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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6일

나는 아주 형식적인 교회에 다닌다

1. 왜 루터 교회로 정했어요?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때마다 나는, 나이드니까 점점 예전(禮典,liturgy)에 끌려서요. 예전이 살아있는 교회를 다니고 싶었어요, 라고 대답을 한다. 그러면 아,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거요? 라는 후속 질문이 들어오고 나는 그와 함께 웃는다. 맞아요!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거요! 매주 성찬도 하고요.

2. 나의 스승(c.s.lewis)께서는, 인간의 <육체>에 대해 여러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셨는데, 지금 까페에 있는 관계로 그냥 기억에 의지해서, 내가 자주 떠올리는 말씀 한두 개 소개하면: 사람들은 자주 육체가 정신을 유혹하고 넘어뜨린다고 생각하는데 , 우리를 넘어뜨리는 건 사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스승님 왈, 죄를 짓는 건 정신이지 육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많은 경우 육체가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피곤하다며 “이제 그만 자자”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던 걱정>, <하던 원망>을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육체가 없었다면 - 육체의 그 한계가 없었다면 - 우리는 일 주일 내내  <하던 걱정>을 하며, 잠시의 쉼도 없이 <하던 원망>을 하며, 보낼 수도 있었다. (특히, 나! -.-) 주기적으로 허기지고, 피곤하고, 졸리다는 건, 그래서 정신이 육체에 굴복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큰 다행이고 유익인가.  

3. 스승께서는 이런 비슷한 말씀도 하셨다.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지! 무릎 꾾고 기도하는 유익을 모르니 말이야."  이 말씀을 하시는 스승께서는 결코, 하나님은 무릎 끓고 드리는 기도만 받으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게 아니다. 설마 우리 스승께서 진심으로 기도할 때, 자세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시겠는가. 스승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존재인 우리는,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보다 많이. 그렇기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더 쉽게> 알 수 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은 형식을 따지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셔"라는 말에 속는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육체와 형식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잊고 무시하는지. 

4. 어떤 강렬한 <느낌>이 와야만 뭔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거라는 <오래된 오해>가 가장 큰 걸림돌인 거 같다. 그래서 별다른 느낌 없이 지난 주와 똑같은 예전 <형식>을 따라 할 때 우리는 자주 우리의 행동이 <가식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느낌 없는 형식은 가식이 아니다>. 가식은 느낌 없는 형식이 아니라, 자기가 실제 믿지 않는 걸 믿는 것처럼 보이려는 형식이다. 자기가 믿는 바를 - 느낌이 안 와도 -  표현하고 행하는 건 훌륭한 일이고 훌륭한 믿음이다. (오, 주여, 우리를 두 번째 가식에서 구해주소서! 느낌 없는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기뻐 받으시는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

5. 다음 순서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합창 순서였다. (나는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었다). 줄 맞춰 입장한 가족들의 노래가 시작 됐다. 오늘 합창을 위해 '평화의 나무 합창단'이 한 달반 동안 가족들과 미리 만나 함께 노래 연습을 했다. 도종환 시인의 화인 ‘화인(火印)’ 을 합창 했다. 처음이었다. 세월호 집회에서 가족들에게 이런 <형식>이 주어진 것은. 너무나 큰 슬픔과 분노를 표현할 방법 없던 가족들에게, 자유 발언대라는 <무형식>과는 다른, 슬픔과 염원을 차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런 합창이란 형식이 주어진 것은. 합창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슬픔이 있었지만, 진정성 있는 가사와 선율 안에서,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쉼을 얻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한 소절, 한 소절 노래를 부르는 가족들을 보면서, 합창이라는 이 미리 짜여진 형식을 준비한 분들에게 깊이 깊이 감사드렸다.   

6. 나는 내일도 무척 <형식적인 교회>에 가서 무척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것이다. 종종 사랑과 감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가끔 표현할 방법 없는 종류와 크기의 감정 때문에 <낙심하는> 나에게, 여전히 예전과 형식이 살아있는 교회에 다닌다는 건 큰 힘이고 격려가 된다. 참, 천국에선 형식이 없어질까? 그때는 <진심>과 <마음의 중심>만 남을까? 나는 하늘나라에서도 형식은 존재할 거라고 본다. 우리는 거기서도 여전히 육체적인 존재일테니. 다만, 이런 상상은 해 본다. 어쩌면 그때는 <느낌>과 <형식>이 하나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느낌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온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2016.4.16.

p.s.
지금 내가 출석하는 루터교회의 예전을 말할 때 내가 꼭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촛불점화, 기도송, 영광송, 성찬식을 할 때 교회 뒷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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