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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6일

8년 전에 주신 말씀

1. 8년 전 아내가 두 아이(중1, 초5)를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무렵 나는 우리 회사 TV국 외주특집부 소속이었는데, 독일 베타필름에서 만든 <더 바이블>이라는 드라마 시리즈를 수급하여 번역과 더빙 과정을 거쳐 방송 내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총 25명의 성경 인물을 25편에 담은 드라마였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아브라함 편이었다. 드라마상에서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은 뒤 많이 <달라졌다>. 화와 짜증을 쉽게 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데, 난 이 묘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짜증내는 아브라함이라니.) 어느날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주인님, 요즘 이전과 다르게 많이 날카로워지신 거 같아요.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종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은,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엘리에셀, 미안하네. 내가 요즘 내가 생각해도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졌어. 이제 내가 나이 많아 언제 하나님 앞으로 불려갈지 모르는데, 저 어린 이삭에게 내가 죽기 전에 가르쳐줘야 할 게 아직도 너무 많아. 별자리 읽는 법, 사냥하는 법, 전쟁에서 싸우는 법....요즘 내가 무척 쫓기는 기분이네.” 아브라함의 그 초조함이 마음 속 깊이 이해되었다. 당시 나 또한 아브라함처럼 시간과 불안에 쫓기고 있었다. 출국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아이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고 어렸다.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의 무게까지 잰다면 비행기는 뜨지 못했을 것이다.

2.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살 게 된 곳은 오래된 학교 기숙사였다. 원래는 군대 막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아내와 두 아이의 입학 수속을 마쳤고, 이제 난 홀로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두고 떠나는 게 쉽지 않아 눈물을 많이 흘렸다.

3. 캔자스는 돌풍으로 유명해서 바람이 많이 불고 겨울에 무척 춥다. 출국 일을 며칠 앞두고 빈 기숙사에서 슬픔에 잠겨 혼자 시편을 읽고 있었는데 강한 바람에 나무로 만든 현관문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내 마음도 그렇게 흔들렸다. 문틈으로 찬 바람이 많이 들어왔다. 성경은 내가 한국에서 갖고 간 표준새번역 성경이었고 그날은 147편을 읽을 차례였다.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주님이 네 문빗장을 단단히 잠그시고, 그 안에 있는 네 자녀에게 복을 내리셨다.” 그날 낯선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안심이 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 신음과 기도를 들으시구나, 하나님은. 내 인생 가장 슬픈 순간 중 하나를 지나고 있었는데 주님이 그렇게 내가 웃을 수 있게 해주셨다. 성경을 읽는 내내 현관문은 덜컹거렸고 난 그 소리가 좋았다.

4. 지켜주신다는 것은 무엇일까. 8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의 문빗장 안에서도(!) 아이들은 크고 작은 아픔을 여러번 경험했다. 지켜주신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어쩌면 그 가운데 여럿은, 내가 8년 전에 읽었던 그 똑같은 시편을 읽었을 것이다.) 요즘은 시편 147편을 읽을 때마다 양가감정에 빠진다. 비록 내가 큰 힘을 얻은 말씀이긴 하지만, 어쩌면 나는 지켜주신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맘이 든다. 지켜주겠다. 아멘.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걸까.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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