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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4일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벤 위더링턴 3세 지음, 이레서원)을 읽고

1.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1세기 고린도의 사회적, 문화적 정황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하는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흥미로웠던  대목 한 군데를 소개하면 이렇다. (총독 갈리오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열리는 만찬회에 참석하려고 신전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신전 입구, 첫 번째 계단 옆에는 새 석판이 세워져 있고, 아스클레피오스 신과 이 신의 상징인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만찬회에 늦은 갈리오는 급히 계단을 올라 신전으로 들어가면서 테라코타  봉헌물이 놓이 방을 지나갔다. 이 방에는 순례자들이 치유를 위한 봉헌과 기도 용도로 바친 여러 부위의 인체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테라코타는 점토로 형상을 빚은 후 구워서 만든 모형인데,  당시에는 병이 난 부위를 테라코타로 만들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치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 여기까지 읽은 내 머릿속에선 <음란마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안 좋아진 부위? 그럼, 그 봉헌 모형들 가운데는 <그 모형>도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일까...흑흑흑" .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갈리오는 팔과 다리 모형이 눈에 익은 모습으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은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가장 흔한 인체 부위 복제품인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는 늘 그랬듯 그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  휴. 나만 쓰레기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트리클리니움, 또는 식당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뒷편에 있었는데, 그런 연회에서 늘 그러듯 크게 떠드는 소리와 흥청거리며 노는 소리가 갈리오의 귀에 들려왔다."     


2. 이제 내 마음에 들었던 점 두 개와 아쉬웠던 점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맺음 ㅋㅋ) 나는 개인적으로 제5장이 좋았는데 그 이유는 <악인>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악인을 제대로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 악인에 대한 묘사가 <두껍지 않고 얇으면>  <이야기>와 <주인공> 모두가 살지 못하고 죽는다. 5장의 악인 묘사는 나름 두꺼웠다. (또 하나의 TMI. 5장에는 '노멩라토르'(nomenclator)라는, 기억력이 나쁜 주인을 위해 "사람 이름을 비롯해 기타 시시콜콜한 일들을 주인 대신 기억하기를 전담하는 노예"가 등장한다. 흥미로워라! )  이 책에서 또 하나 맘에 들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탄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인데 이 책 첫 문단에 등장한다 " 선장은 동틀 무렵 잡은 어린 바닷새로 아침 제사를 드렸다. " 내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을 응시하고 있을 그 시각에, 한 이교도가 차가운 바닷바람 맞으며 어둠 속에서 신에게 제물을 드리고 있다. <전통>과 <형식>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신성한> 형식을 보유하고 있던 시대가 부럽다. (전통 없이 사는 개신교인과 전통 속에서 사는 이교도. 누가 더 자주 행복을 체험할까. 지금 구원 여부를 묻고 있는 게 아님. 피조물의 <위치>를 깨우쳐 주는 <자세>와 <행위>와 <형식> 속에서 피조물이 누리는 행복과 기쁨을 말하는 중.)  다음 센텐스는 이렇게 이어진다. "어린 바닷새가 잡히다니 길조였다." 그 새벽의 상기된 기쁨이 상상된다.  

3. 이제 흡족하지 못했던 부분을 말할 차례가 왔다. 바울이 등장하거나 그가 말을 할 때마다 - 신학서적 독자 입장에선 수용할만 했으나 -  문학서적 독자 입장에선 아쉬움이 있었다. 성경에서 수백 번 읽었기에 거의 외우고 있는 <성경 구절들>이 그대로 바울이 말하는 <대사>로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됐다. 그런데 이게 꼭 저자의 무능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소설을 읽다보면 저자가 사건을 전개하고 대화를 풀어나가는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 저자는, 필요하다면, 19금적 묘사도 능히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럼, <재미있는 구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포기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내가 나중에 1세기 고린도의 기독교를 증언하는 이런 식의 책을 써야한다면, 그때 나는, 이 저자와 달리, 소설적 재미를 살리기 위해 <바울이란 카드>를 버리는 전략을 취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손실>을 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되는 아주 흥미로운 질문들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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