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책을 쥐면 제일 먼저 제사(題辭, epigraph)부터 읽는 습관이 있기에 이 책을 쥐고 제일 먼저 한 일도 제사를 확인하는 거였다. (제사가 없는 책도 많이 만나는데 그럴 때면 난 내심 몹시 실망한다. 얼마 전에 읽은 제사 하나도 참 인상적이었다. 『창세기를 만나다』(로널드 헨델 지음,비아)에 나오는 제사 : "창세기를 벗어나지 말라, 이는 달콤한 충고이니. - 에밀리 디킨슨 " ). 『부서진 사람』 에는 반갑게도 제사가 있었다. 이 제사를 읽는 순간, 난 내가 이 책을 완독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은 이렇다.
상처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될까?
천사도 어쩔 수 없는,
가련하고 실수투성이인 이 땅의 자녀들을 깨우칠 자는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사랑의 군영에는 오직
상처 입은 병사만이 복무할 수 있으니.
- 손턴 와일더, 「물을 휘저은 천사」 에서.
3. 서문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비록 아놀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을 당했지만". 지난 가을에 <내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아놀드란 사람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서문을 읽는데 아놀드가 당한 일뿐 아니라 아놀드라는 사람 자체도 궁금해졌다. 서문의 승리.) 마지막에 서문을 쓴 이의 이름이 나왔다. 유진 피터슨. (역시!)
4. 점점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나는 책 표지를 다시 살폈다. 부서진 사람,이라는 책 제목 위에 영어로 원제가 적혀 있었다. Homage to a Broken Man. 호미지가 뭐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이 단어의 발음은 오마주,였다. 평소 자주 쓰던 오마주라는 단어에는 에이취(H)가 붙는구나! (완전 몰랐다). (어서 빨리 나도 "Homage to C.S.루이스"라고 할 무언가를 내놓아야할텐데 ㅠㅠ).
5. 아껴가며 읽었다. 내게 제일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두개만 소개하면: 하나. 공동체 생활은 한다는 것은,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하이너[아놀드]가 술을 권하자 더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이 되도록 맥주 한 잔 입에 안 대고 살았습니다." 더그는 커피조차 양심에 꺼려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p.426). 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상담하러 아놀드를 찾았다. 나는 아놀드가 한 대답 중에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멤버가 된 제니스가 언젠가 하이너[아놀드]에게 찾아와 자신에게 별 재주가 없다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제가 공동체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자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보태는 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산타클로스처럼 되길 고집하는군요" > (p.434). 이 구절을 읽는데 나는 한 방 먹은 거 같아서 멍해졌다. 실제 다음 문장도 이렇게 이어진다. "제니스는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했다".
2021.8.23.
신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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