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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8일

300년 전의 나

만56세가 되는 오늘 아침에도 난 장모님댁 뒤에 있는 불곡산을 오르며 내가 3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살기 위해> 불교 혹은 무속의 '어떤 말(가르침)'을 간절히 붙잡으려 했을까 생각해봤다. 종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미천한 내 귀에까지 다다른 말은 가르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런 수준의 것이었을 것이다. (내용과 분량과 전달 방식 모두에서. 전달자는 아마 주막집 주모나 머슴, 굿판의 무당이기 쉬웠을 것. 술주정에 가까운 형식을 통해. ) 주인으로 부터 모진 고문을 당할 때 내가 떠올린 말은 '마음이 정하면 악귀도 어쩌지 못한다' 였을까. (그 말은 내게 힘을 주었을까, 무력감을 주었을까). 자기 것 챙기기에 바쁜 하루하루 삶 속에서 내가 나를 다잡기 위해 가끔이나마 떠올린 말은 '베푼대로 돌아온다' 정도였겠지? (나는 불곡산 정상에 있는 정자에 도착했고 내 상상은 이어진다.) 정상에 있는 암자에 다다른 나는 노승에게 주인 마님이 전하라한 서찰을 건네고 돌아서기 전에 물 한 잔을 얻어 마신다. 왠일인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노승이 말을 건넨다. "깊은 산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뇨?" 내가 무엇을 보았을까? 앞길이 보이지 않는 종의 인생길. 나는 무엇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스님. 오는데 새 한 마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 걸 봤습니다. 딱딱딱딱 나무를 쪼는데 유심히 바라보니까 제가 하는 망치질과 달랐습니다. 저는 못대가리를 망치로 한 번 치고는 다시 치기 위해 망치를 들어올려야 하는데 제가 본 새는 신기하게도, 조금의 시간 틈도 없이 나무를 딱딱딱딱 연이어 쪼더라구요. 신기해서 한참이나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 새가 갑자기 멈추고는 더 깊은 숲으로 날아갔습니다. 다시 가던 길을 가는데 얼마쯤 걷다가 작은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를 바라보던 그 30분, 나는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구나. 참 오래간만에 평안했구나. 그런데 스님, 평생 새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는 거겠지요?" (2021.12.28)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폴 니터 지음, 클리어마인드) #2012년4월8일에 1독. 지금 2독 중. #300년 전의 나와 다르게 경전과 주석을 양 손에 쥐고 있는 지금의 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 올 해 생일

2021년 10월 13일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1.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사람이 있다. 책에도 그런 책이 있다.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다.) 나는 서평을 쓸 때, 그 책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것>을 소개한다. (저자가 내 얘기 들으면 "아니 왜 그거를?"이라고 어이없어 할 수도 있고, "아니,당신도 거기서!"라고 감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 것은 <모른다>라는 단어였다. 2. 그냥 몇 군데 살짝 맛보기로 소개하면 :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에 책을 편찬하고 모으는 일과 책을 쓰는 일의 역할 구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언서의 저자가 실제로 누구였는지) .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구약 저자들의 직업을 이야기하며). "(거의) 알지 못합니다" (누가 구약을 썼는지).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4개 복음서들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많은 경우 답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저자의 확정과 경전의 인정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에 대해 ). 그런데, 이 모른다라는 단어와 더불어 소개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저자가 이 모른다라는 말을 할 때의 <톤>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게 핵심이다). 저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5호선은 오목교역을 통과합니다>라고 말할 때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이제 독자들은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의 명예 교수인 저자의 <여유있고 자연스럽고 당당한> 톤에 취해(?), 평소(?)와는 달리 한결 넉넉해진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을 누가 썼나, 언제 썼나,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고해서 내 기독교 신앙이 꼭 흔들리는 건 아닌가봐? 내 기독교 신앙이 꼭 부끄러운 게 되진 않나봐? 2021.10.13. 신동주 <서플먼트> (1) 『성서의 형성』은 200쪽이 채 안 돼 한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기에, 성경 통독을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무척 유익할 듯. 나는 『최신구약개론』(레이몬든 딜러드, CH북스)와 『구약성서탐구』(버나드 앤더슨,CLC)도 읽으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큰 그림을 <빨리>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한편,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두 가지 그림 이미지에 무척 끌림. 첫번 째는 식물 이미지. "성서는 어떤 규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듯, 성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나 성서가 되었습니다". 두번 째는 이메일 이미지."우리는 책이라고 하면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기승전결이 있으며, 시종일관 같은 문체로 기록[된] (...) 물체를 떠올리지요. 고대 세계의 책은 오늘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여러 이메일을, 이것들이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왔음을 숨기고 하나로 묶어 단일한 형식으로 인쇄한 모음집 정도가 될 것입니다." (2) <모른다>라는 단어 외에 한 단어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난 망설임 없이 (이번에는 '흥분'보다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 단어인데) <오늘날>을 추가 하겠다. 출간물 하나하나에 일일이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를 부여하고, 저자 역자 발행인을 각각 기록하고, 1쇄와 2쇄 날짜를 구분하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전승되어 온 본문에 종종 후대의 이름 모를 인물들이, 원저자와 현대 독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절과 구와 장을 과 장을 첨가하는 행위가 진본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임.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오늘날 문화에서는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p.58). (이 단어 역시 이 책에서 끊임없이 등장). 이 책에선 아니지만 G.K. 체스터튼 역시 구약의 욥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함 : "이 서사시에서 어떠한 부분이 원저자가 계획하였던 것이고 어떠한 부분이 훨씬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한 토론이 이어져 왔다.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불일치하는데 - 사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학자들의 주된 업무이긴 하다 - 전반적인 연구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실제로 어떠한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면, 산문으로 기록된 서론과 후기는 [확실히]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젊은이 [엘리후]의 연설과 마지막의 [욥의] 회개가 후대의 첨가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든지, 이 문제에 관하여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일반적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어떠한 고대의 예술 작품을 다루고자 한다면, 고대의 저작이 점진적으로 [즉 후대에 계속적으로 첨가되었다는] 쓰였다는 사실이 이 저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건축되어 왔던 것처럼, 욥기도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건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구전 시가를 쓴 사람들은, 실제 연대와 실제 저자에 대해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원저자와 원연대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그러한 중요성이란 모든 면에서 근대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개인주의의 창조물인 것이다. (...)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설사 다른 사람들이 어떤 구절을 이 저작에 삽입하였다 하여도, 그 당시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과 같은 개인주의적 시대에 그러한 행동이 불러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부족이 창조한 서사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부족의 사원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 부족 전체의 창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한다면, 욥기의 서문과 후기,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이 원래의 저작이 쓰인 이후에 삽입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삽입이 근대의 개인화 혹은 개별화된 책에서 이루어지는 삽입처럼 책을 명백히 위조물로 만든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삽입을 조지 메러디스가 쓴 책에서 이후에 실제로는 그가 쓰지 않은 한 장을 발견한 것과 같이 취급해서도 안 되고, 입센의 희곡에서 윌리엄 아처에 의해 교묘하게 삽입된 장면 일부처럼 간주해서도 안 된다. 일리아스나 욥기처럼 오래된 시를 만들어 낸 옛 시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전통을 언제나 지켜 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을 자기 자식이 추수하도록 물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쓰던 시를 자기 자식이 마무리하도록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통일성(Homeric unity)’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리아스는 한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백 명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통일성이란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 당시에는 한 도시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마치 내전 중에 있는 한 도시인 것처럼 보인다." ( '카이로스: 비평루트'가 번역한 G.K.체스터튼의 욥기 '서론' 중에서. 번역 전문은 https://cairos.tistory.com/215 에서 확인 가능.)

2021년 10월 11일

『성서, 역사와 만나다』(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비아 VIA)를 읽고.

1. 성경 말씀 중에 유독 <한국>에 와서 고생 <이빠이> 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구절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면". 표절,성폭력,횡령 목사들이 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다시 <설교>하는 모습 볼 때면 나 환장하겠다. ( 이렇게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데> 사용된다는 건, <성전을 정화>하신 분을 따르는 조직에서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두 번째 구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성경 본문의 불일치나 모순을 <살펴보며> (이를 통해) 성경(과 신앙)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들어가 보려고> 질문 하나 할라치면 바로 당장 등장하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는 디모데후서 말씀을 인정하면 해결되는데, 넌 그걸 안 믿는구나?". (나 두 번째로 환장하고 슬픔 ㅠㅠ). <기름> 구절이 교회의 정화를 <막는다면>, 이 <영감> 구절은,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더 깊은 세계로의 진입을 <막는다>. 오늘은 후자에 대해서만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참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세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먼저 공유함.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디모데후서 3:16)"의 영어 번역은 이렇다 :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NASB) (2)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에 <신약>은 포함되지 않는다. 디모데가 디모데후서를 받을 당시 신약성서라는 책은 아직 없었다. <모든 성경>은 우리가 흔히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을 지칭. (3) 유대인들은 이 히브리 성경을 <타낙>이라고 부름. 유대인들은 성경 속 책들을 세 종류로 구분. 토라(율법서),네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 이렇게 셋인데, (그래서 성경을 호칭할 때) 이 셋의 앞 부분을 따서 타낙(혹은 타나크)라고 불렀다. 이제 <모든 성경>과 <영감>과 <타낙> 이렇게 세 단어가 <제대로> 결합될 때 - 기름 목사와 달리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데 - 우리 앞에는 <놀라운 결론>이 주어진다. 정말이다. 2. 히브리 성경의 원래 본문은 모음은 하나도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음들로만 이뤄져 있다. 우리 한글로 예를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ㅅㄴㄷㅇㅈㄴㄴㅁㄴㅁㅇㄷㅁ ㄹㅅㄱㅎㅂㄴㄷㅋㅋ.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간단히 말해, 히브리 성경은, 독자들이 추후에 모음을 추가로 집어넣지 않고서는 <읽어 낼 수> 없는 글이라는 뜻이다. 모음을 추가해야, 비로서 의미 있는 문장이 생성된다. 위에서 예로 든 한글 자음들에 (제대로 된) 모음을 추가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된다: "신동주는미남이다미리사과합니다ㅋㅋ" 책에는 모음이 없더라도, 읽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모음을 집어넣어 주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음의 종류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음을 넣으면 다른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위의 똑같은 자음들이, 다른 모음들을 넣을 경우) "신동주너는왜이렇게사냐ㅋㅋ"(라는 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독자들이 <어떤 모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독서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타낙 본문에 히브리어 자음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만을 전달 받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히브리어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서는 모음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아주 이른 시기부터 타낙의 자음에 어떤 모음이 가장 적합한지를 논하는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렇게 전달된 모음은 본문으로 기록된 성서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기억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7)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한 말은, 사실은 이렇게 풀어써야 할 것이다 : "모든 <기록된 자음>과 (모든) <기억된 모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방금 내가 한 이 말은 사실 펠리칸이 한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교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타낙, 즉 구약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문서'라면 성서 본문에 기록된 자음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남아 한참 후에 기록된 모음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영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즉 구전 전승 역시 기록된 본문과 동일한 의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128) 3. 이제 <모음들이 '전달된 방식' 역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글을 맺으려 한다. 나는 영어로 본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생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가 영어책에선 "from teacher to pupil through countless generations"이라고 나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세대>. (그런데) 그 많은 세대, 긴 시간 중에서, 이사야처럼 <높이 들린 보좌>나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 <너를 예언자로 세웠다>, <아닙니다.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라고, 예레미야처럼 직접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의 밀당 할 수 있었던 순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 형성의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은, 환상을 보는 시간이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다음과 같은 선생과 학생들 사이의 <평범한 대화>로 채워져 있다고 본다 : 이 글자는 뭐라고 읽나요? 알레프라고 읽는다. 선생님 '바브'와 '요드'를 쓸 때 획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되나요. 오늘은 드바림(신명기)의 첫 장을 암송할 것이다. 테힐림(시편) 22편에서 '내 손과 발을 거칠게 다루었습니다'는 '내 손과 발에 구멍을 뚫었습니다'라고 읽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요? 스승님이 사무엘하 15장 7절을 '4년'이 아니라 '40년'으로 읽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답하던 스승과 제자들이 죽는다. 자녀들이 태어나 다시 처음부터 글을 배우고 스승들에게 질문을 한다). 하고 싶은 말,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만약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외웠다면, 서너 세대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수 백 세대, 수천 년 이어졌다는 것은, 그 내용을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무언가를 후에 누군가에게 (다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충분히 묻는다>이다. (지금) 충분히 묻지 않으면, (후에) 충분히 답변하지 못하고, 구전 전승은 <끊긴다>. 오늘 날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본다. 온전한 이해로 이끌어주는 첫 단추 의문과 질문을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의문과 질문을 무시하는 것은 비-영감적, 비-타낙적, 비-모든성경적이다. 한마디로 비-디모데후서적이다. 2021.10.11. 신동주 <서플먼트> 1) 시편22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은 각각 마소라 사본과 70인역에 등장. 『성서, 역사와 만나다』 p.129에서 인용함. 2) 줌에서, 오프에서, 성경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나누고, 신학 서적을 구매해 함께 읽으며 궁금증을 풀어가고, 지인들끼리 모여 신학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이 모든 비-이사야적인 시간들을 영감의 원천이신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시기를.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음).

2021년 9월 26일

안식년 휴가 중 몇 권의 구약 성경을 읽고.

1. 이곳 미국에 와서 잠시 지내는 동안 오래간만에 성경을 읽었다. 나이가 있다보니 전도서를 먼저 읽었고 (아주 좋았음), 다음으로 어디를 읽을까 잠시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사무엘상을 폈다. 그렇게 사무엘상,하를 읽고, 이어서 열왕기로 넘어가려다가 사무엘상,하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 다시 한 번 더 읽고, 그리고 열왕기상,하를 읽고, 이어서 예레미야를 읽고 있는 중. (예레미야를 선택한 이유: 아주 흥분해서 읽었던 열왕기하의 마지막 사건들이,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와 겹치기에 스토리가 잘 이어지기도 하며, 사무엘/열왕기와는 다른 장르(즉, 예언서)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음.) 사무엘서를 읽기 시작할 때 결심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 "영적인 교훈을 깨달으려고 하지 말자". 2년 전에 로버트 알터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그 책에서 하는 말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알터는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 "성경도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구약을 읽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문학적 재미를 영순위에 두고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문학적 재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지면 알터의 <할애비>가 와도 재미를 경험하지 못할 뿐이다. 다행히(?) 구약(이라는 문학)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은 편이기에 (도대체 내가 누구관대 이런 말을 ㅋ) ,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층위에서 <문학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아래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문학적 재미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미리 말하지만, 내 재미가 누군가에게는 노잼일 수도 있겠다. 흑흑. 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참 인상적인 책 제목이 있다. 이 제목에 라임을 맞춰 내가 사무엘서 읽은 소감을 표현해 본다면: "사무엘서는 재미있는데 다윗은 맘에 안 들어". 나는 너무 능수능란한 사람, 빈틈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데 다윗은 (소름끼칠 정도로) 권력 유지(Power Yuji)와 전쟁,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수였고 능란했다. 사람을 죽일 때도 그냥 죽이지 않았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이긴 다윗은 "포로들을 줄을 지어 세운 다음에, 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매 석 줄 중에 두 줄은 죽이고, 한 줄은 살려주었다." (사무엘기하 8:2)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다윗은 포로들을 <그런 식으로 죽이고(두 줄)>, <그런 식으로 살렸고(한 줄)>, 나는 <그런 다윗>에게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3. 그럼, 사무엘서에서 인간적으로(?) 제일 정이 갔던 사람은? 그 사람은 아히도벨이었다. 아히도벨은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다윗이 죽인 우리야는, 그의 손녀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 (아름다운 손녀, 용감한 사위를 둔 아히도벨은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의 탐욕스러운 사내가 나타나 그의 손녀에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사위까지 <살해>한다. 가해자는 (전자발찌도 차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녔다. 그래서였을까, 나중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압살롬 편에 선다. 그리고 (도망간) 다윗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략을 냈다. 평소 그가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사람들은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삼하 16:23). 어떻게 된 일인지 압살롬이 이번에는 그의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신이 개입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주님께서 이미 압살롬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좌절시키셨기 때문이다." (삼하 17:14). 이제 사무엘서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사건이 펼쳐진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 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 (삼하 17:23). 그가 목을 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을 깊은 정적의 시간. (사건은 바로 전에 일어났다. 아히도벨이 <매달려> 있는 줄은 지금도 <여전히>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아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종들이 마당에서 일하는 건강한 소음이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와 방 안의 정적과 섞인다. 비록 역모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시도해 봤고, 집의 대소사까지 다 정리하고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 남자. 방 안의 공기는 (적어도 내게는) 무겁다기보다는 차라리 평온하게 느껴진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 이야기가 내게 깊이 각인 되었을까. 아히도벨이 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떠난 시점은, 압살롬이 다윗성 점령에 성공했을 때. 아히도벨은 자신 편의 군사력이 가장 왕성한 그 때, 압살롬의 필패를 미리 <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요즘 내가 <내 끝>에 자주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4. 열왕기상 22장에는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미가야 예언자 사이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크게 두 번>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두 번 놀라기를 바란다.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고 믿는다). 먼저 상황 설명을 하면: 아합 왕은 미가야 예언자를 싫어했다. 이유는, 늘 그에 대해 <안 좋은 예언>만 해서 그렇다. 지금 전쟁을 막 시작하려는 왕이 미가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나는 속으로) 늘 안 좋은 예언만 한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예언을 하겠지, 라고 나는 합리적인 예상을 했다. 웬걸, 15절에서 미가야는 "올라가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라는 축복의 예언을 한다! (여기가, 나의 첫번 째 놀람) 그런데 이어지는 왕의 대답은 방금 전 예언만큼이나 의외였고 나는 두번 째로 놀랐다. 왕이 한 말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다. "너 왜 지금 진실을 말하지 않냐?" 왕은 "역정"(공동번역)을 낸다.(당황한 나는) 15절의 단어 하나 하나에 주목하며 서너 번을 읽었지만 <역정을 낼만한 건덕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번뜩 깨달았다. 미가야 예언자는 15절을 <조롱하듯이> 말했던 것이다! 아합 왕은, 그 예언(이 조롱이라는 것)을 제대로 읽어냈다. (그랬기에 그는 미가야를 옥에 가둔다). 나는 몹시 흥분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낭독하거나 암송할 때, 낭독자나 암송자는, (성경에) 조롱하듯이 읽으시오 라는 지문(地文) 없어도, 이 부분을 조롱하듯이 읽거나 암송했겠구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이 사실이 너무너무 신기했다! ) "주님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15절)"라고 <아무리 분명하게> 성경에 쓰여 있더라도, (그리고) 이 부분은 조롱입니다, 라는 지문이 없더라도, 우리는 기존 문자를 읽을 때와는 <다른 톤>으로 해당 본문을 읽어내야 할 경우가 있는 거구나! 성경은, 우리가 당연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고 있구나! (나 여기서 괜히 깊은 감동 받음. 흑흑). 혹시, 신약에서도, 내가 지금 읽는 톤이 아닌 다른 톤으로 읽어주길 기다리는 구절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그 구절들은 어디일까. 5. 예수님은 구약이 "자기에 관해" 쓴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눅 24:27) 구약의 역사와 이야기는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힐끗) 그 연결점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모두 내가 보기에는 '시작은 좋았으나 끝에 가서는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역사라는 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12:7)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백성이 정신 차리고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나 이스라엘을 원수에게 아무리 <넘겨 주어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들을 <넘겨 주신다>. 이렇게 <백성을 넘겨주는> 구약은 <아들을 넘겨주는> 신약과 이어지고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엠마오 가던 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다시 보니, 여기서도 <넘겨 주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0). 2021.9.25.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신동주 <서플먼트> 1) 이 글의 초반부에 언급한 <문학> 관련 이야기는 로버트 알터의 『성서의 이야기 기술』 (원제: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 39쪽에 등장한다. “성서도 문학[이라고] 본다면, 문학적 분석의 틀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 모든 다른 접근법은 (...) 성서 이야기가 지닌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영적인 교훈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문학적 재미만은 놓치지 말자. 이게 내 가이드라인이었음. 내가 문학적 재미를 놓친다면, 계시의 통로로 구태여 문학을 선택했던 성경 저자들이 몹시 서운해할 것 같았음. 2) 예레미야서를 읽다보니, 적혀 있는 문자를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른 톤>으로 읽어내야 할 상황이 그 어떤 책보다 자주,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음. 예를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쳤다" (15:6)는 어떤 톤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지문(地文)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거 같음. 당신의 지문이 무엇일지 궁금함.

2021년 9월 22일

45세 시절의 조용기 목사 설교(1981.2.25. '겉옷을 벗어 버리고' )를 듣고.

1. 한 명의 목사가 세상을 떴다. 향년 86. 유튜브에는 '조용기 목사 45세 때 설교' 라는 동영상이 떴고 나는 한번 끝까지 들어보았다. 나보다 어린 나이의 한 중년 사내가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었다. 한번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적은 있었으나 (설교 제목이 '겉옷을 벗어버리고'였고, 조목사는 설교 도중 양복 웃도리를 벗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거기서 웃었다), 내 고개는 설교 내내 주로 아래 위가 아닌 좌우로 흔들렸다. 살면서 내가 그에 대해서 꽤 진지하게 숙고했던 적이 <두 번> 있다. 그리고 두 개의 <결론>을 내렸다. 오늘 (대단치 않은, 개인적인) 그 두 결론을 나누고자 한다. 2. 2002년 월드컵 직후였던 것 같다. 교회에서 보내온 그의 설교를 편집하고 있었다. (피디들은, 교회에서 설교 파일을 보내주면, 규정된 방송 시간을 초과하는 분량이나, 방송법 법에 저촉되는 내용 등을 편집해서 잘라내고 내보낸다). 설교 중에 대략 이런 말이 등장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한다).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그런 성장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그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람을 만나더라도 규모가 되는 교회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제 후배 목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교인 수가 적은 목사들 말고, 어느 정도 교회 규모가 되는 목사 동료들과 어울려라." (설교에서는 교인 숫자까지 말했으나, 그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적지 않음). 3.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멘붕에 빠져 편집기를 멈췄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질문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게 맞나?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 그러나 하나님 판단은 내 판단과 다르니, 내가 그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구원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다음 한 가지는 비록 신 앞이지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적인가?"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신 앞에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그(의 설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후, 누군가 내게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구원 여부에 대해선 제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20여년이 흘러도 내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4. 이제, 두 번째 이야기. 다들 잘 알다시피,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요한3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 한번은, 그동안 내가 공부한 신학을 근거로 해서 그의 삼박자 구원을 한번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비평'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함). 평신도로서 그간 신학책을 읽으며 배운 것을, 삼박자 구원론을 살피는 데 <적용>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확인하고 거기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신학책에서 강조하는 첫번 째 원칙이었다. 시(시편)를 읽을 때는 시로 읽어야 하고, 묵시(계시록)를 읽을 때는 묵시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한3서는 편지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 그렇기에, 요한3서는 편지로, 편지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이 편지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을 편지로, 편지처럼, 읽거나 해석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5. 그럼 이 편지에서 삼박자 구원론의 근간이 되는 센텐스는 어디에서 등장할까? 놀랍게도 그 구절은 곧바로 2절에 나온다. 즉, '누구에게(1절)' 바로 다음에 나온다. 대개의 편지에선, 우리가 <의례적인 인사>라고 일컫는 문장이 <그 위치>에 등장한다. 이제, 작은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정말 전형적인 <인사>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조카야), 네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너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개역개정과 현대인의 성경을 혼합). 6. 나는 요한이 상기 편지를,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을 조기 은퇴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삼겹살 고깃집을 개업하는 성도에게 (지금) 쓰고 있다면, 2절은 아마 이런 모습을 띠지 않았을까 싶다 : " 사랑하는 자여 (혹은 사랑하는 사장님), 사장님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이번 고깃집 완전 대박나고, 사모님과 두 분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인사에는 좀 오버하는, 과장된 축복 멘트가 들어가도 괜찮다. '대박' '돈벼락' 같은 말이 들어가도 괜찮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원래 인사가 그런 것이다. 다들 감안해서 듣는다.)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의) 문제는, 어느 정도는 <흘려 듣고> 마음만 받아야 하는 인사말을 <진지 빨고> 들으면서, 자신의 신학을 그런 (한갓) 인사말 위에 세웠다는 데 있다. 그러한 <진지 빤 신학>에서는 이제 '대박'은 진정한 믿음의 표징,증거,의무가 된다. (대박과 십자가를 연결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결론을 정리하면: 인사말은, 듣고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본격적인 신학을 세우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다른 말씀, 다른 심오한 말씀들 많잖아! 왜 66권 수많은 말씀 중에서 하필 거기야!) 2021.9.20. 신동주

2021년 9월 7일

<스토커>(Stalker ,1979 )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를 보고.

1. 영화 두 편을 봤다. 둘 모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1932~1986)의 영화였다. 인터넷 서점에선 DVD로도 판매하고 있지만 (이 말은, 한글 자막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기에 유튜브로 봤다. (이 말은, 러시아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봤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 영화 모두 런닝 타임이 3시간). 나는 영어 이해가 빠르지 않기에 대사 하나 등장할 때마다 포즈 버튼을 누르고는 (모르는 단어 영어 사전에서 찾고)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이 말은, 한 영화당 내가 포즈 버튼을 누른 횟수가 최소 백 번은 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건 영화 감상이 아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음. 인정.) 영화 감상이 아니었어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래 그 이유와 결과를 간단히 적는다. (내 영화평이 늘 그렇듯이 본문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 등장 않는다. 각주에는 나온다). 2. <스토커> (Stalker) / 1979 2019년 5월28일 화요일 오후 6시, 나는 회사 업무가 종료되는 순간,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 되는 고려대 베리타스 포럼에 접속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강연 주제는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였고, 남자 한 명이 왼쪽에 서서 동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 잊혀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강연 초반에 소개한 영화 한 편이었다. 스미스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를 소개했다 : "<스토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세 사람이 어딘가로 갑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은,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줍니다. 누군가 입으로 말하는 바램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죠. 문제는, 그 세 사람이, 그 방 앞에 도착해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정말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3. 2년 전에 들은 이 짧은 영화 줄거리는 이상하게 듣는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입을 통해, 페북을 통해, 경건해지고 싶습니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기고 있습니다, 비아에서 나온 『사막의 지혜』를 읽고 있습니다, 참 멋진 말들을 많이도 해오고 있는데, 막상 그런 나는, 내 입술의, 내 페북의 갈망을 현실화 시켜준다는 그 방, 더 룸(the Room)에 <들어가길> 원할까? 페북에 그렇게 종교와 경건에 대한 포스팅 많이 하는 나이지만, 일단 <지금>은 못 들어간다. (누가 뒤에서 실수로 밀까봐 두려울 정도다). 나 또한 내 깊이 내재한 갈망이 무엇인지 미리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의자에 앉자, 내 앞에, 벌거벗은 남녀 몸뚱아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적거리며 꿈틀대는 세상이 영원히 펼쳐진다면? 내가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어 영원히 꿈틀대(야만 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확실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정욕을 극복하는데 혹시 고행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수도사처럼, 그래서 자기 등 채찍으로 밤마다 쳤듯이, 나는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라는 <고행>을 계속했다. 마치 이 고행 통해 내 갈망 정화되기라도 하듯이. (맞다. '영화 감상'이라 불릴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행의 효과는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속 세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갔을까,에 대한 답변은 생략. 4.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 1966 이십 여년 전, 라디오 방송사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시절, 녹음기 하나 들고 서울 전 지역을 돌아다니던 시절, 내 지갑 속에는 내가 볼펜으로 쓴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한 말이었는데 힘들 때면 꺼내 읽었다. "영화 감독으로 산다는 건 레드카펫 위를 걷고 카메라 플래쉬 받으며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감독으로 사는 건, 촬영 장비를 지고 비오는 새벽 집을 나서는 것이다." 화질 안 좋은 VHS 비디오로 그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본 건 그 무렵이었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삼위일체','블라디미르의 성모' 같은 이콘(icon)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15세기 러시아 화가이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거세게 불던 바람, 무너진 성당 벽에 기대선 남자의 긴장한 얼굴 표정은 또렷이 기억난다. 40대와 50대를 사는 동안 문득문득 흑백 영화 속 그 <거친 바람>이 떠올랐고, 얼마 전 영화평론가 C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중, 그 거친 바람을 <다시 맞고> 싶어졌다. 내 삶의 쭉정이를 다 날려보내고, 그리고 남는 내 삶의 알곡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남을까).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유튜브를 통해 부는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다시 불기를 (역시) 백 번 정도했다. (자막 ㅠㅠ) 런닝 타임 3시간 동안 안드레이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안드레이가 붓을 쥐고 있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다 보고나니 그건 결점이 아니었다. 2021.9.6. 신동주 서플먼트 (*스포일러 등장) 1)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보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원작이 있는 경우 무조건 원작부터 본다, 는 내 오래된 원칙 지키기 위해 SF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 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 (두 형제는 소비에트 시대 작가로서 원작은 1972년에 출간). 출판사 소개문을 발췌, 인용하자면 : " 『노변의 피크닉』은 외계 생명체나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을 다루는 ‘퍼스트 콘택트’ 유의 소설에 속하"며, "불법적으로 ‘구역’(the Zone)에 숨어들어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물체들을 찾아내고, 그걸 팔아 살아가는 ‘스토커’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와 비슷한 동기를 갖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장편 소설에 <그곳은 우리의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라는 식의 문장이 단 일 회만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음.(현재 미국에 와 있어서 소설 속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 못하는 것을 양해 구함). 소설 속 그 한 줄의 문장이, <스토커>에서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 더불어, 이 소설을 통해 '스토커'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좇아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잠입자,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됨. 소설과 영화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임. 2) <스토커>의 주인공 세 사람(스토커, 교수, 작가)은 두려워서 결국 '더 룸'에 들어가지 못함. 세 시간 내내 세 사람 꽁무니 졸졸 따라갔던 <피디> 한 명도 그 방 문턱에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남. (도대체 인간 중에 누가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이런 생각이 듦.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방에 들어간 거 아님? 너무 커서 그렇지, 그 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님? 왜냐하면, 각자가 갈망을 뿌린대로 거두는 모습을 이 방 안에서 매일 목도하고 있으니. 만델라. 이명박. 트럼프. 그레타 툰베리. 윤석열. 신동주...열매가 맺히는 속도만 다르지, 그 방과 이 세상은, 어쩌면 같은 공간일 듯. 그래서 결론: 방 안으로의 진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 3)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열기구가 추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총 9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짐. 그 중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세 개만 아주 짧게 소개하면 : (a) 젊은 청년이 영주를 위해서 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맞아 죽을 수 있음. 드디어 종을 치던 날, 몇 년째 입을 닫고 묵언수행해 오던 안드레이가 입을 열고는... (b) 타타르족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을 폐허로 만듦. 끔찍함.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름).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까지 들어와 사람들을 도륙하고, 교회의 보물을 찾겠다고 끓는 물을 사람의 입에 부음. 그런 행동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함. 장수로 보이는 듯한 이가 말을 탄 채로 성당 벽을 바라보며 묻는다. "저기에 누워 있는 아기는 누군가?" " 예수입니다" "아기 옆에 있는 여자는?" "동정녀 마리아 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면 동정녀가 아니지" 성당을 불태우고 타타르족이 떠난다. 이제 안드레이는 벽에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 누군가에게 아무런 영향 미치지 못한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화가는, 이제 <어떻게> 그려야 할까. 아니, <그려야 할까>. (c)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초반부에 나옴. 안드레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키릴이, 성상화(聖像畫)의 대가 테오판 그릭을 만나는 중. "나와 함께 일해주겠나?"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요. 제 공동체와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저를 지명해주십시오" (당시 안드레이가 더 인정 받고 있던 상황). "그러지". 얼마 뒤, 테오판 그릭이 보낸 전령이 수사들이 다 모인 앞에서 테오판의 후계자를 발표한다. "안드레이!"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의 키릴. "아, 머리가 빠개지는 거 같군". 전날 밤 술을 잔뜩 마신 듯한 전령은 말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함. 난 이 부분을 여러번 돌려봤는데, 만약, 테오판은 키릴을 생각했으나 숙취에 시달리던 전령이 이름을 착각한 것이라면? 이 도입부가 참으로 매혹적). 4) 실존 인물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실제 그린 성상화(聖像畫, icon)들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 내게는 성상화들을 <즐겨보고> 싶은 로망이 줄곧 있어왔음. 이콘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내가 짐작하기론) 중세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중세인의 태도가 내 삶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근현대인인 내게는 그것이 결여돼 있는 듯. C.S. 루이스는 『폐기된 이미지 - 중세 세계관과 문학에 관하여』 (C.S.루이스 지음, 홍종락 번역, 비아토르)에서 중세인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는 (...)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들은 무엇보다 "올려다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함. 누군가를,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걸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영락없는 근대인인 나는, 어쩌면 이콘마저도 내려다 보고 있었을 수도.

2021년 8월 23일

『부서진 사람』 (피터 맘슨 지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읽고.

1. 나는 옛날부터 다음 두 곳에 <들어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 오히려 반감이 있었다. 현실로부터 도망한다는 생각, 현실과 당당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브루더호프라는 기독교 공동체 안의 '리더십'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사람』이란 책을 내가 <단숨에> 다 읽은 것은 내게는 좀 사건이었다.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과정 중에 발견한 (거의 TMI에 가까울 수도 있는) 소소한 일들을 서너 개 나열해보고자 한다. 2. 나는 책을 쥐면 제일 먼저 제사(題辭, epigraph)부터 읽는 습관이 있기에 이 책을 쥐고 제일 먼저 한 일도 제사를 확인하는 거였다. (제사가 없는 책도 많이 만나는데 그럴 때면 난 내심 몹시 실망한다. 얼마 전에 읽은 제사 하나도 참 인상적이었다. 『창세기를 만나다』(로널드 헨델 지음,비아)에 나오는 제사 :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 ). 『부서진 사람』 에는 반갑게도 제사가 있었다. 이 제사를 읽는 순간, 난 내가 이 책을 완독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은 이렇다. 상처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될까? 천사도 어쩔 수 없는, 가련하고 실수투성이인 이 땅의 자녀들을 깨우칠 자는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사랑의 군영에는 오직 상처 입은 병사만이 복무할 수 있으니. - 손턴 와일더, 「물을 휘저은 천사」 에서. 3. 서문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비록 아놀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을 당했지만". 지난 가을에 <내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아놀드란 사람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서문을 읽는데 아놀드가 당한 일뿐 아니라 아놀드라는 사람 자체도 궁금해졌다. 서문의 승리.) 마지막에 서문을 쓴 이의 이름이 나왔다. 유진 피터슨. (역시!) 4. 점점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나는 책 표지를 다시 살폈다. 부서진 사람,이라는 책 제목 위에 영어로 원제가 적혀 있었다. Homage to a Broken Man. 호미지가 뭐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이 단어의 발음은 오마주,였다. 평소 자주 쓰던 오마주라는 단어에는 에이취(H)가 붙는구나! (완전 몰랐다). (어서 빨리 나도 "Homage to C.S.루이스"라고 할 무언가를 내놓아야할텐데 ㅠㅠ). 5. 아껴가며 읽었다. 내게 제일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두개만 소개하면: 하나. 공동체 생활은 한다는 것은,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하이너[아놀드]가 술을 권하자 더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이 되도록 맥주 한 잔 입에 안 대고 살았습니다." 더그는 커피조차 양심에 꺼려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p.426). 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상담하러 아놀드를 찾았다. 나는 아놀드가 한 대답 중에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멤버가 된 제니스가 언젠가 하이너[아놀드]에게 찾아와 자신에게 별 재주가 없다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제가 공동체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자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보태는 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산타클로스처럼 되길 고집하는군요" > (p.434). 이 구절을 읽는데 나는 한 방 먹은 거 같아서 멍해졌다. 실제 다음 문장도 이렇게 이어진다. "제니스는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했다". 2021.8.23. 신동주

2021년 5월 7일

『창세기와 만나다』 (로널드 헨델 지음,박영희 옮김, 비아 VIA)를 구매하고.

1. 기독교 출판사 <비아>에서 제작하는 유튜브 채널 이름은 '비아 채널'(Via Channel)이다. 비아 채널에서는 언박싱을 정기적으로 하는데 이 비아 언박싱은 내가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언박싱이다. 비아 언박싱은 항상 세 파트로 이뤄진다. 1) 책의 외양 소개. 2) 책의 내용 소개. 3) 편집장이 소개하는 이 책의 한 방. 나는 이렇게 『창세기와 만나다』 가 비아에서 언박싱 되는 순간을 지켜보았고 결심했다. "읽어야만 해". 화면에서만 보았던 그 책이 지금 내 손에 쥐어져있다. 2. 책 제일 앞의 헌정사를 보았다 : "친구, 동료이자 히브리 성서 연구자인 밥 알터(Bob Alter)에게". 아니, 알터라면, 『성서의 이야기 기술』을 쓴 로버트 알터아닌가! 나의 '근대적 편협성'을 황홀하게 산산조각 내주었던 학자! 페이지를 한 장 넘기자 이제 이런 제사(題辭)가 눈에 들어온다.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헌정사와 제사에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나는 잠시 책을 덮고...(여기까지) 2021.5.7. 신동주 <서플먼트> 이 책은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야심차게 펴내고 있는 '위대한 종교 서적들의 생애' 시리즈 중 '창세기 편'이다. 창세기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창세기가 인류사에서 어떠한 식으로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인류 지성의 변화가 창세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학문적으로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드문 창세기의 영향사, 해석사, 지성사 저작이다. (이상, 출판사의 소개글 중에서).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을 읽느라 시간이 안 나는 가운데서도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비아 채널에서 제공하는) '슬기로운 독서 생활'이라는 영상 때문이었다. 마침 출연자들이 『창세기와 만나다』에 대해 나누고 있었는데 한 여성 출연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저자의 말은, 창세기는 독자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 라는 말이었어요 ". 아양 떨지 않는 고대 문헌! 그 거침, 그 당당함을, 직접 빨리 대면해 보고 싶었다. 이제 만나러 간다.

2021년 5월 5일

미스터 션샤인

"쉬슬러 피오렌자의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순종'이란 용어가 없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p.431)라는 문장을 읽는데 "이 드라마에는 키스신이 없다"(나무위키, <미스터 션샤인>)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2021년 4월 22일

『찔림』 (신동필 지음, 시커뮤니케이션 , 개정판 2021 )의 저자에 대해서

"당신을 위로하지 않는 책 『찔림』 "의 저자 이름(신동필)이 제 이름(신동주)과 비슷한 이유는 제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선친께서 장남은 '동방의 주인'이 되라고, 차남은 '동방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다 -.- 제 동생은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참 재미없는 세상』 (홍성사,2016) / 『찔림』 (시커뮤니케이션 , 2017 ). 이번에 『찔림』의 개정판(2021)이 새로 나왔습니다. 많은 구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제9계명

며칠 전, 회사 동료 A가 내게 말했다. "미국에 있는 B교수님과 줌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끝나고 제게 피디님 안부를 물으셨어요". 예의를 중시하는 신 모 피디, 멀리서도 기억하고 안부 물어주심에 대해 감사하다는 짧은 메일을 B교수님에게 보냄. 아주 짧게 내가 요즘 하는 일을 썼음. "틈틈이, 새로운 신학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하기 위해 신학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케빈 밴후저의 <제일신학>을 읽었는데, 연구자들에게 제9계명(거짓 증거하지 말라)은, 다른 이의 주장과 글을, 내 입맛대로 변형시키지 않고, 비판하기 쉬운 측면만 골라 읽지 않고, 일단 그의 논지 전체를 제대로 읽어주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이 제게 참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책을 읽으며 그러지 못한 때가 자주 있었거든요." 이 메일에 대해 B 교수님이 답신을 보내주심. 한 가지 부탁을 해오심. 밴후저의 견해를 상기시켜 주어서 고맙다, 책을 한국에 두고 와서 미국에 이 책이 없어서 그런데, 상기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줄 수 있는지, 라고. 나는 기뻤음. 그래서 오늘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림. 사진 찍은 그 대목을 그대로 적어보면: "어떤 저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읽는 자의 의견들과 생각들을 본문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는 대신에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고 행한 바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황금률과 제9계명,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의 함의라고 본다. " - 『제일신학』 (케빈 밴후저 지음, IVP), p.55-56

2021년 4월 18일

< Sports Wit > (Lee Green 지음, 출판사 확인 불가)을 40년 전에 사서 읽고.

1. 이 책은, 내가 사서 지금까지 갖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온갖> 스포츠에 관련된 <온갖> 조크, 명언,경구들을 모아놓았다. 40년 전에 이 책에서, 내가 지금도 항상 마음에 떠올리는 경구 하나를 만났다.

2.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대만 타이페이에 있는 미국 학교에 들어갔고 영어를 못했다. 미국 친구가 없었던 나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던 헌책방에서 산 (살인과 애정행각이 난무하는) 3류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소설을 읽으며 영어 공부를 했고 (그래서 그런지) 끝내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Lawrence Sanders라는 작가가 쓴 <The First Deadly Sin> , <The Second Deadly Sin> , <The Third Deadly Sin>을 읽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지금 내가 소개하는 책도 이곳에서 샀다.
3. 나는 스크린 골프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골프에 관한 경구들에는 많이 끌린다. (볼링에 관한 경구도 좋아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도 골프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Golf is mostly a game of failures." - Tommy Aaron (프로 골퍼). (*골프는 대부분 실패로 이루어진다. 실패한다는 것과 친해져야 한다). coaches & coaching (감독 & 코칭)이라는 항목도 있다. 내게는 다음 두 개가 참 인상적이었다. (1) "No coach ever won a game by what he knows : it's what his players have learned. - Amos Stagg (대학 미식축구팀 감독) (*설사 자기가 알고 있더라도, 선수들이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 (2) "A coach isn't as smart as they say he is when he wins, or as stupid when he loses." - Darrell Royal (텍사스 미식축구팀 감독) (* 경기에 이겼다고 해서 그 사람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경기에 진 사람 말이라고 다 쓸모 없는 것도 아니다).
4. 이제 <내가 만난 경구>를 소개하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혐오하는 '투우 경기' (bull-fighting)에 관한 경구이다. '용기'에 대한 것이라서 알파벳 C 항목('courage')에 들어가 있다. 누구의 말인지도 알려지지 않는 그 경구를 소개하면: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not scared is nothing.
And to not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is nothing.
But to fight a bull when you are scared, that is something.
- Anonymous
(의역을 해보면)
두려운 마음이 전혀 안 생기는 사람이 황소와 싸우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황소와의 싸움을 피한다면 (당연히) 이것 역시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있는데 황소와 싸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5. 나는 겁과 두려움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신학펀치 시즌1을 시작할 때도, 시즌2를 시작할 때도 이 말에서 힘을 얻었다. 아마 시즌3를 하게 된다면, 아마 그때도 이 말을 가장 많이 생각할 거 같다.

2021년 4월 8일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 (민영진 지음, 대한기독교서회)를 오래 전에 읽고.

1.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궁금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질문을 남겼다.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자 현 대한성서공회 번역자문위원인 민영진 목사가 답을 달았다. 그 중 대표적인 질문 49가지를 모아 만든 이 책을, 어느 날  손에 쥐게 되었다.

2. 책의 구성은 이런 식이다. 예를 들어 45번 질문을 보자. : "민영진 목사님께.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전서』라고도 하고, 『구약전서』 혹은 『신약전서』라고도 하는데, 『성경』이나 『구약』이나 『신약』 등 기독교의 경전과 관련된 이러한 이름들의 유래를 알고 싶어요. 이런 질문도 대답해 주실 거지요? 고맙습니다. 궁금이 올림. " 45번 질문에 대한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 "궁금이 님께, (...)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로마서,고린도전후서,야고보서라고 하지, 로마경,고린도전후경,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 답변은 훨씬 다양한 측면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여기서는 부득이하게 인상적인 한 문장만 소개). 

3.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하나를 위 질문과 답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필명>이다.  대부분의 질문자는 필명을 쓴다. 그리고 저자는 답변을 시작할 때 그 필명을 불러준다. 질문자가 김궁금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면, 답변은 김궁금 장로님께,로 시작한다. 게으름뱅이 올림, 게으름뱅이 님께. 열 받은 신자 드림, 열 받은 신자 님께. 이런 식이다. ( 참고로, 바로 전 질문자가 열 받은 이유는 누가복음 16장 1절~9절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다. "민영진 목사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 있습니다. 본문의 문장이나 구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진술된 내용 자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이 말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도 된다는 뜻입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이 '뇌물'과 다른 게 뭔가요? 열 받은 신자 드림." )  

4. 개인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질문들(과 답변들)을 먼저 읽었다. 그랬기에 <8번 질문>을 읽게 된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난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8번 질문은 이러했다. "목사님, 디모데전서 2:15에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저는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보다는 저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 제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아기는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은 우리 같은 석녀(石女)를 너무나도 괴롭힙니다. 석녀 올림."  나 역시 평소 읽을 때마다 좀 의아해 하던 구절이었기에, 나는 저자가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해 하며 답을 보기 위해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전체 답변은 몰랐지만 적어도 첫 문장이 어떻게 시작할지는 알았다. 석녀에게. 

5. 그리고 나는 틀렸다. <자매님께>. 답변은 그렇게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 순간 갑자기 내가 왜 그렇게 심하게 울기 시작했는지. 목젖이 뜨거워지고 가슴에서부터 딱딱한 울음 덩어리가 올라와 나는 꺽꺽대며 울었다. 그렇게 몇 분을 울었다. 필명을 그대로 부르던 분이, 그 여성에게만큼은, 이 책에서 지켜오던 원칙을 깨고, 석녀라고 부르지 않고 자매님이라고 불러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소개하는 도중에 석녀, 자매님 얘기만 하게 되면 나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될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매번 그랬다. 심지어 한번은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 책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내 눈에선 민망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로는 사람들 앞에서 이 책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아, 딱 두 번 더 꺼낸 일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연출하던 <새롭게하소서>에 민영진 목사님을 모셨을 때였다. 녹화전 대기실에서 민목사님께,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차분하게> 말하다가 자매님,에서 또 울고 말았다. 나머지 한 번은, 신학펀치 섭외를 위해 인천으로 사본학 전문가 M교수를 만나러 갔을 때였다. 그날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요즘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그 <울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2021.4.7.
신동주 


*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 수록된 질문들 중 일부는 (저자가 정기적으로 글을 싣고 있는) 성경연구 월간지 <햇순> 독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왔다. 공동체성서연구원(http://newsprout.org)을 방문하면 <햇순>이 나오는데  메뉴에서 '성서 난해구 해설'을 클릭하면 이 책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에는 실리지 않은 수백 편의 질문과 답변들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돼 있다.

2021년 3월 31일

『삐딱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쾌한 희망사전(Wishful Thinking: A Seeker's ABC ) 』 (프레드릭 뷰크너 지음, 복 있는 사람)을 읽고.

1. 이 책은 사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62개 단어를 고른 후 저자가 아주 개인적인 설명을 달았다. 'ㅂ' 항목을 찾아보면 저자의 이름인 '뷰크너'도 등재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뷰크너(Buechner)'.  내 이름이다. 뷰크너라고 발음한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바보스럽게 잘못 발음하면 마치 내가 바보인  것 같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잊어버리면 마치 내가 잊혀진 것 같다. 내가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듯이 내 이름에도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뭔가가 있다. 헬드라든가 메릴, 아니면 흘라바첵 같은 다른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일 내 이름이 달랐다면 나도 달라졌을 것이다. 내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상대방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나에 대한 영향력을 넘겨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이름을 부르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멈추고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말씀하신다. 그 후로 하나님은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다. (p.75)

2.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연출을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는 목사님 한 분을 뵈러 간 적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셨고 스탭들과 같이 갔다. 점심 초대였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드렸더니 목사님은 반가운 얼굴로  "어서와요, 박동주 피디". 그후 꽤 오랫동안 서운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엔 그 분의 그 실수가 인간에 대한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느껴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요즘은 그날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내 스스로 조금 부끄러워진다. 그 실수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인간적인 실수였을 뿐이다. 이제는 누군가 실수로 나를 신동추 혹은 신통주,라고 부르더라도 웃으며 <정확한 발음>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3. 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건 '역사'(History)이다. 저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 '역사' . 불교나 힌두교와는 달리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본을 좇아 역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역사를 매우 의미 있게 여기셔서 그것을 시작하셨고, 그 속에 들어오셨고, 언젠가 의미 있는 결말을 맺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견뎌 내야만 하는 부조리도 아니고 거부해야 하는 환상도 아니며 해탈해야 하는 영겁의 순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를 어딘가로 인도해 가기 위한 일련의 중대하고 반복될 수 없는 소중하고 유일한 순간들이다. 인류와 개인의 진정한 역사는 역사책이나 전기나 자서전에 수록된 정보와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역사는 영혼을 구원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역사는 자기 영혼이 위태로운 사람을 포함해 사람들 대다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일어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전환점은, 선거에 당선되거나 결혼식을 올린 날보다는 어떤 편지를 부치지 않기로 결정한 아침이나 눈이 소복이 쌓인 숲을 바라보던 오후일 수도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진정한 전환점은, 바퀴가 발명되거나 로마가 멸망한 날이 아니라 어느 유대인 부부에게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일 수 있다. (p.125)

4. 저자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비크너는 1926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작가로서의 이력을 쌓고자 뉴욕에 체류하던 중, 예수님은 신자의 고백과 눈물과 '큰 웃음' 가운데 신자의 마음에 즉위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했다".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글 1번에서 '뷰크너'로 표기 됐던 저자의 이름이 지금 글 4번에선 '비크너'로 바뀐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뷔크너’, ‘뷰크너’, ‘뷔히너’, ‘부크너’ 등 다양하게 불러왔는데 저자가 원하는 발음은 '비크너'이다. 위키피디아와 '프레드릭 비크너 페이지'(https://www.frederickbuechner.com )에도 '비크너'(pronounced BEEK-ner)로 소개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읽은 비크너의 책은  그의 설교문 37편을 모아놓은  『어둠 속의 비밀(Secrets in the Dark)』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 옮김, 포이에마)이었는데  - 방금 위에서 소개한 비크너의 회심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 소개문에 나온다 - 처음 읽으며 "이런 설교가 있을 수 있다니" 하며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도 북리뷰에서 비크너를 이렇게 소개했다. "비크너는 끝내 독자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 독자를 웃게 함으로써, 때로는 경악한 나머지 거의 기도하게끔 함으로써, 가장 좋을 때는 둘 다 하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 (비아)를 쓴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도 비크너를 언급하며 "단어의 힘을 망각한 나를 발견할 때, 나는 프레드릭 비크너를 읽는다"라고 말했다. 상투적인 설명과 설교에 지쳤다면 비크너 읽기를 추천한다. 비크너의 책에는 진부함이 없으니.

2021년 3월 15일

『성스러움의 의미 』(루돌프 오토 지음,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를 읽는 중에

제4장 '두려운 신비'에는 <The Inquirer >(July 14, 1923 )에 실린 글이 한 대목 등장한다.  O.Schreiner 이 쓴 『Thoughts on South Africa』라는 책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저자는, 키가 크고 힘세며 강인한 성격을 소유한, 말이 없는 보어인 한 사람이 말한 의미심장한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책을 쓰는] 저자는, 그[보어인]가 고작해야 자기 양과 가축들, 혹은 그가 잘 알고 있는 표범들의 습성 외에는 거의 어떤 심오한 얘기라고는 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 약 두 시간 가량이나 넓고 넓은 아프리카의 평원을 건너질러 간 후 그는 탈(Taal) 언어로 서서히 말했다. "한 가지 오랫동안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하셨을테니까요. 이런 들에 혼자 있을 때, 그리고 태양이 잡목들에 내리쬐고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인가가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너무나 너무나 작아지는 듯하며 다른 어떤 것은 너무나 커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작은 일들이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집니다".

2021년 3월 9일

잘잘법 Ep. 61을 시청하고.

1. 잘잘법 Ep. 61 '비기독교인들에게 인간이 죄인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에서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이 일종의 <사투리>가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교회 내부의 구성원들만 알아듣고, 교회 외부의 비기독인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가 되었다는 뜻이죠. 잘잘법 이번 편에서는 <죄인>이란 말의 의미를 비기독교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주고 있는데, 저는 <이런 작업>이 비기독인에게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기독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단지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는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돼'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요. 내가 믿는 바를, 내 이웃에게, 내 이웃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저는 제가 <설명하는 바>를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잘잘법의 <이번 작업>은,  우리 기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일' 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런 작업> 없이 너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왔습니다.  

 
2. C.S. 루이스도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가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평범한 이웃>에게 설명해 보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루이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죠. "예를 들어, [우리 같은 기독교인들은] 대속(Atonement)이나 성직(Orders)이나 영감(Inspiration)에 대해 자신이 [어느 정도 확립된] 특정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같은 부류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그 견해를 논하고 옹호합니다. 비판자들에게 답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여러 부분에서 다듬고, 모호한 부분을 명확하게 해주는 듯한 기발한 비유들을 고안하고, 다른 견해들과 비교하여 대강의 '위치'를 가늠해 보[다보면] 자신의 견해가 일류 사상들 사이에서 확고히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지적인 기계공이나, 진지한 호기심은 있지만 겉으로는 상당히 불경해 보이는 학생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려고 해보십시오. (식자들 사이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을) 유치한 질문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검술의 첫 번째 원칙조차 모르는 상대의 칼에 어이없이 꿰뚫린 능숙한 검객의 신세가 됩니다. 상대의 유치한 질문은 치명적인 한 방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장했던 내용을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견해를 철저히,끝까지,'완전히 끝장을 볼 때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견해를 포기하거나 , 아니면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참을성과 통상적인 노련함을 발휘하는데도 분별 있는(들을 마음이 있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한 가지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 C.S.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  제2부 '의사소통의 전제 조건' 중에서 ). 

2021년 3월 2일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를 읽으며

 "정보망이 낙후되어 형편없었던 고대에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들은 기발한 수를 많이 개발했다. 그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 시판(詩板)을 들 수 있다. 당나라 사람들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시장의 상점이나 명승고적,역참, 사원 등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벽을 골라 회칠을 한 뒤에 자신의 시를 벽 위에 쓰고, 나머지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벽은 유한하고 당나라 사람들의 시정(詩情)은 무한하여 벽이 금세 부족해졌다. 많은 지역에서 시인에게 나무 널빤지 하나를 제공하는 것으로 방식을 바꾸었고 (...) 이 작은 널빤지가 바로 시판이다. (...) 시판을 쓰는 데 신분의 제약도 없었고 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 한족이나 이민족, 남녀노소 모두 시판 앞에서는 평등했다. 그러나 뛰어난 작품은 필시 매우 드물고 열등한 시판이 매우 많아지자 누군가 나서서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행해야 했다. 유우석은 백제성을 떠날 때 시벽을 지나다가 엉망인 시가 무수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걸음을..." (여기까지)


"당나라 후기의 유명한 재상인 배도(裴度)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늦봄에 우연히 남쪽 정원을 노닐다 모란이 아직 피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난간에 기대어 유감을 금치 못했다. “내가 이 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니 슬프구나.” 그런데 이튿날 남쪽 정원에 한 무리의 모란이 먼저 피었다. 하인이 다급히 이 소식을 알리자 배도가 그 말을 듣고 마치 원진이 친한 친구인 백거이가 폄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의 반응처럼 “죽을병에 걸렸다 놀라 일어나 앉아” 기를 쓰고 나가서 모란을 감상했다. 배도는 활짝 핀 모란을 보며 깊은 위로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사흘 뒤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두 대목 모두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 에서. 

2021년 2월 26일

『예언자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천규 옮김, 비아 ) 를 읽으며

 책의 첫 쎈텐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학교에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장 칼뱅이 정착시킨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전통은 바로 기도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 책은, 이제는 은퇴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드렸던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니, 안 봐도 어떻게 했을지 뻔한 수업 시작 기도들을 책으로 냈다고?" 였다). 그리고 책을 폈다. 첫 기도는 이렇게 시작 됐다 : " 우리는 / 거룩하신 당신을 통제하기 위해 / (...) / 경건한 행위를 하고, 교리를 만들고 ... " .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가지 이유에서. (어떻게 이런 공중대표기도가 있을 수 있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했지?). 이 첫 기도문 끝에는 <구약학 수업, 1998.10.15>이라는 메모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밑에,  내가 <따라 읽으며 기도드린> 날짜를 적었다. <특집부에 와서, 2021.1.12>. 올해 들어 <작은 전통>을 하나 만들었다. 회사 오면 일 시작하기 전에 이 기도문을 한 편씩 읽는 것. 얼마전 내가 2월22에 읽은 기도는, 월터 브루그만이 1998년 1월8일 수업 중에 드린 <끝없이 추락할 때>라는 기도였다. 기도문을 읽고 내가 읽은 날짜를 적었다. <2021.2.22.월. 지옥같은 금,토,일을 보내고 와서> . 기도는 이렇다. "주님, 우리에게는 몰락이 익숙합니다 / 삶의 중심을 대적하며 우리 자신을 파괴합니다 / (...) / 주님, 우리의 중심이 되소서 /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 /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 ". 나는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를 읽을 때 '절망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바꿔 읽었다. 그래, 힘들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고통스럽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그런 과장은 거짓말이 될 테니까. 내가 용기만 낸다면 다시 일어설 여지는 항상 있는 것이니까.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 다시 주말을 맞는다. 퇴근길에 기도문을 챙겼다). 

2021년 2월 24일

『몸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지음, 두란노)을 읽는 중에

1. (인용)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장로교 목사 프레드 로저스가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로저스 아저씨네 동네>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로저스는 (...) 소품이나 첨단 장비를 별로 쓰지 않았다.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인상을 풍기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 그는 곧 유명해졌고 상도 많이 받으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 강연도 시작했다. 그가 강연마다 어김없이 넣는 순서가 있었는데 바로 청중에게 2분 동안 침묵하며 각자 자기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 그는 말했다. "매번 사람들이 [제 강연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 침묵의 시간입니다". (...) 한번은 백악관에서 열린 고위급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동 문제와 관련해 딱 8분 발언 시간을 얻었다. '짧디짧은 이 귀한 시간의 4분의 1을 꼭 침묵에 할애해야 할까?'.... " (그는 망설인다) (8분 중 2분 침묵은 오버일까?) (여기까지).  

 
2. 위 이야기는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필립 얀시가 쓴 글에서 발췌했는데 한 쎈텐스만 내가 임의로 순서를 바꾸었다. 책의 본 내용과는 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데도 참 인상적이어서 여러 차례 읽었다. 책의 부제는 '우리 몸에 새겨진 복음의 경이와 한 몸의 의미'이다. 통증, 외모, 얼굴, 피부, 촉각, 뼈, 근육, 피, 뇌, 세포 등에 얽힌 신비로운 과학적 사실들과 묵상을 담았다. 

2021년 2월 22일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의 제1장을 읽고.

1. 좋은 스테이크는 다 먹지 않고 한 입만 먹어봐도 알 수 있듯이,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은 제1장만 <씹었는데도> - 논문집이라서 말 그대로 <씹어야> 한다 - <일등급 한우>로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미국 신학자의 글은 한우에 비유하는 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보라! (ㅋㅋ)) 밴후저는 각 시대마다 철학에서는 중요한 핵심 질문이 있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고대에는, 실재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중요했는데 (예:  만물은 물로 돼 있다, 아니다, 공기다, 아니다, 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만물이 '존재'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는데 여전히 사용하는 많은 범주인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실존(existence) 등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즉, 형이상학이] 고대 세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 '제1철학(first philosophy)'이었다. 우리는 한 시대의 제1철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함으로써 그 시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 12세기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업과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중세의 많은 신학자가 형이상학을, 혹은 그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1신학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p.28-29). 지적 허세 있는 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축약본까지 사서 읽었지만 아퀴나스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에 대해 파고들었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2. 고대와 중세를 다뤘으니 그럼 이제 자연스럽게 <근대의 제1철학은 무엇이었나>를 묻게 되는데, 밴후저에 따르면 그것은 <인식론>이다. "이성의 시대에 뜨거운 쟁점은 인식의 본성과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알 수 있을까? 나의 신념이 단순한 견해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 (p.29)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 <절차>이다. "어떤 주장들을 정당화하는 것은 더 이상 권위적인 자료들에 대한 호소"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게 된 객관적인 절차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의 우선 순위상의 이러한 변화는 르네 데카르트의 고전의 긴 제목전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제목은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여 학문 연구에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담론 』이다 (...) 이 점에 있어서는 자연과학의 성공이 전형적(paradigmatic)이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방법은 다른 학문 분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 근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용(matter)에 대한 방법의 우위이며, 형이상학에 대한 인식론의 우위이다". 반 하비(Van Harvey)는 그의 책 『역사가와 믿는 자(The Historian and the Believer)』에서 충분한 증거를 토대로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믿는 것은 사실상 <부도덕>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더니티를 변호한다. 하비는 우선적으로 역사가들에 대해 생각하지만, 동일한 요구 사항들이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 또는 근대 시대의 다른 누구에게나 적용되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약 200년이 지난 후에도 많은 학문 종사자가 여전히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비평적 물음>들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 (p.29-30).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성경에 대한 <비평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나는 영락없는 <근대의 아들>이었다.    

3. 이어서 밴후저는 근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제1신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힌다. 그 내용이 이 제1장의 핵심을 이루지만 <개인 사정으로> 생략한다. (ㅋㅋ)  대신, 내 평생 잊지 못할 1장 결론부의 한 대목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밴후저는 우리가 <신학적 해석학> 작업을 수행하는 목적이 말씀을 따라 "살아감의 문제, 말씀을 행하는 문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 " 만일 우리가 본문을 따라서 (...) 살아가지도 않는다면, 성경 권위에 대한 우리의 교리들도 쓸모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값싼 무오론'과 더불어 남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쓴다. 값싼 무오론과 더불어 남게 될 것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누군가> 앞에서 내밀 수 있는 게 <값싼 무오론>과 <값싼 은혜>뿐이라면....  


<서플먼트> 

1) 내가 올리는 책 서평의 대부분은 일반 평신도를 위한 것인데, 이 책만큼은 <난이도>가 좀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밴후저가 이전에 쓴 12개의 논문을 모아서 출간한 논문집인데, 1장 중간중간에 화행이론(speech act theory)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했고, 낌새를 보니 앞으로는 더 자주 나올 것 같다. 평소 독서할 때 내가 제일 어려워하던 게 화행이론이었는데, 하나 이번에는 찬찬히 읽었더니 전체 요지를 파악하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밴후저 덕분인 것 같다. 밴후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렇기에 설명이 난해하지 않다. (모든 저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려운 개념이 나올 때 마다 꼼꼼한 역주를 달아주신 역자에게도 감사한다.  

2) 밴후저가 『제일신학』 제1장에서 제일 길게 인용한 글은 놀랍게도, 반갑게도,  C.S.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에 나오는 '공구실에서 한 생각'(Meditation in a Toolshed)이다. 밴후저에 따르면 루이스의 이 글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간략한 비유인데, 그 비유에서 루이스는 어두운 작업실에 들어가는 간단한 경험을 회상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세상을 전복시키는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루이스의 [이] 간략한 내러티브는 <근대라는 성전>에서 지식을 교환해 주는 자들의 <가판대>를 뒤엎는다. (p.30)

2021년 2월 4일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벤 위더링턴 3세 지음, 이레서원)을 읽고

1.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1세기 고린도의 사회적, 문화적 정황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하는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흥미로웠던  대목 한 군데를 소개하면 이렇다. (총독 갈리오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열리는 만찬회에 참석하려고 신전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신전 입구, 첫 번째 계단 옆에는 새 석판이 세워져 있고, 아스클레피오스 신과 이 신의 상징인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만찬회에 늦은 갈리오는 급히 계단을 올라 신전으로 들어가면서 테라코타  봉헌물이 놓이 방을 지나갔다. 이 방에는 순례자들이 치유를 위한 봉헌과 기도 용도로 바친 여러 부위의 인체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테라코타는 점토로 형상을 빚은 후 구워서 만든 모형인데,  당시에는 병이 난 부위를 테라코타로 만들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치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 여기까지 읽은 내 머릿속에선 <음란마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안 좋아진 부위? 그럼, 그 봉헌 모형들 가운데는 <그 모형>도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일까...흑흑흑" .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갈리오는 팔과 다리 모형이 눈에 익은 모습으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은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가장 흔한 인체 부위 복제품인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는 늘 그랬듯 그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  휴. 나만 쓰레기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트리클리니움, 또는 식당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뒷편에 있었는데, 그런 연회에서 늘 그러듯 크게 떠드는 소리와 흥청거리며 노는 소리가 갈리오의 귀에 들려왔다."     


2. 이제 내 마음에 들었던 점 두 개와 아쉬웠던 점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맺음 ㅋㅋ) 나는 개인적으로 제5장이 좋았는데 그 이유는 <악인>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악인을 제대로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 악인에 대한 묘사가 <두껍지 않고 얇으면>  <이야기>와 <주인공> 모두가 살지 못하고 죽는다. 5장의 악인 묘사는 나름 두꺼웠다. (또 하나의 TMI. 5장에는 '노멩라토르'(nomenclator)라는, 기억력이 나쁜 주인을 위해 "사람 이름을 비롯해 기타 시시콜콜한 일들을 주인 대신 기억하기를 전담하는 노예"가 등장한다. 흥미로워라! )  이 책에서 또 하나 맘에 들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탄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인데 이 책 첫 문단에 등장한다 " 선장은 동틀 무렵 잡은 어린 바닷새로 아침 제사를 드렸다. " 내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을 응시하고 있을 그 시각에, 한 이교도가 차가운 바닷바람 맞으며 어둠 속에서 신에게 제물을 드리고 있다. <전통>과 <형식>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신성한> 형식을 보유하고 있던 시대가 부럽다. (전통 없이 사는 개신교인과 전통 속에서 사는 이교도. 누가 더 자주 행복을 체험할까. 지금 구원 여부를 묻고 있는 게 아님. 피조물의 <위치>를 깨우쳐 주는 <자세>와 <행위>와 <형식> 속에서 피조물이 누리는 행복과 기쁨을 말하는 중.)  다음 센텐스는 이렇게 이어진다. "어린 바닷새가 잡히다니 길조였다." 그 새벽의 상기된 기쁨이 상상된다.  

3. 이제 흡족하지 못했던 부분을 말할 차례가 왔다. 바울이 등장하거나 그가 말을 할 때마다 - 신학서적 독자 입장에선 수용할만 했으나 -  문학서적 독자 입장에선 아쉬움이 있었다. 성경에서 수백 번 읽었기에 거의 외우고 있는 <성경 구절들>이 그대로 바울이 말하는 <대사>로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됐다. 그런데 이게 꼭 저자의 무능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소설을 읽다보면 저자가 사건을 전개하고 대화를 풀어나가는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 저자는, 필요하다면, 19금적 묘사도 능히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럼, <재미있는 구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포기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내가 나중에 1세기 고린도의 기독교를 증언하는 이런 식의 책을 써야한다면, 그때 나는, 이 저자와 달리, 소설적 재미를 살리기 위해 <바울이란 카드>를 버리는 전략을 취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손실>을 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되는 아주 흥미로운 질문들이라고 믿는다. 

2021년 1월 15일

나의 아저씨

나랑 친한 조연출 한 명이 <나의 아저씨>를 다봤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누가 <나의 아저씨>를 다봤다고 하면, 그가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다읽었다고 하는 것만큼 반갑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것은 <위치>였다. 기성세대로서의 위치, 남편으로서의 위치. 거기서 벗어남은, 처음엔 쾌락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고통이라는 것. 그 위치를 지키고 있을 때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사실 평안이 가장 큰 쾌락이라는 것.

<순전한 아저씨>가 되고 싶다 : )

(2020년 9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