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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7일

<스토커>(Stalker ,1979 )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966)를 보고.

1. 영화 두 편을 봤다. 둘 모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1932~1986)의 영화였다. 인터넷 서점에선 DVD로도 판매하고 있지만 (이 말은, 한글 자막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기에 유튜브로 봤다. (이 말은, 러시아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봤다는 말이다. 참고로 두 영화 모두 런닝 타임이 3시간). 나는 영어 이해가 빠르지 않기에 대사 하나 등장할 때마다 포즈 버튼을 누르고는 (모르는 단어 영어 사전에서 찾고) 다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이 말은, 한 영화당 내가 포즈 버튼을 누른 횟수가 최소 백 번은 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건 영화 감상이 아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음. 인정.) 영화 감상이 아니었어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래 그 이유와 결과를 간단히 적는다. (내 영화평이 늘 그렇듯이 본문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 등장 않는다. 각주에는 나온다). 2. <스토커> (Stalker) / 1979 2019년 5월28일 화요일 오후 6시, 나는 회사 업무가 종료되는 순간,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 되는 고려대 베리타스 포럼에 접속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의 저자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강연 주제는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였고, 남자 한 명이 왼쪽에 서서 동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 잊혀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강연 초반에 소개한 영화 한 편이었다. 스미스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를 소개했다 : "<스토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세 사람이 어딘가로 갑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그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은,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줍니다. 누군가 입으로 말하는 바램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죠. 문제는, 그 세 사람이, 그 방 앞에 도착해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정말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3. 2년 전에 들은 이 짧은 영화 줄거리는 이상하게 듣는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입을 통해, 페북을 통해, 경건해지고 싶습니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기고 있습니다, 비아에서 나온 『사막의 지혜』를 읽고 있습니다, 참 멋진 말들을 많이도 해오고 있는데, 막상 그런 나는, 내 입술의, 내 페북의 갈망을 현실화 시켜준다는 그 방, 더 룸(the Room)에 <들어가길> 원할까? 페북에 그렇게 종교와 경건에 대한 포스팅 많이 하는 나이지만, 일단 <지금>은 못 들어간다. (누가 뒤에서 실수로 밀까봐 두려울 정도다). 나 또한 내 깊이 내재한 갈망이 무엇인지 미리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의자에 앉자, 내 앞에, 벌거벗은 남녀 몸뚱아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적거리며 꿈틀대는 세상이 영원히 펼쳐진다면? 내가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어 영원히 꿈틀대(야만 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확실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정욕을 극복하는데 혹시 고행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수도사처럼, 그래서 자기 등 채찍으로 밤마다 쳤듯이, 나는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포즈, 사전 찾기, 스타트 라는 <고행>을 계속했다. 마치 이 고행 통해 내 갈망 정화되기라도 하듯이. (맞다. '영화 감상'이라 불릴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행의 효과는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속 세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갔을까,에 대한 답변은 생략. 4.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 1966 이십 여년 전, 라디오 방송사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시절, 녹음기 하나 들고 서울 전 지역을 돌아다니던 시절, 내 지갑 속에는 내가 볼펜으로 쓴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한 말이었는데 힘들 때면 꺼내 읽었다. "영화 감독으로 산다는 건 레드카펫 위를 걷고 카메라 플래쉬 받으며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감독으로 사는 건, 촬영 장비를 지고 비오는 새벽 집을 나서는 것이다." 화질 안 좋은 VHS 비디오로 그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본 건 그 무렵이었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삼위일체','블라디미르의 성모' 같은 이콘(icon)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15세기 러시아 화가이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거세게 불던 바람, 무너진 성당 벽에 기대선 남자의 긴장한 얼굴 표정은 또렷이 기억난다. 40대와 50대를 사는 동안 문득문득 흑백 영화 속 그 <거친 바람>이 떠올랐고, 얼마 전 영화평론가 C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중, 그 거친 바람을 <다시 맞고> 싶어졌다. 내 삶의 쭉정이를 다 날려보내고, 그리고 남는 내 삶의 알곡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남을까). 그렇게 바람을 맞았다. 유튜브를 통해 부는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다시 불기를 (역시) 백 번 정도했다. (자막 ㅠㅠ) 런닝 타임 3시간 동안 안드레이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안드레이가 붓을 쥐고 있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다 보고나니 그건 결점이 아니었다. 2021.9.6. 신동주 서플먼트 (*스포일러 등장) 1)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보려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원작이 있는 경우 무조건 원작부터 본다, 는 내 오래된 원칙 지키기 위해 SF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 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 (두 형제는 소비에트 시대 작가로서 원작은 1972년에 출간). 출판사 소개문을 발췌, 인용하자면 : " 『노변의 피크닉』은 외계 생명체나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을 다루는 ‘퍼스트 콘택트’ 유의 소설에 속하"며, "불법적으로 ‘구역’(the Zone)에 숨어들어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물체들을 찾아내고, 그걸 팔아 살아가는 ‘스토커’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와 비슷한 동기를 갖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장편 소설에 <그곳은 우리의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라는 식의 문장이 단 일 회만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음.(현재 미국에 와 있어서 소설 속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 못하는 것을 양해 구함). 소설 속 그 한 줄의 문장이, <스토커>에서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탄. 더불어, 이 소설을 통해 '스토커'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좇아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잠입자,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됨. 소설과 영화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임. 2) <스토커>의 주인공 세 사람(스토커, 교수, 작가)은 두려워서 결국 '더 룸'에 들어가지 못함. 세 시간 내내 세 사람 꽁무니 졸졸 따라갔던 <피디> 한 명도 그 방 문턱에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남. (도대체 인간 중에 누가 그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에 이런 생각이 듦. 우리 모두는 이미 그 방에 들어간 거 아님? 너무 커서 그렇지, 그 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님? 왜냐하면, 각자가 갈망을 뿌린대로 거두는 모습을 이 방 안에서 매일 목도하고 있으니. 만델라. 이명박. 트럼프. 그레타 툰베리. 윤석열. 신동주...열매가 맺히는 속도만 다르지, 그 방과 이 세상은, 어쩌면 같은 공간일 듯. 그래서 결론: 방 안으로의 진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 3)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열기구가 추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총 9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짐. 그 중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세 개만 아주 짧게 소개하면 : (a) 젊은 청년이 영주를 위해서 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맞아 죽을 수 있음. 드디어 종을 치던 날, 몇 년째 입을 닫고 묵언수행해 오던 안드레이가 입을 열고는... (b) 타타르족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을 폐허로 만듦. 끔찍함.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름).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까지 들어와 사람들을 도륙하고, 교회의 보물을 찾겠다고 끓는 물을 사람의 입에 부음. 그런 행동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함. 장수로 보이는 듯한 이가 말을 탄 채로 성당 벽을 바라보며 묻는다. "저기에 누워 있는 아기는 누군가?" " 예수입니다" "아기 옆에 있는 여자는?" "동정녀 마리아 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면 동정녀가 아니지" 성당을 불태우고 타타르족이 떠난다. 이제 안드레이는 벽에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 누군가에게 아무런 영향 미치지 못한 성화를, 다시 그려야 하는 화가는, 이제 <어떻게> 그려야 할까. 아니, <그려야 할까>. (c)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초반부에 나옴. 안드레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는 키릴이, 성상화(聖像畫)의 대가 테오판 그릭을 만나는 중. "나와 함께 일해주겠나?"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요. 제 공동체와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저를 지명해주십시오" (당시 안드레이가 더 인정 받고 있던 상황). "그러지". 얼마 뒤, 테오판 그릭이 보낸 전령이 수사들이 다 모인 앞에서 테오판의 후계자를 발표한다. "안드레이!"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의 키릴. "아, 머리가 빠개지는 거 같군". 전날 밤 술을 잔뜩 마신 듯한 전령은 말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함. 난 이 부분을 여러번 돌려봤는데, 만약, 테오판은 키릴을 생각했으나 숙취에 시달리던 전령이 이름을 착각한 것이라면? 이 도입부가 참으로 매혹적). 4) 실존 인물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실제 그린 성상화(聖像畫, icon)들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 내게는 성상화들을 <즐겨보고> 싶은 로망이 줄곧 있어왔음. 이콘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내가 짐작하기론) 중세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중세인의 태도가 내 삶에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근현대인인 내게는 그것이 결여돼 있는 듯. C.S. 루이스는 『폐기된 이미지 - 중세 세계관과 문학에 관하여』 (C.S.루이스 지음, 홍종락 번역, 비아토르)에서 중세인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는 (...)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기를' 원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들은 무엇보다 "올려다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함. 누군가를,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걸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영락없는 근대인인 나는, 어쩌면 이콘마저도 내려다 보고 있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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