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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0일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를 (오래 전에) 읽고.

1. 나에겐 콤플렉스가 하나 있다. 나는 왜 그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이나 <안티-기독교인들>만큼 성경을 <꼼꼼하게> 읽지 못할까. 얼마 전 누가 영화 <노아>에 대한 얘기를 내게 해줬는데, 내가 <수십 번> 읽으면서도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은 ‘천사들’이 스토리 전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했다. 아, 내가 <헐리우드 작가들>만큼만 성경을 꼼꼼하게 읽을 수 있다면! 부끄럽지만 난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짜가 복음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안 게 채 오 년이 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내 <머리>는 폼이었고, <분석>은 죄였고, 오직 그날 받을 은혜 위한 <적용>만 있었다. 아니, 가나의 혼인 잔치 날짜도 아니고 그 중요한 십자가 처형 날짜(!)가 다르게 기록돼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니! 결코 둘 모두 <동시에> 맞을 수는 없다. (1)둘 모두 틀리든지, (2) 하나만 맞든지. 그런데 -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이런 딜레마를 경험할 때, 우린 덫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아주 멋진 곳으로 우리 인도할 낯선 골목길로 들어선 것일까.
2. C. S. 루이스는 어디선가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기로 결단하셨는데, 그 동일한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의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겠다고 하신 게 이상한 일일까? 이 질문 앞에서 난 <개안>을 했다. 이 물음을 만난 후 <불일치>와 <오류>로 보이는 것들은 내게 더 이상 기독교의 한계가 아니라 감격이었다. 오류와 모호함과 모순 존재하는 내 언어의 집까지 내려와, 기꺼이 거기 머무시며, 나에게 읽힘을 당하시고, 나에게 이해당하시고, 오해당하시고, 질문당하시는 그 분! 무오하지 않은 경전 소유한 종교는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는, 무오한 경전의 종교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까? 그런 무오를 부러워해야할까? 
3. 내가『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권연경 지음, SFC 출판부)를 읽으며 재차 깨달은 건, 성경이 <무오하다>는, 혹은 <무오해야만 한다>는 내 신념이 놀랍게도 <성경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경 속 오류와 불일치로 보이는 것들 앞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가 무너지는 거 아냐?> 당황하고 불안해 하는 나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성경의 객관적 사실들 자체가 나의 “무오” 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내가 가진 무오 교리가 애초부터 내가 가진 실제의 성경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저자는 이제 그 <실제의 성경>에 우리 신앙을 맞춰나가는 흥미진진한 작업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그리고 그 흥미로운 작업에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식이 해명되어야 한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언어로, 완전하지 않은 해석자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을 살피다 보면, 어쩌면 당신은 은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웃음).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이 땅을 다 너에게 주리라> 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신이 무언가를 열심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고마움에 가까운 마음.
서플먼트
1) 이 책을 읽으며 배운 것 중 하나는 성경을 읽을 때는 자신이 읽는 성경의 <장르>를 먼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시는 제일 먼저 시로 읽고, 편지는 우선 무엇보다도 편지로 읽기. 문득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삼박자 구원>의 중심 구절을 상기 기준으로 살펴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요한3서 1장을 찾았다. 1절에 편지의 발송자와 수신자가 각각 장로와 가이오로 나왔다. 이어 2절에 그 유명한 구절이 나왔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제 보니 전형적인 <인사말>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새로 시작한 이벤트 사업은 잘 돼? 대박 나기 바래> 정도의. 누군가 자신의 <신학>을 세우면서,  편지 본문이 아니라 인사말을 핵심 어구로 삼는 게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2) 나는 요즘 상기 책의 저자와 함께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어느 날 책의 저자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프로그램 캐치프레이즈에 나오는 <신앙의 근육>이라는 말, 제 책에 나온 거 아시죠? 어, 제가 생각한 캐치프레이즈인데요! 그는 여전히 미소지으며, 아니에요, 이 책에 나와요. 아, 내가 처음 만든 조어(造語)라고 생각하고 엄청 뿌듯해 했는데! (흑흑). 신앙의 근육을 키워주는 책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를 모든 이에게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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