있음. 한편, 역자 채혜숙의 해설을 보면 "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라는 말은 일본 고전에서도 제일 멋있는 머리말로 유명하다"(p.11). 일본 문학에서 유명하다고 하고 또 길지도 않기에 전문을 소개하면: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 온종일 벼루를 마주하고 앉아 마음 속에 떠오르는 걷잡을 수 없는 상념들을 두서 없이 적어 가노라니 묘하게도 기분이 상기되어 온다>. 2) 무료-벼루-상념-두서 없이 적기-상기(上氣:흥분이나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짐)와 같이 <마음의 흐름>을 시간 순으로 차례차례 묘사해 나가는 본 서문을 읽다보니 (마지막 '상기'라는 단어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불현듯 성애(性愛)가 떠오름. (성에 대해서 쓰자니, 또 잘 모르면서 쓰자니, 이중으로 쑥스러운데) 성애(性愛)시에는 상대의 쾌감을 너무 일찍 <터트리지 않고>(이런 고상하지 않은 표현이라니!) 조금씩 애태우며 충분히 빌드업(build-up)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트리는 것>(상대가 샴페인도 아니고ㅠㅠ)이 중요. 한국어 번역에선 이런 빌드업이 잘 살았는데 과연 영역(英譯)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하는 궁금증 생김. 왜냐하면 (내 짧은 영어 상식에 따르자면) 상기 서문은 < what a strange feeling I have as I .... > 같은 문장 구조로 영역될 확률이 큰데, 이렇게 일단 결론부터 <터트리는> 서양식 번역 통해 서양 독자는 과연 나 같은 동양 독자가 느끼는 <빌드업 절정감>을 맛볼 수 있을까, 겐코가 그런 영역본 읽었다면 실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문학적 염려> 생김. 그래서 영어 번역 확인해 보기로 함. 3) 오래 살펴보지 않았는데도 두 가지 사실이 금방 드러남. 첫째, 그동안 <도연초>를 영어로 번역한 책은 여러 권 나왔으나 영어판 결정본(the definitive english translation)으로 평가 받는 건 Donald Keene(1967)의 번역. 둘째, Keene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그때까지 나온 예닐곱 개의 영어와 독어 번역본을 읽어 본 결과 가장 뛰어난 건 George B. Sansom(1911)의 번역이었다고 평가. 그래서 나 이제 Keene와 Sansom, 이 두 사람의 번역본 통해 내 궁금증 풀어보기로 함.(연구주제: 과연 서양 독자도 진정한 <문학적 오르가즘>을 경험했을까). 먼저 Keene가 영역한 (1967)에서 서문을 확인해 보니 내가 우려한 바대로 : "What a strange, demented[미친] feeling it gives me when I realise I have spent whole days before this inkstone[벼루], with nothing better to do, jotting[적어두다] down at random whatever nonsensical thoughts that have entered my head." (내 결론: 서양 독자가 경험한 쾌감과 내가 경험한 절정의 수위는 다르겠구나). 이어서 Sansom이 영역한 의 서문을 보니 :  "To while away[즐겁고 느긋하게 보내다] the idle hours, seated the livelong day before the inkslab[벼루], by jotting down[적어두다] without order or purpose whatever trifling[사소한] thoughts pass through my mind, truely this is a queer[기묘한] and crazy thing to do! ".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내가 Keene와 Sansom의 번역 중 어느 것을 더 선호할지 쉬이 알 수 있으리. 심지어 Sansom은 문장의 마지막을 <무언가 터졌을 때> 어울리는 느낌표로 마무리. 4) 겐코 별세 후 약 삼백 년 뒤에 출생한 마쓰오 바쇼는 일본 하이쿠의 성인(聖人)으로 불림. 오늘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그의 하이쿠 한 수 소개하며 긴 글 읽어준 독자들에게 내 감사의 마음 표하려 함. 류시화 작가가 번역한 <바쇼 하이쿠 선집>(열림원,2015)에서 골랐다. 절에서 자니 참된 얼굴이 되는 달구경 참고로, 미국의 하이쿠 시인 Jane Reichhold은 같은 시를 아래와 같이 번역. sleeping in the temple the serious-looking face is moon-viewing <끝> 

2022년 4월 1일

필립 K. 딕

나는 필립 K.딕을 좋아한다. 최근 <필립 K.딕 : 나는 살아있고 , 너희는 죽었다>라는 평전이 번역됐기에 (당연히) 사서 단숨에 읽었다. 문장과 구성이 몹시 괜찮았다. 평전을 쓴 엠마뉘엘 카레르라는 저자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또 한 권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었다. <왕국>(열린책들). 사서 읽고 있다. 카레르는 (나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과 성경을 공부하다가 어느날, 불가지론자가 되었음. 그런 그가, 초기 기독교의 발생과 복음서의 형성 과정을 693쪽에 걸쳐 <정말 독창적으로> 구성해 냈는데 그게 이 <왕국>. 띠지(!)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 <왕국>은 모든 장르에 도전한다. 해설, 조사, 에세이, 역사책이자 자성록이며 시종일관 흥미진진하다. - 프랑수아 뷔넬, <리르> ]. 이 책의 장점은 그 서로 다른 장르들이 절묘하게 섞인다는 것. 종종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기는 하지만, 절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또 다시 시작되는) 다른 장르>의 글 읽기가 주는 문학적 쾌감이 크다. 이제 인상적이었던 대목 하나 소개하며 페북다시컴백 인사글을 맺으려 함. 루카(누가)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다가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왕국>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발레 지방의 산골 마을에서 지낸 저녁 시간들을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얘기고, 난 어떤 저녁들에는 인터넷에서 포르노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 내가 가장 지속적으로 끌리는 테마는...(여기까지).

2022년 1월 12일

드라이브 마이 카

운전을 못하는 내가 오늘 본 영화는 하루키 원작의 드라이브 마이 카. 비록 나 흡연을 혐오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흡연씬은 섹스씬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흡연을 혐오하는 내가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흡연씬은 밀양에서 송강호가 교회 앞 골목에 쭈그려 앉아 피는 담배. 그 장면에서 송강호가 너무 짠해 보여 그 담배 연기 내가 다 들이마시게 되더라도 그냥 그 옆에 앉아있어주고 싶었다. )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인상적인 대화가 많았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자면 ). 누군가, 연극 감독인 남주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이번에 연출만 하고 출연은 하지 않으시나요? (남주가 대략 이런 식으로 말한다). 안톤 체호프의 극본은, 제대로 읽고 연기하게 되면, 극본이 묻는 질문에 답하며 진짜 나의 모습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고 싶지 않아요. (이 대목에서 성경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도 성경을 잘 안 읽는가?)

2021년 12월 28일

300년 전의 나

만56세가 되는 오늘 아침에도 난 장모님댁 뒤에 있는 불곡산을 오르며 내가 3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살기 위해> 불교 혹은 무속의 '어떤 말(가르침)'을 간절히 붙잡으려 했을까 생각해봤다. 종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미천한 내 귀에까지 다다른 말은 가르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런 수준의 것이었을 것이다. (내용과 분량과 전달 방식 모두에서. 전달자는 아마 주막집 주모나 머슴, 굿판의 무당이기 쉬웠을 것. 술주정에 가까운 형식을 통해. ) 주인으로 부터 모진 고문을 당할 때 내가 떠올린 말은 '마음이 정하면 악귀도 어쩌지 못한다' 였을까. (그 말은 내게 힘을 주었을까, 무력감을 주었을까). 자기 것 챙기기에 바쁜 하루하루 삶 속에서 내가 나를 다잡기 위해 가끔이나마 떠올린 말은 '베푼대로 돌아온다' 정도였겠지? (나는 불곡산 정상에 있는 정자에 도착했고 내 상상은 이어진다.) 정상에 있는 암자에 다다른 나는 노승에게 주인 마님이 전하라한 서찰을 건네고 돌아서기 전에 물 한 잔을 얻어 마신다. 왠일인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노승이 말을 건넨다. "깊은 산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뇨?" 내가 무엇을 보았을까? 앞길이 보이지 않는 종의 인생길. 나는 무엇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스님. 오는데 새 한 마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 걸 봤습니다. 딱딱딱딱 나무를 쪼는데 유심히 바라보니까 제가 하는 망치질과 달랐습니다. 저는 못대가리를 망치로 한 번 치고는 다시 치기 위해 망치를 들어올려야 하는데 제가 본 새는 신기하게도, 조금의 시간 틈도 없이 나무를 딱딱딱딱 연이어 쪼더라구요. 신기해서 한참이나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 새가 갑자기 멈추고는 더 깊은 숲으로 날아갔습니다. 다시 가던 길을 가는데 얼마쯤 걷다가 작은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를 바라보던 그 30분, 나는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구나. 참 오래간만에 평안했구나. 그런데 스님, 평생 새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는 거겠지요?" (2021.12.28)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폴 니터 지음, 클리어마인드) #2012년4월8일에 1독. 지금 2독 중. #300년 전의 나와 다르게 경전과 주석을 양 손에 쥐고 있는 지금의 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 올 해 생일

2021년 10월 13일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1.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사람이 있다. 책에도 그런 책이 있다.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다.) 나는 서평을 쓸 때, 그 책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것>을 소개한다. (저자가 내 얘기 들으면 "아니 왜 그거를?"이라고 어이없어 할 수도 있고, "아니,당신도 거기서!"라고 감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 것은 <모른다>라는 단어였다. 2. 그냥 몇 군데 살짝 맛보기로 소개하면 :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에 책을 편찬하고 모으는 일과 책을 쓰는 일의 역할 구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언서의 저자가 실제로 누구였는지) .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구약 저자들의 직업을 이야기하며). "(거의) 알지 못합니다" (누가 구약을 썼는지).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4개 복음서들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많은 경우 답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저자의 확정과 경전의 인정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에 대해 ). 그런데, 이 모른다라는 단어와 더불어 소개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저자가 이 모른다라는 말을 할 때의 <톤>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게 핵심이다). 저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5호선은 오목교역을 통과합니다>라고 말할 때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이제 독자들은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의 명예 교수인 저자의 <여유있고 자연스럽고 당당한> 톤에 취해(?), 평소(?)와는 달리 한결 넉넉해진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을 누가 썼나, 언제 썼나,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고해서 내 기독교 신앙이 꼭 흔들리는 건 아닌가봐? 내 기독교 신앙이 꼭 부끄러운 게 되진 않나봐? 2021.10.13. 신동주 <서플먼트> (1) 『성서의 형성』은 200쪽이 채 안 돼 한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기에, 성경 통독을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무척 유익할 듯. 나는 『최신구약개론』(레이몬든 딜러드, CH북스)와 『구약성서탐구』(버나드 앤더슨,CLC)도 읽으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큰 그림을 <빨리>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한편,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두 가지 그림 이미지에 무척 끌림. 첫번 째는 식물 이미지. "성서는 어떤 규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듯, 성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나 성서가 되었습니다". 두번 째는 이메일 이미지."우리는 책이라고 하면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기승전결이 있으며, 시종일관 같은 문체로 기록[된] (...) 물체를 떠올리지요. 고대 세계의 책은 오늘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여러 이메일을, 이것들이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왔음을 숨기고 하나로 묶어 단일한 형식으로 인쇄한 모음집 정도가 될 것입니다." (2) <모른다>라는 단어 외에 한 단어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난 망설임 없이 (이번에는 '흥분'보다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 단어인데) <오늘날>을 추가 하겠다. 출간물 하나하나에 일일이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를 부여하고, 저자 역자 발행인을 각각 기록하고, 1쇄와 2쇄 날짜를 구분하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전승되어 온 본문에 종종 후대의 이름 모를 인물들이, 원저자와 현대 독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절과 구와 장을 과 장을 첨가하는 행위가 진본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임.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오늘날 문화에서는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p.58). (이 단어 역시 이 책에서 끊임없이 등장). 이 책에선 아니지만 G.K. 체스터튼 역시 구약의 욥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함 : "이 서사시에서 어떠한 부분이 원저자가 계획하였던 것이고 어떠한 부분이 훨씬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한 토론이 이어져 왔다.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불일치하는데 - 사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학자들의 주된 업무이긴 하다 - 전반적인 연구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실제로 어떠한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면, 산문으로 기록된 서론과 후기는 [확실히]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젊은이 [엘리후]의 연설과 마지막의 [욥의] 회개가 후대의 첨가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든지, 이 문제에 관하여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일반적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어떠한 고대의 예술 작품을 다루고자 한다면, 고대의 저작이 점진적으로 [즉 후대에 계속적으로 첨가되었다는] 쓰였다는 사실이 이 저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건축되어 왔던 것처럼, 욥기도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건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구전 시가를 쓴 사람들은, 실제 연대와 실제 저자에 대해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원저자와 원연대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그러한 중요성이란 모든 면에서 근대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개인주의의 창조물인 것이다. (...)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설사 다른 사람들이 어떤 구절을 이 저작에 삽입하였다 하여도, 그 당시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과 같은 개인주의적 시대에 그러한 행동이 불러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부족이 창조한 서사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부족의 사원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 부족 전체의 창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한다면, 욥기의 서문과 후기,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이 원래의 저작이 쓰인 이후에 삽입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삽입이 근대의 개인화 혹은 개별화된 책에서 이루어지는 삽입처럼 책을 명백히 위조물로 만든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삽입을 조지 메러디스가 쓴 책에서 이후에 실제로는 그가 쓰지 않은 한 장을 발견한 것과 같이 취급해서도 안 되고, 입센의 희곡에서 윌리엄 아처에 의해 교묘하게 삽입된 장면 일부처럼 간주해서도 안 된다. 일리아스나 욥기처럼 오래된 시를 만들어 낸 옛 시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전통을 언제나 지켜 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을 자기 자식이 추수하도록 물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쓰던 시를 자기 자식이 마무리하도록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통일성(Homeric unity)’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리아스는 한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백 명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통일성이란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 당시에는 한 도시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마치 내전 중에 있는 한 도시인 것처럼 보인다." ( '카이로스: 비평루트'가 번역한 G.K.체스터튼의 욥기 '서론' 중에서. 번역 전문은 https://cairos.tistory.com/215 에서 확인 가능.)

2021년 10월 11일

『성서, 역사와 만나다』(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비아 VIA)를 읽고.

1. 성경 말씀 중에 유독 <한국>에 와서 고생 <이빠이> 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구절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면". 표절,성폭력,횡령 목사들이 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다시 <설교>하는 모습 볼 때면 나 환장하겠다. ( 이렇게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데> 사용된다는 건, <성전을 정화>하신 분을 따르는 조직에서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두 번째 구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성경 본문의 불일치나 모순을 <살펴보며> (이를 통해) 성경(과 신앙)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들어가 보려고> 질문 하나 할라치면 바로 당장 등장하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는 디모데후서 말씀을 인정하면 해결되는데, 넌 그걸 안 믿는구나?". (나 두 번째로 환장하고 슬픔 ㅠㅠ).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다면>, 이 <영감> 구절은,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더 깊은 세계로의 진입을 <막는다>. 오늘은 후자에 대해서만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참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세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먼저 공유함.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디모데후서 3:16)"의 영어 번역은 이렇다 :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NASB) (2)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은 포함되지 않는다. 디모데가 디모데후서를 받을 당시 신약성서라는 책은 아직 없었다. <모든 성경>은 우리가 흔히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을 지칭. (3) 유대인들은 이 히브리 성경을 <타낙>이라고 부름. 유대인들은 성경 속 책들을 세 종류로 구분. 토라(율법서),네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 이렇게 셋인데, (그래서 성경을 호칭할 때) 이 셋의 앞 부분을 따서 타낙(혹은 타나크)라고 불렀다. 이제 <모든 성경>과 <영감>과 <타낙> 이렇게 세 단어가 <제대로> 결합될 때 - 기름 목사와 달리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데 - 우리 앞에는 <놀라운 결론>이 주어진다. 정말이다. 2. 히브리 성경의 원래 본문은 모음은 하나도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음들로만 이뤄져 있다. 우리 한글로 예를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ㅅㄴㄷㅇㅈㄴㄴㅁㄴㅁㅇㄷㅁ ㄹㅅㄱㅎㅂㄴㄷㅋㅋ.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간단히 말해, 히브리 성경은, 독자들이 추후에 모음을 추가로 집어넣지 않고서는 <읽어 낼 수> 없는 글이라는 뜻이다. 모음을 추가해야, 비로서 의미 있는 문장이 생성된다. 위에서 예로 든 한글 자음들에 (제대로 된) 모음을 추가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된다: "신동주는미남이다미리사과합니다ㅋㅋ" 책에는 모음이 없더라도, 읽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모음을 집어넣어 주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음의 종류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음을 넣으면 다른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위의 똑같은 자음들이, 다른 모음들을 넣을 경우) "신동주너는왜이렇게사냐ㅋㅋ"(라는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독자들이 <어떤 모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독서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타낙 본문에 히브리어 자음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만을 전달 받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히브리어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서는 모음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아주 이른 시기부터 타낙의 자음에 어떤 모음이 가장 적합한지를 논하는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렇게 전달된 모음은 본문으로 기록된 성서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기억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7)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한 말은, 사실은 이렇게 풀어써야 할 것이다 : "모든 <기록된 자음>과 (모든) <기억된 모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방금 내가 한 이 말은 사실 펠리칸이 한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교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타낙, 즉 구약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문서'라면 성서 본문에 기록된 자음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남아 한참 후에 기록된 모음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영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즉 구전 전승 역시 기록된 본문과 동일한 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128) 3. 이제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역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글을 맺으려 한다. 나는 영어로 본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가 영어책에선 "from teacher to pupil through countless generations"이라고 나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세대>. (그런데) 그 많은 세대, 긴 시간 중에서, 이사야처럼 <높이 들린 보좌>나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 <너를 예언자로 세웠다>, <아닙니다.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라고, 예레미야처럼 직접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의 밀당 할 수 있었던 순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 형성의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은, 환상을 보는 시간이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다음과 같은 선생과 학생들 사이의 <평범한 대화>로 채워져 있다고 본다 : 이 글자는 뭐라고 읽나요? 알레프라고 읽는다. 선생님 '바브'와 '요드'를 쓸 때 획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되나요. 오늘은 드바림(신명기)의 첫 장을 암송할 것이다. 테힐림(시편) 22편에서 '내 손과 발을 거칠게 다루었습니다'는 '내 손과 발에 구멍을 뚫었습니다'라고 읽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요? 스승님이 사무엘하 15장 7절을 '4년'이 아니라 '40년'으로 읽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답하던 스승과 제자들이 죽는다. 자녀들이 태어나 다시 처음부터 글을 배우고 스승들에게 질문을 한다). 하고 싶은 말,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만약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외웠다면, 서너 세대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수 백 세대, 수천 년 이어졌다는 것은, 그 내용을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무언가를 후에 누군가에게 (다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충분히 묻는다>이다. (지금) 충분히 묻지 않으면, (후에) 충분히 답변하지 못하고, 구전 전승은 <끊긴다>. 오늘 날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본다. 온전한 이해로 이끌어주는 첫 단추 의문과 질문을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의문과 질문을 무시하는 것은 비-영감적, 비-타낙적, 비-모든성경적이다. 한마디로 비-디모데후서적이다. 2021.10.11. 신동주 <서플먼트> 1) 시편22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은 각각 마소라 사본과 70인역에 등장.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9에서 인용함. 2) 줌에서, 오프에서, 성경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나누고, 신학 서적을 구매해 함께 읽으며 궁금증을 풀어가고, 지인들끼리 모여 신학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이 모든 비-이사야적인 시간들을 영감의 원천이신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시기를.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음).

2021년 9월 26일

안식년 휴가 중 몇 권의 구약 성경을 읽고.

1. 이곳 미국에 와서 잠시 지내는 동안 오래간만에 성경을 읽었다. 나이가 있다보니 전도서를 먼저 읽었고 (아주 좋았음), 다음으로 어디를 읽을까 잠시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사무엘상을 폈다. 그렇게 사무엘상,하를 읽고, 이어서 열왕기로 넘어가려다가 사무엘상,하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 다시 한 번 더 읽고, 그리고 열왕기상,하를 읽고, 이어서 예레미야를 읽고 있는 중. (예레미야를 선택한 이유: 아주 흥분해서 읽었던 열왕기하의 마지막 사건들이,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와 겹치기에 스토리가 잘 이어지기도 하며, 사무엘/열왕기와는 다른 장르(즉, 예언서)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음.) 사무엘서를 읽기 시작할 때 결심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 "영적인 교훈을 깨달으려고 하지 말자". 2년 전에 로버트 알터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그 책에서 하는 말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알터는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 "성경도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구약을 읽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문학적 재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지면 알터의 <할애비>가 와도 재미를 경험하지 못할 뿐이다. 다행히(?) 구약(이라는 문학)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은 편이기에 (도대체 내가 누구관대 이런 말을 ㅋ) ,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층위에서 <문학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아래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문학적 재미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미리 말하지만, 내 재미가 누군가에게는 노잼일 수도 있겠다. 흑흑. 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참 인상적인 책 제목이 있다. 이 제목에 라임을 맞춰 내가 사무엘서 읽은 소감을 표현해 본다면: "사무엘서는 재미있는데 다윗은 맘에 안 들어". 나는 너무 능수능란한 사람, 빈틈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데 다윗은 (소름끼칠 정도로) 권력 유지(Power Yuji)와 전쟁,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수였고 능란했다. 사람을 죽일 때도 그냥 죽이지 않았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이긴 다윗은 "포로들을 줄을 지어 세운 다음에, 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매 석 줄 중에 두 줄은 죽이고, 한 줄은 살려주었다." (사무엘기하 8:2)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다윗은 포로들을 <그런 식으로 죽이고(두 줄)>, <그런 식으로 살렸고(한 줄)>, 나는 <그런 다윗>에게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3. 그럼, 사무엘서에서 인간적으로(?) 제일 정이 갔던 사람은? 그 사람은 아히도벨이었다. 아히도벨은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다윗이 죽인 우리야는, 그의 손녀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 (아름다운 손녀, 용감한 사위를 둔 아히도벨은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의 탐욕스러운 사내가 나타나 그의 손녀에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사위까지 <살해>한다. 가해자는 (전자발찌도 차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녔다. 그래서였을까, 나중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압살롬 편에 선다. 그리고 (도망간) 다윗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략을 냈다. 평소 그가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사람들은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삼하 16:23). 어떻게 된 일인지 압살롬이 이번에는 그의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신이 개입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주님께서 이미 압살롬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좌절시키셨기 때문이다." (삼하 17:14). 이제 사무엘서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사건이 펼쳐진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 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 (삼하 17:23). 그가 목을 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을 깊은 정적의 시간. (사건은 바로 전에 일어났다. 아히도벨이 <매달려> 있는 줄은 지금도 <여전히>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아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종들이 마당에서 일하는 건강한 소음이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와 방 안의 정적과 섞인다. 비록 역모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시도해 봤고, 집의 대소사까지 다 정리하고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 남자. 방 안의 공기는 (적어도 내게는) 무겁다기보다는 차라리 평온하게 느껴진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 이야기가 내게 깊이 각인 되었을까. 아히도벨이 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떠난 시점은, 압살롬이 다윗성 점령에 성공했을 때. 아히도벨은 자신 편의 군사력이 가장 왕성한 그 때, 압살롬의 필패를 미리 <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요즘 내가 <내 끝>에 자주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4. 열왕기상 22장에는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미가야 예언자 사이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크게 두 번>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두 번 놀라기를 바란다.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고 믿는다). 먼저 상황 설명을 하면: 아합 왕은 미가야 예언자를 싫어했다. 이유는, 늘 그에 대해 <안 좋은 예언>만 해서 그렇다. 지금 전쟁을 막 시작하려는 왕이 미가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나는 속으로) 늘 안 좋은 예언만 한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예언을 하겠지, 라고 나는 합리적인 예상을 했다. 웬걸, 15절에서 미가야는 "올라가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라는 축복의 예언을 한다! (여기가, 나의 첫번 째 놀람) 그런데 이어지는 왕의 대답은 방금 전 예언만큼이나 의외였고 나는 두번 째로 놀랐다. 왕이 한 말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다. "너 왜 지금 진실을 말하지 않냐?" 왕은 "역정"(공동번역)을 낸다.(당황한 나는) 15절의 단어 하나 하나에 주목하며 서너 번을 읽었지만 <역정을 낼만한 건덕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번뜩 깨달았다. 미가야 예언자는 15절을 <조롱하듯이> 말했던 것이다! 아합 왕은, 그 예언(이 조롱이라는 것)을 제대로 읽어냈다. (그랬기에 그는 미가야를 옥에 가둔다). 나는 몹시 흥분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낭독하거나 암송할 때, 낭독자나 암송자는, (성경에) 조롱하듯이 읽으시오 라는 지문(地文) 없어도, 이 부분을 조롱하듯이 읽거나 암송했겠구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이 사실이 너무너무 신기했다! ) "주님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15절)"라고 <아무리 분명하게> 성경에 쓰여 있더라도, (그리고) 이 부분은 조롱입니다, 라는 지문이 없더라도, 우리는 기존 문자를 읽을 때와는 <다른 톤>으로 해당 본문을 읽어내야 할 경우가 있는 거구나! 성경은, 우리가 당연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고 있구나! (나 여기서 괜히 깊은 감동 받음. 흑흑). 혹시, 신약에서도, 내가 지금 읽는 톤이 아닌 다른 톤으로 읽어주길 기다리는 구절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그 구절들은 어디일까. 5. 예수님은 구약이 "자기에 관해" 쓴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눅 24:27) 구약의 역사와 이야기는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힐끗) 그 연결점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모두 내가 보기에는 '시작은 좋았으나 끝에 가서는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역사라는 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12:7)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백성이 정신 차리고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나 이스라엘을 원수에게 아무리 <넘겨 주어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들을 <넘겨 주신다>. 이렇게 <백성을 넘겨주는> 구약은 <아들을 넘겨주는> 신약과 이어지고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엠마오 가던 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다시 보니, 여기서도 <넘겨 주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0). 2021.9.25.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신동주 <서플먼트> 1) 이 글의 초반부에 언급한 <문학> 관련 이야기는 로버트 알터의 『성서의 이야기 기술』 (원제: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 39쪽에 등장한다. “성서도 문학[이라고] 본다면, 문학적 분석의 틀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 모든 다른 접근법은 (...) 성서 이야기가 지닌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영적인 교훈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문학적 재미만은 놓치지 말자. 이게 내 가이드라인이었음. 내가 문학적 재미를 놓친다면, 계시의 통로로 구태여 문학을 선택했던 성경 저자들이 몹시 서운해할 것 같았음. 2) 예레미야서를 읽다보니, 적혀 있는 문자를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른 톤>으로 읽어내야 할 상황이 그 어떤 책보다 자주,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음. 예를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쳤다" (15:6)는 어떤 톤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지문(地文)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거 같음. 당신의 지문이 무엇일지 궁금함.

2021년 9월 22일

45세 시절의 조용기 목사 설교(1981.2.25. '겉옷을 벗어 버리고' )를 듣고.

1. 한 명의 목사가 세상을 떴다. 향년 86. 유튜브에는 '조용기 목사 45세 때 설교' 라는 동영상이 떴고 나는 한번 끝까지 들어보았다. 나보다 어린 나이의 한 중년 사내가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었다. 한번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적은 있었으나 (설교 제목이 '겉옷을 벗어버리고'였고, 조목사는 설교 도중 양복 웃도리를 벗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거기서 웃었다), 내 고개는 설교 내내 주로 아래 위가 아닌 좌우로 흔들렸다. 살면서 내가 그에 대해서 꽤 진지하게 숙고했던 적이 <두 번> 있다. 그리고 두 개의 <결론>을 내렸다. 오늘 (대단치 않은, 개인적인) 그 두 결론을 나누고자 한다. 2. 2002년 월드컵 직후였던 것 같다. 교회에서 보내온 그의 설교를 편집하고 있었다. (피디들은, 교회에서 설교 파일을 보내주면, 규정된 방송 시간을 초과하는 분량이나, 방송법 법에 저촉되는 내용 등을 편집해서 잘라내고 내보낸다). 설교 중에 대략 이런 말이 등장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한다).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그런 성장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그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람을 만나더라도 규모가 되는 교회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제 후배 목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교인 수가 적은 목사들 말고, 어느 정도 교회 규모가 되는 목사 동료들과 어울려라." (설교에서는 교인 숫자까지 말했으나, 그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적지 않음). 3.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멘붕에 빠져 편집기를 멈췄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질문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게 맞나?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 그러나 하나님 판단은 내 판단과 다르니, 내가 그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구원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다음 한 가지는 비록 신 앞이지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적인가?"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신 앞에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후, 누군가 내게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구원 여부에 대해선 제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20여년이 흘러도 내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4. 이제, 두 번째 이야기. 다들 잘 알다시피,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요한3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 한번은, 그동안 내가 공부한 신학을 근거로 해서 그의 삼박자 구원을 한번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비평'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함). 평신도로서 그간 신학책을 읽으며 배운 것을, 삼박자 구원론을 살피는 데 <적용>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확인하고 거기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신학책에서 강조하는 첫번 째 원칙이었다. 시(시편)를 읽을 때는 시로 읽어야 하고, 묵시(계시록)를 읽을 때는 묵시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한3서는 편지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 그렇기에, 요한3서는 편지로, 편지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이 편지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을 편지로, 편지처럼, 읽거나 해석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5. 그럼 이 편지에서 삼박자 구원론의 근간이 되는 센텐스는 어디에서 등장할까? 놀랍게도 그 구절은 곧바로 2절에 나온다. 즉, '누구에게(1절)' 바로 다음에 나온다. 대개의 편지에선, 우리가 <의례적인 인사>라고 일컫는 문장이 <그 위치>에 등장한다. 이제, 작은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정말 전형적인 <인사>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조카야), 네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너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개역개정과 현대인의 성경을 혼합). 6. 나는 요한이 상기 편지를,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을 조기 은퇴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삼겹살 고깃집을 개업하는 성도에게 (지금) 쓰고 있다면, 2절은 아마 이런 모습을 띠지 않았을까 싶다 :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사장님), 사장님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이번 고깃집 완전 대박나고, 사모님과 두 분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인사에는 좀 오버하는, 과장된 축복 멘트가 들어가도 괜찮다. '대박' '돈벼락' 같은 말이 들어가도 괜찮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원래 인사가 그런 것이다. 다들 감안해서 듣는다.)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의) 문제는, 어느 정도는 <흘려 듣고> 마음만 받아야 하는 인사말을 <진지 빨고> 들으면서, 자신의 신학을 그런 (한갓) 인사말 위에 세웠다는 데 있다. 그러한 <진지 빤 신학>에서는 이제 '대박'은 진정한 믿음의 표징,증거,의무가 된다. (대박과 십자가를 연결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결론을 정리하면: 인사말은, 듣고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본격적인 신학을 세우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다른 말씀, 다른 심오한 말씀들 많잖아! 왜 66권 수많은 말씀 중에서 하필 거기야!) 2021.9.20. 신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