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8일
300년 전의 나
2021년 10월 13일
『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존 바턴 지음, 비아)
2021년 10월 11일
『성서, 역사와 만나다』(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비아 VIA)를 읽고.
2021년 9월 26일
안식년 휴가 중 몇 권의 구약 성경을 읽고.
2021년 9월 22일
45세 시절의 조용기 목사 설교(1981.2.25. '겉옷을 벗어 버리고' )를 듣고.
2021년 9월 7일
<스토커>(Stalker ,1979 )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를 보고.
2021년 8월 23일
『부서진 사람』 (피터 맘슨 지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읽고.
2021년 5월 7일
『창세기와 만나다』 (로널드 헨델 지음,박영희 옮김, 비아 VIA)를 구매하고.
2021년 5월 5일
미스터 션샤인
2021년 4월 22일
『찔림』 (신동필 지음, 시커뮤니케이션 , 개정판 2021 )의 저자에 대해서
제9계명
2021년 4월 18일
< Sports Wit > (Lee Green 지음, 출판사 확인 불가)을 40년 전에 사서 읽고.
1. 이 책은, 내가 사서 지금까지 갖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온갖> 스포츠에 관련된 <온갖> 조크, 명언,경구들을 모아놓았다. 40년 전에 이 책에서, 내가 지금도 항상 마음에 떠올리는 경구 하나를 만났다.
2021년 4월 8일
『성경을 공부할 수록 궁금한 49가지 바이블 FAQ』 (민영진 지음, 대한기독교서회)를 오래 전에 읽고.
1.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궁금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질문을 남겼다.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이자 현 대한성서공회 번역자문위원인 민영진 목사가 답을 달았다. 그 중 대표적인 질문 49가지를 모아 만든 이 책을, 어느 날 손에 쥐게 되었다.
2021년 3월 31일
『삐딱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쾌한 희망사전(Wishful Thinking: A Seeker's ABC ) 』 (프레드릭 뷰크너 지음, 복 있는 사람)을 읽고.
1. 이 책은 사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62개 단어를 고른 후 저자가 아주 개인적인 설명을 달았다. 'ㅂ' 항목을 찾아보면 저자의 이름인 '뷰크너'도 등재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뷰크너(Buechner)'. 내 이름이다. 뷰크너라고 발음한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바보스럽게 잘못 발음하면 마치 내가 바보인 것 같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잊어버리면 마치 내가 잊혀진 것 같다. 내가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듯이 내 이름에도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뭔가가 있다. 헬드라든가 메릴, 아니면 흘라바첵 같은 다른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일 내 이름이 달랐다면 나도 달라졌을 것이다. 내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상대방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나에 대한 영향력을 넘겨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이름을 부르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멈추고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말씀하신다. 그 후로 하나님은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다. (p.75)
2.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연출을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는 목사님 한 분을 뵈러 간 적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셨고 스탭들과 같이 갔다. 점심 초대였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드렸더니 목사님은 반가운 얼굴로 "어서와요, 박동주 피디". 그후 꽤 오랫동안 서운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엔 그 분의 그 실수가 인간에 대한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느껴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요즘은 그날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내 스스로 조금 부끄러워진다. 그 실수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인간적인 실수였을 뿐이다. 이제는 누군가 실수로 나를 신동추 혹은 신통주,라고 부르더라도 웃으며 <정확한 발음>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3. 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건 '역사'(History)이다. 저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 '역사' . 불교나 힌두교와는 달리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본을 좇아 역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역사를 매우 의미 있게 여기셔서 그것을 시작하셨고, 그 속에 들어오셨고, 언젠가 의미 있는 결말을 맺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견뎌 내야만 하는 부조리도 아니고 거부해야 하는 환상도 아니며 해탈해야 하는 영겁의 순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를 어딘가로 인도해 가기 위한 일련의 중대하고 반복될 수 없는 소중하고 유일한 순간들이다. 인류와 개인의 진정한 역사는 역사책이나 전기나 자서전에 수록된 정보와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역사는 영혼을 구원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역사는 자기 영혼이 위태로운 사람을 포함해 사람들 대다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일어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전환점은, 선거에 당선되거나 결혼식을 올린 날보다는 어떤 편지를 부치지 않기로 결정한 아침이나 눈이 소복이 쌓인 숲을 바라보던 오후일 수도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진정한 전환점은, 바퀴가 발명되거나 로마가 멸망한 날이 아니라 어느 유대인 부부에게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일 수 있다. (p.125)
4. 저자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비크너는 1926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작가로서의 이력을 쌓고자 뉴욕에 체류하던 중, 예수님은 신자의 고백과 눈물과 '큰 웃음' 가운데 신자의 마음에 즉위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했다".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글 1번에서 '뷰크너'로 표기 됐던 저자의 이름이 지금 글 4번에선 '비크너'로 바뀐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뷔크너’, ‘뷰크너’, ‘뷔히너’, ‘부크너’ 등 다양하게 불러왔는데 저자가 원하는 발음은 '비크너'이다. 위키피디아와 '프레드릭 비크너 페이지'(https://www.frederickbuechner.com )에도 '비크너'(pronounced BEEK-ner)로 소개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읽은 비크너의 책은 그의 설교문 37편을 모아놓은 『어둠 속의 비밀(Secrets in the Dark)』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홍종락 옮김, 포이에마)이었는데 - 방금 위에서 소개한 비크너의 회심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 소개문에 나온다 - 처음 읽으며 "이런 설교가 있을 수 있다니" 하며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도 북리뷰에서 비크너를 이렇게 소개했다. "비크너는 끝내 독자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 독자를 웃게 함으로써, 때로는 경악한 나머지 거의 기도하게끔 함으로써, 가장 좋을 때는 둘 다 하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 (비아)를 쓴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도 비크너를 언급하며 "단어의 힘을 망각한 나를 발견할 때, 나는 프레드릭 비크너를 읽는다"라고 말했다. 상투적인 설명과 설교에 지쳤다면 비크너 읽기를 추천한다. 비크너의 책에는 진부함이 없으니.
2021년 3월 15일
『성스러움의 의미 』(루돌프 오토 지음,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를 읽는 중에
제4장 '두려운 신비'에는 <The Inquirer >(July 14, 1923 )에 실린 글이 한 대목 등장한다. O.Schreiner 이 쓴 『Thoughts on South Africa』라는 책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저자는, 키가 크고 힘세며 강인한 성격을 소유한, 말이 없는 보어인 한 사람이 말한 의미심장한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책을 쓰는] 저자는, 그[보어인]가 고작해야 자기 양과 가축들, 혹은 그가 잘 알고 있는 표범들의 습성 외에는 거의 어떤 심오한 얘기라고는 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 약 두 시간 가량이나 넓고 넓은 아프리카의 평원을 건너질러 간 후 그는 탈(Taal) 언어로 서서히 말했다. "한 가지 오랫동안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하셨을테니까요. 이런 들에 혼자 있을 때, 그리고 태양이 잡목들에 내리쬐고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인가가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너무나 너무나 작아지는 듯하며 다른 어떤 것은 너무나 커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작은 일들이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집니다".
2021년 3월 9일
잘잘법 Ep. 61을 시청하고.
1. 잘잘법 Ep. 61 '비기독교인들에게 인간이 죄인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에서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이 일종의 <사투리>가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교회 내부의 구성원들만 알아듣고, 교회 외부의 비기독인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가 되었다는 뜻이죠. 잘잘법 이번 편에서는 <죄인>이란 말의 의미를 비기독교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주고 있는데, 저는 <이런 작업>이 비기독인에게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기독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단지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는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돼'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요. 내가 믿는 바를, 내 이웃에게, 내 이웃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저는 제가 <설명하는 바>를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잘잘법의 <이번 작업>은, 우리 기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일' 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런 작업> 없이 너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왔습니다.
2021년 3월 2일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를 읽으며
"정보망이 낙후되어 형편없었던 고대에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들은 기발한 수를 많이 개발했다. 그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 시판(詩板)을 들 수 있다. 당나라 사람들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시장의 상점이나 명승고적,역참, 사원 등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벽을 골라 회칠을 한 뒤에 자신의 시를 벽 위에 쓰고, 나머지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벽은 유한하고 당나라 사람들의 시정(詩情)은 무한하여 벽이 금세 부족해졌다. 많은 지역에서 시인에게 나무 널빤지 하나를 제공하는 것으로 방식을 바꾸었고 (...) 이 작은 널빤지가 바로 시판이다. (...) 시판을 쓰는 데 신분의 제약도 없었고 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 한족이나 이민족, 남녀노소 모두 시판 앞에서는 평등했다. 그러나 뛰어난 작품은 필시 매우 드물고 열등한 시판이 매우 많아지자 누군가 나서서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행해야 했다. 유우석은 백제성을 떠날 때 시벽을 지나다가 엉망인 시가 무수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걸음을..." (여기까지)
"당나라 후기의 유명한 재상인 배도(裴度)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늦봄에 우연히 남쪽 정원을 노닐다 모란이 아직 피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난간에 기대어 유감을 금치 못했다. “내가 이 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니 슬프구나.” 그런데 이튿날 남쪽 정원에 한 무리의 모란이 먼저 피었다. 하인이 다급히 이 소식을 알리자 배도가 그 말을 듣고 마치 원진이 친한 친구인 백거이가 폄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의 반응처럼 “죽을병에 걸렸다 놀라 일어나 앉아” 기를 쓰고 나가서 모란을 감상했다. 배도는 활짝 핀 모란을 보며 깊은 위로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사흘 뒤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두 대목 모두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마오샤오원 지음, 글항아리) 에서.
2021년 2월 26일
『예언자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천규 옮김, 비아 ) 를 읽으며
책의 첫 쎈텐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학교에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장 칼뱅이 정착시킨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전통은 바로 기도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 책은, 이제는 은퇴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드렸던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니, 안 봐도 어떻게 했을지 뻔한 수업 시작 기도들을 책으로 냈다고?" 였다). 그리고 책을 폈다. 첫 기도는 이렇게 시작 됐다 : " 우리는 / 거룩하신 당신을 통제하기 위해 / (...) / 경건한 행위를 하고, 교리를 만들고 ... " .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가지 이유에서. (어떻게 이런 공중대표기도가 있을 수 있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했지?). 이 첫 기도문 끝에는 <구약학 수업, 1998.10.15>이라는 메모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밑에, 내가 <따라 읽으며 기도드린> 날짜를 적었다. <특집부에 와서, 2021.1.12>. 올해 들어 <작은 전통>을 하나 만들었다. 회사 오면 일 시작하기 전에 이 기도문을 한 편씩 읽는 것. 얼마전 내가 2월22에 읽은 기도는, 월터 브루그만이 1998년 1월8일 수업 중에 드린 <끝없이 추락할 때>라는 기도였다. 기도문을 읽고 내가 읽은 날짜를 적었다. <2021.2.22.월. 지옥같은 금,토,일을 보내고 와서> . 기도는 이렇다. "주님, 우리에게는 몰락이 익숙합니다 / 삶의 중심을 대적하며 우리 자신을 파괴합니다 / (...) / 주님, 우리의 중심이 되소서 /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 /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 ". 나는 '위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를 읽을 때 '절망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바꿔 읽었다. 그래, 힘들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고통스럽지만 과장하지는 말자. 그런 과장은 거짓말이 될 테니까. 내가 용기만 낸다면 다시 일어설 여지는 항상 있는 것이니까. 당신의 선한 질서에 저항하지 않게 하소서.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 다시 주말을 맞는다. 퇴근길에 기도문을 챙겼다).
2021년 2월 24일
『몸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지음, 두란노)을 읽는 중에
1. (인용)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장로교 목사 프레드 로저스가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로저스 아저씨네 동네>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로저스는 (...) 소품이나 첨단 장비를 별로 쓰지 않았다.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인상을 풍기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 그는 곧 유명해졌고 상도 많이 받으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 강연도 시작했다. 그가 강연마다 어김없이 넣는 순서가 있었는데 바로 청중에게 2분 동안 침묵하며 각자 자기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 그는 말했다. "매번 사람들이 [제 강연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 침묵의 시간입니다". (...) 한번은 백악관에서 열린 고위급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동 문제와 관련해 딱 8분 발언 시간을 얻었다. '짧디짧은 이 귀한 시간의 4분의 1을 꼭 침묵에 할애해야 할까?'.... " (그는 망설인다) (8분 중 2분 침묵은 오버일까?) (여기까지).
2021년 2월 22일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의 제1장을 읽고.
1. 좋은 스테이크는 다 먹지 않고 한 입만 먹어봐도 알 수 있듯이, 『제일신학』(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IVP )은 제1장만 <씹었는데도> - 논문집이라서 말 그대로 <씹어야> 한다 - <일등급 한우>로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미국 신학자의 글은 한우에 비유하는 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보라! (ㅋㅋ)) 밴후저는 각 시대마다 철학에서는 중요한 핵심 질문이 있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고대에는, 실재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중요했는데 (예: 만물은 물로 돼 있다, 아니다, 공기다, 아니다, 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만물이 '존재'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는데 여전히 사용하는 많은 범주인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실존(existence) 등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실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즉, 형이상학이] 고대 세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 '제1철학(first philosophy)'이었다. 우리는 한 시대의 제1철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함으로써 그 시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 12세기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업과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중세의 많은 신학자가 형이상학을, 혹은 그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1신학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p.28-29). 지적 허세 있는 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축약본까지 사서 읽었지만 아퀴나스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에 대해 파고들었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상기 설명이 참 <시원했다>.
2021년 2월 4일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벤 위더링턴 3세 지음, 이레서원)을 읽고
1.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1세기 고린도의 사회적, 문화적 정황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하는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흥미로웠던 대목 한 군데를 소개하면 이렇다. (총독 갈리오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열리는 만찬회에 참석하려고 신전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신전 입구, 첫 번째 계단 옆에는 새 석판이 세워져 있고, 아스클레피오스 신과 이 신의 상징인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만찬회에 늦은 갈리오는 급히 계단을 올라 신전으로 들어가면서 테라코타 봉헌물이 놓이 방을 지나갔다. 이 방에는 순례자들이 치유를 위한 봉헌과 기도 용도로 바친 여러 부위의 인체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테라코타는 점토로 형상을 빚은 후 구워서 만든 모형인데, 당시에는 병이 난 부위를 테라코타로 만들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치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 여기까지 읽은 내 머릿속에선 <음란마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안 좋아진 부위? 그럼, 그 봉헌 모형들 가운데는 <그 모형>도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일까...흑흑흑" .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갈리오는 팔과 다리 모형이 눈에 익은 모습으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은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가장 흔한 인체 부위 복제품인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는 늘 그랬듯 그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 휴. 나만 쓰레기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트리클리니움, 또는 식당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뒷편에 있었는데, 그런 연회에서 늘 그러듯 크게 떠드는 소리와 흥청거리며 노는 소리가 갈리오의 귀에 들려왔다."
2021년 1월 15일
나의 아저씨
나랑 친한 조연출 한 명이 <나의 아저씨>를 다봤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누가 <나의 아저씨>를 다봤다고 하면, 그가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다읽었다고 하는 것만큼 반갑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것은 <위치>였다. 기성세대로서의 위치, 남편으로서의 위치. 거기서 벗어남은, 처음엔 쾌락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고통이라는 것. 그 위치를 지키고 있을 때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사실 평안이 가장 큰 쾌락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