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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7일

위플래쉬를 보고

초등학교 2학년 때 토끼를 한 마리 키웠다. 토끼를 들 때 - 아기를 안 듯 - 두 손으로 토끼를 안아 올리면 아버지는, 두 귀를 잡는 거야, 토끼를 들 때는, 하셨다. 그 후로 살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는 두 마리 다 놓친다, 라는 말을 십만 번 이상 들었다. 그때마다 난 속으로, 아니야, 아니야, 시청률과 공익성, 실력과 인격, 카리스마와 친절,은 두 마리 토끼가 아니야. 한 마리 토끼에 달려있는 두 개의 귀야. 두 귀를 한꺼번에 잡는 거야, 토끼를 들 때는. 어느 날 여름 토끼가 목 말라 하는 거 같아 물을 많이 줬더니 토끼가 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토끼에겐 물을 주는 게 아니야, 당근과 채소 속에 수분이 이미 많아, 하셨다. - 위플래쉬를 보고 (1).

그쯤 했으니 됐어, 라는 말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둘 있으니, 한 명은 위플래쉬의 음악 선생이고 또 한 명은 그리스도입니다. 둘의 관심 영역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둘 모두 명확한 목표치가 있고 그 목표치에 이르기 전까지는, 만족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그 분은, 예를 들어 제가 매일 오피에 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늘 제가 자주 가는 사이트 오유에서 ‘오피’라는 말을 처음 접했는데 그 뜻은 오피스텔 성매매.) 분명, 가지마, 라고 말씀 하실 것입니다. 시무룩하게, 알겠어요, 이제 안 갈께요, 됐죠? 그 분은,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잘했어. 기쁘구나. 이제 컴 하드에 있는 동영상을 모두 지울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너에게 더 큰 쾌락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래. (정말)시무룩하게, 알겠어요, (약간 짜증내며) 이제 됐나요? 수고했다, 나랑 같이 다른 즐거움을 찾아보자꾸나. 그런데 그러기 전에 이제 마지막으로 너의....싫어요! 라고 저는 외칩니다. 싫어요! 제발 그만 하세요! 그 분은 제 비명과 항변을 묵묵히 들으십니다. 전 그에게, 나는 인간이예요, 신이 아니라구요. 하나 며칠 뒤 다시 이 주제로 대화를 할 때 제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져있었습니다. 난 네가 지고 있는 짐을 바꿔주고 싶어서 그래. 내가 갖고온 짐은 보기보다 무겁지 않아. 전 제 맘 속에서 일어하는 변화에 놀랍니다. 짐을 바꿔 져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다가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의 입가에는 제가 처음 보는 미소가 걸려있었는데 그 미소는 최근 개봉한 한 영화에서 음악 선생이 마지막에 지었던 미소와 좀 달랐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그건, 너 아니어도 가능성 있는 애들 많아, 하는 대신.... - 위플래쉬를 보고 (2).

오래 전에, 남성다운 건 건 뭘까, 라는 생각을 하며 300을 봤다. 그래서(?), 안 나오는 장면이 뭘까, 생각하며 영화를 봤다. 300에서 한 번도 안 나오는 장면은, 밥 먹는 장면이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남성성을 해칠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선 지겹도록 나온다. 싸우러 가기 전에 먹고, 싸우고 와서 먹는다. 각 영웅에게 주어지는 고기의 부위까지 설명한다. 위플래쉬를 보는데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번도 안 나오는 장면이.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었다. 자기가 하는 음악 때문에 행복해하는 학생이 한 명도,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음악 영화에서 - 아니, 음악 인생에서 - 웃음과 미소는 고뇌와 좌절만큼이나 - 왜 고뇌와 낙심과 좌절이 없겠는가, 완성을 추구해가는 삶에서. 그게 음악이든, 신앙이든, 성애이든, 흑흑흑 - 콘크리트한 것이다. (근데 왜 영어를 썼을까.) 내가 행복하고,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음악을 하고 싶어, 라는 말은 한가한 소리가 아니라 건물의 철심이고, 뼈대이다. 피 흘리는 손만큼이나 미소 짓지 않는, 경련하는 입술도 섬뜩하다. 미소 없는 인생과 음악은 무너진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의 꿈)이 그 선생 밑에서 무너졌을까,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누군가 뺨을 맞으며 배운 음악을 나는 듣고 싶지 않다. - 위플래쉬를 보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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