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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0일

『예언자적 상상력』(월터 브루구만 지음, 복 있는 사람)을 읽고.

1. 한두 해 전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구만의 이름이 자주 언급돼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사서 읽었다. 브루구만은 이 책을 1978년에 썼고, 개정판 서문은 2000년에 썼다. 나는 이 책에서 개정판 서문이 제일 좋았다. 브루구만에겐 조금 미안한 얘기인데, 서문까지만 좋았다. 1장부터는 약간 과하게 느껴지는 '의미 부여' 때문에 오히려 감동이 반감되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의 표현: "모세가 의도했던 일은, 적은 무리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 모세가 한 일은 이집트 제국의 의식(意識)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제국을 사회 관습과 신화적 주장의 양면에서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p.59). 나는 타격이나 해체가 아니라 어리둥절, 안절부절, 조마조마,긴가민가 같은 단어들이 '역사적 모세'를 더 사실적으로 그려주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뭘 할 때 매번 그렇게 큰 그림을 다 보면서 하나? 안 보며, 못 보며, 하는 건 안 멋진 일인가? -.- )

2. 이제 나를 파고든 개정판 서문에 대해서. 이런 말이 나온다. "완전한 자유로 행하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든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말과 행위에 권위를 부어 주실 수 있다. (...)어떤 사회적 환경의 경우 다른 환경에 비해 (...)예언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장소로 더 적절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p.36) 브루구만은 예언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큰 공동체의 특징을 넷 얘기하는데 그 두 번째 특징에서 내 독서와 내 삶 모두 콱 막혔다. " [그 공동체에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이용 가능한 고통에의 감각이 있다."(p.37). 몹시 찔렸다. 신학적인 용어에는 점점 친숙해져 가는데, 내게는, 이용 가능한, 예언자적 삶을 살기 위해선 필수적인, "고통에의 감각"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면서, 고통의 감각을 몸 속에 지닌 채 살아가는 한 후배가 떠올랐다. 페북에서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방금 브루구만 책을 읽을 때처럼 찔렸다. 그는 세월호 현장에 있고, 청소년들을 돌보고, 동료들과는 자신이 먼저 경험한 어려움과 극복 방안을 나눴다. 예언서를 읽는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예언서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2016.2.10.

ps.
브루그만은 아브라함 헤셀이 쓴 『예언자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예언자는 고통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 예언자가 나서서 이루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고난을 감당하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요, 삶과 고통 사이에 가로놓인 장막을 찝어 버리는 것이다". (p.35). 난 그 막이 더 튼튼해지기를, 질겨지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고통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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