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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3일

『부서진 사람』 (피터 맘슨 지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읽고.

1. 나는 옛날부터 다음 두 곳에 <들어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야기. 오히려 반감이 있었다. 현실로부터 도망한다는 생각, 현실과 당당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브루더호프라는 기독교 공동체 안의 '리더십'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사람』이란 책을 내가 <단숨에> 다 읽은 것은 내게는 좀 사건이었다.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과정 중에 발견한 (거의 TMI에 가까울 수도 있는) 소소한 일들을 서너 개 나열해보고자 한다. 2. 나는 책을 쥐면 제일 먼저 제사(題辭, epigraph)부터 읽는 습관이 있기에 이 책을 쥐고 제일 먼저 한 일도 제사를 확인하는 거였다. (제사가 없는 책도 많이 만나는데 그럴 때면 난 내심 몹시 실망한다. 얼마 전에 읽은 제사 하나도 참 인상적이었다. 『창세기를 만나다』(로널드 헨델 지음,비아)에 나오는 제사 :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 ). 『부서진 사람』 에는 반갑게도 제사가 있었다. 이 제사를 읽는 순간, 난 내가 이 책을 완독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은 이렇다. 상처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될까? 천사도 어쩔 수 없는, 가련하고 실수투성이인 이 땅의 자녀들을 깨우칠 자는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사랑의 군영에는 오직 상처 입은 병사만이 복무할 수 있으니. - 손턴 와일더, 「물을 휘저은 천사」 에서. 3. 서문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비록 아놀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을 당했지만". 지난 가을에 <내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아놀드란 사람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서문을 읽는데 아놀드가 당한 일뿐 아니라 아놀드라는 사람 자체도 궁금해졌다. 서문의 승리.) 마지막에 서문을 쓴 이의 이름이 나왔다. 유진 피터슨. (역시!) 4. 점점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나는 책 표지를 다시 살폈다. 부서진 사람,이라는 책 제목 위에 영어로 원제가 적혀 있었다. Homage to a Broken Man. 호미지가 뭐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이 단어의 발음은 오마주,였다. 평소 자주 쓰던 오마주라는 단어에는 에이취(H)가 붙는구나! (완전 몰랐다). (어서 빨리 나도 "Homage to C.S.루이스"라고 할 무언가를 내놓아야할텐데 ㅠㅠ). 5. 아껴가며 읽었다. 내게 제일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두개만 소개하면: 하나. 공동체 생활은 한다는 것은,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하이너[아놀드]가 술을 권하자 더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이 되도록 맥주 한 잔 입에 안 대고 살았습니다." 더그는 커피조차 양심에 꺼려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p.426). 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상담하러 아놀드를 찾았다. 나는 아놀드가 한 대답 중에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멤버가 된 제니스가 언젠가 하이너[아놀드]에게 찾아와 자신에게 별 재주가 없다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제가 공동체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자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보태는 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산타클로스처럼 되길 고집하는군요" > (p.434). 이 구절을 읽는데 나는 한 방 먹은 거 같아서 멍해졌다. 실제 다음 문장도 이렇게 이어진다. "제니스는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했다". 2021.8.23. 신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