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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9일

<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다 > - CBS 아카데미 숲 제작을 마치며

제가 올 3월 프로그램 중간부터 연출을 맡기 시작했던 이 가을 개편을 맞아 어제 방송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새로운 주제와 함께 시즌2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시즌2가 언제 방송될지, 담당 피디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함정 -.- ) 그동안 함께 해주셨던 분들의 멋진 강의가 떠올라요. 한성열 교수의 심리학 콘서트, 성현 목사의 이 시대의 영성 작가들, 최주훈 목사의 우리가 몰랐던 종교개혁 이야기, 김홍기 작가의 옷장 속 인문학 이야기, 민경식 교수의 우리의 신앙을 다져주는 사본학, 성경 인쇄와 번역 이야기, 임정혁 목사의 누구나 알아야 할 성(性) 이야기, 옥성득 교수의 다시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기민석 교수의 구약성경은 현재 진행형! , 덕은동 공동체 최규창 대표의 '공동체는 힘이 세다!' , 최은 영화평론가의 영화 이야기 '스크린 속에 지금 우리 삶이 있다'. (제가 연출 맡기 전에 출연하여 좋은 강의 해주신 김학철 교수, 배덕만 교수, 백소영 교수, 김진혁 교수, 김근주 교수, 김응교 교수 외 여러 강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숲을 제작하면서, 우리가 각자의 '전문성'을 키우면 언젠가 주위 이웃에게 큰 힘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됐습니다. 그것이 그림에 대한 안목이든 카운셀링에 관한 것이든, 주제가 패션이든 영화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든지요.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전문적인 주제와 씨름해오신 강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강사분들 외에 또 빼놓을 수 없는 분들! 녹화 때마다 멋진 질문 던져주신 패널 박수진, 최령, 차유주, 김원구, 박인영, 지니, 김진철 외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CBS 아나운서들의 멋진 활약 감사드립니다.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다. 올 봄 프로그램 맡으면서 제가 지었던 캐치프레이즈였어요. 그때는 숲이 인문학만을 은유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그램을 마치는 지금, 제게 있어서 숲은 오히려 제가 만난 사람들이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숲에서 길을 잃고 싶어요. 한 번 더라도!
감사합니다.
2017.10.29.
숲 스태프를 대표해서
신동주PD드림
ps.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었던 스태프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어요. 강사 섭외, 강의안 구성과 제목 정하기, PPT 제작, 녹화/편집과 자막 등 프로그램의 모든 걸 다 함께 했던 멤버들이어요. 사진 속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숲은 지금과 달리 '앙상'했을 거예요. (사진 왼쪽부터: 신피디, 김민현 조연출, 이경남 조연출, 특별게스트 김현정 씨, 김보영 작가). 자비하신 그 분께서 50대 중년 남성으로부터 20대 여성 청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후 길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를!





2017년 10월 5일

『알라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IVP)를 읽고.

1. 미셸 푸코는 총 673쪽에 달하는 『광기의 역사』를 쓰면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짧게 언급한다. 겨우 3쪽 분량이었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는 나머지 670쪽에 대해선 아무 언급도 없이 그 3쪽만 물고 늘어졌다. 그 3쪽 안에 『광기의 역사』의 근간을 흔드는 결정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은 그렇게 시작됐고 둘의 관계는 이후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데리다처럼 나 또한, 달랑 8줄 나오는 『알라』 제13장 23번 각주 인용문에, 전체 『알라』 394쪽을 무력화시킬 결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2. 먼저  문제의 각주가 달린 본문부터 살펴보면 이렇다. 볼프는 "공통의 신을 믿으며 그 신을 비슷하게 인식한다는 사실을 공동으로 인정"하는 행위가 "공동생활에 관한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p.325)"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로, 볼프는 <공통의 신을 믿는다>는 행위와 <의견 충돌의 해결>이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을 394페이지 되는 이 책 <전체>에서 끊임없이 주장해 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순간에 문제의 각주가 등장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를 하기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꼼꼼하게 각주까지 다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아마 <이 문장>을 <지금 처음 접했을 것이다>.  한편, 각주에 등장하는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라는 말은 문맥상 <평화 공존을 위한 논의> 등으로 얼마든지 바꿔쓸 수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재진술도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평화 공존을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이제 독자들은 참으로 난감해진다. 평화 공존을 위해 공통의 신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독자들은 왜 <장장 394쪽에 걸쳐> 이슬람과 기독교 두 종교의 신이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을까. 하지만 이제, 이런 <근본적의 질문> 잠시 옆으로 제쳐놓고,  저자가 <394쪽>에 걸쳐 펼쳐놓은 이야기 논리 속에 다른 문제점은 없는지 알아보련다.   

3. 볼프는, 어느 두 집단에서 <믿는 신이 동일하다>면 <평화가 구축될 것이다>라고 믿기에, 자신의 책   『알라』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두 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나는 볼프의 이런 접근을 <크로아티아에서 배태된 신학>이라고 명명해 보겠다. (볼프는 종족 간의 많은 내전을 겪은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이에 반해 <신의 동일성 여부는 갈등 해소 및 평화 구축에 주요 변수가 아니다>라는 나의 신념과 접근법은 <강남 서초역을 거친 신학>이라고 부르려 한다. (서초역 근처에는 큰 교회가 하나 있고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표절 후에도 사임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그 교회를 출석하는 신도들의 수는 수 만을 헤아리며, 이 신도들과 그 교회를 갱신하려는 구성원들 사이에는 수 년간 <평화>가 없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소위 <크로아티아 신학>은 한국의 강남 서초역이라는 <공간>에서도 <작동>하는가?

교회를 갱신하려는 자들과, 그들을 보며 교회를 허문다고 비판하는 자들은, 같은 <개역개정>으로 성경을 읽는다. 두 측이 믿는 신은 동일한 날 십자가에 못 박혔고, 동일한 날 부활했다. 이슬람-기독교 비교에서처럼, 소위 <가까스로 동일신>이 아니라 <한눈에 동일신>이다. 하지만 이런 <동일성>은 오히려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아!>라는 분노를 증폭시킬 뿐이다. 안타깝게도, 양측에서 똑같이! 『알라』를 읽으면서 답답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나는 비록 총성도, 폐허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자꾸 볼프보다 <더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동일신의 실제적 <무력함>에 대해서만큼은.

4. <동일신>이 그렇게 무능하다면, 즉 양측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는 신이라면,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떤 신>을 바라보아야 할까?  볼프는 <각주 23번>에서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라는 사람이 쓴 『Thick and Thin』의 서문 한 대목을 길게 인용한다. 그 서문에서 저자 왈저는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벨벳혁명의 한 장면을 기록한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 그것은 프라하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이었다. 그들은 단순하게 '진실' 혹은 '정의'라고 쓰인 표지판을 들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즉시 그 표지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고, 똑같은 사진을 본 모든 사람도 다 그랬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나는 행진을 하는 그 사람들이 옹호하고 있는 가치를 이해했고 (...)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 행진을 하던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화는 나에게 이질적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런 반응을 하게 만들었던 경험을 나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마도 그들 사이에서 아주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역시 똑같은 표지판을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이, 394쪽 분량 『알라』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킨, 여덟 줄이다. (줄 수는 원문 기준).  

5. 이질적이고 낯선 사람들 사이로 걸어들어갈 용기는 <동일신의 확인>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 왈저의 회상. 이렇게 양쪽이 믿는 신의 동일성은,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왈저 에피소드에 대한 볼프의 반응은? 한마디로 말해서 볼프, 수긍을 하되,  <동일신에 대한 로망>을 버리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공통성>은 왈저가 파악한 <도덕적 최소치>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 만약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공통의 신을 가지며, 그들이 신의 성격과 명령을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중복>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강조 첨가). 이렇게 볼프는 여전히 동일신 로망 안에 머문다. 두 신의 <중복>이 <유익>을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을 포기할 생각이 그에겐 없다. 그럼, 그의 말대로 두 종교는 중복되는가? 

6. 『꾸란』을 읽는 동안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내 <충격 포인트>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꾸란』을 읽기 전에는 예수도 <그저 그런 여러 예언자 중 한 명>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이 가장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꾸란』를 읽어본 지금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느끼는 대목은 다음이다 : "그러나 그들이 그를 (실제로는) 죽이지도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다...오히려 그들에게 그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나타났으며 (그들은 그를 예수와 혼동하여 죽였다)." ( 『꾸란』 4:157 중에서. 상기 우리 말 번역은 한스 큉이 쓰고 손성현이 번역한 『이슬람』 제4장 각주 40번에서 인용. 같은 대목을 N.J. Dawood는 다음과 같이 영역하였다. " They did not kill him, nor did they crucify him, but they thought they did." ) 이제 이 대목에 대한 한스 큉의 해설을 들어보면: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이 꾸란 구절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다른 해석들도 가능하다. 예컨대 이 구절이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만을 부정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그러나 고전적 꾸란 주석가, 현대의 꾸란 주석가 대부분은 이 구절을 대치(代置, substitution)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요컨대 예수 대신 다른 사람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함마드 주변에 널리 퍼져 있던 견해였다." (한스 큉,『이슬람』, pp.886-887 . 강조는 한스 큉). 기독교적 메시지가 십자가 사건에서 정점을 이룰진대 그 <정점>이 빠진 종교가 기독교와 중복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와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과연 <중복되는 문장>일까. 

7. 『알라』에 대한 이번 서평에서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 다음 세 가지였다. ① "의미 있는 도덕적 논의를 하기 위해 꼭 공통의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각주 23)" 라고 믿으면서도 394쪽에 걸쳐 두 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려 하는 볼프의 행동은 상호 모순이다. ( "왜 볼프는 문제 해결에 <필수적인 사항>부터 밝히고 다루지는 않는 것일까?") ② 갈등 중인 양쪽의 신이 동일하다는 게 밝혀져도 실제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동일신은 보기와 다르게 무력하다") ③그런데 사실 양쪽의 신은 애당초 <중복>되지도 않는다. ("십자가는 중요한데 한 명은 십자가에 오르지 않았다"). 만약 볼프가, 『알라』 마지막 장 각주23에서 <지나가듯이> 밝힌 내용을, 책 서론에서 <제일 먼저> 밝히고, 그 문제와 394쪽에 걸쳐 씨름했다면, 『알라』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용과 영향력에서). 나는 볼프가 그런 후속작을 냈으면 좋겠다. 
2016.3.25.
신동주

<서플먼트>
1)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한 달 넘는 시간을 『알라』를 읽고 쓰는데 매달리게 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장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문장으로서의 효용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걸까, 회의하고 있던 바로 그때 볼프가 들고온 <동일성>과 <중복>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고, 그래서 조금은 <데리다>식으로 볼프에게 딴지를 걸었던 것 같다. 볼프의 학문적 깊이와 역량 그리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평생에 걸쳐 기울인 노력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2) 서평을 쓰면서 읽고 참고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꾸란 선 : 35개 장의 의미번역과 주해』(손주영 번역,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알라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IVP) , 『한스 큉의 이슬람 : 역사 현재 미래』(한스 큉 지음, 시와 진실), 『The Koran』( N.J.Dawood 번역, Penguin Books ). 한국외대에서 나온 상기 『꾸란 선』은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여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다음에 한번 더 꾸란을 읽는다면 한스 큉을 번역할 때 번역자 손성현 선생이 기준으로 삼은 『성 꾸란 : 의미의 한국어 번역』(파하드국왕꾸란출판청 발간)으로 읽어보고 싶다. (『이슬람』을 읽으면서도 또 확인하고 느낀 거지만 손성현 선생의 번역은 참 좋다.)

3) 마지막으로, 볼프가 이번 『알라』에서는 <들어서지 않겠다고 한 길>을 잠시나마 걸어보면서 이 서평을 맺으려 한다. 볼프는 『알라』를 시작하며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신과 지금 세상에 관한 것이지, 신과 장차 올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 이 책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며,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지는 않는다.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는 남겨 두기로 한다. 전문용어로 이 책은 정치신학에 관한 책이지, 구원론에 관한 책이 아니다." (p.26) 이제 잠시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 짧게나마 하고 싶다. 나는 본문에서 꾸란과 성경이 증언하는 신은 동일한 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다른 신을 믿는 무슬림들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C.S.루이스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은 100 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퍼센트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나는 루이스의 말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내가 모르는 다양한 방법과 능력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하기 원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루이스의 상기 발언 중에서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란 대목에 눈길이 더 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 타종교인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루이스의 경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시각에선, 지금 한국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몇 갈등>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믿는 이들>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일 수도 있을 거란 무서운 생각이 든다.하나님은, 하나님만, 아시고 보실 수 있으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