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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7일

거리감

 













얼마 전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모기영)의 박일아 프로그래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혹시 개막식 때 무대 앞에서 이 영화제에 대한 생각을 짧게 말해줄 수 있나요? 목사, 디자이너, 피디 이렇게 세 분을 모시려고 해요."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사람 들 앞에 서는 건 너무 부담스럽다. 다음 날 답신 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내가 조금만 용기를 내서 참가하면 나름 영화제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사람당 4분 정도라니, 내가 살아오며 했던 고민들을 정리하면 그 정도 말할 분량은 충분히 될 거 같았다. 그날 밤 문자를 보냈다. "생각해 봤습니다. 해보겠습니다"

개막식 행사는 7시였다. 행사장으로 가는데, 마음에 드는 완벽한 원고를 써놓은 나는 초조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패널로 앞에 서지 못했다. 홍대입구는 수능으로 버스가 막혔고, 롯데 시네마를 못 찾아 두 번이나 다른 영화관으로 뛰어들어가 그 안에서 헤맸다. 그렇게 나 없이 사전 행사는 끝났다.

1.자기 소개를 간단히 해주시겠습니까?

= 93년에 CBS에 입사해서 올해로 30년째 피디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 십년은 라디오 피디로, 그 다음 20년은 TV 피디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낸시랭의 신학펀치>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모기영>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돼 기쁘고 감사합니다.

2. 어떤 입장에서 <모기영>을 지지하는지 그 이유, 그리고 <모기영>을 지지하는 것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 젊은 시절 제 '삶의 바탕화면'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어요. 바탕화면에 폴더가 딱 2개 밖에 없었어요. 폴더(1): 기독교적인 것. 폴더(2): 비기독교적인 것. 세상이 그렇게 두 개의 폴더로 깔끔하게 나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확신 속에서 각각의 폴더를 채워나갔지요.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제 삶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의 기독교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비기독교 폴더 안에 넣었던 것들 중에도 "그분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런 저에게 <비기독교 영화를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함께 고민하겠다는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와의 만남은 소중합니다. 제게 <모기영>이란, 사람들의 삶이 쪼그라들지 않고 반대로 확장되도록 격려하는 운동이어요. 제가 후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3. 올해의 영화제 주제는 '거리감'입니다. 주제를 듣고 떠오르는 관계, 혹은 거리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자기만의 해석을 들려주세요.

= 한 신문기사에서 이번 제 5회 영화제를 놓고 "우리 사이의 거리, 틈을 메우기 위한 ‘모두의 영화축제’ "라고 쓴 것을 봤어요. 저는 반대로 우리 사이의 <거리와 틈을 벌리기 위한> 영화제이기도 하다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우리 중에는 거리가 멀어져서 갈등하고 힘든 사람도 있지만, 너무 붙어있기에, 좀 떨어지고 싶은데 책임감과 죄책감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거리를 두지 못해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아요. '거리감'을 주제로 잡은 이번 5회 영화제에, 절박하게 거리를 벌리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에게 맞는 적정 거리를 찾기 위해 시행착오하는 이들의 이야기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간신히 찾은 영화관 관객석 제일 앞 줄 빈 자리에 앉았다. 영화제 장다나 프로그래머가 개막작에 대한 소개를 했다. "누군가 저희 모기영 개막작을 보면 고구마 먹은 것처럼 마음이 답답해진다고 말 하는 걸 들은 적 있어요 ^^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거에요. 그래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고구마 100개의 이번 개막작으로 고구마 1000개의 우리 사회 현실을 견디고 살아갈 위로와 힘을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개막작은 윌리엄 니콜슨 감독의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Hope Gap)이었다.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마음이 참 편했다. 이런 평안함은 정말 오래간만에 경험했다. 집에서 넷플릭스를 시청할 때는 끝까지 보는 게 별로 없다. 지루함의 낌새가 조금만 보여도 그 즉시 다른 걸 선택한다.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영화관에선 내 앞에 하나만 있고,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런 한계와 구속이 실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주는 것인지, 오늘 절감했다. 난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고, 넘 많은 것을 얻었다. 놀랍게도 개막작에는 거리를 좁히려는 이야기와 거리를 두려는 이야기가 공존했다. 내게는 최고의 영화였다. 불이 켜질 때 난 부끄러워하지 않고 박수를 쳤다. 맞다. 이 말도 해야지. 고구마 절대 아니었다.

집으로 오늘 지하철 속에서 문득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내가 오늘 뭘 놓쳤던가?

오늘이란 시간은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흘러갔지만 왜 나는 무언가 놓쳤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로 꽉 채워졌다는 느낌이 들지?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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