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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6일

『사무엘상』(김구원 지음, 홍성사)을 읽고.

1. 홍성사에서 창립 40주년을 맞아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를 냈는데 그 첫 권이- 아직 첫 권밖에 나오지 않았다 - 김구원 교수의 『사무엘상』이다. 책을 손에 쥔지 사나흘만에 다 읽었다. 시리즈의 첫 저자 김구원 교수가 발간사 격으로 쓴 글 중에서 다음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들을 다루었다”. 제일 먼저  떡볶이가 떠올랐다. 청년부 모임 후 조원들과 떡볶이 먹으며 사리 하나 추가하며 나누었던 고민과 대화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멕시칸 푸드 타코 먹으며 <쉐어링> 해본 적도 있지만 역시 <내 기독교>에는 떡볶이와 순대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코리안 크리스천의 질문이라! 재미있는 콘셉트였다. 그런데, 내 질문은 무엇이었더라?  

2. 성서 사무엘상과 이 책『사무엘상』이 다루는 수많은 이야기는 다 생략하려 한다. (갑자기 저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이 마흔여덟에 사무엘상을 다시 읽었을 때 내게 생긴 - 약간 뜬금없는 - 단 하나의 질문은 아래와 같다.

3. 사울은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지 못하거나 않는다. 반면 다윗은, 매번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고, 승리한다. 기다리(기만하)면, 가부(可否)간에 지시를 받고, 승리를 한다. 이런 다윗의 승리에서 다윗이나 독자는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다윗은 언제, 자기의 결정에 따른 결과를 맛보며 - 그게 쓴맛이든 단맛이든 - 성숙할까?) 이런 다윗의 행동에서 <대단한 건> 도대체 뭘까.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춘다. 에봇을 통해 예스-노로 지시를 받는다. 이건 마치 -불쑥 끼어드는 19금적 표현을 용서 바란다 - 언제 삽입하고 언제 어디를 애무하라고 일일이 하나님에게 -에봇을 통해- 물어보고 갖는 성관계만큼 코믹하고 비성인(非成人)적이다. 아,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에봇적인 인도 없었고, 제사장 없었고, 오직 - 당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침묵>뿐. 네 삶을 내게 맡기되 네가 내려야 할 결정까지 내게 맡기지는 마, 라는 계시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고대근동에선 한 인간이 성숙한다, 는 개념과 구조가 달랐을까. 다윗이 <블레셋일기>를 남겼다면 그 안에 제사장을 기다렸다, 에봇을 가져오라 시켰다, 하나님께 물었다, 말고 또 어떤 말이 들어갈까. 21세기에 제사장과 에봇은 무엇일까. 아, 그런데,  이 내 질문은 한국적인 것일까.

서플먼트
1)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공감하지 못한 상기 <하나님의 뜻 묻기>는 전쟁에 국한된 거란 생각이 들었다. 광야와 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 다윗은 참으로 많은 결정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스스로> 내렸다. 그래서 내 질문 수정하여 다시 해보면: 이런 다윗의 행동에서 <대단한 건> 도대체 뭘까. (이런, 내가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도 아니고 수정 전후 문장이 똑같은 건 뭥미?  

2) <낸시랭의 신학펀치>를 제작하며 김구원 교수를 패널로 섭외한 일이 있다. 그때 요나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 중에 나온 <다큐멘터리>와 <픽션>이란 두 단어가 페이스북 상에서 꽤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 『사무엘상』355쪽에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혼자 미소 지었는데 인용하면 이렇다. “다소 이상한 이 두 상황은 본문이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사무엘서 저자의 문학적 구성임을 암시한다. 저자는 다윗의 등극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울과 익명의 소년 간의 대화를 본문에서 문학적으로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드너,173쪽)”.

3) 이 책의 미덕 한 가지. 고대근동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지식을 갖고 있는 저자의 해설을 흠뻑 맛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울의 번뇌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비아트’는 욥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골리앗 앞에서 사울을 격려하며 다윗이 사용한 말은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알-이폴 레브-아담’인데 (...)성경에서 마음이 ‘떨어지다’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온다” (...) 이것은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 대한 저자의 복선이다>. (복선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생략).

2014년 7월 20일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를 (오래 전에) 읽고.

1. 나에겐 콤플렉스가 하나 있다. 나는 왜 그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이나 <안티-기독교인들>만큼 성경을 <꼼꼼하게> 읽지 못할까. 얼마 전 누가 영화 <노아>에 대한 얘기를 내게 해줬는데, 내가 <수십 번> 읽으면서도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은 ‘천사들’이 스토리 전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했다. 아, 내가 <헐리우드 작가들>만큼만 성경을 꼼꼼하게 읽을 수 있다면! 부끄럽지만 난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짜가 복음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안 게 채 오 년이 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내 <머리>는 폼이었고, <분석>은 죄였고, 오직 그날 받을 은혜 위한 <적용>만 있었다. 아니, 가나의 혼인 잔치 날짜도 아니고 그 중요한 십자가 처형 날짜(!)가 다르게 기록돼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니! 결코 둘 모두 <동시에> 맞을 수는 없다. (1)둘 모두 틀리든지, (2) 하나만 맞든지. 그런데 -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이런 딜레마를 경험할 때, 우린 덫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아주 멋진 곳으로 우리 인도할 낯선 골목길로 들어선 것일까.
2. C. S. 루이스는 어디선가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기로 결단하셨는데, 그 동일한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의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겠다고 하신 게 이상한 일일까? 이 질문 앞에서 난 <개안>을 했다. 이 물음을 만난 후 <불일치>와 <오류>로 보이는 것들은 내게 더 이상 기독교의 한계가 아니라 감격이었다. 오류와 모호함과 모순 존재하는 내 언어의 집까지 내려와, 기꺼이 거기 머무시며, 나에게 읽힘을 당하시고, 나에게 이해당하시고, 오해당하시고, 질문당하시는 그 분! 무오하지 않은 경전 소유한 종교는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는, 무오한 경전의 종교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까? 그런 무오를 부러워해야할까? 
3. 내가『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권연경 지음, SFC 출판부)를 읽으며 재차 깨달은 건, 성경이 <무오하다>는, 혹은 <무오해야만 한다>는 내 신념이 놀랍게도 <성경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경 속 오류와 불일치로 보이는 것들 앞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가 무너지는 거 아냐?> 당황하고 불안해 하는 나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성경의 객관적 사실들 자체가 나의 “무오” 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내가 가진 무오 교리가 애초부터 내가 가진 실제의 성경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저자는 이제 그 <실제의 성경>에 우리 신앙을 맞춰나가는 흥미진진한 작업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그리고 그 흥미로운 작업에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식이 해명되어야 한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언어로, 완전하지 않은 해석자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을 살피다 보면, 어쩌면 당신은 은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웃음).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이 땅을 다 너에게 주리라> 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신이 무언가를 열심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고마움에 가까운 마음.
서플먼트
1) 이 책을 읽으며 배운 것 중 하나는 성경을 읽을 때는 자신이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시는 제일 먼저 시로 읽고, 편지는 우선 무엇보다도 편지로 읽기. 문득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삼박자 구원>의 중심 구절을 상기 기준으로 살펴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요한3서 1장을 찾았다. 1절에 편지의 발송자와 수신자가 각각 장로와 가이오로 나왔다. 이어 2절에 그 유명한 구절이 나왔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제 보니 전형적인 <인사말>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새로 시작한 이벤트 사업은 잘 돼? 대박 나기 바래> 정도의. 누군가 자신의 <신학>을 세우면서,  편지 본문이 아니라 인사말을 핵심 어구로 삼는 게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2) 나는 요즘 상기 책의 저자와 함께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어느 날 책의 저자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프로그램 캐치프레이즈에 나오는 <신앙의 근육>이라는 말, 제 책에 나온 거 아시죠? 어, 제가 생각한 캐치프레이즈인데요! 그는 여전히 미소지으며, 아니에요, 이 책에 나와요. 아, 내가 처음 만든 조어(造語)라고 생각하고 엄청 뿌듯해 했는데! (흑흑). 신앙의 근육을 키워주는 책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를 모든 이에게 강추한다.

2014년 7월 7일

<신학이란 무엇인가> 를 읽고.

1. <신학이란 무엇인가>(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를 읽는 과정은 내게 있어 자전거 타기와 비슷했다. 자전거는 신비롭다. 희열이 오래 지속된다. 오르가즘은 7초면 끝나지만 자전거는 20분, 30분, 페달을 밟는 내내 동일한 쾌감을 선사한다. 유럽과 미국의 주요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한다는 이 책, 내게 한 달 넘게 지속되는 절정을 선사했다. 일반 ‘평신도’ 독자의 입장에서 평신도 동료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평가하자면: 쉽고, 깊고, 체계적이고, 재미있다. 마지막 1131쪽까지. 그렇다. 라스트 드롭(last drop)까지! 추천한다. 머스트-리드(must-read).머스트-드링크(must-drink). 

2. 마음에 드는 주제들을 먼저 찾아 읽었다. 제일 먼저 펴서 읽은 곳 중의 하나가 제10장 삼위일체론 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언제나 날 흥분시킨다. 그 이유를 3번 글에 썼다. 삼위일체론에 관심이 없다면 4번 글로 건너뛰어도 괜찮다.

3. C. S. 루이스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만큼 - 기억에 의지하여 루이스가 한 말을 요약한다 - 비합리적인 교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데 걸림돌이었다. 하나 지금 이 교리는 내가 기독교 신앙을 진리라고 믿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됐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이 관계(혹은 사랑)란 얼마나 중요한 특질인가. 그렇다면 어떤 종교의 신관은 이 관계성이란 것이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신이 단일한 존재라면 - 즉, 신이 삼위일체나 이위일체나 사위일체가 아니라면 - 그의 본질에는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관계를 맺는다는 속성이 포함돼 있지 않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관계성이 신적인(절대적인) 기원을 갖추지 못하게 되고 ‘우연히’ 발생한 상태에 불과해진다. 삼위일체, 설명해내기 힘들지만, 그러나, 삼위일체야말로 인간의 삶 속의 관계성(사랑)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유일한 신관이다. 영원 전부터 서로 관계 맺고 서로 사랑해오던 삼위일체의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은 관계 맺고 서로 사랑하게 됐다. 기독교가 일위일체의 신관을 주장했다면 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4. 구원이라는 ‘간단한(?)’ 교리에 대한 내 이해는 30년 전쯤 내가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을 무렵 수준에서 멈춘 것 같다. 그 상태에서 멈춘 이유는 내가 <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성경을 읽을 때나 신앙서적을 읽을 때나 내가 잘 아는 ‘구원’ 이라는 단어 앞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내 이해의 수준은 멈췄다. 요즘 다시 묻게 됐다. 어쩌면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 분이 나를 구원했다는 게 무슨 뜻일까. 2천년 전 한 ‘청년’이 흘린 피가 내게 왜, 어떤, 어떻게 - 구체적으로 어떻게! - 영향을 끼치나. 물론 보혈임을 믿는다. 하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냥 보혈이라고 외워왔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제13장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읽었다.

5. <교부시대의 신학자들>, <종교개혁>, <다른 종교와 구원의 가능성> 등 맥그래스가 다룬 다양한 주제, 항목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한 내 감상을 일일이 소개하면 지루해질 것 같아 대신 이 책 <신학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했던 생각을 적으며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책을 덮는데 갑자기 한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바르트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너,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동성애,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 타인들의 정답 말고 - 너의 오답은 무엇이니? > . 읽는 건 쉽다. 아무리 책이 두꺼워도. 하나 생각하는 것, 특히 내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다. (그냥 정답을 빨리 얻고 싶다.) 하나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정답 속에서 영원히 빈약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신학자들에게 나 대신 생각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귀찮지만 성경을 찾아보며 나 또한 생각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2014년 6월 24일, 그동안 맥그래스가 차지하고 있던 내 가방속 공간을 <표준새번역 성경>이 새롭게 차지했다. 

2014년 7월 5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2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2

점점 상투적으로 돼가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만의 언어를 갖고 싶었다. 라이코스에 my_own_language@lycos.co.kr 이란 메일을 만들었다.

2014년 7월 4일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0

‪#‎라디오시절_이라는_퍼즐‬ – 10
개편을 한 달 앞두고 피디들은 편성국 출입구 앞에 붙은 프로그램 배당표를 확인했다. 각자의 이름 옆에, 배정된 프로명이 적혀있었다. 내 이름이 보였다. 내 이름 옆에, 프로명이 없었다. 1995년 가을 난 프로그램을 배정 받지 못했다. ( ‘내가 아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은 퇴직하신 ‘어떤 한 분’의 결정을 내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건 공평하지 않을 것 같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선배 B가 근처 중국집에서 점심을 사줬다. 밥을 먹으러 가기 전만 해도 난, “그래,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좋아, 월급 나오겠다, 그래 푹 쉬어주지”라고 생각했다. B 선배가 사준 점심을 먹고 회사로 오며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게 긴 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을 가지고 너 뭐 할래?” 다큐였다. 내가 피디가 된 가장 큰 이유. 다큐멘터리. FM 라디오 개국을 석 달 앞두고 있었다. 무언가 감동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종소리가 떠올랐다. 새벽마다 경쟁적으로 울리는 한국 교회의 차임벨 소리는 이미 공해였다. 성공, 성장, 복을 외치는 설교는 그보다 더한 공해였다. 교회가 안 그러던 시기가 있을 거 같았다. 안 그러는 교회가 있을 거 같았다. 그런 교회의 종소리를 - 그런 교회에는 왠지 종이 있을 거 같았다 - 그 교회가 겪은 스토리와 함께 들려주면 무척 라디오다큐적일 것 같았다. 그렇게해서 CBS-FM 개국특집 다큐멘터리 <한국 교회의 종(鐘)을 찾아서>. 1995년 12월 15일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