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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8일

『천년 동안 백만 마일』(도널드 밀러, IVP)을 읽고.

1.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두 아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얘들아, 이 세상에서 섹스를 완전하게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뭔 줄 아니? 관계를 갖고 난 후 의무적으로 느낀 점 써내라고 하는 거야, A4 용지 하나 가득. 일 년이면 이 세상에서 섹스 없어진다. 어, 아빠 말 안 믿냐?  독후감은 사라져야 해, 독후감 때문에 사람들이 책을 안 읽게 되는 거라고. 듣고 있니?  
2.  인생에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남을 위해 살아봐야겠다는 절박함에서 청소년 멘토링 NGO <러빙핸즈>에 가입하고 첫 교육을 받던 날이었어요. 교육 시작과 함께 진행자가 교육 과정 수료를 위해선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할 숙제가 있다는 거예요. 숙제? (음, 온라인으로 지원서 받을 땐 숙제 얘긴 없었는데 ㅠㅠ 궁시렁 궁시렁). 진행자의 말이 이어졌어요. 저 뒤에 있는 4권의 책 중 하나를 골라 독후감을 써주세요. (뭐라고? 독후감이라고?? 지금 그만두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겠지? ㅠㅠ ) 9시에 시작한 교육은 저녁 6시30분에 끝났고 저는 느릿느릿 독후감용 책이 전시돼 있는 사무실 뒷편으로 걸어갔어요. 이 중에서 고르면 되는 건가요? 네, 넷 중에서 마음대로 고르시면 됩니다. (마음대로가 아니라 의무적이겠지). 저는 기계적으로 제일 왼쪽에 있는 책부터 집었어요.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저는 나머지 셋은 보지도 않고 그 책을 샀어요. 어느새 제 불평은 멎었어요. 홍대역에서 전철에 오르자마자 책을 폈어요. 밀러는 제가 (하이네켄이나 칭따오만큼이나) 좋아하는 작가였어요. 뭐랄까, 횡재를 한 느낌이었어요.
3. 밀러가 쓴 첫번 째 책 『재즈처럼 하나님은』(복있는사람)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45주 이상 올랐을 정도로 성공적이었어요. 저도 읽었었는데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고백하는 이런 구절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내 시간의 95%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데 들어간다". 밀러는 C.S.루이스의 시(詩)도 한 편 인용하며 이런 말을 해요. "처음 읽었을 때 그 심정에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꼭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밀러가 인용한 루이스의 시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재즈처럼 하나님은』, p.32에 나와요.)
이 모두는 당신을 사랑함에 관한 번지르르한 궤변입니다.
태어나던 날부터 나는 이타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철두철미 속속들이 타산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나는 하나님,당신,모든 친구가 나를 챙겨 주기만을 바랍니다.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평온함,안심,즐거움입니다.
나는 내 살갗 밖으로 한 치도 기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학자의 앵무새는 헬라어를 말하겠지요.
내 감옥에 갇힌 나는 언제나 원점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부끄럽지만 이 시, 제게는 <시>가 아니라 저에 대한 <다큐>로 다가왔어요. 제가 추구하는 목표, 정확하게 "평온함, 안심, 즐거움", 이 셋(!)뿐이었어요.(여전히, 이예요.) 신의 은혜가 아니면, 신의 개입이 없으면, "내 살갗 밖으로 한 치도 기어 나올 수 없는" 내 인생. 밀러는 참 가벼운 필치로, 저를 깊이 찔렀어요. 밀러는 첫 책의 성공 이후 계속 해서 책을 냈어요. 하나 계속 실패했어요. "내가 몇 년 전에 쓴 그 책이 많이 팔렸고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자만심에 젖어 내가 대단한 작가나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로 쓴 책들이 잘 팔리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다시 정서가 불안해졌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천년 동안 백만 마일』,p.25). 여친과도 헤어졌지요. 영성에 대해 멋진 글을 썼던 밀러는 이제 아침이 와도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TV리모컨만 찾는 그런 사람으로 변했어요. (제가 베스트셀러 작가의 심정은 잘 모르지만, 무기력한 사내 심정은 잘 알아요). 그리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밀러에게 어느날 영화제작자 스티브와 벤이 찾아와요. 밀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한 편 제작하고 싶다면서요.
4.『천년 동안 백만 마일』은 영화를 한 편 찍으려다보니까 다시 바빠졌고, 바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됐다, 라는 얘길하는 책이 아니어요. 다시 바빠짐. 다시 주목 받음. 다시 화려해짐은 사실 변화가 아니잖아요. 단순한 커버링이지요. 그저 잠시 미뤄두기이지요.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엄청난(?) 성공을 경험한 뒤에도 (중복이라 시전한 <썰렁> 조크 -.- ) 저라는 사람은 여전히 저 한 사람 안에 갇혀 있고, 지금 비록 틈틈이 펀치 시즌2를 준비하고 있지만, 혹 시즌2가 성공하더라도, 그 성공이 저를 <진짜>로 만들어주지 못할 거란 것, 너무 잘 알아요. (그런데 저는 진짜로 진짜가 되고 싶어요. ) 그래서 저는 밀러와 함께, 정말 밀러와 <함께> , 제 삶이라는 스토리에 <빠져있는 게> 뭘까, 절박하게 물었어요. 예, 밀러의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밀러가 되었어요. 왜 나는 진짜를 살고 있지 못할까. 제가 묻자, 스티브와 벤이 제게 말했어요. "우린 지금 이야기의 갈등을 구상하는 중이에요 (...) 진짜 갈등다운 갈등이어야 해요. 좋은 이야기가 되려면 도널드는 자기가 부딪치기 싫은 일에 부딪쳐야 합니다".(p.80). 여기에 대한 저와 도널드의 생각? " 나는 (...) 쉬운 이야기를 바랐다. 하지만 쉬운 이야기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p.48). 밀러의 다음 고백은 제 고백이나 마찬가지예요. " 어떤 이야기가 나를 부르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더 나은 이야기를 사는데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더 나은 이야기를 살지 않는 것은 죽기로 작정하는 것과 같다. (...) 죽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p.82).
5. 평온함, 안심, 즐거움, 이 셋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불쌍한 사내가 한국에 한 명 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가 기꺼이 갈등에 부딪치고 <더 나은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소서. 그 새 이야기에선, 불쌍한 주인공이 1센티라도 자신을 뚫고 나올 수 있게 하소서. 1센티라도 이전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다가가게 하소서.

2016. 7.28.
신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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