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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9일

사순절과 향유

한국 루터란아워 요청을 받고 시도한 사순절 묵상 원고 쓰기.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주제를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교회력에 따라 주어지는 주제에 대해 <무조건> 써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떨리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 ) 첫번 째 묵상 원고입니다.
2월28일 / 마가복음 14:3-11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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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 진퇴양난에 처한 것처럼 보일 때가 여러번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볼까요?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태 22장). 더 드라마틱한 주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교활한 시험 중에 나왔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한 8장).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피는 본문도 잘 읽어보면 이런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한 노동자의 일년치 임금인 3백 데나리온을 줘야 겨우 살 수 있는 비싼 향유를 -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에 따르자면 - ‘장례 준비’ 하는데 ‘소비’한 한 여성의 행동을 놓고 어떤 사람들이 따집니다. 지금도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데, 고작 ‘사랑 표현’에 3백 데나리온이나 사용하는 게 가합니까? 오히려 진정한 사랑 표현은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상하게 저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여성을 야단치는 사람들의 말에 수긍이 많이 갑니다.
이런 지적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듣고도 저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장례 준비’에 대한 제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이 죽는다고 하시지만 3일 뒤엔 부활하게 되어 있는 분이잖아요. 이미 정해져 있는 승리를 위해 거쳐야 하는 죽음이라는 ‘요식 행위’를 위해 3백 데나리온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 갑자기 이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예수의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요식 행위가 아니었단 말일까?

(기도)
사순절을 맞아 주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죽음이셨기에, 오늘만큼은 가난한 이뿐만 아니라 나도 위로를 받고 싶구나, 하는 고백을 하셨는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습니다.
신동주 / CBS 기독교방송 TV제작국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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