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참 인상적인 책 제목이 있다. 이 제목에 라임을 맞춰 내가 사무엘서 읽은 소감을 표현해 본다면: "사무엘서는 재미있는데 다윗은 맘에 안 들어". 나는 너무 능수능란한 사람, 빈틈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데 다윗은 (소름끼칠 정도로) 권력 유지(Power Yuji)와 전쟁,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수였고 능란했다. 사람을 죽일 때도 그냥 죽이지 않았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이긴 다윗은 "포로들을 줄을 지어 세운 다음에, 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매 석 줄 중에 두 줄은 죽이고, 한 줄은 살려주었다." (사무엘기하 8:2)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다윗은 포로들을 <그런 식으로 죽이고(두 줄)>, <그런 식으로 살렸고(한 줄)>, 나는 <그런 다윗>에게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3. 그럼, 사무엘서에서 인간적으로(?) 제일 정이 갔던 사람은? 그 사람은 아히도벨이었다. 아히도벨은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다윗이 죽인 우리야는, 그의 손녀의 사위가 되는 셈이다. (아름다운 손녀, 용감한 사위를 둔 아히도벨은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의 탐욕스러운 사내가 나타나 그의 손녀에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사위까지 <살해>한다. 가해자는 (전자발찌도 차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녔다. 그래서였을까, 나중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압살롬 편에 선다. 그리고 (도망간) 다윗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략을 냈다. 평소 그가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사람들은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삼하 16:23). 어떻게 된 일인지 압살롬이 이번에는 그의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신이 개입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주님께서 이미 압살롬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좌절시키셨기 때문이다." (삼하 17:14). 이제 사무엘서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사건이 펼쳐진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 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 (삼하 17:23). 그가 목을 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을 깊은 정적의 시간. (사건은 바로 전에 일어났다. 아히도벨이 <매달려> 있는 줄은 지금도 <여전히>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아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종들이 마당에서 일하는 건강한 소음이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와 방 안의 정적과 섞인다. 비록 역모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시도해 봤고, 집의 대소사까지 다 정리하고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 남자. 방 안의 공기는 (적어도 내게는) 무겁다기보다는 차라리 평온하게 느껴진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 이야기가 내게 깊이 각인 되었을까. 아히도벨이 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떠난 시점은, 압살롬이 다윗성 점령에 성공했을 때. 아히도벨은 자신 편의 군사력이 가장 왕성한 그 때, 압살롬의 필패를 미리 <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요즘 내가 <내 끝>에 자주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4. 열왕기상 22장에는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미가야 예언자 사이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크게 두 번>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두 번 놀라기를 바란다.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고 믿는다). 먼저 상황 설명을 하면: 아합 왕은 미가야 예언자를 싫어했다. 이유는, 늘 그에 대해 <안 좋은 예언>만 해서 그렇다. 지금 전쟁을 막 시작하려는 왕이 미가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나는 속으로) 늘 안 좋은 예언만 한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예언을 하겠지, 라고 나는 합리적인 예상을 했다. 웬걸, 15절에서 미가야는 "올라가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라는 축복의 예언을 한다! (여기가, 나의 첫번 째 놀람) 그런데 이어지는 왕의 대답은 방금 전 예언만큼이나 의외였고 나는 두번 째로 놀랐다. 왕이 한 말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다. "너 왜 지금 진실을 말하지 않냐?" 왕은 "역정"(공동번역)을 낸다.(당황한 나는) 15절의 단어 하나 하나에 주목하며 서너 번을 읽었지만 <역정을 낼만한 건덕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번뜩 깨달았다. 미가야 예언자는 15절을 <조롱하듯이> 말했던 것이다! 아합 왕은, 그 예언(이 조롱이라는 것)을 제대로 읽어냈다. (그랬기에 그는 미가야를 옥에 가둔다). 나는 몹시 흥분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낭독하거나 암송할 때, 낭독자나 암송자는, (성경에) 조롱하듯이 읽으시오 라는 지문(地文) 없어도, 이 부분을 조롱하듯이 읽거나 암송했겠구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이 사실이 너무너무 신기했다! ) "주님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15절)"라고 <아무리 분명하게> 성경에 쓰여 있더라도, (그리고) 이 부분은 조롱입니다, 라는 지문이 없더라도, 우리는 기존 문자를 읽을 때와는 <다른 톤>으로 해당 본문을 읽어내야 할 경우가 있는 거구나! 성경은, 우리가 당연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고 있구나! (나 여기서 괜히 깊은 감동 받음. 흑흑). 혹시, 신약에서도, 내가 지금 읽는 톤이 아닌 다른 톤으로 읽어주길 기다리는 구절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그 구절들은 어디일까.
5. 예수님은 구약이 "자기에 관해" 쓴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눅 24:27) 구약의 역사와 이야기는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힐끗) 그 연결점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모두 내가 보기에는 '시작은 좋았으나 끝에 가서는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역사라는 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12:7)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백성이 정신 차리고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나 이스라엘을 원수에게 아무리 <넘겨 주어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들을 <넘겨 주신다>. 이렇게 <백성을 넘겨주는> 구약은 <아들을 넘겨주는> 신약과 이어지고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엠마오 가던 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다시 보니, 여기서도 <넘겨 주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0).
2021.9.25.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신동주
<서플먼트>
1) 이 글의 초반부에 언급한 <문학> 관련 이야기는 로버트 알터의 『성서의 이야기 기술』 (원제: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 39쪽에 등장한다. “성서도 문학[이라고] 본다면, 문학적 분석의 틀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 모든 다른 접근법은 (...) 성서 이야기가 지닌 문학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영적인 교훈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문학적 재미만은 놓치지 말자. 이게 내 가이드라인이었음. 내가 문학적 재미를 놓친다면, 계시의 통로로 구태여 문학을 선택했던 성경 저자들이 몹시 서운해할 것 같았음.
2) 예레미야서를 읽다보니, 적혀 있는 문자를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른 톤>으로 읽어내야 할 상황이 그 어떤 책보다 자주,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음. 예를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쳤다" (15:6)는 어떤 톤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지문(地文)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거 같음. 당신의 지문이 무엇일지 궁금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