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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9일

사순절과 나귀(2)

*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쓴 사순절 묵상 원고

3월2일 마가복음 11:1~10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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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제일 궁금해 하는 건 나귀 주인과 예수님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도대체 나귀 주인은 누구길래 ‘주가 쓰겠다’라는 암호 같은 말 한마디에 한 마리 이상(마가복음에선 한 마리, 마태복음에 따르면 두 마리)의 나귀를 두말없이 냉큼 내줬던 걸까요?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도 복음서 저자들의 수많은 ‘주작’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등장 인물의 정체도 모호하고 대화도 현실성이 없다고 하면서요.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 주위에 제자들이 한 명도 없는 순간들이 등장합니다.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갔을 때> 한 여성과 우물가에 <단둘>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인상적인 대화>는 그 여성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4:28). 저는 나귀 주인의 경우도 수가성 여인과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 주위에 제자들과 <현대인들>이 없을 때 – 예수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것 같고,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작은 신세>를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그가 그날 만남에 대해 – 네, 수가성 여인처럼 –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의 이름과 그가 그렇게 한 연유가 복음서 저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 됐을 가능성이 컸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만남과 대화에 대해 제가 아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믿는 것 한 가지는, 그 남자는 그날 만남에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 <자기 자신>도 만났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암호가 ‘주’였다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평소 잊고 사는 주라는 단어가 이 정체 모를 남자와 우리 주님 사이에선 무척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걸 보니 말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자신의 주에게, 자신의 나귀를 즉시 보냅니다.

(기도)
주님, 제가 주님을 주님으로 대우하고 있나요?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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